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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경 / 기록하는 자로서의 작가

이선영

기록하는 자로서의 작가

  

이선영(미술평론가)

   

고암 이응로의 생가와 전시장 등이 있는 충남 홍성의 작업실 외벽에는 ‘우리 다시 만나요’라는 문장이 담긴 거대한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손 글씨체로 씌여진 그 짧은 문장은 연잎 밭으로 에워싸인 풍광 좋고 고즈녘한 장소에서 갑자기 크게 들리는 소리처럼 긴 여운을 남긴다. 도보가 아닌 자동차로 통과하곤 하는 길목, 특히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그러한 규모의 문장은 흔히 발견되지만, 대개 기업체 광고나 공공 기관의 계몽적 메시지가 대부분이다. 그 글씨의 주인공은 사적인 차원의 작은 규모에서 오고가는 말에 거대한 시각적 확성기를 달아준 셈이다. 친한 사람이건 아니건 일상적으로 자주 쓰는 그 말은 어떤 예술적 의도에 의해서 비일상적인 차원으로 소격(낯설게 하기)되었다. 이 대화체의 문장은 이러한 소격 작용에 의해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일상의 한 단락을 부각시킨다. 그 작품은 그다지 주목할 만 한 것이 없는 일상의 결을 보듬어왔던 김도경의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다시만나요 1700cm x 350cm(h) 패브릭에 인쇄 2017



일상이 일상에 의해 조명 받는 것은 아니다. 일상은 비 일상에 의해서 조명 받고 그 반대도 성립된다. 일상과 비일상은 반복과 차이의 관계다. 최초에 메모지에 썼을 그 문장은 크게 확대됨으로서 의식 뿐 아니라 무의식이 드러난다. 확대는 필사자가 자신은 의식하지 않았지만,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어떤 흔적을 감지하게 한다. 낯설게 하기는 확대 뿐 아니라 축소—김도경은 자기 작품의 축소모델 격인 아티스트 북을 종종 만들곤 한다—를 통해서도 일어난다. 낯설게 하기는 예술의 가장 오래된 관행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김도경의 경우 이러한 낯설음을 위해 뭔가 대단하게 놀라운 무엇을 도입하는 것은 아니다. 근대에 부각된 새로움의 전통은 이러한 낯설음의 실행에 많은 무리수를 두어왔다. 근대예술은 충격의 산실이었고 이는 고스란히 대중문화의 관행에도 스며들어 체계적으로 소비되기에 이르렀다. 새로움의 전통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 김도경의 작품은 잔잔한 편이다. 


이러한 잔잔함은 예술적 야심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일상성을 화두로 한 작품의 성격에 기인한다.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현대세계의 일상성]에서 일상과 비일상을 cool과 hot이라는 두 단어로 대조한 바 있다. 축제나 전쟁, 재난 같은 비일상적 상황에 비해 일상은 차갑게 흘러간다. 르페브르에 의하면, 일상의 비정상이란 결국 폭로된 일상성 그자체이다. cool/ hot의 대조는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의 원시/현대의 구별을 상기시킨다. 그렇지만 상품을 소비하며 채워지는 현대의 일상 역시 변화가 더딘 원시시대의 시간 감각으로 되돌린다. 앙리 르페브르는 소비사회의 일상에 주목하는데, 여기에서 특히 반복을 발견하게 하는 것은 대상이다. 일상은 하찮은 물건들의 집합인 것이다. 김도경의 작품에서 그러한 물건들은 커피 컵부터 장난감 조각에 이르기까지 흔하게 소비되는 품목들로 나타난다. 일상은 그 하찮음 속에서 반복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새로운 것의 생성 또한 반복으로부터 온다. 




32cm x 32cm x 10cm 핸드메이드 아티스트북 2016

32cm x 32cm x 10cm 핸드메이드 아티스트북 2013





그래서 르페브르는 일상이 철학의 서막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철학을 일상성으로 하여금 현재에는 그 안에 부재중인 어떤 충만성을 세상에 내놓도록 도와준다는 르페브르의 논지를 따르자면, 예술 또한 그렇다. [현대세계의 일상성]에 의하면 일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선시되는 것은 객체이다. 객관성 속에서가 아니라, 물체성에 의해 그리고 거의 순수 형태로서의 객체말이다. 르페브르는 다만 물체적 명료성 속에서 사물을 스펙터클로 변형시키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물체의 확실성은 행위로서의 주체, 또는 작품으로서의 사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언어 곧 그 구조가 현실과 너무 똑같은 그 언어에서 나온다. 완벽한 순환을 추구함으로서,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왕복함으로서 일상생활의 확고한 안정성이 드러난다. 르페브르는 짧은 시간들이 한없이 확대되는 현대소설(누보로망)의 예를 든다. 


김도경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물들 또한 인간을 대신한다. 그러한 사물들을 사용하는, 그것을 바라보는, 그것을 작품화하는 주체는 가려져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많은 사물들은 주체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을 증거 할 뿐이다. 그러한 사물들은 주체의 반영이나 표현이기 보다는, 주체 자체를 구성하는 무엇이다. 소비품목이 소비자를 대신하듯, 사물이 예술가를 대신한다. 김도경은 그러한 반복적 실행 가운데 살짝 비트는 전략을 구사한다. 여기에서 예술은 일상적 삶의 반복이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형식은 압축적이기 때문에 반복은 기계적일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작품에 대해 기시감을 갖곤 하지만, 무엇이 무엇과 비슷하다고 말할 때는 반드시 어떤 차이도 있다고 같이 말해야 한다. 작정하고 베낄 때조차도 완전한 반복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압축적 재현인 예술은 어떤 부분을 선택하거나 삭제하고, 어떤 순간을 가속화하거나 느릿하게 한다. 그래서 삶과 관련은 되지만 삶 그 자체는 아닌, 즉 삶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삶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생겨난다. 





My Space 2007-2009   ,150cm x 400cm Digital print 2007-2009



My Space 2007-2009  150cm x 400cm Pencil drawing and Digital print 2007-2009



예술이란 이러한 생성을 증거 하는 기념비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작가가 선택한, 또는 만들어놓은 맥락이다. 가령 플래카드 작품 [우리 다시 만나요]는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에 큰 울림을 자아낼 수 있었다. 또한 그것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유목민적 삶을 살게 되는 현대인의 상황도 드러내주는 애틋한 문장이다. 최초의 [우리 다시 만나요]는 2014년에 작가가 유목민의 땅인 몽골사막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것이 있다. 영국 유학 중에 제작한 작품 [c have something](2008)은 매일 마셨던 커피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작가 말대로 ‘부모님의 노후자금을 털어서’온 유학, 여기서 반드시 뭔가 건져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지 않았을 것이기에, 부담 없는 커피 타임조차도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시간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석고로 캐스팅한 수많은 일회용 커피 잔은 작가가 마신 그때마다의 시간들이다. 매순간 작가는 다른 생각을 했을 것이고, 커피가 가지는 무게 또한 달랐을 것이다. 


게다가 원재료에 충실한 이 조각 작품들은 서서히 바래가는 시간의 흐름을 각인한다. 작가는 반복과 차이의 유희를 보여주는 이러한 주제를 수백 장의 에칭에 담기도 했다. 작품 [my space](2007-9)는 일상을 반복적으로 기록하는 작업으로, 작업실을 계속 촬영하여 판화로 만든 것이며, 드로잉 버전도 있다. 배움의 과정도 그렇고 더욱이 작업하는 삶이란 사치스러운 것이다. 사실, 이렇게 낭비된 시간이 없이 일상을 미세하게나마 변화시키는 무엇인가가 생겨나기는 힘들다. 일상이란 단지 살기만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에 의해 지속된다. 그러나 예술을 한다고 해서 늘 충만한 작품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작가는 그 때 마다 작품을 시작했던 초심으로 되돌아가고자 했다. 작품 [the way of healing](2011-12)은 미술을 처음 할 때 하던 명암내기에서 착안한 것이다. 손이 녹슬지 않도록 기본을 유지하면서 하던 작업인데, 그자체가 작품이 되고 심지어는 치유까지도 가능하게 했다. 작업실에는 400자 원고지의 칸을 명암내기로 메꾼 것도 걸려 있었다.







Rainbow   Dimension variable copperplate 2008_2009

Rainbow Plate size: 21.3cm x 29.8cm photo etching and drypoints 2009

Rainbow Lithography and screen print 102cm x 69.5cm 2009



그것은 필자가 원고지를 글자하나하나로 채우듯이 미술가는 자신의 조형적 언어로 그렇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몸을 기록하는 작품 [emotional graph](나무 버전은 2008-9, 금속 버전은 2010), 자신이 입었던 옷을 전 방위적으로 조각하고, 실크스크린과 에칭으로도 작업한 [rainbow](2009)는 반복적 기록이라는 기조를 유지한다.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소재를 단단한 재료로 만든다든지 하는 변화를 통해 차이를 도입한다. 걷기란 일상 속에서 반복과 차이의 관계를 가늠해주는 경험이다. 두 발의 반복적 움직임은 보행자를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김도경의 작품에서 걷기는 끝없는 이동을 보여주지만, 시점과 종점이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작품 [step by step](2009-10)에서 처음에는 앞으로 가는 듯했지만, 점차 앞뒤자체의 구분이 없어지는 상황을 표현한다. 작품 [step by step puzzle](2012)은 발자국 모양이 있는 400개의 나무 조각으로 이루어진 퍼즐이지만, 굳이 안 맞춰도 상관없다. 거기에는 유목과 미로의 관계가 있다. 


21세기를 유목의 시대로 규정하는 자크 아탈리는 또한 [미로]의 저자이기도 하다. [미로]에 의하면 미로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적어도 하나의 입구와 출구 또는 중심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통로를 갖추었지만 출구를 찾아내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어떤 표지도 없는 복잡한 길을 의미한다고 정의된다. 이 공간의 내부는 오는 길과 가는 길, 나선형 길과 막다른 통로, 멀면서도 가까운 곳들로 가득 들어차 있으며, 그 속에서는 거리조차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미로에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여기에서는 근대가 중시하는 직선적 지름길이 없기 때문이다. 자크 아탈리는 역사 또한 필연적으로 최선을 향해 나가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발전은 없다. 역사는 미로처럼 막다른 길과 환멸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예술 또한 미로에서의 헤매기처럼 한정된 공간 안에 무수한 길을 만드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초창기 작업인 [i’m working](2005)은 낡은 신발을 납판으로 조각한 것으로, 그렇게 낡기까지 걸었을 시간을 금속의 푸른 녹으로 보여준다. 





I’m working, copperplate, copperpipe dimensional variable 2005



낡은 신발로 나타나는 걷기는 일상을 반복한다. 그렇지만 작가는 재료를 변화시키고 시간을 가속화시킴으로서 차이를 만들어낸다. 작가의 삶이 전개됨으로 인해 선택되는 사물이나 재료는 자연스럽게 달라진다. 새장 모양의 모자 [my hat](2011)은 어느덧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가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을 은유한다. 멀리 날아가진 못한 채 천정에 걸쳐있는 동판으로 만들어진 풍선 또한 같은 맥락이다. 이번 전시의 작품 [헤매는 사람]은 아이의 놀이터에서 힌트를 얻었다. 미끄럼틀과 계단, 사다리 등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실제의 놀이터와 달리 매우 위험한 느낌을 준다. 천정에 달린 미러볼은 놀이터를 비췄을 태양을 대신한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끝나는지 알 수 없는 모호한 구조를 가진 이 놀이터는 벨기에 출신의 판화가인 에셔의 작품처럼, 돌고 도는 이상한 고리의 모순이 깔려 있다. 거기에는 아이들의 블록 장난감처럼 기본 도형으로 되어있는 작품 [동그라미+세모+네모](2013-17)에도 등장하는 도형들이 가세하여 한정된 단위로 다양한 조합을 만들어낸다. 


레고 블록으로서의 우주에서 새로움은 기존의 것을 재배열함으로서 탄생할 뿐이다. 매일 마셨던 커피나 자주 입었던 옷과 신발, 늘 머물렀던 작업실, 흔히 하던 말 등 일상의 사물과 공간, 언어들이 총체적으로 드러나는 김도경의 작품은 살아가기와 작업하기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일상과 비일상의 관계처럼 그 간격이 어느 지점에서는 교차된다. 작업/작품이 예술가 주체의 거울이라면, 반사상이 가능할 거리가 사라지는 것이다. 무엇이 무엇을 비춘다는 것인가. 사빈 멜쉬오르 보네는 [거울의 역사]에서 반사상이 많아지면 주체를 떠받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를 분산하고 흔들어놓는다고 본다. 이때 하나가 다른 하나를 신기루처럼 붙잡고 그러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상호성으로 환상이 조금씩 자리를 넓힌다. 저자는 그러한 예를 1만여 페이지에 이르는 자신의 일기와 삶을 혼동했던 작가 아미엘에서 발견한다. 보네에 의하면 아미엘은 꼼짝하지 않고 자신이 사는 것을 바라보고, 또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자신을 포착하는 몽상가였다. 




헤매는 사람_ planetai, dimensional variable steelpipe, steel plate, mirror ball 2017





[거울의 역사]에 인용된 바에 의하면, 아미엘은 자신을 ‘서로 마주보는 두 개의 거울, 서로의 모습을 비추면서 또 서로에게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또 비춰진 모습을 다시 반사하는,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두 개의 거울’로 묘사한다. 여기에서 반사상의 가역성은 완전한 비현실을 예고한다. 이때 예술가는 ‘내적 삶의 영웅’이지만, 동시에 ‘활동적인 삶의 패자’가 된다. 수백 장에 이르는 시리즈로 구성되기도 하는 김도경의 작품은 일상의 친숙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거기에서 야기되는 미묘한 변화를 기록하려 한다. 그러한 기록이 바로 작업이다. 작품은 기록의 과정 또한 담는다. 그녀가 작업을 열심히 한다면 말 그대로 기록하는 삶인 것이다. 그렇다면 기록하는 자는 언제 사는가. 여기에는 작업을 열심히 할수록 삶이 축나기도 하는 예술가의 역설이 담겨있다. 김도경은 이러한 역설을 굳이 피하지 않고 그것과 함께 살기로 한다. 더 나아가 그러한 역설을 작업의 주제로 삼는다.   

 

출전;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 레지던시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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