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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진 / 스스로를 보게 하는 보이지 않는 지점

이선영

스스로를 보게 하는 보이지 않는 지점

  

이선영(미술평론가)

  

최익진의 [천명변곡]전은 제자리에 차곡차곡 있어야 할 것들이 거대한 태풍을 맞아 휘몰아치며 들썩이고 있는 듯하다. 전시장 벽의 어떤 지점에서 출발했을 일정한 폭을 지닌 길이의 선/면들은 천정과 벽, 바닥 할 것 없이 자신의 촉수를 뻗는다. 무늬목으로 이루어진 촉수는 실제의 나무와 달리 선을 덧대어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 전시장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작품 [항해]는 최초의 계획을 어느 정도는 수정해야 하는 가변설치물이다. 사방팔방으로 뻗어있는 촉수는 날개가 달린 듯 시원하게 뻗은 선과 중력에만 의지한 채 아래로 내려 뜨려진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복잡한 꼬임새를 하고 있는 고무판/선들은 꼬르륵하며 심연으로 잠기는 듯한 모습과 벽에 연결되어 강력한 지지대를 이루는 등, 다양한 역할을 맡는다. 벽으로부터 튕겨 나와 아우성치는 듯한 상태는 그 반대편에 다소간 차분하게 놓인 평면작품과 대조적이다. 




 항해,  합판에 먹과 염료, 고무 바,  가변 설치(803x445x1074cm),  2017, 토포하우스 설치전경





먹과 염료로 표면을 처리한 합판과 길게 잘린 검은 고무판이 만들어내는 선들은 3차원 공간상에서 이루어진 드로잉이라고 할 수 있다. 선은 단단히 고정되어 있지만, 차이를 둔 반복적 배치가 잠재적 운동감을 야기한다. 말 그대로 정중동(靜中動)이다. 시시각각 달라질 수밖에 없는 신체적 체험을 일깨우는 설치작품은 공간에 그어진 선 안에 관객을 밀어 넣는다. 서있는 위치에 따라 불어오는 ‘바람’도 달라질 것이다. 어떤 지점에서는 보는 이를 밀쳐버릴 듯 또는 포박할 듯한 강력한 선/면의 쇄도가 느껴진다. 지천명의 나이를 맞아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는 거대한 설치작품 [항해]는 순탄한 항해만을 기대하기 보다는 난파(難破)를 개의치 않는 태도가 깔려있다. 날아다니는 폐목같이 연출된 것들은 안전한 항해와는 거리가 있는 이미지이다. ‘죽어야 산다’는 말이 있듯이, 떠남만이 안착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물론 그 안착조차도 또 다른 떠남을 위한 지점에 불과할 것이지만 말이다.


[천명변곡] 전의 작품들은 규모와 차원은 다르지만, 어느덧 지천명이 되어 20여회의 개인전을 치룬 작가의 상황을 여러 버전으로 말한다. 동시에 난장(亂場)을 이루는 조형언어는 작품이란 것이 미칠 것 같은 순간을 통과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음을 말한다. 또한 그의 작품 속 거울이나 판옵티콘 이미지에도 광기가 내재해 있다. 작품 [항해]의 출발점을 이루는 보이지 않는 중심은 그림처럼 벽에 붙어있는 직사각형 판에 존재한다. 벽에 걸린 다른 작품과의 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선은 평면에서 뻗어 나온 것이 된다. 물론 거기에는 가역성이 있다. 해체와 구성이 구별되지 않듯이, 발산과 수렴 또한 그러하다. 이러한 가역성은 단선성이나 제자리에서 돌고 도는 순환과도 다르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의 뒤엉킴이 존재한다. 평면 작품 [뒤엉켜진]은 설치작품 [항해]에서 뻗어 나온 선들이 수렴한 모습이다. 마치 압축 파일처럼 3차원 공간에서 거둬들여진 선들은 평면에 접혀 들어가 있다. 






[항해] 부분



그것들은 3차원 상에 펼쳐질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다. 관객이 이동하는 중에 추가되는 시간성은 또 다른 차원을 덧붙인다. 평면작품에 사용된 나무 역시 먹과 염료로 표면을 처리해서 동질이상의 느낌은 더욱 강하다. 평면작품에는 검은 거울들이 끼어있는 차이가 있다. 그림이란 것이 창문이나 거울로 간주되었던 때도 있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이 작품은 창문 안의 창문, 또는 거울 안의 거울을 은유한다. [뒤엉켜진]이라는 제목은 차원에 차원을 더하는 복잡성을 암시한다. 여기에서 창문 또는 거울에 기대될 법한 투명성은 사라진다. 눈구멍같이 뚫린 창문, 또는 거울은 긁혀있거나 깨져있다. 그것은 자신은 보여주지 않은 채 무심히 바깥을 비추고 있는 창/거울로 다가온다. 그것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지만, 보여진다는 상상은 상상만으로도 자동적으로 권력을 작동시킨다. 그러한 모델은 판옵티콘으로 잘 알려져 있다. 


미란 보조비치는 [암흑지점-초기 근대철학에서의 응시와 신체]에서, 근대 계몽주의 시대에 발명된 판옵티콘이라는 감옥 모델은 감시자가 실제로 덜 현존하면 할수록 그는 외견상 더 편재한다고 말한다. [암흑지점]에 의하면, 죄수들을 장악하는 감시자의 권능 일체는 감시자의 비가시성으로부터, 혹은 그의 비가시적 편재로부터 유래한다. 건축적 스케일을 가지는 최익진도 작품은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판옵티콘적 시선과 관련이 있다. 그의 작품에서 창/거울은 외곽선과 기울기가 각기 달라 역동적이다. 그것들은 (잠재적)회오리 바람에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수직/수평의 안정된 좌표를 벗어난 이러한 움직임은 불투명성을 더욱 강조한다. 그것은 거울/창에 기대되는 바처럼 바깥을 투명하게 반영하지 않는다. 옆에 걸린 작품 [어긋난 시선]과 [어긋난 시선2]는 한 쌍을 이룰 뿐 아니라, 60x60cm의 안정된 틀 거리를 가진다. 여기에도 깨지거나 긁힌 흑경이 박혀있다. 합판들을 복잡하게 구성한 평면에 연속성은 단절되어 있다. 






[항해] 부분



거기에는 균열과 간극이 있지만, 파고들어갈 수 없을 만큼 ‘뒤엉키고’ ‘어긋나’ 있다. 서로가 서로를 반사함으로서 복잡하게 꼬인 상황은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난감한 뒤엉킴을 낳는다. 이러한 뒤엉킴은 무한 반사하는 거울의 방이나 일망 감시망이 작동되는 거대한 감옥에도 존재한다. [뒤엉켜진]은 벽에 붙인 [어긋난 시선]과 달리 벽에 기대어 놓아 그림을 설치적인 방식으로 푼다. 벽에 걸린 것이 바닥에 놓이면, 이후에 그것은 [항해]처럼 3차원 상에 풀어헤쳐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평평한 거울을 지탱하고 있는 이면이 드러날 것이다. 최익진이 암시하는 거울의 이면은 거울의 표면과 달리, 무엇인가를 재현하지 않는다. 거울을 통과하는 여정은 수많은 길로 갈라진 미로를 이룬다. 끝없는 우회로로 이루어진 미로는 즐길만한 것이면서도 낭비를 야기함으로 위험하다. 항해는 결코 낭만적인 것이 아니다. 더구나 앞에 펼쳐진 수많은 여로로 인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깜깜이 항해라면 더욱 더. 


작품 [뒤엉켜진]이나 [어긋난 시선]은 예술작품을 비롯하여 투명하고 원활한 소통에 대한 기대가 좌절된 경험을 담고 있다. ‘아’라고 외치는데 ‘어’라고 들려오는 메아리들, 예술에서는 신선할 수도 있는 오차가 현실 속에서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작품 안에서만 살 수 있는 작가란 없다. 물론 수시로 닥치는 그러한 희비극적 상황이 작품의 무게를 더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통상적으로 그림을 담은 액자가 나무틀과 유리로 되어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그는 그림을 이루는 형식만으로 ‘그림’을 그린 셈이다. 작가는 유리의 차가움과 나무의 따뜻함이라는 물성도 염두에 두었다고 말한다. 나무는 광물질과 달리 유기적 속성을 가진다. 그는 작업 초창기부터 애용했던 나무가 중에서 오행(五行) 중에서 유일한 유기물이라고 밝힌다. 2000년대 초반, 합판과 석회가 사용된 그의 작품에서 석회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 흑경과 은경이다. 당시의 작품에서 합판은 지평선을 이루고 그 위에 석회에 가려진 풍경의 흔적들이 드러나곤 했다. 




(좌)[뒤엉켜진]/ (우)[어긋난 시선]



 [어긋난 시선]



나무와 유리로 된 작품은 어떤 내용을 담은 그림이 아니라, 형식으로부터 드러나는 내용이다. 서까래와 대들보, 그리고 마루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최익진에게 나무라는 소재는 한국적 실경을 만들기 위해 사용되곤 하였다. 이전에는 오래된 폐목이 사용되기도 했지만, 요즘에는 회화적 처리를 한 합판으로 대신한다. 합판은 묵직한 실재감 대신에 표면의 조합을 통해 새로운 실재를 구성/해체한다. 전시장 한 켠에는 그림을 이루는 형식을 파헤쳐서 널어놓은 설치물이 있고, 다른 한 켠에는 그림을 이루는 형식적 요소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그림이 있다. 그것은 또 다른 관계 맺기가 용이한 나무의 시뮬라크르이다. 현대철학은 현대미술과 함께 원본과 복사본의 구별이라는 플라톤 이래의 오랜 철학적 관념을 와해시키려 한다. 시뮬라크르, 즉 나무의 껍데기들로 그림이라는 틀을 산산이 분해한 최익진의 작품 [항해]는 최초의 출발이나 최종적 목적지가 아니라 가고 있는 과정만을 드러낼 뿐이다. 시뮬라크르에게는 기원과 목적은 큰 의미가 없고 과정, 중간이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끝없는 변형이 일어난다. 


표면은 심층과 달리 변형이 용이하다. 가다가 이리저리 꼬이는 고무판/선들처럼 안과 밖의 관계도 수시로 바뀐다. 그것은 전시부제 ‘천명변곡’에서 ‘변곡’이 강조하는 바이다. 합판이든 고무판이든 좁은 면으로 이루어진 선들은 ‘납작하게 눌려 넓이가 된 깊이’(질 들뢰즈)라고 할 수 있다. 즉 그것은 표면이다. 최익진의 평면 및 설치작품은 표면들로 이루어진 실재이다. 원본과 본질에 묻혀있던 시뮬라크르의 의미를 밝히는 질 들뢰즈의 책 [의미의 논리]는 시뮬라크르가 퇴락한 복사물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나아가 표면으로 거슬러 올라감, 그릇된 심층의 거부, 모든 것이 가장자리에서 발생함을 강조한다. 또한 이리저리 휘어져 공간을 내달리고 있는 최익진의 작품은 휘어져 있는 우주에 대한 현대 과학의 가설을 떠오르게 한다. 이러한 가설의 바탕은 원근법의 기초를 이루었던 유클리드 기하학이 아니라, 보다 신축적인 기하학, ‘고무판 기하학’이라 불리우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바탕으로 한다. 도널 오셔는 [푸앵카레의 추측-우주의 모양을 찾아서]에서 우주가 지구의 표면처럼 장소에 따라 다르게 휘어져 있다고 말한다. 




뒤엉켜진, 합판에 나무 먹과 염료 바니쉬, 흑 경에 스크래치, 218.2x290cm, 2017



[뒤엉켜진] 부분



 어긋난 시선, 합판에 나무 먹과 염료 바니쉬, 흑 경에 스크래치, 60x60cm, 2011



 어긋난 시선 2, 합판에 나무 먹과 염료 바니쉬, 흑 경에 스크래치, 60x60cm, 2011



그렇게 생긴 우주에서는 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가능하다. 시뮬라크르와 고무판 기하학을 바탕으로 하는 작품들은 지천명의 작가에게 새로운 출발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다만 그가 충분히 오랫동안 날아갔어야 출발점 근처로 되돌아 올 수 있다. 이러한 영원한 회귀에서 중심은 조금씩 이동한다. 거울이 등장하는 작품은 시차와 오차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다. 가변성을 긍정적 가치로 고양시킨 설치 작품에 비해, 평면작품은 조금 음울하게 다가온다. 최익진의 작품에서 거울을 깨져있거나 긁혀있다. 사실은 거울 자체가 좌우가 뒤집힌 왜곡 상에 기반 한다. 이전 작품에서 그는 거울의 반전을 이용하여 사회적 이슈를 담은 텍스트를 담기도 했다. 거기에는 왜곡이 바로잡히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었지만, 서로가 서로를 반사하는 어지러운 우주에서 무엇이 진짜인지는 끝없이 유예된다. 이번 전시에서 평면작품 속 거울은 관객을 비추지만, 평면을 공간상에 헤집어 놓은 듯한 설치작품에서는 거울의 저편으로 안내한다. 


마치 실밥이 지저분하게 풀려있는 자수 작품의 뒷면 같은 설치작품은 투명한 반영이 가능하기 위한 불투명한 과정이 드러나 있다. 사빈 멜쉬오르 보네의 [거울의 역사]에 의하면 거울은 내적 성찰을 일구는 도구로 쓰이기 전에 먼저 외관을 가꾸는데 사용되었다고 말한다. 즉 거울은 사회적 적응과 조화의 도구였던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쳐보는 것이 아니라, 거울이 사람들을 본다. 거울은 스스로의 법칙을 공포하고 규범적 도구가 되며, 그에 따라 사교계의 규칙에 적합하고 부응하는지 판단한다는 것이다. 보네에 의하면 자의식은 우선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 그 표상과 가시성과 일치한다. 데카르트적 어법으로 말하자면 ‘나는 보여졌다. 고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울의 메카니즘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손에 쥐어져 있는 작은 인터페이스, 즉 손거울처럼 기능하고 있는 스마트 폰에서 확인된다.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생중계하며 타인을 엿보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는 그 창 말이다. 그런데 최익진의 작품이 암시하는 바에 의하면 그 창은 뒤죽박죽이다. 




철수장면



라깡을 비롯한 현대 심리학의 주장처럼 거울이 마련하는 주체의 자리는 상상적이다. 2000년대 초반의 전시부제인 [세상엔 없다 utopia]전(2003년), [무거리의 거리-utopia]전(2004년), [무거리 속의 거리; 벽의 눈]전(2005년)을 보면, 작업 초반기부터 허구의 위상에 대한 생각이 작품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던 듯하다. 타자와의 소통에 깔려있는 상상의 자리는 예술 뿐 아니라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시선을 매개로 한 최익진의 작품에서 권력은 음울한 양상을 띤다. 이번 전시에서 거울이 등장하는 평면작품들에 사용된 흑경은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를 반사함과 동시에 어떤 시선이 느껴진다. 선글라스를 낀 사람이 자신의 시선을 감춘 채 상대를 볼 수 있듯이 말이다. 또한 현대인의 삶은 도처에 반짝이는 검은 표면을 가진 수많은 카메라의 감시망 속에서 펼쳐진다. 그것은 거울처럼 자신을 보는 내적인 시선이 스스로를 감시하고 조절하는 사회와 연결되어 있음을 말한다. 또한 거울에 내재된 보기/보여지기의 메카니즘은 제러미 벤섬이 설계한 판옵티콘의 기본 구조에도 깔려 있다. 


미란 보조비치는 [암흑지점]에서, 제러미 벤섬이 판옵티콘과 허구이론을 통해서 근대사유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 우리를 보는 자를 보지 못하는 채로 보여짐을 당하는 판옵티콘에서는 감시당하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감시는 이루어진다. 판옵티콘의 전능한 존재는 보이지 않을수록 더욱 우리를 보고 있을 것만 같다. 죄수들을 장악하는 그의 권능 일체는 그의 비가시성으로부터 유래한다. 응시는 판옵티콘 안에서 커다란 역할을 한다. 죄수들이 실제로 항상 감시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그렇다고 상상하는 것 뿐이다. 신처럼 전능한 권력은 그 스스로는 보여주지 않는 암흑지점에 존재한다. 빛으로 가득한 판옵티콘 우주 속에는 전능한 권력자의 자리인 암흑 지점이 있다. 암흑지점은 최익진의 이전 전시에 포함된 키워드의 하나인 유토피아처럼 허구이다. 그러나 판옵티콘의 모델은 현실 그자체가 이미 허구처럼 구조화되어 있음을 말한다. 최익진이 연출한 어둡고 흐린 거울과 그 이면은 허구적이지만, 아니 허구적이기에 권력을 발생시키는 암흑지점(설치작품에서는 암흑지대)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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