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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희 / 다시 만들어져야할 자리

이선영

다시 만들어져야할 자리

  

이선영(미술평론가)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 한 후 미국으로 가서 9년간 샌디애고, 시카고, 미시간 등 여러 지역의 학교에서 미술수업과 레지던시를 마치고 얼마 전에 돌아온 작가에게 다시 시작된 이곳에서의 삶은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보냈던 그곳과 마찬가지로 유목이다. 유목하는 삶은 멀리서 보기와 다르다. 정주가 평화롭지만 권태롭다면, 유목은 자유롭지만 불안하다. 한국에 온지 3년 차인 작가에게도 상당부분 그러하다. ‘이동하지 않으면 살수 없는 삶’을 체감하고 있는 작가에게 유목 또한 정주만큼이나 강제적일 수 있다. 테미예술창작센터에서 열린 개인전 ‘치유의 방; A wandering nomad’ 전은 ‘방황하는 유목민’의 여정에서 생겨나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는 그 여정들이 이제 갓 서른을 넘은 젊은이에게 준 불안과 피로감에서 비롯된다. 빛은 그러한 그림자 때문에 생겨난 역설적인 무엇(가령 작품)이다. 김연희에게도 예술은 빛과 그림자의 길항 관계 속에서 생겨나며, 영상 설치로 이루어진 작품들의 면모 또한 명암의 대조가 선명하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 강조되는 요즘은 많이 완화되었다고 하지만, 예술계 또한 학연과 지연, 그리고 +α로 분류되는 전략적 고려 등이 얽히고설켜 있는, 그래서 뭔가 끈적끈적한 것이 없다면 어딘가 ‘붙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누군가에겐 ‘자연스럽게’ 이미 깔려 있을지 모르는 사이비 공동체의 보이지 않는 끈이 작가에게는 결핍되어 있다. 김연희는 거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조기 유학 세대들이 거의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동안 해왔던)작업만 가지고 창작스튜디오에서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그다지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창작 공간이 있는 대전을 중심으로, 작업과 강의 등을 위해 경상도, 전라도, 서울을 거의 주기적으로 왕래해야하는 작가의 여정은 생각만으로도 피곤하다. 갈갈이 찢어진 동 선 때문에 길에다 쏟는 시간과 에너지가 너무 크다. 인생을 권태로움과 가혹함으로 요약했던 어떤 시인의 기준으로 본다면, 작가는 정주민의 권태에 버금가는 유목만의 가혹함을 온 몸으로 통과하고 있는 중이다. 


전시된 작품은 자신이 당면한 절박한 무엇, 가령 머무름과 휴식에 대한 갈망이 있다. 작품의 형식은 세련되고 깔끔하다. 그러나 작업이나 전시준비 또한 머무름이나 휴식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니, 그 또한 역설이다. 만약 누군가 인생이 역설적인 것이라고 규정한다면, 예술은 그러한 인생을 가장 많이 닮았을 것이다. 전시는 크게 정육각형의 구조물을 스크린 삼아 상영되는 영상설치와 ‘치유의 방’으로 상정된 200x200x200cm 규모의 준 건축적 구조물로 구성된다. 어둑한 전시장에 영상설치 작품들이 섬처럼 띄엄띄엄 놓여있고, [치유의 방]은 사각형 전시공간의 한 축에 존재한다. 끝없는 이동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영상들 사이에 서있는 하얀 방은 관객으로 하여금 들어가 볼 것을 권유한다. 그것은 휴식의 이미지, 즉 유목민의 파라다이스라고 할 수 있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분위기가 있다. 전시공간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관객은 작가의 여정을 축소모델로 추체험하는 셈이다.    








투명 아크릴로 만든 벌집의 조합은 작가가 활용하는 카카오 네비게이션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자주 가는 지역을 특정하여 표시한다. 그것은 남한 지역의 몇 군데 지점을 마치 폐쇄회로처럼 오가는 여정을 반영한다. 전시장은 어둑해서 바닥으로 영상이 반사되기 때문에 정육각형 구조물은 더욱 많아 보인다. 그것은 언제라도 더 줄이거나 늘릴 수 있는, 말 그대로 가변적인 설치물이 된다. 여기에 투영되는 영상은 차나 도보로 움직이는 장면들이다. 지상에서의 움직임을 상영한 것이 어서인지 스크린들은 바닥에 놓인다. 주행의 경우 차에 부착된 카메라가 기록하는 전방시점, 도보의 경우 카메라를 메고 걷는 시점이다. 영상들은 홀로 운전하거나 걷는 1인칭의 시점으로, 시시각각 다가오는 환경을 헤치고 나아가는 모습이 담겨있다. 우연히 화면에 묻어나온 것이 아니라면 타인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상의 재현이면서도 상응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부산하게 움직였던 여로가 담겨 있다는 면에서 재현이라면, 반복재생 하는 비디오의 메카니즘은 반복적 일상에 상응한다.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다니던 길들은 작업 수단이 아니라 내용이 되었다. 시간에 쫒기느라 풍경을 제대로 볼 여유가 없었는데, 카메라에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들이 잡혀 있었다. 카메라에 자동적으로(무의식적으로) 찍힌 순간은 작품을 통해 의식화된다. 이렇게 예술은 예술이 아니라면 잡아두지 못할 순간을 기록하게 된다. 벌집구조 4개가 연결된 작품 [wandern_4]에 투사되는 영상은 8개월 가량 찍은 것을 바탕으로 편집한 것이다. 벌집구조 7개가 연결된 작품 [wandern_7]에는 도보자의 관점이 있다. 이 전시를 위해 이것저것 준비하기 위해 이동했던 여로이다. 하루의 일상처럼 보이지만, 여러 지역과 상황이 편집된 것이다. 벌집구조 2개가 연결된 작품 [냄새_2]는 도보나 운전 등의 여로 외에 브런치 테이블이 등장한다. 미국생활을 오래했던 작가에게는 일종의 ‘고향의 맛’이라 할 만한 것이다. 냄새는 은연 중에 어떤 기억을 호출한다. 또한 그것은 먹는 것이 차지하는 원초적 중요성을 암시한다.






나무와 천으로 만들어진 [치유의 방]은 영원히 안주할 수 있는 집이 아니라, 유목민의 막사나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다. 여정들 사이에 있는 간이 휴식처 같은 느낌이다. 사각형이 아니라 모서리가 약간 둥글려지고, 치유의 방을 상징하는 기호는 돌릴 수—하얗게 빛나는 병원 로고에서 더하기(+)로, 또는 곱하기(x)로 변할 수 있다—있는데, 거기에는 잠재적 동감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김연희의 이전작품의 한 제목처럼 ‘움직이는 집’의 면모가 있다. 캐리어 모양의 집 같은, 이전 작품의 스타일을 보면 올해에 제작된 [치유의 방]은 그 연속선상에 있다. 작가는 ‘가고 싶은 특정한 장소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늘 도망가고 싶었다’고 말한다. ‘날마다 다른 지역으로 움직이는 일상’으로부터의 도망이다. 그러한 절실함 때문인지, 치유의 방은 모든 자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준비된 듯한 세트가 눈에 띈다. 하얀 옥스퍼드 천으로 된 바깥 가림 막 안쪽에는 부드러운 하얀 천으로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방 안팎을 둘러싸는 하얀 색은 상징적으로는 휴식을 위한 순수한 백지 상태일 것이다. 기능적으로는 청결함일 것이다. 하얀 방은 지친 심신에서 활력 있는 심신으로의 재탄생을 위한 장이다. 재생이나 부활을 상징하는 흰색의 유래는 깊다. 또한 이 작품에서 흰색은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성능이 뛰어난 유목 물품의 성격과도 관련된다. 이러한 물품들은 문명사회에서의 유목을 말해준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흰색(그리고 검정도)은 모든 관심을 기능성으로 돌려준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기술은 색이 없이도 작동하므로 기술자에게 색은 장식일 뿐이다. 기술 디자인의 미니멀한 양식은 명확성을 추구하며, 모든 장식과 색채에서 해방된 미학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하얀 방은 동시에 텅 빈 방이며, 미지의 장소를 말한다. 에바 헬러는 옛 지도의 예를 들면서 미지의 지역을 하얀 공백으로 표시한다고 말한다. 






일상적 편안함은 익숙함을 전제로 하지만, 편안함에 관련된 예술은 낯설음 또한 포함한다. 방 안에는 한사람이 푹 들어앉아 있을 크기의 육각형 구조물이 놓여 있다. 나무 향이 나는 이 구조물은 소파나 침대처럼 푹신하진 않지만 포근하다. [치유의 방]은 완전 밀폐는 아니지만 겹겹의 장치들이 있다. 방과 육각형 구조물은 은은한 향이 편안함을 주기에 온천이나 사우나탕에서 많이 사용되기도 하는 편백나무로 짜여졌다. 휴식을 위한 하얀 방은 최소한의 필수품을 담는다. 영상작품에서 벌집 구조는 스크린의 역할을 했지만, 여기에서는 방속의 방이 된다. 그 안에는 편안히 앉을 수 있는 방석과 쿠션 등 소품들이 있다. 소품들에는 설치작품을 하기 전에 회화를 전공했음을 알려주는 추상적 형상들이 무늬로 새겨져 있다. 전시장에 찾아온 관객들에게 나눠주는 에코백은 작가의 유목적 여정이 결집된 작은 선물이다. 작가는 관객이 그녀의 작품을 체험하고 무엇인가를 담아가기를 바란다. 


작가가 즐겨보는 책 몇 권, 작은 화분, 램프, 향초, 그리고 스마트폰을 올려놓으면 소리가 울리는 자작나무 스피커 등, 아기자기 하면서도 꼭 필요한 것들이 작은 탁자 위에 놓여있다. 그곳은 누군가를 위한 방이긴 하지만, 사적인 느낌은 없다. [치유의 방]의 주조를 이루는 색인 흰색이나 나무색은 특정 개인의 내면성 보다는 기술이나 자연, 즉 중성적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누구라도 여기서 다시 시작할 수 있듯이 말이다. [치유의 방]에는 자크 아탈리가 현대의 유목민(또는 유목민으로서의 현대인)에게 필요하다고 말했던 유목 물품이라 할 만한 것들이 발견된다. 아탈리는 [21세기 사전]에서 1만년 전에 정착된 문명은 머지않아 유목을 중심으로 재건될 것이라고 하면서, 모든 것이 불안정하므로 모든 것을 휴대하려 할 것이라고 말한다. 아탈리는 과거 유목민의 물품 중에서 음악, 보석, 작은 조각 작품, 그림, 구전문학의 예를 든다. 






유목민을 항상 접속 상태로 있게 하는 휴대 가능한 사물이 유목 물품이다. 그는 언젠가는 인간 자신이 점점 더 복잡하고 가벼운 유목 물품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유목물품이 되고자 할 것이기에, 시장은 모든 노력을 총동원해서 유목민을 만족시키려고 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20세기에 씌여진 [21 세기 사전]의 저자는 휴대폰은 분실해서는 안 되는 제 1순위의 유목 물품이 된 상황을 이미 내다 본 듯하다. 유목 물품, 또는 유목 물품에 담길 예술가의 가장 중요한 항목은 자신의 작품 리스트일 것이다. 4차 산업혁명에서 지식이나 예술은 또 다른 의미에서 중요성을 가진다. 그것은 김연희가 요즘 대학에서 하고 있는 강의 [예술과 지식생산]에 관련된 내용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동하기에 버거운)물질보다는 일련의 노하우를 소유하는 자이다. 물질이 아닌 방법이기에 소유하는 자 보다는 중개하는 자가 더 정확할  것이다. 


예술가의 작업 자체가 여기와 저기를 잇는 그물망적 구조를 가진다. 유목민/예술가는 소통의 중개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권력은 정보교환을 방해하거나 또는 원활히 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 보는 자크 아탈리는 또 다른 책 [미로]에서, 역사상 그러한 중개인의 예로 ‘사제, 이야기꾼, 음유시인, 마법사, 예언가, 전도사 등’을 든다. 그들은 모두 ‘메시지를 만들어내고 옮기고 표현하는’ 자들이다. 이 목록에는 암시적이고 명시적인 예술가가 포함되어 있다. 이동의 궤적이 드러나 있는 영상 설치 작품은 운전 중의 시점으로 담긴 풍경도 볼만 하지만, 기계와 합체된 몸의 상황, 즉 차로 이동하는 현대 유목민들의 몸의 상황을 드러내는 점이 흥미롭다. 그것은 다가오는 텅 빈 풍경을 저항 없이 통과하는 주체의 시점이다. 리차드 세넷은 [살과 돌; 서구 문명에서 육체와 도시]에서 봉건적 전통을 밀어내고 근대가 새로이 구축한 공간, 즉 거대한 광장을 비롯한 텅 빈 공간이 인간을 얼마나 수동적으로 변하게 했는지 설명한 바 있다. 








자연을 비롯한 전통을 밀쳐낸 공간에서 유일하게 활성화되는 것은 눈이다. 그에 의하면 근대인이 가진 것은 ‘순수하게 시각적인 아고라’이다. 공공 공간에서는 침묵이 권장된다. 그러한 공간에서 대중은 침묵하지만, 그 대신 가득한 것은 움직이는 스펙터클을 포함하여 다양한 미디어들이 뿜어내는 백색 소음들이다. 무심한 구경꾼의 시선은 이제 이런 저런 인터페이스에 묶이게 되었다. 타자와의 접촉은 피하고 싶은 사고(事故)일 뿐이다. 근대의 개인주의가 전통으로부터의 해방과 동시에 사회적 소외를 야기했다면 대안을 위한 행동, 즉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접촉이다. 접촉이 절망이 아닌 희망, 즉 사고가 아닌 소통으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 현대의 작가가 공략해야 하는 부분은 소통을 위한 접촉인 것이다. 김연희의 작품에서 도보자나 운전자나 상황은 비슷하다. 리차드 세넷은 도시 공간이 단지 통과하기 위한 곳일 때 공간 그 자체는 활기를 잃게 된다고 말한다. 


즉 도보자나 운전자는 공간을 뚫고 나가고 싶어 할 뿐, 공간에 의해 자극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바깥을 이동하는 중에도 사람들은 바깥과의 감각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다. 주변으로부터 분리된 감각을 차지하는 것은 여러 매체가 되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 리차드 세넷은 단 몇 초 만에 길과 길에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승강기의 예를 들지만, 앞으로 자율주행 자동차 등 얼마든지 많은 예가 있다. 이미 우리 생활에 깊숙이 들어온 스마트 폰은 대중이 북적이는 엄청나게 밀집된 공간 속에서도 개인의 공간을 마련해 준다. 다만, 그 개인의 공간이 모두 비슷하다는 것에 개인주의나 사적 공간의 문제점이 있을 따름이다. 디지털 미디어 사회에서 눈과 손가락만 움직이게 되는 몸의 수동성은 강화되고 있다. 새로운 도시환경은 ‘속도, 탈출, 수동성을 이끌 것’(리차드 세넷)이다. 






휴식과 휴가의 의미는 어느 시대보다도 중요해졌다. 도보자나 운전자의 시점이 가감 없이 기록되어 있으며, 간이 휴식처 같이 연출된 김연희의 작품은 ‘접촉에 대한 공포와 물러남’이라는, 리차드 세넷이 현대사회의 특징이라 분석한 상황을 표현한다. 소외된 개인을 위한 치유의 방은 공동체를 호출하기 이전에 공동체가 가능하기 위한 개인을 먼저 충족시키고자 한다. 김연희는 작품을 만드는 과정과 작품을 중첩시킨다. 작업은 어떤 휴식을 표현한다 해도 그 자체는 실제의 휴식과는 거리가 멀다. 감각의 수동성도 마찬가지다. 휴식을 표현하기 위해 과로를 해야 하고, 감각의 수동성을 표현하기 위해 감각은 깨어있어야 하는 것이 작가이다. 죽음과 같은 절망적 상황을 표현하는 것도 삶이 담보되어야 한다. 그것도 최상으로 각성된 삶이. 리차드 세넷의 결론은 사회적 접촉의 촉구였다. 예술가에게는 깨어있는 감각과 육체로 만들어낸 예술작품이 바로 그러한 접촉의 창구가 될 것이다.  

 

출전;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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