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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영 / 망망대해 같은 시공간에 좌표 화 된 존재

이선영

망망대해 같은 시공간에 좌표 화 된 존재

  

이선영(미술평론가)

  

하얀 벽을 활강하는 깔끔한 선들로 이루어진 공간 안팎에 다양한 양태로 자리한 것들은 어떤 존재를 떠올린다. 주원영의 작품에서 이 존재는 복합적이다. 그것들은 자를 대고 그릴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굴곡져 있다. 그것이 놓이는 맥락인 건축적 구조는 수직, 수평, 그리고 원근법적 공간을 상징하는 사선들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건축적 구조는 화이트 큐브라는 광막한 공간에 그 자신이 창조한 존재의 자리를 좌표화 한다. 이러한 좌표적 특성은 집을 떠올리는 가장 원초적인 존재의 자리를 추상적으로 공간화 한다. 건축적 구조는 망망대해 같은 공간을 한정 짓지만, 이러한 한정을 통해서 한정지어지지 않은 더 많은 공간이 암시된다. 회화와 조각을 함께 전공한 작가는 레이저로 자른 쇠로 공간에 드로잉을 한다. 벽에 일정 간격을 두고 설치되곤 하는 구조물은 부조, 즉 일종의 회화적 조각이다. 그것은 그가 평소에 수없이 행해온 드로잉 중에서 선택된 것들이다. 관객들은 볼 수 없었던 종이 위의 드로잉들은 입체화되어 보여 진다. 




스며있는1501,   Colored Steel,1000×120×10cm 2015



스며있는1502, Colored Steel 80×120×10cm×2ps 2015



그러나 종이 위의 것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일정 두께의 금속을 잘라내야 하는 특성상 단순화는 필연적이다. 그의 작업실에 잔뜩 쌓여있을 드로잉들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본격적인 작업을 위한 일종의 몸 풀기에 해당된다. 그려진 그대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지만, 매일 하지 않으면 작품이 나올 수 없는 필연적 과정이다. 그러한 점에서 그의 드로잉은 수행적이다. 뇌나 손도 근육처럼 훈련이 필요하다. 이러한 지속 가운데 순간의 포획이 가능하다. 작업이라는 맥락 안에 잠겨 있어야 작품이 가능하다는 것은 작가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몰입이라는 작업의 필요조건은 몸 뿐 아니라 머리를 더 많이 써야 하는, 소위 말하는 ‘개념예술’에서도 제외될 수 없다. 몰입할 수 없는 ‘작업’은 자기에게서 꺼내지는 것이 아니라 뜬소문들을 취합한 것일 뿐이다. 주원영이 작품에 일관되게 붙이고 있는 제목인 [스며있는]이 의미하는 바가 그것이다. 자신에게 스며있어야 스며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건축적 구조 안팎의 존재는 조금 더 복잡하다. 그것은 무기적 구조와 구별되는 유기적 형태로 생각된다. 흔히 집 안팎에 있는 사람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뭐라 한정지을 수 없이 여러 방향으로 뻗은 선들은 사람의 외적 형태가 아니라, 누군가가 그가 속한 공간에서 느꼈을 법한 자유분방한 감성을 추상화한다. 그것은 건축적 구조와 대비되어 유기적으로 보이는 것일 뿐, 유기적인 질서를 내장한 것은 아니다. 유기적 질서가 성립되려면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파악돼야 한다. 그 관계가 파악되지 않는 복잡한 형태는 총체가 아니라 집합이다. 부분들이 집합되어있는 형태에서 전체와 부분의 관계는 해체된다. 무엇을 하나의 개체로 한정지을지 모호한 것들은 모이려 하는지 흩어지려 하는지 알 수 없는 순간에 포착되곤 한다. 여기에서 구성과 해체는 동격에 놓인다. 이 복합적 형태는 건축적 구조 없이 벽에 설치되어 있기도 하다. 




스며있는1505 Colored Steel, 80×120×10cm×3ps 2015



스며있는1505-1,  Colored Steel, 80×120×10cm2015



또한 건축적 구조는 금속이 아니라 벽에 직접 붙여진 검정 테이프로 연출되기도 한다. 회화와 조각, 2차원과 3차원 사이에 존재하는 주원영의 작품은 여러 조합의 방식이 있다. 그래서 비교적 단순한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상황을 표현할 수 있다. 뒤에 캔버스가 있는 작품의 경우, 캔버스가 일종의 건축적 구조가 되어 복합적 형태와 상호작용한다. 이 경우에 캔버스에 아크릴로 흐릿하게 그려진 것과 앞의 형태는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관계를 이룬다. 요컨대 그것은 사각형 캔버스에서 나왔거나 들어갈 것이라는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가상적 움직임은 수평적일 뿐 아니라 수직적인 차원에서도 존재한다. 건축적 구조 안의 형태와 밖으로 나온 형태가 나란히 설치된 작품은 시간의 추이에 따른 좌표의 변화가 감지된다. 같은 구조가 다른 작품에서 원근만 달리할 때도 있는데, 이때 복합적 형태의 위치는 이동한 것 같은 양상이다. 여기에는 플립 북이나 애니메이션 같은 환영이 있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모든 작품에서 건축적 구조와 복합적 형태는 벽에 약간 떨어져 설치되어 그 아래로 그림자를 떨군다. 그림자는 또 하나의 층을 만든다. 구조와 형태가 동시에 하얀 벽에 떨어뜨리는 그림자는 정지된 가운데 움직이는(흔들리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입체 구조물이 만들어내는 선이다. 기하학적으로 구체화된 최종 작품과 달리 A3 용지에 평소에 붓과 목탄으로 그리는 드로잉은 마치 (무)의식이 자라나는 듯 자연스럽다. 한계를 지으면서 무한을 암시하는 방식, 그리고 복합적 형태는 드로잉에 대한 원초적 체험을  또 다른 어법으로 번역한다. 작가는 종이 위에 행해진 수많은 드로잉의 ‘리듬이 잘 올라왔을 때’ 마음에 드는 것이 나온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인간을 누군가는 동물을 누군가는 괴물을 떠올릴 수도 있는 복합적 형태는 결정 불가능성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그러나 작업이란 결정을 하는 것이다. 비록 관객이 그 광기의 순간을 온전히 공유할 수는 없을 지라도 말이다. 




스며있는1512, Colored Steel, Acrylic on canvas 116.7X91cmX3ps 2015



스며있는1520,  Colored Steel,  220×250×10cm 2015



그의 작품에 편재하는 건축적 구조 또한 위에서 본 공간인지 아래서 본 공간인지 모호하며, 그것이 물리적으로 건축 가능할지도 불확실하다. 반듯한 그것도 단단한 쇠로 이루어진 공간이지만 닫힘의 느낌은 없다. 정확히 아귀를 맞춘 듯한 형태들은 다만 작가 자신과 관객의 감성을 격발시킬 최소한의 방향타를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 독특한 구조는 명나라 시대의 건축적 구조에서 영감받은 것이다. 주원영은 중국 여행에서 미로처럼 만들어진 돌로 된 거리를 다녔는데, 오랜 시간의 흔적이 스며있는 그 구조물들은 행인을 가두는 물리적인 장벽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후 작가는 형상을 둘러싼 공간을 건축의 선을 빌어서 표현하게 되었다. 그의 독특한 공간체험은 단순한 가운데 좀 더 많은 층위를 부여하려는 노력을 낳았다. 기하학적 단순함을 유지하면서도 많은 층위를 암시하기 위해 형태와 마주하는 판을 파내거나 스프레이 등을 활용하기도 했다. 


결국 그림자까지 가세하는 공간들은 서로 중첩되고 간섭하며, 다양한 공존과 만남의 상황을 연출하게 된다. 기하학적으로 암시된 공간 안팎에 배치된 복합적 형태는 유기체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기체 이상이거나 이하이지 유기체 그자체는 아니다. 이 복합적 형태의 기원을 작가의 말로 추적해 보자면 미시적 차원의 존재다. 주원영은 ‘근육의 60% 이상이 미토콘드리아이며, 몸은 미토콘드리아의 식민지’라고 말한다. 즉 ‘내 몸은 뇌가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미토콘드리아가 진짜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유기체가 아닌 유전자를 진화의 주체로 놓은 리처드 도킨스의 도발적인 사고를 떠올리는 생물학적 발상이다. 거의 신을 닮은 근대의 비대한 주체를 해체한 것은 인간을 중심에 놓지 않는 사고, 특히 근대의 과학적 사고였다. 인간중심주의의 폐해는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그것은 생산중심주의가 되어 자연을 타자화 했다. 예술의 경우 상투적인 표현을 낳았다. 결국 물질적 진보나 소유와 관련된 협소하게 정의된 나(인간)를 벗어나는 것이 진지한 예술가들의 화두가 되었다. 




스며있는1510,  Colored Steel,  220×250×10cm 2015_1989



스며있는1602,  Colored Steel, 200×320×10cm, 가변설치, 2016



스며있는1603,  Colored Steel, 220×320×260cm, 가변설치, 2016



주원영의 경우, 그것은 단순히 현대예술의 비인간화나 포스트휴머니즘 같은 사조가 아니라, 거대한 시공간과의 격세유전적인 만남을 지향한다. 그에게 주체는 미시적이거나 거시적이며, 한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원에 편재한다. 오지여행을 즐기는 작가는 인간의 흔적이 없는 깊은 산이나  360도의 지평선을 가진 사막에서의 환상적 체험을 말한다. 무한한 공간과의 소리 없는—그는 2012년에 ‘소리 없이’라는 부제로 개인전을 연 바 있다--만남은 단순히 주체가 대상을 파악하는 단계를 넘어선다. 이때는 나의 시선이 아니라 나의 세포가 반응하는 것이다. 자신의 유전자에 깊숙이 박혀있던 잠재적인 것이 활성화되는 그 극적인 순간을 위해 작가는 발로, 그리고 손으로 끝없이 유목한다. 그에게 작품은 잃어버린 또는 미지의 체험을 향한 여정들 사이의 간이역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앞뒤로 무한히 펼쳐진 과거와 미래는 작품이라는 영원한 현재로 압축된다.


출전; 미술과 비평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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