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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원 / 억압과 쾌락을 위한 기념비

이선영

억압과 쾌락을 위한 기념비

홍기원 전 (6.22 ~ 7.5, CR Collective)

  

이선영(미술평론가)

  

열정적인 전시부제와 달리, 청동 주물로 뜬 마구 두 개와 스크린이 전부인 전시장의 첫인상은 냉랭하고 건조하다. 영상 또한 남미의 이국적 분위기가 간헐적으로 묻어나오는 것 빼고는 거의 다큐멘타리 풍의 중성적인 직설 화법이다. 각종 규칙에 파블로프의 개처럼 길들여져 있는 현대인에게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어둠 속의 종소리는 뭔가 즉시 수행해야 할 것 같은 조건 반사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모호한 열정이 일련의 명료한 예술적 형식이 되기 위해서는 최초의 열정보다 더 큰 열정이 추가로 투입돼야 한다. 물론 후자의 열정을 지탱하고 이끄는 것은 전자의 열정이지만 말이다. 열정을 어떤 한정된 형식에 담는다는 것은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같은, 항간에 떠도는 농담에서 발견될 법한 마술적 과정이 필요하다. 열정은 그자체가 자신을 넘어서는 열린 과정이기 때문이다. 열정, 즉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을 물화시키는 과정에는 뜨거움과 차가움이 교차된다. 열락은 이러한 역설로부터 발생한다. 작가는 마구를 제작할 때의 담금질되고 연마되는 쇠처럼 가혹한 과정을 온몸으로 통과해야 했을 것이다. 




홍기원_무제_자이로콘트롤러, 브론즈캐스팅, 좌대_107×30×35cm, 150×30×30cm_2017







작품 속 경주마가 승리를 위해 감내 해야 했듯, 작가 또한 시간과의 싸움이기도 한 전시회 준비를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자신을 ‘채찍질 하는’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20대 때 낙마 사고로 하반신 마비라는 중상을 입었던 홍기원은 이번 전시에서 그 트라우마를 회피하지 않고 직시한다. 말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지만, 말 또한 상처받는 존재임이 선명하다. 더구나 부상과 죽음에 이르는 말의 상처는 작가에게 일어났던 바와 같은 우연적 사고가 아니라, 반 만 년 전 인간에게 가축으로 길들여진 이래 항구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상처이다. 여기에서 가해와 피해는 명확한 방향성을 잃고 뒤섞인다. 인간이 자연을 타자화 했지만,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 또한 타자의 운명을 공유했던 것처럼 말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마구 제작 공장이나 승마클럽, 경마장 언저리에서 경주마가 되기 위해 가해지는 여러 과정들은 말 뿐 아니라 인간, 특히 작가에게 전이된다. 이기기 위해 눈과 귀를 막고 무작정 정해진 궤도를 달려야만 하는 그런 운명 말이다. 


영상 속에서 풀 샷으로 보여주는 마구 제조 공장의 자세한 모습은 자연을 도구화시키기 위해 인간 또한 도구화되었음을 알려준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을 자연과 구별시킨 속성, 즉 ‘도구를 만드는 인간’(벤자민 프랭클린)은 그다지 영웅적이지 않다. 다양한 마구들, 즉 불에 달구어지고 두들겨진 단단한 무기물은 부드러운 유기체에 장착된다. 특수한 목적을 강화하기 위해 장착된 보철은 거친 자연을 길들이고 문명화한다. 문명비판은 예술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지만, 현대인은 이미 그 문명을 떠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노동의 사회화를 통해 생산력을 진보시켜온 ‘억압적 문명’(프로이트)은 안전과 쾌락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가령 승마자의 엉덩이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을 말안장과 수직으로 서 있는 채찍은, 잔혹과 열정의 조합이 사도매저키즘적일 수도 있음을 알려준다. 인간사회의 비유가 있는, 경쟁력 있는 경주마가 되기 위한 이런저런 과정들에서 억압적 관계만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영상작품에서 충분히 강조하고 있듯이, 말에게 적용된 잔혹한 과정들은 군중을 열광시킨다. 억압을 낳는 ‘권력은 쾌락 또한 생산’(미셀 푸코)한다. 




홍기원_Appassionata; Mysterious Impression_단채널 영상, 사운드, 칼라_00:12:28_2017











말은 소처럼 일상의 노동에 활용되기보다는 전쟁이나 경쟁을 위한 가축이었다. 전쟁이나 경쟁에서의 승리는 오랜 억압의 보상일 권력, 그리고 그와 연관된 쾌락을 자아낸다. 말안장과 채찍은 원래의 소재와 달리 금속으로 만들어졌다. 그것은 자동인형처럼 규율에 따르는 종속적 존재를 상기시키는 종소리를 내는 기능이 있다. 또한 유물처럼 제시된 이 고풍스러운 청동주조물은 더 이상 말을 통한 이동이나 속도가 요구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잔재하는 권력에 대한 기념비이다. 상대를 이기기 위한 말은 자동차나 무기류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말은 도박이나 스포츠의 장에서 또 다른 경쟁의 도구로 전용된다. 거기에서 도태된 말은 고기가 된다. 경쟁은 전쟁을 일상의 차원에서 수행한다. 고고학적 유물처럼 제시된 마구(馬具)는 권력을 유지되는 방식을 알려준다. 즉 권력은 할 필요가 없는 것도 하게끔 한다. 그것도 경쟁적으로. 인간은 더 이상 말에게 굴레를 씌울 필요가 없는데,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 또한 굴레를 뒤집어쓴다. 억압하는 자 또한 억압당한다. 인간은 이 중층적 억압을 쾌락으로 전이시키는 가학피학적인 권력의 산물이다.  

 

출전; 퍼블릭 아트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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