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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성 / 대우주를 항해하는 소우주

이선영

대우주를 항해하는 소우주

  

이선영(미술평론가)

  

대지와 함께 현실계를 대표하는 바다, 그 무한한 공간 속에서 작전을 펼치는 잠수함은 조각가 나인성에게 주체의 상징이다. 많은 작품에서 발견되는 잠수함이라는 소재는 단순한 비유를 넘어서 주체와의 일체형으로 다가온다. 현실 속에서 잠수함은 비틀즈의 음악에 나오는 귀여운 이미지부터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실험과 같은 섬뜩한 --그것은 독재자 자신의 공포를 반영하기 때문에 섬뜩하다--이미지까지 다양하다. 나인성의 작품은 전자에 가깝다. 가령 고가 철교 위를 지나는 기차 한량을 표현한 작품은 고풍스럽고 한가롭다. 거북이나 코끼리 같이 느릿한 동물과 연결된 작품들 또한 속도가 지배하는 세상의 대안으로 다가온다. 잠수함이 아니어도, 그의 작품에는 저장이나 이동의 이미지가 풍부하다. 그것들은 원래의 잠수함이 그렇듯 금속으로 용접되어 만들어졌다. 비행기나 배, 자동차나 잠수함같이 자연적 속도를 초월한 운송 수단은 한정된 공간에 최대한의 자족 기능이 탑재될 것을 요구한다. 


대우주를 압축함으로서 완벽해진 소우주는 대우주를 항해한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계는 인간에게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한다. 인간 역시 기계에 준하는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 나인성의 작품은 기계에 둘러싸여 사는 인간이 기계에게 자신을 투사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려준다. 타자로부터의 절대 우위를 점하는 완벽한 기계부터 기계적인 노동에 소모되는 존재까지, 인간은 자신이 만든 존재(기계)와의 비교를 그친 적이 없다. 특히 기계가 소수 호사가들의 장난감이나 예술품을 넘어서 전면적인 환경으로 확대된 근대 이후, 인간의 실존에 대한 막강한 비유로 떠올랐다. 이러한 경향은 과거에 신이나 자연에 비교될 법한 새로운 척도가 되었다. 나인성의 작품은 그러한 새로운 척도에 그저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기계 중심적인 지배적 세태에 대한 문명비판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기계는 더 이상 주체에게 외재적일 수 없기에, 그의 잠수함은 양면적으로 다가온다. 


평화를 위한 것이든 전쟁을 위한 것이든, 무기류는 공격적이고 강해야하는 전형적인 남성성을 대변할 수 있다. 경쟁적 이해관계로 얼룩진 세계에서 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기계/자아의 업그레이드는 필수적이다. 바다로부터 비롯되었지만 이미 진화적 과정을 통해 육지에 적응한 인간에게 바다 또한 이중적이다. 그것은 풍요만큼이나 파괴를 야기할 수 있다. 인간이 바다로 다시 돌아가려면 물샐 틈 없이 완벽한 도구가 필요한 것이다. 나인성의 잠수함은 그렇게 주체가 비롯된 곳으로 회귀할 수 있는 매개가 되어줄 것이다. 스테인레스 스틸이나 스틸을 용접하여 만들어진 대부분의 작품에 작가는 [personal space]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 개인적 공간은 잠수함이라는 기계적 모델의 다양한 변주로, 작가 자신은 물론 그가 거주하는 집이나 작업실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에게 ‘개인적 공간은 어머니의 뱃속이 주는 안정감에서부터 방, 책상, 작업실로 이어지는 나라는 존재에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는 물리적 공간’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양수막에 싸여있던 인간은 최초에 자신이 발원했던 원초적 환경을 축소해서 모방한 소우주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다. 물론 그 기억은 한해 두해 전의 기억이 아니라, 유기체의 유전자적 차원에 기입된 아득하게 먼 기억이다. 대자연, 특히 바다는 어머니이다. 수중 생태계의 모델에서 성체로 분화한 개체는 동시에 작가는 그 개인적 공간이 현대에 이르러 침해되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모성은 유지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희생이 요구되며,  그래서 가족제도는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사적공간의 침해가 야기된 것은 사적 영역이 부당할 만큼 공적 영역과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사 영역의 이분법은 근대사회가 전통사회와 구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근대적 전면적인 분업의 결과가 야기한 양극화에서 공적 영역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이들은 사적 영역 또한 보장받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중에게 사적 영역은 무늬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격리된 공간에서 대중들은 비슷한 것을 생산하고 소비하기 때문이다. 금속 용접이라는 형식 탓이 크겠지만, 지나치게 방어적인 그래서 공격적으로도 보이는 나인성의 조각들은 개인 공간에 대한 사수 의지가 엿보인다. 잠수함은 항해해야하지만, 그것이 영원히 바다 속에만 있다면 죽음이다. 자족적 기능을 갖춘 것도 외계와 상호작용은 필수이다. 물 밖으로 모습을 보이는 잠수함은 이러한 상호성에 대한 감각을 표현한다. 가령 작품 [personal space-누덕 잠수함]은 잠수함 윗부분만 만들어져 바닥에 놓여있는데, 그렇게 함으로서 작가는 우리가 내딛고 있는 바닥을 심연으로 변환시킨다. 푸른 바다에 떠있는 잠수함을 표현한 작품 [personal space-submarine in space]에서 좌대 역할을 하는 것은 바다이다. 작가는 기계와 달리, 자를 수 없는 바다를 잘라서 관객에게 대면시킨다. 


해수면은 관객의 시선이 잠수함을 잘 볼 수 있는 선까지 상승해 있다. 여기에서 바다는 두부 잘리듯 잘려 있지만, 그것은 주체의 경계처럼 인위적으로 설정된 것이다. 경계는 닫혀 있는 선 보다는 접경지대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나인성의 잠수함은 이러한 접경지대에서 활동한다. 잠수함으로 대변되는 예술-기계는 단단한 외벽으로 둘러싸여있지만, 그것은 폐쇄가 아닌 열림을 위한 한정이다. 잠수함은 작가말대로 ‘개인적 공간을 위한 표본’이며, 사적이면서도 공적이어야 할 인간에게 분리는 연결을 위한 조건이다. 특히 예술에 있어 사적/공적 공간 간의 관계는 밀접하다. 작품이란 사적이지 않으면 공적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독특한 세계가 드러난 작품만이 공적인 장에서 활발하게 소통/유통될 수 있다. 똑같은 것들은 상품에서 발견된다. 또는 똑같은 직책에서 발견된다. 그것들은 사용되고 고갈되며 버려진다. 상품은 작품과 달리 소비자의 취향을 정확하게 반영하여 체계적으로 생산(재현)된다. 


전시회는 가장 사적인 것을 공적 공간에 내놓는 작업이다. 작가는 사적/공적인 일,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가능할 수 있는 사적/공적 공간의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나인성의 작품에서 잠수함 외에 문, 계단, 돔같은 건축적 구조는 구별되는 영역들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반영한다. 그것들은 한 영역과 또 다른 영역 사이에 있으며, 양영역을 분리하면서도 연결하기 때문이다. 계단 위에 있는 존재는 계단과 마찬가지로 이행기의, 과도기의 존재이다. 특히 건축은 안팎의 관계를 나타내기에 적합하다. 작품 [personal space-ston studio]은 돔형 구조 위에 굴뚝 나와 있고 아래에 입구가 있다. 창문 같은 둥근 구조 둘은 눈같은 그래서 전체적으로 얼굴같은 인상이다. 그것은 파사드처럼 건축의 얼굴이 된다. 작품 [personal space-castle]에서 반구형 원통은 벽돌로 쌓은 성처럼 보이며 고풍스러운 주체를 표현한다. 작은 집의 경우 보이는 것보다 더 깊은 사적 공간과 연결되기도 한다. 


작품 [personal space-another private space]는 작은 집 지하로 기다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면 닿을 수 있는 또 다른 공간을 단면처럼 보여준다. 그것은 마치 공적인 자아에 가려진 심층의 자아처럼 무엇인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들을 저장해 놓은 용기 같다. 지상으로 드러나 있는 자아의 상징에는 다양한 부속 기구로 바깥과의 접촉면을 확장한다. 작품 [personal space-concrete studio]에서 인간의 머리를 떠올리는 반구형 꼭지 위에 붙어있는 우산 모양의 구조는 외계와의 보다 원활한 소통을 위해 완벽한 기능을 탑재한 기지국 같은 모습이다.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는 건축적 구조가 주체 상징인 한, 거기에는 주체가 놓여 있는 여러 상황이 암시된다. 사각형 구조 위의 반구는 뼈대만 남아 있는 작품에서는 박탈감이 느껴지며, 몸통이 사각 틀에 매달려 있는 고통스러운 모습도 발견된다. 바깥과의 상호작용이 원활치 않을 때 주체는 극도로 위축된다. 


계단위에 서있는. 반구형 머리를 가진 깡통 로봇같은 존재를 표현한 작품에서는 더 이상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막막한 심정이 느껴진다. 막다른 골목이라면 주체가 변신하는 방법이 있다. 원통형 구조가 나무로 변신한 듯. 위로 가지를,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작품 [space in tree]는 제자리에서 탈주하는 방법, 즉 변신을, 인류의 상상계에서 변신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나무의 형태를 통해 보여준다. 이도 저도 안 된다면 보다 좋은 조건이 될 때까지 웅크리고 있어야 한다. 마치 씨앗처럼 말이다. 몸의 부속기구들에 대한 상징이 모두 생략된 채 원통만 남아있는 작품 [personal space-tank]에는 바깥과 최소한의 접촉면을 위해 단순화된다. 잠수함같은 밀폐형 기계 구조의 일부처럼 보이는 작품은 문을 잘못 열면 큰일이라도 날 듯 붉은 경고등이 번쩍거린다. 금속판을 이어서 석벽처럼 보이게 한 작품에는 최후의 장벽을 친 듯한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출전; 미술과 비평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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