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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n Black 전 / 색의 비밀이 담긴 블랙박스

이선영

색의 비밀이 담긴 블랙박스

 

이선영(미술평론가)

  

블랙 이라는 코드가 심어 있는 Black’n Black 전은 블랙을 둘러싼 다양한 상징적 의미와 형식적 시도들이 얽혀있는 전시이다. 블랙은 많은 색이 더해짐으로서 만들어지기에 그만큼의 많은 색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블랙’에 집중하는 작품들은 블랙이 가질 수 있는 의미의 최대치를 지향한다. 블랙은 연금술의 화로처럼 많은 것을 끌어 들이며, 외연보다는 내포에 충실하다. 블랙은 진한 내포를 위해 외연을 한정짓는다. 이러한 한정은 빈곤이나 한계이기 보다는, 실험이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이 된다. 수많은 색의 얽힘인 블랙에게서는 그만큼 뽑아낼 수 있는 개별적 내용과 형식이 잠재해 있다. 이 전시는 이러한 잠재성을 현실화하고자 한다. 다양한 세대에 걸쳐 있는 참여 작가들인 오윤석, 김명진, 김범중, 최상철은 그동안 밀도 있는 작품들을 선보여 왔다. 오일스틱, 목탄, 먹, 아크릴, 연필 등 다양한 매체로 만들어진 검은 작품들은 감춰진 것을 통해 드러낸다. 




오윤석, hidden memories-black, 130x200cm, paper, pastels, charcoal, pencil on panel~



이 전시는 자신의 색을 현란하게 내보이기보다는 감추려해도 감춰지지 않는 최소한의 것만을 드러낸다. 블랙은 이러한 역설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름붙일 수 있는 색은 색이 아니라는 시적 언명도 있지만, 분류와 명명은 인간사회의 규칙이다. 예술 또한 이러한 규칙에 걸쳐있다. 그러나 규칙이 더 이상 규칙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 변화는 일어난다. 이른 바 패러다임의 혁명이다. 이때 코드화되지 않은 자연은 풍부한 참조점이 되어준다. 그런데 자연에 블랙이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어왔다. 자연에 대한 열렬한 관찰자였던 인상주의자들이 그런 질문을 했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검정도 색인가?’라고 물으면서, 검정은 모두 50가지라고 밝힌다. 그에 의하면 가장 검은 검정은 검은 벨벳이다. 이보다 더 깊은 검정은 빛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우주 공간에 있다고 한다. Black’n Black 전에서의 블랙은 다양한 재료의 재질에 색감의 변화 또한 추가한다. 미술사적으로 보자면, 근대미술의 출발점에 있었던 인상주의는 블랙을 ‘모든 색의 부재’, 그래서 색이 아니라는 판정을 했다. 


에바 헬러는 굳이 ‘블랙이 색이냐’고 묻는다면 무채색이라고 대답하겠다고 한다. 다양한 색채가 쏟아지는 듯한 그림을 그리고자 했던 인상파는 블랙을 회피했고, 검게 칠해진 사각형은 이전의 재현주의 전통을 끝장내려는 선언문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사회적으로 보자면 얼마 전의 구정권에서 ‘블랙리스트’ 사건이 있었다. 투명해야 할 공권력을 사유화했던 어둠의 세력은 촛불에 의해 물러났다. 여기서 블랙은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는 억압적이며 권위적인 비밀을 상징한다. 이때 블랙은 사물의 특성을 가장 나쁘게 이야기하는 부정적 표현이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여러 가지 예를 든다. ‘남에게 흑칠을 한다’는 남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한다는 뜻이다. 못된 사람은 ‘검은 양’이라고 불린다. 그 밖의 예를 더 옮겨 쓰자면, 모든 것을 ‘검정 바탕에 검정으로’ 그리는 사람, 언제나 ‘검게 보는’ 사람은 비관론자이다. 



김명진, 연못 깊숙이_캔버스위에 한지,먹,안료,한지콜라주,162x130cm,2016



섬뜩한 웃음을 짓거나 범죄나 질병, 죽음을 재미있게 여기는 사람은 ‘검은 유머’를 가졌다고 한다. ‘검은 날’에는 불행한 일이 생긴다, 등등. 무엇보다도 블랙으로 대변되는 어둠은 이성의 밝음과 비교되었다. 미셀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이러한 진리를 시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인간과 광인은 상호적이면서도 양립할 수 없는 진실의 만질 수 없는 끈으로 이어져 있고, 어둠은 빛을 불러들였지만 빛은 어둠을 찢어 놓았을 뿐 만 아니라 어둠의 그토록 참혹한 모습을 드러나게 했는데, 이제는 각각의 빛이 스스로 탄생시킨 밝음으로 인해 꺼지고, 그리하여 어둠 속으로 되돌아가기에 이른다....’  [광기의 역사]가 암시하듯, 모든 이항 대립적 사고의 끝과 끝은 이어진다. 뫼비우스적인 유연한 사고에서 부정은 긍정으로 전화될 수 있다. 블랙으로 대변되는 밤-잠-꿈-무의식의 세계는 백주대낮의 세계를 지배하는 합리적 이성의 세계만큼이나 중요하다. 낭만주의자들은 고전주의자들과 달리 어둠의 세계를 선호했다.


인간은 잠을 잘 수 없으면 사고는커녕 생존조차 위협받는다. 이러한 대조적 목록들이 비서구 문화권에서도 공유될 수 있는 것은, 색이 관념에 기반 하는 어떤 고정된 진리가 아니라, 실제의 경험에서 나오는 감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근대의 기능주의는 보편적으로 경험되는데, 기능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블랙은 객관성을 상징해왔다. 에바 헬러는 근대 디자인을 특징지었던 기능주의를 ‘복잡한 장식이나 쓸데없는 무늬, 색을 포기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유채색을 포기하면 객관성과 기능성에 대한 요구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색은 사라질 때 기술은 전면에 나설 수 있다. 존 하비는 [블랙 패션의 문화사]에서 블랙이 의상과 결합했을 때 그것은 ‘현세에서의 금욕주의’(막스 베버)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블랙은 작업활동 외에 모든 것을 자제해야 하는 작가의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다. 초상화의 전통에서 인물을 돋보이기 위해 종종 검은 색 옷을 입곤 했다. 이는 작가가 초상사진을 찍을 때 검은 옷을 즐겨 입는 이유가 될 것이다.



김범중, Eigen Frequency  2015 160x112cm pencil on Korean paper



블랙 계열의 작품이나 사물은 피상적인 것들을 거둬들이고, 본질에 집중하도록 한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검은 양복 뒤에 자신을 감추는 현대사회의 관료적 익명성과도 무관치 않다. 예술에서는 작품이 곧 자신으로 간주되곤 하지만, Black’n Black 전의 작품에는 작업 이외에 그들의 일상이나 삶의 흔적이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작업이란 기성의 언어로 자신에 대해 말하기가 아니라, 보편적 언어에 상응하는 구조를 조형적으로 다시 짜면서 드러나는 또 다른 정체성이다. 이러한 구조적 방식은 주체를 익명화하거나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특수한 언어들은 현대미술의 악명 높은 소통불가능성을 낳곤 했다. 그러나 예술의 특수한 언어는 타성화 되어 더 이상 실제적 기능을 하지 못하는 형식적인 소통에 대한 대안의 소통을 만들 수 있다. 첨단 기술이 소통의 외연을 확장한다면, 예술은 내포를 책임진다. 이 전시의 네 작가의 블랙은 각기 다른 울림을 낳는다. 


무엇인가 그 안에 그려져 있다는 것만을 암시한 채 검정 오일스틱과 목탄으로 깡그리 지워버린 오윤석의 작품은 기억과 망각의 관계에 있어서 블랙의 압도적인 밀폐력을 활용한다. 그러나 작가의 행위의 궤적이나 이전 층의 가장자리는 남아있다. 이전의 것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흔적을 남긴다. 그에게 작품은 자족적인 우주가 아니라 수행의 결과이다. 그것은 해방을 요구하는 억압—또는 억압을 요구하는 해방—이다. 김명진은 먹으로 우주적 암흑을 표현한다, 신비와 우울을 함축하는 깊은 어둠은 빛 또한 내포한다. 먹으로 얼룩진 하얀 종이는 가늘게 썰려 붙여지며 깊은 어둠 속을 이리저리 횡단한다. 횡단의 궤적들은 여러 형상을 낳는다. 빛줄기 같은 선은 암흑 속에 끊어진, 그러나 끊어져서는 안 되는 관계망을 표현한다. 이러한 관계망에는 모빌 같은 소박한 장난감부터 절대적 타자(신)까지 포함된다. 




최상철,[無物 12-9], 162.2x130.3cm, 캔버스에 아크릴, 2012



김범중은 모든 사물, 즉 우주에 내재한 고유 진동수를 연필로 표현한다. 소리를 시각화하는 작업이기도 한 진동의 표현은 표면은 물론, 표면 위까지 물질화 된다. 그의 블랙은 정밀한 것을 기록하기 위한 필기구 같은 중성적인 색이다. 빠른 속도가 정지의 느낌을 낳듯이, 계속 진동하기에 멈춰진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과정은 사물 내부에서 작동하는 미시적인 것이지만, 그리드 구조로 상징되는 억겁의 계열을 관통하면서 우주적 차원까지 확장된다. 최상철은 자연과 최대한 가까워지려 한다. 그에게 예술은 자연을 추체험할 수 있는 실험의 장이다. 그는 자연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처럼 그린다. 자연을 베끼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따라 그린다. 이때 붓이라는 전형적인 예술적 도구는 물감을 갤 때 이외에는 사용되지 않는다. 자연이 수행하는 게임을 재현하기 위해 작가가 만들어 놓은 판 위에 무작위로 떨어지는 선, 끈, 구르는 돌멩이가 붓을 대신한다. 그에겐 자연이 출발했던 원초적인 지점에 블랙이 있다.    

  


오윤석-흙 같은 블랙     


오윤석의 작업 소재 중의 하나는 종교적인 경전이나 고전적 텍스트이다. 훌륭한 소재를 쓴다고 해서 작품이 자동적으로 훌륭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예술 또한 종교나 학문 못지않은 헌신적이고 몰입적인 활동이라면, 기왕이면 의미 깊은 소재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특정 소재는 그에 어울리는 특정한 방법을 뒤따르게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업은 예술 고유의 자유로움보다는 엄격한 수행이나 수련 등으로 해석되곤 했다. 그가 선택한 텍스트가 무엇이건 간에, 문자가 용이하게 읽히기 위해서는 밝은 바탕에 진한 선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렇기에 블랙은 작가가 가장 많이 접하고 활용했던 색이었을 것이다. 비록 조형적 차원의 텍스트에서는 최초의 투명성이 사라진다 해도 말이다. 최근 작업의 키워드인 ‘감춰진 기억’이나 ‘물질적인 정신’은 텍스트의 투명성과는 거리가 있다. 읽기 위한 것이든 보기 위한 것이든 그의 작업은 마치 사경(寫經)을 하는 사도와 같은 진지한 자세로 임할 것을 요구한다. 




오윤석, Hidden memories-01, 190.5x140.5cm, oil stick, charcoal, acrylic, paper on p~



오윤석, Hidden Memories-text 1609, 45x41cm, hand-cutting, ink, acrylic, paper, canv~



그러나 이번 전시의 출품작 [Hidden memories-01]은 그간의 작업 스타일인 조밀하고 정밀한 방식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오일 스틱과 목탄 등 다양한 매체가 사용된 이 작품에는 뭔가를 빡빡 지운듯한 행위의 흔적이 검은 표면 위에 남아 있다. 보다 느슨한 외곽과 달리 가운데 부분에는 한줄기 빛(색)도 새어 나와서는 안된다는 강박증 마저 보인다. 사경 스타일의 작업이 주로 눈과 손만 움직인다면 지우기, 또는 망각의 행위는 보다 과감해서 온몸을 투척해야 한다. 시각에서 전신으로의 방점 이동이다. [Hidden memories-01]은 정성껏 만다라를 그려 놓고 마지막에 허물어버리는 듯한 과정이 있다. 일종의 해체작업인데, 서양의 해체주의가 (재)구축 과정에 다름 아닌 정교한 이성적 작업의 결과라면, 오윤석의 방식은 보다 야성적이다. 


그의 블랙은 모든 질서를 거부하는 ‘아나키스트의 깃발’(에바 헬러)이나 하나의 색으로 덮어버리려는 ‘파시즘’(존 하비)같은 과격함도 느껴진다. 그의 작품에서 블랙은 망각의 역할을 맡는다. 그의 작품은 하얀 바탕에 검정 칠을 한 것이 아니다. 망각/기억되는 것은 한 겹이 아니라 여러 겹이다. 블랙은 그러한 지층들을 뒤덮는 또 하나의 강력한 층이다. 망각으로 단순하게 표현될 수 있는 ‘숨겨진 기억들’은 꼭꼭 숨겨져 있다. 고전 텍스트들로 대표되는 깨알 같은 기억들이 ‘창조적 망각’(니이체)으로 대체된다. 재현에 필요한 거리는 사라지고, 작품은 행위의 궤적을 받아낸 장이 된다. 그의 작품에서 망각과 기억은 한 몸의 두 얼굴이다. 새로운 기억이 생겨나려면 어떤 것은 망각되어야 한다. 그러나 텍스트의 세계에서 완전한 출발이 없듯이 완전한 망각도 없다. ‘감춰진 기억’은 언제 다시 발굴될지 기약 없이 검게 덮여간다. 이때 블랙은 흙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전의 것들이 죽은 잔해이자 흔적인 흙은 또 다른 생명의 출발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김명진-어둠처럼 편재하는 블랙


김명진의 그림에서 깊은 어둠을 가능하게 하는 매체는 먹이다. 먹이 하나의 색으로 환원할 수 없듯이, 그가 여러 재료들로 연출한 블랙 또한 그러하다. 찢거나 오린 한지가 가세하면서 어둠은 더욱 깊어진다. 색상이나 명암은 그 자체 보다는 대조어법에 의해 보다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서 동양화 전통의 여백은 선이 되었고, 여백을 가르는 검은 선은 바탕이 되는 역전이 일어난다. 서커스나 카니발 같은 뒤집혀진 세계에서 장난감이나 인형 같은 형상이 무대의 전면을 차지한다. 꼴라주한 종이는 그 자체가 먹이 묻어있어서 붙이기에 따라서 얼룩덜룩한 효과를 준다. 그의 작품에는 전형적인 동양화의 방식이 아니면서도 먹에서 발현되는 검정의 다양한 계열이 있다. 그의 한 작품 제목처럼 ‘연못 깊숙이’에 있는 깊은 어둠부터 빛에 가까운 밝은 선까지 말이다. 김명진의 깊은 블랙은 종교적 금욕이나 신비, 염세주의와 종말 등을 떠올린다. 



김명진, 다른 나라에서_캔버스에 한지,먹,안료,콜라주,162x130cm,2016-2017



김명진, 사람의 아들_캔버스에 한지,먹,안료,콜라주,72x60cm,2016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나는 얼룩덜룩한 꼴라주는 어디선가 떨어져 나와 어디엔가 붙은 것으로 화면의 수수께끼를 가중시킨다. 표면적으로는 모빌이나 인체 같은 대상이 떠오르지만, 모빌은 사람 같고, 인체는 자동인형 같기도 하다. 사물과 인간의 관계는 수시로 바뀐다. 마치 흑백이 반전된 그의 작품처럼 말이다.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것은 O, X 처럼 뭔가를 분명히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작품 [다른 나라에서]는 위가 원뿔형인 모빌의 실루엣이 마치 뾰족 모자를 쓴 인체 같다.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갈래 진 빛들이 모여 형태를 만든다. 바탕의 깊은 어둠은 가늘게 매달린 선들을 돋보이게 하면서도 위협한다. 작품 [사람의 아들]은 권좌에 앉아 있는 사람 같지만 편안치가 않다. 전기의자에 앉아 있는 듯 괴기스럽고 고통스러운 모습이다. 거기에서 뻗어 나오는 선들은 히스테릭하다. 그는 신의 유사물이지만 신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의 아들’인 것이다. 


신은 부재하거나 어둠 속에 숨어 있다. 온통 세계를 검게 표현한 세계관을 낳은 역사의 비극들을 떠올려 본다면, 신은 세상을 창조한 후 그것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숨은 신’(루시앙 골드만)은 신의 위상이, 더불어 신과 닮은 인간의 위상이 추락한 시대의 비극을 함축한다. 작품 [연못 깊숙이]에서 여러 크기의 동그라미를 연결해주는 사선들은 어디에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블랙으로 나타나는 우주적 심연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장소가 아니다. ‘연못 깊숙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지상의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 톱니바퀴처럼 촘촘한 망은 우연과 연관된 필연성을 떠올린다. 칠흙 같은 심연은 여러 가지 힘의 역학관계로 복잡하지만 조화롭게 굴러간다. 그러나 전능한 존재의 힘으로 가능할 조화가 계층화된 만물의 연쇄 망을 통과하면서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비밀에 붙여진다. 여기에서 블랙은 비밀의 봉인으로 다가온다. 

  


김범중-정류(整流)하는 블랙


한지 위에 연필로 드로잉 한 김범중의 작품은 뭔가 한 꺼풀이 벗겨진 피하 층처럼 섬세하다. 그리고 취약하다. 그것들은 매끄럽게 그려진 이미지라기보다는 표면을 뾰족한 것으로 긁어 생긴 상흔들이다. 이러한 민감한 표면 때문에 그리드 구조를 바탕으로 하는 질서정연한 형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안정감이 부족하다. 그의 작품에서 배경과 대상은 질적 차이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배경의 일부가 변형되어 전면에 나서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마치 꺼짐과 켜짐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계처럼 말이다. 최초의 명료한 분석과 분류의 틀은 점차 시간의 두께를 거쳐 물질화되고 육화된다. 최초의 균등한 분할은 명도에 따라 다른 크기로 다가온다. 그의 작품은 추상적 기하학이 아니라, 물질과 행위, 그리고 육안이 만들어내는 유기적 기하학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움직임이 큰 것은 아니다. [Eigen Frequency]나 [Moon]처럼, 늘 움직이기에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다. 



김범중, Eigen Frequency  2015 160x112cm pencil on Korean paper



이 운동은 과정 중의 한 장면만을 고착시켜 인식하기 쉬운 이성의 습관을 역류한다. 한지 위에 연필로 그려진 드로잉은 그림이라는 정지된 매체에 시간성을 부여한다. ‘Eigen Frequency’, 즉 각 사물에 내재한 고유 진동수는 시간성에 기초한다. 그것은 한 줄  한줄 그어나가는 시간이고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는 시간이다. 한 켜 한 켜 쌓이거나 벗겨지는 시간이다. 그리고 유한한 존재가 죽음에 한발자국씩 다가가는 운명적 시간이다. 작은 것들이 쌓여 큰 변화를 만들어내는 차이를 둔 반복이다. 각기 방향이 다르게 정렬해 있는 선들은 그 밀도와 강도에 따라서 명도가 달라진다. 강한 블랙에서 약한 블랙의 계열이 있는 그의 작품은 가운데서부터 가장자리로 번져 나간다. 파동은 상자 안의 상자에서도 반복된다. 그의 작품은 규칙적 간격 때문에 직물이나 자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검은 실을 꿰어 수놓은 듯한 작품은 바탕 위가 아니라 바탕 자체를 관통하는 듯한 힘이 느껴진다. 이 때 그의 도구인 연필은 침이나 바늘이 된다. 


직물처럼 일정한 방향으로 짜여 진 텍스트를 물들이는 것은 심층의 어둠이다. 이때 블랙은 밀도의 차이를 통해 스며들거나 스며나오는 무엇이 된다. 또한 그것들은 소리로도 향기로도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동형구조를 이루는 단위들은 흐름의 정류(整流)--사전적인 의미로는 ‘유체의 흐름을 고르게 하여 혼란이 없는 상태로 흐르게 함’을 말함—상태와 유사하다. 심연에서 솟아나 빛과 잠시 만나 고유의 순간을 언뜻 보여주고, 그것들이 비롯된 곳으로 되돌아간다. 칸칸마다 지속과 순간의 교차가 있다. 작품 [Moon]은 ‘진동수’ 보다는 낭만적인 소재지만, 비슷한 시각 상을 가진다. 한밤중에 달의 위상을 생각하면, 고요한 가운데 극적인 효과가 있다. 수평선 부분에 섬광이 비치듯 주변과 명도차이를 보이는 밝은 띠가 있는 형태는 양 가장자리로 갈수록 어두워진다. 그것은 달의 차고 이지러짐을 표현하는 듯하다. 달이라는 천체는 언제나 변치 않는 진리가 아니라, 시간의 축을 따라 진동하면서 변화한다. 

  


최상철-원초적인 자연에 내재하는 블랙


최상철은 캔버스를 주사위 놀이의 장으로 만든다. 그는 자연에 내재하는 우연과 무작위를 활용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말 그대로 우연과 무작위로 흩어지지 않는 것은, 즉 관객이 그만의 ‘독자적’인 양식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주사위 던지기를 무수히 시행하는 통계학적 과학성 덕분이다. 통계학은 결정론적 우주론이 무너진 현대과학에서 중요시 된다. 현대 물리학과 수학 등에서 ‘불확정성’, ‘불완전성’ 등, 예술적 분위기를 풍기는 용어는 객관적 진리처럼 자리 잡았다. 그러한 통계학적 사고는 동양의 [주역]에서도 발견된다. 한 두 번의 실행은 우연에 머물지만, 무수한 실행은 어떤 사건을 필연으로 만든다. 통계학은 시간이 지날수록 우연이 필연으로 전화됨을 보여준다. [無物] 시리즈 중 하나는 공중으로 고무패킹을 던져 생겨난 지점에 검은 아크릴 물감이 묻은 돌을 굴리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작가는 첫 번째 실행에서 더 이상 물감 자국이 없을 때까지 굴리다가 두 번째 고무패킹을 던진다. 




최상철, [無物 14-16], 130.3x162.2cm, 캔버스에 아크릴, 2014



최상철, [無物15-19](2015)

 


그렇게 연결 지점을 만들어가며 1000번을 같은 방식으로 실행하면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굵은 선의 뭉치가 남는다. 그것들은 모두 연결된 것처럼 보인다. 단지 풀 수 없을 만큼 엉켜 있을 뿐이다. 또는 하나의 굵은 선을 구겨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이때 차원의 변주가 이루어질 것이다. 물감 묻힌 돌 대신 물감 묻힌 철사를 사용하면, 모든 점들이 연결되는 형식은 그대로 유지된 채 좀 더 기하학적인 형태가 만들어진다. 또 다른 작품은 물감의 양을 듬뿍 해서 점을 찍고 여기에 돌을 굴려 만든 것이다. 이런 형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관객이 어떤 추측을 하든, 거기에는 물리적인 힘의 흐름이 효과적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남아 있다. 검은 머리카락 뭉치처럼 보이는 작품 [無物14-16]은 아크릴 물감을 묻힌 줄을 1000번을 던져서 만든 형상이다. 1000은 특별한 의미보다는 언제인가는 게임을 끝내야 하므로 만든 나름의 규칙이다. 


규칙은 일관되게 관철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연은 필연의 그물망에 좌표화 되지 못한 채 우연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無物]이라는 제목은 ‘사물이 태어나기 이전의 혼돈된 상태’를 말하며, [노자]에 나오는 표현이다. 그의 작품에서 블랙은 원초적인 혼돈을 상징한다. 서구의 종교적 관념에서는 이 암흑 같은 혼돈에 신의 힘이 작용하여 빛과 세상의 질서가 생겨났다고 상상된다. 그러나 [노자]에 바탕 한 동양적 사유는 있음과 없음을 칼같이 나누는 빛의 이미지가 아니라, 중력에 순응하여 떨어지는 사물처럼 굴러가는 자연스러운 세계를 상정한다. 최상철은 그러한 자연을 자연적 방식을 따라 표현한다. 거기에는 사회의 규칙보다는 자연의 법칙이 더 훌륭하다는 가치평가가 있다. 그의 작품은 자연을 흉내내서 정해 놓은 최소한의 매뉴얼을 따르면 누구라도 할 수 있다는 특성이 있다. 강바닥에서 주어온 돌멩이가 붓의 역할을 하는 최상철의 작품에서 의미와 목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자유와 그다지 상반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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