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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풍성 / 인간적인 아이

이선영

인간적인 아이

  

이선영(미술평론가)

  

정풍성의 작품 속 인물은 대부분 큰 머리에 지그시 감은 눈, 콧구멍도 안 보이는 작은 코, 생략된 귀와 입을 가지며, 의도를 알 듯 말 듯 한 최소한의 동작을 취한다. FRP가 아닌 브론즈 작품도 마찬가지이며, 단독이 아닌 설치작품인 경우 비슷함의 이미지는 극대화 되어, 복제인간 같은 모습은 더욱 강조된다. 어차피 조소 작업이라는 것이 하나의 모델로부터 나오는 것이지만, 그의 경우 복제의 메커니즘 자체를 작품 내용의 전면에 내세운다. 실리콘이 첨가된 작품은 피부이자 색이 입혀지는 중간 과정에서 멈춰진 듯한 모습으로, 웃기면서도 섬뜩하다. 인물은 아이 모습을 만화적으로 과장한 것이며, 캐릭터처럼 반복된다. 눈을 감은 아이 캐릭터는 자는 것도 아니고 노는 것도 아니다. 그는 지상에 우뚝 서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하기 좋아했던 이들이 즐겨 상상했던 바로 그 인간처럼 말이다. 그러나 인간을 ‘영장’이나 ‘척도’로 삼는 사고는 비판되고 있다. 




Everyone , 40x37x70cm, bronze, 2017



Everyone , 15x20x30cm, F.R.P에 우레탄도색, 2014



특히 근대적 주체의 위상이 추락한 탈 근대주의적 사고에서 그러하다. 정풍성의 작품은 대부분 30cm 남짓한 작은 크기지만, 단순히 인형 같은 모습이 아니라 직립한 인간의 특성을 보여준다. 큰 머리는 아름다운 인간의 비례와는 맞지 않지만, 생각하는 인간을 강조하는데 모자라지 않다. 다만 어떤 특성을 과장한 그의 작품은 지나치게 생각을 많이 해서 문제임을 암시한다. +-가 반복되면서 결국은 0이 되고, 어떤 행동도 무력화하는 관념주의의 병 말이다. 감은 눈, 그리고 귀와 입의 생략은 내면으로 침잠을 표현한다. 즉 작품 속 인물은 단지 아이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어떤 전형적 특징을 강조한다. 귀엽지만 퇴행적인 그 모습이 왜 인간적인가? 그것은 인간이 아이 같았기 때문에, 즉 그자체로는 다른 동물에 비해 취약했지만 사회적 협동을 통해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생물학적 가설을 떠오르게 한다. 


클라이브 브롬홀은 [영원한 어린아이, 인간]에서 인간의 가장 확실한 생물학적 특징을 몸집만 커다란 아기임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몸 중에서 특별히 유아적인 부분은 굴곡이 적은 얼굴과 크고 둥그런 두개골, 높은 이마 등이다. 정풍성의 작품에도 육중한 뇌가 들어있을 법한 커다란 두개골과 굴곡이 작은 얼굴 골격 등은 아이의 특징이다. 다른 동물과 비교하여 독특한 인간의 해부학적 특징들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유인원 태아의 특징이다. 정풍성의 작품 속 인물은 비대한 머리통에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 텐데 모두 서 있는 자세를 유지한다. 그러나 직립보행은 지상의 삶에 적응하기 위한 방법치고는 아주 괴상했다. 빠른 속도로 사냥감을 쫓는 육식동물들에게서 도망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립보행은 네발로 걸을 때보다 훨씬 더 위험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지만, 뇌를 키우게 했다. 머리가 아주 큰 형태의 작품들은 퇴행이나 미성숙함을 떠올리지만, 그것은 양날의 칼이다.




Everyone , 15x20x30cm, bronze, 2016



Everyone , 85x85x185cm, bronze, 2016



클라이브 브롬홀은 환경변화가 일어났을 때 미성숙한 형태의 동물이 성체 형태보다 더 잘 적응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정풍성의 작품에서 보이는 유아로의 퇴행은 변화에 보다 잘 대응할 수 있는 상태에 대한 상징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미숙함은 풍부한 잠재성을 가진다. 유아시절의 특징을 간직한 인간은 생존을 위한 더 유리한 고지에 오르게 되었다. 자신의 약함을 사랑과 사회적 협동을 통해 극복한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유아적 특징들은 자연도태가 아니라, 의미심장한 변화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협동은 물질적 발전을 낳았지만 부작용도 낳았다. 역사의 과정을 통해 쌓아온 발전의 성과를 차지하는데 있어서 이해관계가 보다 첨예하게 엇갈리는 현재, 사회적 협력이라는 것이 쉽지 않다. 심지어는 최소한의 사회라고 할 수 있는 가족까지 위기에 빠져 있는 형국이다. 역사는 돌고 돌아 다시금 유아기적인 퇴행이 문제시되는 시대가 왔다. 


인간을 지구의 주인이 되게 만든 유아기적 특성은 소비사회의 유치증(幼稚症)적 전략에 의해 왜곡이 불가피해졌다. 4차 산업혁명의 전야에서, 차수를 거듭한 산업혁명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으로부터의 직접 노동을 벗어나게 했고, 직접 몸을 쓰는 감각을 둔화시켰다. 그러나 24시간 접속하고 있다 시피 한 미디어에서는 주로 원더우먼과 슈퍼맨이 활동한다. 대중매체에서 약함이나 평범함은 별로 주목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대중매체와 길항 관계에 놓인 예술은 미디어가 제외시켜 놓은 것에 관심을 가진다.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화려한 스펙터클은 모두 현실계의 에너지로부터 취해진 것이다. 미디어의 힘이 강해질수록 현실은 더욱 위축된다. 정풍성의 작품은 실재보다 상상의 비중은 커지는 현실, 그리고 사회의 구성원을 판박이처럼 찍어내는 코드나 언어, 즉 상징의 위력을 반영한다. 인간의 몸은 비대해진 두뇌에 비해 축소화된 작품 속 인물들은 관념화된 현대인, 또는 상상의 장에서 활동하는 예술가적 정체성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Everyone , 15x20x30cm, F.R.P에 우레탄도색, 2015



Everyone , 각15x20x30cm, F.R.P에 우레탄도색, 2015



정풍성의 작품에서 그러한 상상의 상당부분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불안과 공포이다. 뚜렷한 가해자가 없다는 점에서 공포라기보다는 불안이다. 예술은 직접적인 현실로부터 인간(작가)을 보호해주고 도피하게 하는 일종의 대안의 현실이지만, 가혹한 현실 원리는 예술이라는 대안의 현실에도 어김없이 스며든다. 예술가의 전략은 현실을 축소시키거나 현실을 추월하려 한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은 원초적이기에 더욱 적나라한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자세는 다소간 초월적이다. 그러나 신선도 아니고 아이 같은 캐릭터의 초월은 풍자적이다. 머리통이 큰 캐릭터는 팀 버튼 감독의 풍자적인 SF 영화 [화성침공](1996)의 외계인을 떠오르게 한다. 그림을 그리기도 했던 팀 버튼 감독은 얼마든지 그럴듯한 괴물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시대에 ‘화성인’ 하면 떠오르는 상투적인 이미지를 활용했다. 영화 속 화성인은 다 드러난 비대한 뇌를 투명 헬멧으로 보호하고 있는 문어 대가리 가분수 괴물이다. 


새로움과 신기함 보다는 대중적 상상력을 최대한 활용한 그 영화에서 화성인이 왜 그런 이미지인가를 생각하면, 가분수 괴물은 미래의 발전된 세계에서 인간 형태에 대한 상상이 투사된 것이다. 몸의 다른 부분은 퇴화하고 머리만 활성화된 미래의 인간은 사지와 오감을 통한 모든 번거로운 감각기관을 흔적만으로 남기고, 텔레파시로 소통을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영화에서 서사가 시작되는 사건의 시작은 화성인과 지구인간의 소통 방식의 차이였다. 현대인이자 미래인, 또는 외계인을 닮은 정풍성의 캐릭터는 소통의 방식이 점차 단순화되고 있는 시대에 대한 반응이다. 작가는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고민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을 때 문득 머리가 부풀어 오르는 것 같은 상상을 했다’고 말한다. 그 결과는 부풀어 올라 터지기 직전에 멈춘 듯한 거대한 두상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기에, 전시부제나 작품제목을 모두 [Everyone]이라고 붙였다. 




Everyone , 15x20x30cm, F.R.P에 우레탄도색, 실리콘,2016



Everyone , 각15x20x30cm, F.R.P에 우레탄도색, 실리콘, 2016



FRP에 우레탄 도색을 한, 2014-2015년에 발표한 이전 작품에서 아이형태의 캐릭터는 점퍼부터 신랑 신부 옷 까지 여러 상황에 걸 맞는 의상을 걸치고 있다. 거기에는 ‘키덜트’라는 신조어가 생길만큼 어른이 되어서도 별반 달라질 것 없는 현대인의 모습이 있다. FRP에 우레탄 도색에 실리콘이 첨가된 2016년 작품은 피부를 한 겹 덧입히는 듯한 중간과정이 완성품으로 제시되어 있다. 얼굴을 포함하여 온몸에 덧입혀지는 층은 앞에서 뒤에서 또는 쌍둥이 분체같은 개체에서 끼얹듯이 연출했다. 자신을 덮치는 어떤 상황에도 눈을 지긋이 감고 있으며 때로는 뒷짐까지 진 모습은 자못 의연하기까지 하다. 만화 원작을 영화로 만든 [공각 기동대-고스트 인 더 쉘](2017)에서 인간이 사이보그로 재탄생하기 위해 매끈하게 덧입혀지는 피부처럼, 액상의 껍질은 제 2의 탄생을 위한 조건일 것이다. 액상의 껍질은 가짜가 진짜가 되는 과정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어떤 결과를 맞든 정풍성의 코팅작업은 중도에 멈춰짐으로서 그 불완전성이 강조된다. 


[공각기동대]에서 지구를 위협하는 악당들을 해치우는 여주인공 스칼렛 요한슨은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야기하고 강인한 전사로서의 역할을 약화시키는 인간적 기억을 떨쳐내면서, ‘내가 누군지를 결정하는 건 기억이 아니라, 바로 행동이다’라고 말한다. 정풍성의 작품에서 실리콘으로 새로운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캐릭터는 행동하기에는 너무 미숙한 개체이다. 그 대신 큰머리의 그들은 기억하고 사고하고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기계적 복제의 이미지는 피해가지 못한다. 2016년의 설치작품에서 작가는 하나의 틀에서 나온 캐릭터들이 줄지어 또는 떼 지어 세워 놓았다. 작년부터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된 브론즈 작품은 플라스틱 작품들과 표정과 자세는 같지만, 금속판을 이어붙인 자국 그대로 드러나 좀 더 야성적인 느낌이다. 용접 이다보니까 개체별로 차이가 난다. 브론즈 색의 캐릭터는 다소간 묵직하게 다가온다. 작품 하나 당 300여개의 금속판을 용접해야 하는 과정 자체가 묵직하다. 




Everyone , 15x20x30cm, F.R.P에 우레탄도색, 실리콘, 2016



Everyone , 15x20x30cm, F.R.P에 우레탄도색,2015



흙으로 모델링을 하여 캐스팅하고 삼각형으로 자른 동판을 용접해서 붙이는 과정에는 고강도의 노동이 투입돼야 한다. 크기는 30cm부터 180cm까지 다양하지만, 작든 크든 여전히 아이 같은 모습을 간직한다. 금속 조각을 용접으로 이어붙인 아이는 누더기 같은 피부를 가졌다. 작가는 그것에서 상처를 발견한다. 본격적인 경험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이미 존재하는 그 상처는 인간이라면 모두 가지는 원초적인 상처이다. 상처는 두려움을 낳지만, 그 반대 또한 사실이다. 두려움은 공격성을 낳기 때문에 주객체를 막론하고 상처는 필연적이다. 정풍성의 작품에는 심리적인 두려움이 깔려 있다. 아이형상으로의 퇴행 자체가 두려움의 표시이다. 사고 또는 상상을 상징하는 큰 머리, 직립한 모습이 인간적이라면, 그의 작품 속 또 다른 인간적 모습은 두려움이다. 틸 바스티안은 [가공된 신화, 인간]에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을 두려움으로 본다. 


틸 바스티안에 의하면, 인간은 동물과 달리 다가올 일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다. 즉 미래를 내다보며 성찰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실제로 경험하는 세계와 나란히 또 다른 가상 세계를 상정하지만, 거기에서 바로 두려움이 발생한다. 그것은 인간이 성취한 만큼이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에 대한 고민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를 비롯한 심리학자들은 더 원초적인 불안(그리고 상처)을 말한다. 모태에 푹 파묻혀 생존과 성장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받던 태아가 출생하자마자 겪는 고통이 바로 그러한 불안의 시작이다. 이후의 생애에서 모든 불안의 원형은 거기에 있다. 거의 누더기 같은 피부를 가진 아이의 모습에는 출생 그자체로부터 야기되는 ‘최초의 극심한 불안상태’(프로이트)를 태생적으로 각인한다. 프로이트는 불안이 ‘외상에 대한 예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완화된 형태로 이루어지는 그 외상의 반복’(프로이트)이라고 말한다. 




Everyone , 각15x20x30cm, F.R.P에 우레탄도색, 약 4x6m 공간 내 가변설치, 2016



Everyone , 각15x20x30cm, F.R.P에 우레탄도색, 약 6x8m 공간 내 가변설치, 2016



탄생 이후에도 불안 상태는 수도 없이 발생하며, 개체는 그때마다 이에 대해 방어해야 한다. 상처-불안이라는 심리적 기제에는 죽음과도 같은 반복이 깔려 있다. 현실세계와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간접적인 관계를 가지는 예술은 상처를 상상적으로 반복하면서 불안을 해소하려 한다.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기 전에 일종의 백신을 맞아 대비하는 셈이다. 그러나 예술을 하는 삶 그자체가 바로 불안이며 수많은 상처의 반복이기에, 화해적 세계관이 손쉽게 가정하는 치유와의 거리는 멀기만 하다. 맞닥뜨린 현실의 괴로움에 대해 먼 과거나 먼 미래는 해결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제공한다. 아이의 형상에 몰두하고 있는 정풍성의 경우 과거이다. 그러나 앞서 예를 든 영화 [화성침공]이나 [공각기동대]처럼 먼 미래에 있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이미 바짝 다가온 미래 속에서 과거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심신이 겪어야 하는 모순에 찬 과정을 풍자적으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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