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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혜 / 차이와 다양성으로서의 생명

이선영

차이와 다양성으로서의 생명

  

이선영(미술평론가)

  

생명 갤러리에서 열리는 김영혜의 ‘몸을 말하다’ 전은 ‘몸+몸’(2002) 전을 시작으로, 꾸준하게 작가의 관심을 사로잡아왔던 몸에 대한 내용을 담은 전시다. 몸은 또한 형식이다. 누드의 역사가 미술의 역사와 거의 중첩될 정도로 몸은 조형예술의 중심이 되어왔다. 물론 그 중심은 점차 해체 되어 가고 있지만, 해체되는 순간조차도 기준이 되어준다. 우연이 필연과의 관계 속에 있듯이, 기준 없는 해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해체는 구축의 또 다른 이면으로 간주된다. 몸의 해체/구축은 그것이 원래 하나의 본질을 가지는 완결된 덩어리가 아니라, 그 경계를 열어젖히는 흐름과 함께 한다. 해체에서 우리는 죽음을 떠올릴 수밖에 없지만, 생명은 삶 뿐 아니라 죽음 또한 포괄한다. 예술 또한 죽음의 영역에 닿을 정도로 자신의 역량을 확장하지 않는다면 예술이라고 볼 수 없다. 이 전시에서 이러한 확장은 유동적인 몸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작품의 주조 색이 되고 있는 블루는 물과 몸의 관련성을 말한다.




다중유방2, 200cmx60cm,2015



그것은 물이 몸을 이루는 물질의 70%라는 과학적 사실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몸 자체의 유체성을 말한다. 김영혜의 작품에서 몸의 가장자리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져 나오곤 한다. 블루라는 주조 색을 강조하는 다른 색들은 이러한 미세한 차이를 강조한다. 어떤 작품에서는 한 두 방울 정도가 아니라 콸콸 넘쳐흐르기도 한다. 신축성이 있는 천과 충전재를 활용하여 손바느질로 하나하나 완성되는 작품들은 마치 바탕에서 도드라져 나오는 부조처럼 보이는데, 색상과 재질면에서 바탕과 연속성 상에 있는 몸은 바탕과 마찬가지로 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또한 다른 생명체처럼 푸른 바다에서 비롯되었음을 알려준다.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풀 하우스]에서 생명이 원시 바다와 대기를 구성하고 있던 성분에 화학적 연쇄 반응이 일어나고, 그것에 자기 조직화를 유발하는 물리적 원리가 작용한 결과 출현했는데, 이때의 바다가 바로 ‘원시생명 수프’라고 말한다. 바다와 등치된 푸른 몸은 자신의 유한성을 떨쳐낸다. 

  

김영혜의 작품에서 다양한 두께로 솟아오르는 몸은 물처럼 표면 장력을 가지고 있으며, 올록볼록한 외곽선은 물에서 나오고 물로 되돌아가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몸은 고정되지 않고 물처럼 흐른다. 흐름을 멈추게 하는 것은 유체를 담는 프레임들이다. 그러나 그 프레임들은 유체/몸을 다시 연결시키기 위해서만 흐름을 단절시킨다. 단절은 연결, 특히 의외의 연결을 위한 장치이다. 작품은 이러한 의외의 연결을 통해 평범한 유기체의 이미지를 벗어나, 이접(離接)이 연속되는(그래서 괴물이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정상과 이상은 정도—암세포는 한도를 모르는 세포분열을 하는 ‘생명력이 과도한’ 세포이다—의 차이일 뿐이다. 일련의 단위구조들이 이합집산 하는 형식을 보다 미시적인 차원으로 보면 세포 분열을 떠올린다. 무엇인가를 담는 서랍의 형태로 구현되는 비슷한 형태의 작은 방(cell)들은 생명공학에서의 클로닝과 유사하다. 자신을 재생산함으로서 끝없이 이어갈 수 있다는 상상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45)를 필두로, SF적인 상상력의 주요 테마가 되었다. 




웅크려 앉은 사람들(People sitting squat),120cmx50cm, fiber, sewing,2016



 입체적 드로잉-푸른 suit , 60cmx30cm, 섬유, 바느질, 2015



전시는 크게 ‘일상속의 몸’, ‘관계속의 몸’, ‘상상의 몸’으로 나뉘어져 있다. 일상과 상상 사이에 관계가 있다. 일상이야말로 상상되어야 하는 것이고, 상상의 몸체는 일상이다. 예술은 양자 간의 관계를 말한다. 가령 이 전시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작품이기도 한 [생명 트리]는 생태계와 비유될 수 있는 관계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엉덩이 모양으로 만든 계통수는 다양함을 뽐내는 각축장이다. 거기에는 황/흑/백인종을 넘어서는 무한히 다양한 스킨이 있다. 엉덩이는 인간의 얼굴이나 뒤통수만큼이나 보기 힘들다. 가장 익숙하면서도 낯선 부위가 바로 엉덩이다. 우리에게 몸은 실제이면서도 상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용과 패션은 물론, 성형과 생명공학에 이르기까지 몸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상태를 거부하고 다양하게 편집되려 한다. 생명공학의 시대에 편집은 생전에도 이루어진다. 가령 유전자 가위를 통해 편집된—대개 병을 고치겠다고 시작되지만 결국은 오용되고 남용되는—유전자로 태어나는 인간이 생겨날 것이다. 


김영혜의 작품에서 생명의 다양한 양태는 스킨의 비유가 신축성 있는 천으로 나타난다. 작품 속 몸은 천처럼 탄력성이 있다. 이분법이 해체되는 시대, 몸 또한 하나의 막으로 출렁거린다. 천은 몸을 막과 비유하는데 유용한 매체가 된다. 다이앤 애커먼은 [감각의 박물관]에서 인간의 피부가 우주복과 같다고 비유한다. 그에 의하면 몸무게의 16%를 이루고 있는 피부는 살아있어서 호흡하고 배설하며 해로운 빛과 세균침입을 막아주고 비타민 D를 합성하고 열과 추위를 막아주고 스스로를 복구하며 혈액의 흐름을 조절하고 촉각을 느끼는 바탕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성적 매력을 갖게 해주고 개인적 정체성을 규정한다. 피부는 우리와 세계 사이에 있다. 거의 모든 문명에서 피부는 색칠하고 문신하고 장신구로 치장할 수 있는 이상적인 캔버스가 되어 주었다. 김영혜의 작품에서 몸은 피부라는 옷을 입고 있다. 이 피부/천은 푹신하고 부드러운 촉감을 가진다. 그것은 피부가 무엇보다도 촉각 수용기가 편재하는 기관임을 알려준다. 




입체적 드로잉- 목욕(three dimensional drawing- bathing), 105cmx35cm,fiber, sewing, 2~


바느질 된 몸-휴식(Sewing the body), fiber, sewing, 2015



다이앤 애커먼은 촉각이 없이 사는 것은 흐릿하고 마비된 세상을 사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몸과 몸이 접촉하고 있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는 김영혜의 작품은 바느질이라는 기법 자체에 내재된 치유적 측면을 강조한다. 찢어진 것을 꿰매주고  새살을 돋게 하는 작업은 외과적인 예술이다. 다만, 예술은 의학과 달리 정상의 기준이 더 애매하다. 치유의 기준이 애매한 상황에서, 갈 때까지 가보는 식의 동종요법은 더욱 설득력이 있다. 펼치면 천처럼도 보일 피부는 표면으로서의 몸이라는 모델에 근접한다.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뫼비우스 띠로서의 몸]에서 라캉을 인용하면서, 주체를 뫼비우스 띠로 비유한 바 있다. 표면으로서의 몸이라는 모델은  몸과 마음으로 나뉜 이분법적 세계관을 거부한다. 거기에는 하나의 실재가 있을 따름이다. 기존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몸은 주변화 되었다. 그러나 표면과 이면이 연동되는 세계에서 중심은 주변으로, 주변은 중심으로의 전이가 일어난다. 


김영혜가 즐겨 사용하는 섬유라는 재료는 ‘순수예술’ 보다도 오래된 전통을 가지지만, ‘오래된 미래’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물처럼 흐르는 몸에 내재된 ‘유목적 주체’ 또한 오래된 미래로서의 주체이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유목적 주체]에서 니이체와 들뢰즈를 인용하면서, 변형의 복수적이고 항구적인 과정을 중시한다. 이러한 유목적 주체에게 목적론적 질서나 고정된 정체성은 다양한 존재로의 변신(되기)의 흐름(flux)을 위해 폐기된다. 단편으로 나뉜 단위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접합되어 있는 작품들이 바로 유목적 스타일이다. 로지 브라이토티는 이러한 유목적 주체에 내재한 욕망이라는 추동적인 개념이 그/녀의 외적 현실을 구성하는 수많은 타자들과 자아를 연계한다고 본다. 김영혜의 작품에서 유체로서의 몸은 타자와의 접촉이나 접속을 위한 유연한 인터페이스를 제공한다. 전시장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일상속의 몸’ 섹션은 샤워하는 사람이나 운동복을 입은 사람들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작품 [웅크린 사람들]은 웅크린 자세라는 특수성 때문에 머리와 사지가 생략된 모습이 자연스럽다. 




입체적 드로잉-순환하기 (three dimensional drawing-cycling),90cmx85cm, 바느질, 2012


그 옷에는 나의 몸이 찍히고(The clothes that my body was imprinted),40cmx52cm,fiber,sewi~



인종도 성도 나이도 알 수 없는 과감한 생략은 작가가 다루고자 하는 몸이 보편적인 몸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 보편성은 동질성을 가정하지 않는다. 작품 속의 가변적인 몸은 동질성보다는 이질성을 강조한다. 몸은 누구나 가지고 있기에 더욱 민감하게 그 차이를 감지할 수 있는 기준이다. 이 기준을 중심으로 정상과 비정상, 그리고 기이함이나 그로테스크가 생겨날 수 있다. 몸은 가장 보편적인 경계인 것이다. 그러나 돌도 금속도 아닌, 섬유로 연출된 몸은 이 경계가 매우 취약함을 알려준다. 김영혜의 작품에서 경계의 와해는 개체와 개체가 만날 때 이루어지기도 한다. 또 다른 [웅크린 사람들]은 웅크렸을 때 접혀지는 몸의 굴곡들이 도드라지게 표현되어 있다. 작품 [옆으로 누운 사람들]에서는 웅크린 모습의 배열이 리듬감을 자아낸다. 몸의 외곽선을 부드럽게 해주는 체지방은 충전재를 싼 천을 어떻게 바느질하는가에 달려있다. 여기에서 천은 피부처럼 작동한다. 


야광 빛의 화려한 색상의 표피가 있는 작품 [푸른색 운동복-그 옷에는 나의 몸이 찍히고]는 패션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가령 인체공학적인 스포츠 패션은 제 2의 피부로 작동하면서 몸과 일체화되곤 한다. 1초 이하를 다투는 프로 스포츠에서 옷은 몸만큼이나 전쟁터이다. 김영혜는 옷을 짓듯이 몸을 짓는다. 옷처럼 몸도 마름질 된다. 옷이 상품이라면 몸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몸이라는 자연적 소재를 다루면서도 인공적 색감이 두드러진 작품들은 몸 또한 상품 못지않은 복제의 대상임을 암시한다. 작품 [깊은 시름, 깊은 위로]는 사람들이 서로를 부둥켜안고서 위로하는 모습이다. 그것은 이해관계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세계화 시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낳은 위험사회 속에서 일상이 돼버린 풍경이다. 위험은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육신에 대한 위험이다. ‘관계 속의 몸’ 섹션에서, 깊은 포옹을 보여주는 작품 [free hug]는 서로를 위로해 주는 모습이다. 붉은 바탕에 도드라지는 인체의 실루엣에서 물방울 같은 것이 떨어진다. 




바느질 된 몸(Sewing the body), 60cmx75cm,fiber,sewing,2015



몸을 짓다



타자와의 결합을 위해 경계는 무너진다. 이러한 경계의 위반, 또는 와해는 육체적일 뿐 아니라 심리적이다. 그것은 현대 문화에서 ‘아브젝트’라는 키워드로 알려져 있는 강렬한, 이행중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어떤 계기에 의해 터져버린 몸/감정이다. 경계가 와해된 몸은 단편화되고 접합된다. 과학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지만 예술 또한 그러하다. 흘러내리는 물이 수많은 유방이 되는 작품 [다중 유방]은 몸/심리의 변형이 야기하는 기이함의 장이다. 그리드 모양의 바탕은 유기체의 변형이 야기하는 기이함이 신화적인 상상을 넘어서 현재적이거나 미래적임을 알려준다. 물/몸의 변화무쌍함은 괴물 같은 유기체 뿐 아니라 사물로의 변형을 포함한다. 작품 [몸 조각-수집된 몸]에서 몸의 조각들은 직선으로 배열된 물건같이 제시된다. 그것은 유기체라는 한계를 넘어서 얼마든지 더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에 열려 있다. 


작품 [수집된 몸 조각]에서 몸은 서랍이 되어 그 몸을 가졌을 사람이 사용했을 법한 잡다한 물건들을 담고 있다. 한도를 모르는 취미인 수집은 몸의 경계에 대한 가늠자가 되어준다.  [수집된 몸조각]은 몸이 일련의 것을 담고 있는 수용기임을 보여준다. 이 원초적 수용기는 자신이 다 소화할 수 없는 욕망으로 터져 나간 순간을 극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김영혜의 작품에서 몸이라는 수용기는 장기 대신에 물건을 담고 있으며, 그것은 물건과 호환성을 가지게 된 몸을 표현한다. 코드화를 통해 몸을 좀 더 투명하게 열어젖히는 생명공학의 시대에 그러한 교환은 더욱 용이하게 일어날 것이다. 몸과 기계의 교환 및 접합은 ‘상상의 몸’ 섹션에서 더욱 강렬하게 펼쳐진다. 작품 [수집된 몸]은 몸의 일부로 만들어진 가구로, 서랍이 열리는 수용기로서의 인체는 또한 기계로서의 인체이기도 하다. 무엇인가를 수용하는 몸/기계는 동시에 뱉어내기도 한다. 




몸과몸,이곳에 있거나 혹은 없거나1,2011



붉은 몸, 70cmx90cm,바느질, 2011



살아있는 몸은 그 자체가 무엇인가를 끝없이 담고 뱉어내는 기관이다. 몸은 물질 뿐 아니라 욕망이 흐르는 도관이다. 그 흐름이 막히면 병이 된다. 욕망에 대한 현대의 철학적 가설에서, 흐름은 목적과 기원을 가지지 않는다. 작품 [수집된 몸]은 잡다한 부스러기로 펼쳐져 있는 몸이다. 그 부품들을 조합하면 생명이 될 것이다. 사용된 물건의 흔적이 어떤 사람의 정체성을 알려주듯이 말이다. 작품 [몸 조각-무한궤도]는 어떤 힘에 의해 응집된 기계적 요소들이 자체의 자율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세계에 몸 또한 함께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몸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한 영화처럼 ‘시계태엽이 감겨진’ 유기체이다. 누군가(뉴턴에게는 신)가 그 태엽을 감아 놓았고,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리플리칸트처럼 한정된 시간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다른 작품 속에 존재하는 오래된 물건들은 진짜 인간과 가짜 인간을 나누는 기억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 또한 편집될 수 있지 않을까. 몸의 편집은 그러한 의혹을 미리 알려준다. 17-18세기의 유물론적 철학은 인간 또한 기계라는 생각을 강하게 펼쳤는데, 그 모델이 된 것이 바로 시계였다. 여기에서 인간은 자동인형 같은 존재가 된다. 김영혜의 작품에서 시계는 거꾸로 가는 것도 있지만, 방향성이 정해지면 규칙적으로 흐른다는 것은 동일하다. 시계와 하나가 된 몸은 몸이 하나의 기계로 간주됨을 보여준다. 주디 와츠맨은 [페미니즘과 기술]에서 과학사를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17세기에 들어와서 몸은 기계로, 의사는 기술자나 기계공으로 바라보는 데카르트 식 모델이 부상하여 생명 의료과학의 발전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수전 보르도도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에서, 17세기 기계론적 과학과 철학에서는 육체의 본능적인 속성은 전적으로 기계적인 것이며, 생물학적 프로그램의 체계로 완벽하게 수량화될 수 있고, 또한 이론상으로는 통제될 수 있는 것이었다고 본다. 




깊은 시름, 깊은 위로(부분),90cmx35cm,2017



free hug(부분), 90cmx40cm, 섬유, 바느질, 2017



그것은 과학과 기술을 통해 결정론적 육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포스트 모던적 상상에까지 이른다. 이러한 상상에서 몸의 물질성은 도전 받으며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조형적 패러다임이 득세한다. 그러나 아나로그 작업에 충실한 김영혜의 작품에서 몸의 물질성은 쉽게 부정되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작품은 몸이 이전의 본질주의적 사고에 비해 가변적임을 은유할 뿐이다. 작품 [생명 트리]는 몸 일부의 형태 34개를 쌓아 나무처럼 연출한 작품이다. 34라는 숫자에 어떤 상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얼마든지 줄어들거나 늘려질 수 있다. 하나의 모델로부터 나온 비슷한 형태지만 똑같은 무늬는 없다. 계층적이기 보다는 차이와 변이에 대한 찬가처럼 보이는 이 그물망은 생명이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틀로부터 복제된 관념적 산물이 아님을 알려준다. [생명 트리]는 진화의 계통수를 닮았지만, 거기에는 한 방향의 진보가 아니라, 차이와 변이로서의 진화가 있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풀 하우스]에서 진화는 한 집단이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전환을 가정하는 향상진화(anagenesis)의 개념을 거부한다. 향상진화는 사다리나 연쇄, 선형성을 나타내는 비유들로 변화를 형상화한다. 그것은 다윈의 진화에 대한 사고를 왜곡한 것으로, 신학적 사고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인류를 지고한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출현한 결정적 사건으로 극화한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중심적 사고는 인류 뿐 아니라 자연에게 많은 피해를 주곤 했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을 필요로 하지만, 자연은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실제 진화는 정교하고 복잡하게 갈라지는 가지처럼 분지진화(cladogenesis)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스티븐 제이굴드에 의하면 경향이란 하나의 길을 따라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종 분화 사건에서 다음 종의 분화 사건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복잡한 전환 또는 옆길로 들어서는 과정이다. 




 몸조각(Fragments of body) , 120cmx20cm, 섬유, 2014



몸과몸,관계망, 300cmx70cm, 2010



그에 의하면 생명의 역사에서 진보란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생명의 진보는 단순하게 출발점에서 멀어지는 무작위적인 움직임일 뿐이다. 김영혜의 [생명 트리]는 그녀의 다른 작품들처럼 더 자랄 수 있는 잠재력이 있지만, 여기에서 성장이란 하나의 중심 경향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체계적이지만, 그 체계를 이해할 수 있는 일관된 방법은 없다. 스티븐 제이굴드의 말처럼 변이(variation) 만이 의미 있는 현실이다. 그러한 생물학적 사고에 비추어 본다면, 김영혜의 작품들은 자연의 기본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변이를 표현한다. 생명을 포함한 세계를 이루고 있는 속성으로서의 변이는 예술의 귀감이 된다. 몸이라는 작가는 가장 보수적일 수 있는 주제와 바느질이라는 가장 오래된 기법을 결합시키면서, 일시적인 경향을 모두가 따라야할 전범으로 간주하는 인간 사회의 상대적 규칙에 대항하기 위해 자연의 방식을 참조한다. ‘몸을 말하다’ 전은 자연이 문명보다 더 다양함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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