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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욱 / 회화의 정원, 또는 건축학

이선영

회화의 정원, 또는 건축학

 

이선영(미술평론가)

 

전시되는 많은 작품들이 판화지 전지 사이즈의 크기로 통일감을 주는 이강욱의 작품은 마치 책의 낱장 들이 하나씩 분해되어 걸려있는 듯하다. 낱장의 종이에 하나의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그의 작품 속 검은 씨앗처럼 무엇인가 접혀 있다가 펼쳐지는 잠재성을 가진다. 잠재적인 것이 펼침을 통해 현실화된 것이 세계이다. 지적으로 무게감 있는 책들이 가득한 작업실 한 켠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작품들을 보면, 그의 작품들은 그림보다는 책(또는 책의 일부)을 연상시킨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콩테와 파스텔은 붓보다는 필기구를 쥐는 느낌이 더 강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캔버스를 대신한 종이가 그렇다. 그의 재료들은 붓보다는 손에 잡기 쉽고 그림과의 거리는 더 가까이 할 수 있다. 꽂혀있기 보다는 쌓아놓은 ‘책’이 있는 책가도(冊架圖) 풍의 형식적 틀이 깔려있는 작품들은 2016년의 개인전 작품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올해의 전시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문자도(文字圖)같은 이미지가 발견되는 것도 책가도와 같은 맥락이다. 

 

 


 160266 78x112cm 종이에 콩테 파스텔  2016

 

 

이번 전시에서 책가도의 받침대에 해당되는 것이 검은 씨앗이라고 할 수 있다. 화분은 그 씨앗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안/팎의 구별이 모호한 그의 풍경과 정물에서 대지나 바다 전체가 그러한 그릇이다. 작품 [160266]은 상징적 사물을 구축해 나가는 이전의 책가도 스타일의 작업과 닿아있다. 작은 책상을 떠올리는 수평적인 좌대 위로 접은 종이나 술병, 집모양 등이 쌓여있다. 수첩 같은 것이 전개되는 모습이 있는 작품 [무제]는 읽기가 쓰기와 연동되는 것임을 알려준다. 사람 옆모습 같기도 한 형태는 푸른색의 다양한 계열이 있다. 글쓰기/그리기란 끝없는 차이 짓기의 연속이다. 이전 작품에서 그의 책가도는 아래의 지지대 부분이 안정감 없는 것이 특징이다. 시각적 관계상, 관객 앞에 서있는 이미지가 초상이나 인체를 상징한다면, 그의 작품 속 얼굴이나 몸은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있는 것이다. 그 받침대는 종종 의자로 나타난다. 이번 전시에서도 의자라는 모티브가 발견된다. 

 

작품 [의자 160149]에서는 검은 의자 위에 무엇인지 특정하기 어려운 하얀 형태가 놓여 있다. 의자는 부재하는 자리, 인물을 암시한다. 그는 2015년 [칼과 심장] 전에서 ‘내가 사물이 되는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되기’에서, ‘카프카의 벌레인간처럼 자신을 스스로 이상하다 여기지 않았다’ 사물 및 사물의 집적은 작가 자신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의 사물들은 그와 관련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소유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되기는 갖기가 아니다. 갖기와 달리 되기는 변형을 전제한다. 변형은 갖기에 전제되는 단순한 이동과 달리 불투명한 과정이다. 만약 작품이 개인의 소유물의 재현에 한정된다면, 19세기의 리얼리즘이나 그것의 통속화된 현대적 대중문화처럼 사물들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개체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 속 사물은 20세기의 누보 레알리즘이나 프랑시스 퐁주의 사물의 시학처럼, 대상들 배후의 주체를 한정짓지 않는다. 문예사조사에서 사물, 미술에서는 오브제의 출현은 인간이나 주체의 반영 및 표현으로서의 예술을 벗어나고자 한 탈 인간주의적 전략으로부터 체택 된 것이다. 

 

 


 무제 37x51.5cm  종이에 콩테 파스텔 2016

 

의자 160149 36.5x56cm 종이에 콩테 파스텔 2016

 

 

‘사물의 밤’(2016)전에도 출품된, 원통 위에 중심을 잡고 있는 호랑이가 있는 작품 [호랑이]는 작가 얼굴을 많이 닮았다. 꺽인 허리에도 불구하고 위풍당당한 꼬리는 작가적인 자존감을 강조한다. 이강욱의 작품에서 받침대의 다리는 4개 인 것이 드물고 뾰족한 것, 심지어는 식물의 잎 같은 형상이 지지대가 되고 그 위로는 많은 것들이 쌓여있어 조그만 충격에도 앞으로 쏟아질 것 같은 구도가 특징적이었다. 마치 브라크와 피카소가 3년 정도 함께한 입체파의 실험처럼, 테이블 위에 가득 올려놓은 물건들은 원근법이 아니라 손으로 만져질듯한 공간감을 보여준다. 미술사에서 이러한 추세는 회회가 회화로 성립되기 위한 바탕을 다지는데 도움을 주었다. 콩테와 파스텔을 손으로 비벼서 만들어내는 미묘한 색감으로 채워진 바탕 면은 평면적이면서도 공기의 느낌을 품고 있다. 그의 작품은 모더니즘의 미학적 이데올로기에 갇히지 않고 실재와 조형언어와의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세잔같은 초창기 모더니스트처럼. 

 

철학자 메를로 퐁티는 [세잔의 회의]에서 세잔은 리얼리티에 이르기 위한 수단을 포기한 채 리얼리티를 추구했다고 평가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연과 예술을 통일 시키고’(세잔) 싶어했다. [세잔의 회의]에 의하면, 세잔의 작품이 더 이상 자연과 1대 1의 대응관계가 아닌, 캔버스는 각 부분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상에 대한 보편적 진실, 즉 우리가 사물을 대할 때 받는 인상을 회복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분위기를 묘사하고 색조를 깨뜨림으로서 대상은 침몰하게 되며, 대상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중량감을 상실하게 된다. 세잔은 원근법이 아닌 색의 겹침으로 원근감을 표현했다. 시간의 축을 따라 전개되는 현실은 일시적이다. 근대의 화가는 그러한 일시성을 화면에 반영했지만, 인상주의가 그러했듯이 현실이 조형언어로 휘발되는 단점이 있었다. 세잔이 고민했던 것은 현대적 유동성과 고전적인 안정감의 조화였다. 

 

 


 호랑이, 75x105cm 종이에  콩테 파스텔 혼합물감 2016

 


 검은산 흰산 78x112cm 종이에 콩테 파스텔 수성물감  2016

 

 

이강욱의 작품에서의 안정감은 20세기 초반 세상을 기하학적으로 본 세잔을 따라 구성주의자들이 썼던 용어인 ‘회화적 건축학’(류보프 포포바)에 있다. 기하학적 요소간의 조합은 쌓기를 거쳐서 흐름으로 변화한다. 구성주의 이후의 흐름에서와 같이 이강욱의 작품에서 기하학적 요소들로의 환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그가 선택한 사물에 있다. 사물은 대상이나 상품과 달리 환원을 거부한다. 만약 어떤 사물이 환원이 된다면, 그것은 철학적 주체에 대한 대상이고, 자본주의 소비자에 대한 상품일 것이다. 그것들은 명확한 기능(의미)와 가격을 가진다. 사물은 대상이나 상품에 비해 보다 많은 겹을 가잔다. 사물은 자연의 두툼함을 지향하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래된 사물 역시 같은 효과를 가진다. 장욱진 화백을 좋아하는 작가에게 때로 어린 아이같은 천진한 화법은 모더니즘 발생기의 초심을 유지하도록 한다. 화면의 쌓여있는 사물들은 그림이 아니었다면, 결코 그렇게 하나의 덩어리처럼 응집(구축)될 수 있는 자명함을 가지지 않는다. 

 

한 사물을 이루는 선이 다른 사물의 이루는 선이 되면서 그것들은 하나가 되지만, 이러한 유동성은 물리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스케일의 조작은 빈번히 일어난다. 그것들은 그 중에서 뭐 하나를 빼면 우르르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움을 준다. 비수같은 파초의 이파리와 부드러운 꽃잎이 공존하는 ‘꽃과 불’ 전도 그렇지만, ‘칼과 심장’(2015년 전시부제)같은 극단적인 이미지의 조합은 절제된 색과 형태가 조합된 화면에 필수적인 균형감각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작가는 작은 지지대 위에 실내에 있을법한 사물은 물론, 집도 올려놓고 섬도 올려놓는다. 올해 전시에서는 물건을 놓는 바닥에 해당되는 기저 면이 지평선이나 수평선으로 전치되어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는 정물을 풍경처럼, 풍경을 정물처럼 그린다. 초창기 모더니즘에서 이러한 전략은 조형언어의 자율성과 실재감을 동시에 충족시키려는 화가들의 선택이기도 했다. 자족적인 완결 감을 가지는 이강욱의 작품에서 자연은 배제되지 않는다. 

 


 멀리보이는 흰산 76x112cm 종이에 콩테 안료 파스텔  2017

 


 오른 손에 핀 꽃37x51.5cm 종이에 아크릴 콩테 파스텔  2017

 

 

칸딘스키같은 초창기 추상화가들은 풍경화에 주로 쓰이는 수평선마저 자연을 연상시키기에 배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강욱의 작품에서는 수평선, 지평선이 자주 등장한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 역시 평면성, 즉 추상성이 있다. 재현주의와 달리 평면적인 화면에서 빛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체 발광적인데, 그의 색감이 그러하다. 자연인가 인공인가 어느 하나만 선택하면 답은 쉽다. 그러나 그 사이(관계)가 중요하고 초창기 모더니스트들의 고민과 해법도 그래서 높이 평가받는다. 메를로 퐁티는 [세잔의 회의]에서 (세잔에게서) 대상은 반사광에 의해 가려지거나, 대기나 다른 대상들과의 관계 속에서 소멸되어 버리는 일이 없었으며, 마치 내부에서 은밀하게 빛이 비춰 빛이 대상에서부터 발산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결과적으로 입체성과 질료성의 인상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세잔이 여러 번 그렸던 [생 빅트와르 산]은 사과를 배열해 놓은 정물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그려져 있다. 

 

하늘 색 바탕에 층층이 놓인 물건들을 보여주는 작품 [검은 산 흰 산]에서 작가는 튼실하지 못한 좌대 위에 서울 와서 매일 산책하던 성북동 뒤의 북한산과 불타는 집을 올려놓았다. 작품 [멀리 보이는 흰 산]은 인근의 산을 생각하며 그렸지만, 섬이 되어버린 풍경이다. 섬이나 산은 그가 있었던 곳과 관련된 곳이다. 그곳은 현대를 규정짓는 스펙터클이나 추상적 공간이 아니라, ‘심리지리(psychogeography)’(기 드보르)적인 공간이다. 작년 전시에도 그런 작품들이 몇몇 끼워져 있는 만큼, 1년 사이에 서서히 변화하고 있는 과정이 보인다. 작품은 작업이 아니고서는 잘 포착되지 않는 주체의 변화를 알리는 지표가 된다. 작업은 일상의 시시콜콜한 것을 담은 그림 일기같은 것이 아니어도, 통상적으로 간과되기 쉬운 순간들의 섬세한 기록이다. 만약 작가가 어느 기간 동안 그러한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면, 다시 작업을 하는 순간 잃어버린 시간 찾기를 해야 할 것이다. 

 

 


 식물 170310 37x51.5cm 종이에 먹 콩테 파스텔  2017

 


 170327 56x76cm  종이에 먹 콩테 파스텔  2017

 

 

‘잃어버린 시간 찾기’(프루스트)의 과정은 우연의 연속이다. 기억을 활성화하는 최초의 자극—프루스트의 경우에는 향기—부터 우연적이다. 우연은 거짓된 필연성이 지배하는, 점점 체계화되어가는 현대사회의 대항 논리로 중요시되었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현대조각사]의 마지막 부분에서 프루스트를 인용한다. 프루스트에 의하면 예술은 ‘지성의 한계를 넘어선 어떤 곳에, 그리고 어떤 물질적 대상 안에(혹은 그러한 대상이 우리 안에 불러일으키는 감각 안에) 명백히 존재한다. 그러한 대상과의 만남은 전적으로 우연에 맡겨져 있다’ 잃어버린 찾기에서 필요한 것은 다양한 울림을 주는 사물의 존재이다. 오래된 예술품도 그러한 사물에 속한다. 그것은 사물처럼 끝없는 해석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전통 민화에서의 책가도는 책과 책 주변의 문방구등이 함께 있는 일종의 정물화라고 할 수 있지만, 이강욱의 작품은 정물은 물론 풍경을 포함한다. 화분들이 놓인 작은 안마당부터 저 멀리에 있는 어떤 섬까지, 작은 의자부터 지평선 위의 별자리까지. 

 

특히 화분에 있는 식물이라는 소재는 유기체가 자라듯이 전개된다. 작품 [오른 손에 핀 꽃]은 작가의 상징인 손에 식물이 자라는 모습이다. 생손을 앓는 듯한 이 이미지는 작가를 양분삼아 자라나는 잔인함이 깔려 있다. 손바닥의 선들은 손금이 아니라 날카로운 식물의 모서리로 베어낸 듯하다. 이번 전시에서 식물의 이미지는 편재한다. 작가는 식물로부터 도상과 상징을 끌어오지만, 그것은 변형을 위한 것이다. 그는 식물에게서 어떤 구체적 모델을 참조한 것이 아니라, 변형의 과정만을 취했다. 실제 식물과 다른 점은 그의 작품은 씨앗으로부터 무엇이 나올지 예측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작업이란 주체의 자연스러운 활동의 소산이지만, 자연 그자체는 아니다. 예술이 제아무리 ‘무위자연’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작업이 아니고서는 결코 세상에 나올 일이 없는 것이 바로 예술 작품이다. 작업이란 점하나 찍고 줄 하나 치는데도 심신의 공력이 많이 투입되는 고도의 에너지 집약적 활동이다. ‘꽃과 불’은 작업할 때 과도하게 예민해지는 자신과의 화해를 암시하는 부제라고 말한다. 

 

 


 줄기 식물 75x106cm 종이에 아크릴 콩테 파스텔  2017

 


 식물도 76x112cm 종이에 콩테 안료 파스텔  2016-2017

 

 

작업이 고도의 집약적 활동이라고 해서 노동은 아니다. 작업은 자연과 노동 사이 어딘가에 있다. 작업은 자연과 달리, 그리고 노동과도 달리, 콩 심은 데서 팥이 나와야 한다. 그는 2016년 [사물의 밤] 전에서 ‘오늘의 사물이 내일의 사물과 같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작가노트에 적어놓은 바 있다. 이강욱의 식물은 분지되는 방향마저 이상해서 모가지가 꺽인 같기도 하다. 그의 식물이미지는 한곳에 뿌리를 내리는 수직적 이미지보다는 수평적으로 확장하는 리좀을 닮았다. 거기에는 나무와 같은 질서정연한 계보가 없다. 나무 같은 이미지의 계보학은 역사학에서 전형적이다. 그러나 이강욱의 작품에도 시간성이 깔려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가 아닌 고고학의 시간성이다. 고고학은 역사와 달리 불연속적이다. 역사와 주체가 주를 이루는 관념적 인문학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던 미셀 푸코는 고고학으로부터 영감 받아 [지식의 고고학]을 쓰기도 했다. 

 

역사 특히 관념화된 역사는 역사주의 이데올로기가 되어서 단선적 진전을 가정하지만—메를로 퐁티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말하듯이, ‘시간은 줄이 아니라 지향성들의 망’이다—고고학은 불현 듯 드러나는 시간의 단면과 관련된다. 이강욱은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젊은 시절 그에 관련된 일을 잠시 하기도 했다. 고고학적 시간의 단층이 공간화 된다면 그것은 뿌리가 아닌 뿌리줄기인 것이다. 이 리좀적 식물은 한 줄기에서 여러 종의 꽃들이 피어나기도 한다. 뿌리는 아예 생략되기도 한다. 줄기의 방향은 제각각이다. 작품 [식물 170310]은 한 화분에서 자라난 여러 꽃이 펠릭스 가타리의 [카오스모제]에 나오는 주요 개념처럼, ‘이질발생(heterogenesis)적’이다. 영화로 치면 몽타주적이다. 작품 [170327]에서는 검은 꽃에 하얀 잎 등 서로 다른 것이 피어나는 화분을 보여준다. 바탕에 찍힌 다수의 분홍얼룩처럼 이접의 상황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161701 76x112cm 종이에 콩테 안료 파스텔  2016-2017

 


 숲 너머 76x112cm 종이에 콩테 파스텔  2017

 

 

작품 [줄기 식물]은 뿌리가 없이 머리만 여럿인 식물 이다. 검은 머리, 하얀 머리, 푸른 머리 등등. 푸른색 바탕은 뿌리줄기의 이미지를 표류와 연결시킨다. 표류하는 뿌리들이 뿌리줄기인 것이다. 포자처럼 이곳저곳으로 날아가 발아하기도 한다. 작품 [식물도]는 물속을 떠도는 듯한 씨앗을 보여주는데, 여기에서 발생한 것은 부드러운 꽃의 실루엣과 날카로운 잎을 한 몸에 갖는 괴물 식물이다. 포자의 이미지는 대전에서 주로 작업하고 대안공간에서의 기획 활동을 하다가 제주도로, 다시 서울로 온 삶의 궤적을 반영하는 듯하다. 그는 2003년 첫 개인전 이래, 10번 이상의 개인전을 했지만, 본격적인 작업은 2014년부터라고 말할 정도로 요즘 작업에 의욕적이다. 어떤 작가에게도 기복은 있다. 이미 그 내부에 주름을 접어 넣고 있는 포자들은 적절한 상황에서 펼치고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다시 접을 것이다. 마치 열매처럼도 보이는 커다란 검은색 씨앗은 검은색은 모든 색의 총합이듯, 풍부한 잠재성으로 남아있다. 

 

지상과 지하를 동시에 보여주는 듯한 작품 [161701]에서 지면 아래에 검은 덩어리 두 개에서는 푸른 꽃과 칼 같은 잎 새가 돋아난다. 작품 [숲 너머]에서 검은 타원형에서 자라나온 검은 꽃을 보여준다. 계속 가지를 친 듯한 형태에는 머리 여럿 달린 괴물이 연상된다. 이강욱의 작품에서 검정은 최소한의 선택에 최대한의 것을 담을 수 있는 가능성의 색이다. 이전 작업에서 지배적이었던 검정은 2014년 제주도에서의 작업 때부터 변했다. 그는 거기에서 빛과 색을 다시 발견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검정은 최근 작업에도 빛과 색이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어두운 바탕에서의 색(빛)의 움직임은 더욱 조심스러워야 할 것이다. 이 덩어리에서 무엇이 어떻게 어떤 순간에 나올지는 작가 스스로도 확신하기 힘들다. 자의와 자유, 고통과 열락을 넘나드는 작업의 세계이다. 훌륭한 책/작품은 지금 여기를 벗어나 이곳저곳, 이 시간 저 시간을 넘나들게 한다. 요즘 유행어로 유목하게 한다. 그의 작품 속 비행기처럼 말이다. 

 

 


 밤을 지나는 비행기 56x76cm 종이에 아크릴 콩테 파스텔  2017

 


 170329 52x75cm  종이에 아크릴 먹 콩테 파스텔  2017

 

 

작품 [밤을 지나는 비행기]에서 작은 비행기는 불타는 듯한 배경—작가는 도시 불빛에 비친 밤은 검정이 아니라 와인색에 가깝다고 말한다—통과한다. 날고는 있지만 정지된 듯 안정된 십자 구도의 작품은 이동이 제자리에서의 이동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독서나 그림 그리기가 그렇듯이 말이다. 검정을 많이 사용했던 이전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밤처럼 어두운 배경은 자주 나타난다. 작품 [170329]에서 한 줄기에서 나온 다양한 식물의 이미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원초적 혼돈을 암시하는 어둠을 바탕으로 한다. 여기에서는 무엇이 어떻게 나오든 이상할 것이 없다. 검정은 모든 색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별들의 밤]에서 지평선 위에 흩어진 별들을 이어서 하나의 자리로 만드는 것은 밤하늘이다. 일정한 크기의 종이위에 그려진 그의 작품은 책의 낱장을 떠올리지만, 그것은 책들을 묘사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이야기의 삽화도 아니며 장면들 간의 연속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만약 책이라는 형식에 담겨있는 어떤 이야기라면 산문이기 보다는 운문일 것이다. 이강욱의 작품은 추상화는 아니지만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간극들이 있다. 

 

그림이 들려줄 이야기는 이 건너뜀 속에서 발생할 것이다. 말이나 문장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여백이 필요한 것이다. 그는 이번 전시의 부제는 ‘꽃과 불’이라고 지었다. 식물은 동물과 달리 차갑지만 불처럼 피어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꽃은 이동하기 힘들지만 불처럼 전염될 수 있다. 꽃과 불은 작업과 소통과정에 대한 비유로 다가온다. 이강욱에게 작품/작업이란 ‘꽃이면서 불인 것’이다. 이전 작업에서 꽃/불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사물이었다. 책, 두루마리, 술병. 집 등. 이번 전시에서는 식물 이미지가 강하다. 작품 [160226 흰 꽃]은 마치 원고지처럼 보이는 하얀 선들 앞에 화분이 있는 이미지이다. 하얀 꽃 위의 제멋대로 꼬인 노란 선은 드로잉의 자유로움을 드러낸다. 드로잉은 식물처럼 발아하고 자라고 시든다. 식물은 책과 어울린다. 꽃/불은 사물보다는 유기체적이다. 좀 더 섬세하고 좀 더 취약하다. 그러나 못으로도 뚫기 힘든 나무의 두터운 표피를 뚫고 나오는 것이 부드러운 어린잎이다. 식물은 약하면서도 강하다. 식물이 강함은 때가 된 순간에 발휘된다. 

 

 


 별들의 밤  37x51.5cm 종이에 아크릴 콩테 파스텔  2017

 

 
160226 흰 꽃 57x76cm 종이에 콩테, 파스텔, 수성물감 2016

 

 

예술이 식물과 비교되는 것은 단순한 무력감이 아니라, 바로 그 ‘때’에 대한 감각일 것이다. 작가는 화초를 가꾸듯이 그 때를 기다린다. 화훼업자들은 출하시기를 생각해서 개화시기를 인위적으로 조정하기도 하지만, 예술은 농사보다 변수가 많다. ‘한 번에 잡으면 끝내는’ 작업은 회화보다는 드로잉에 가깝다. 전체적인 방향은 있지만, 과정은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는 일단 그린다음에 생각한다. 생각하고 그리기가 때로 관념성으로 빠지고, 그것이 관념적인 한 동일성의 논리에 함몰되기 쉽다면, 그 반대 방향은 생각지 못했던 이질적인 것들이 나오는 것은 물론, 작업을 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한다. (무)의식적으로 그려진 것들을 통해 나를 분석하고, 내가 속한 사회와 세계를 분석한다. 물론 예술 작품은 뭔가를 분석하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반성적 계기가 포함되어야 한다. ‘사물의 편’(프랑시스 퐁주)에 서있는 이강욱의 작품은 침묵하는 편이지만, 그 침묵은 때로 ‘표현의 광란’(프랑시스 퐁주)을 낳고, 관객들이 끌어낼 이야기가 많은 영양가 있는 침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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