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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일 / 안과 밖 사이가 연동되는 공간

이선영

안과 밖 사이가 연동되는 공간

  

이선영(미술평론가)

  

박용일이 수년전부터 그리고 있는 것은 보따리이다. 이전 세대에서는 보따리가 책가방으로도 쓰일 만큼 일상적이었지만, 포장재로서의 보따리는 더 이상 보편적이지 않다. 랩이나 비닐봉지 같은 것이 보따리를 대체했다. 일상에서 사라질 즈음의 물건들은 특별한 자리에 다시 나타난다. 요즘 보따리는 명절날 선물세트 등을 포장하는 등 ‘특별한’ 용도로 사용된다. 그러나 보따리는 우리의 일상어에 여전히 남아있다. 가령,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채 전국을 떠도는 대학 강사를 ‘보따리 장수’라고 하고, 조직에서 누군가를 쫒아낼 때 ‘보따리 싸라’로 명령한다. 박용일의 보따리 그림들은 그가 살고 작업하고 있는 수도권 안팎의 재개발지를 비롯하여 서민들의 삶의 터전을 소재로 했던 이전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초창기 작업과 비교한다면 같은 작가인가 싶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그는 나름대로 하나의 줄기를 잡고 진화해온 것이다. 이거다 싶으면 거의 바닥을 칠 때 까지 열심히 그리는 것도 여전하다. 인간의 삶보다는 자본의 회전에 의한 변화의 바람 앞에 스산해진 풍경에 뒤이은 것이 종이배 시리즈였다면, 보따리는 종이배의 또 다른 면이다. 



He-story 45x45cm oil on canvas 2014



 He-story 91x117cm oil on canvas 2014



 He-story 91x117cm oil on canvas 2014



He-story 45.5x53cm oil on canvas 2014



무너진(또는 무너질) 풍경 이미지가 접혀 만들어진 종이배들은 정처 없는 유랑을 상징했다면, 보따리는 유랑하는 자들이 꾸렸을 짐에 해당된다. 종이로 접혀진 배, 천으로 주름진 보따리는 같은 계열에 속한다. 그것은 안과 밖이 연동되는 유연한 평면으로서의 공통점이 있으며, 일상의 무대를 넘는 시공간으로 확장될 잠재력을 가진다. 20세기 초 몽마르트,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가난한 예술가들의 집결 촌을 ‘세탁선(Bateau Lavoir)’이라고도 불렀듯이 집은 배와 비교된다. 배는 움직이는 집이다. 종이배는 극히 취약한 집인 것이다. 집이 인간의 연장이라면 보따리는 보다 직접적이다. 모든 유기체들이 조만간 어떠한 막에 싸여진 덩어리라면, 보따리들은 인간의 몸, 특히 얼굴을 떠올린다. 대개 한 화면에 배경도 없이 하나씩 그려져 관객과 대면하는 그 덩어리는 은유적인 초상이다. 어수선하게 풀어헤쳐진 보자기, 즉 해체되고 있는 유기체는 치명상을 입거나 피로한 몸체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반대로, 그것은 ‘뫼비우스 띠로서의 몸’(엘리자베스 그로츠), ‘기관 없는 몸’, ‘다양체’(들뢰즈) 등으로 개념화되면서 부정적 기운을 떨쳐낼 수도 있을 것이다. 


유기체와의 비유에서, 보따리 위의 나목 잔가지들은 인체의 일부, 즉 혈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드물게는 보자기가 두 개 놓이기도 하는데, 그때는 사람 같은 모습이 더욱 강하다. 박용일의 보따리 그림들은 그 보따리를 싸고 떠났을 인간들처럼 다양한 표정, 특히 멜랑콜리한 표정이 있다. 체액을 떠올리는 물감 흘린 자국이나, 밑이 쑥 빠진 형태, 흐트러진 윤곽선 등을 보면, 비극으로 귀결되곤 하는 삶의 중력이 감지된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그저 예쁜 스카프 무늬를 보든 기괴한 이미지를 보든, 음울한 감성에 젖든 그것은 관객 각자의 몫이다. 작가는 더 이상 (재)개발공화국인 한국의 현실을 고발하는 류의 메시지를 던지지는 않는다. ‘He-story; in and out’(전시부제) 전의 은유적 형상들은 그의 비판적 문제의식이 보다 안쪽, 또는 더 머나먼 바깥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소재는 더욱 미시적 세계로 이동했지만 은유의 폭은 더욱 커졌다. 그의 최근 작품은 일상의 풍경부터 우주론적 경관까지 아우른다.




 He-story 112x162cm oil on canvas 2014



 He-story 41x32cm oil on canvas 2017



 He-story 45x90cm oil on canvas 2015



 He-story 30x53cm indian ink on canvas 2017



박용일의 수많은 보따리 그림들을 일별하다보면, 보따리는 회화를 위한 감춰진 알리바이는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모네가 성당이나 짚가리, 그리고 만년에는 수련만 그렸듯이 말이다. 예술가들은 자기만의 영토 속에서 현실의 진부함이나 가혹함을 이겨낸다. 그렇게 예술은 현실로부터 주체를 탈주하게 한다. 그러한 방식이 전염이나 전파 등을 통해 확장되어 예술가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더불어 탈주하도록 한다면, 예술은 현실을 변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천천히 진화하고 있는 중인 박용일의 작품은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 너무 멀리가지는 않는다. 우선 형식을 보면 그의 보따리는 비판적 리얼리즘부터 추상표현주의까지, 미술사의 전 영역을 압축하다시피 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는 장이다. 작가는 보따리라는 최소한의 참조 점을 유지한 채 그리기의 즐거움을 맘껏 구가한다. 그러한 즐거움이 없다면, 그 수많은 보따리 그림들은 부조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그저 동어반복이었다면 고된 노동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가 이런 저런 보따리를 연출해놓고 단지 재현하려하기만 했다면 그러한 함정에 빠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가 성공했을 때조차도 시장에서 ‘보따리 작가’ 라는 식으로 코드화되어 유통될 것이다. 그의 작품이 단순한 사실주의와 달리, 대상을 불투명하게 하는(또는 심미화 하는) 야생적 붓질이 전면에 드러나지만 추상화는 아니다. 보따리가 거의 와해되다시피 한 작품에서조차도 완전한 추상화는 아니다. 칸딘스키를 비롯한 초창기 추상화가들의 염려처럼, 추상화는 넥타이나 스카프 무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만큼, 현실이라는 참조대상에 괄호를 칠 수는 없는 것이다. 장식으로 전락하는 추상이야말로 비루한 현실의 가림 막에 불과하다. 하기야 마법의 양탄자도 아니고, 보따리 따위가 비루한 현실을 얼마나 가려주겠는가. 박용일의 보따리는 먹도 활용한 최근작에서 보이듯이, 세상을 보는 또 다른 창이 되어주고 있다. 보따리로 본 세상이라고나 할까. 




 He-story 45x45cm oil on canvas 2017



 He-story 73x91cm oil on canvas 2016



종이배든 보따리든, 작가가 어느 시기에 소재를 특정하고 한정하는 것은 동어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실험하기 위한 선택이다. 어떤 절묘한 소재는 고갈되지 않는 샘처럼 거듭해서 퍼내도 또 나올 것이 있다. 그리고 마침내 거기에서 바닥을 보면 작가는 다른 우물을 찾아 떠날 것이다. 우선 그가 몇 년간 몰두하고 있는 보따리 이미지는 변화의 소용돌이에 있는 삶을 상징한다. 그는 재개발지 등을 포함한, 작품 소재가 될 만 한 장소를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현수막용 천에다 출력하여 보자기를 만든 다음, 무엇인가를 싸서 보따리를 만들고 그것을 출발로 하여 그림을 그린다. 종착지는 최초의 참조대상과 많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 그것 없이 출발하지는 않는다. 수년간 수많은 보따리를 그렸어도 여전히 대상을 참고해야 한다. 그의 작품은 실재를 출발점으로 하지, 관념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박용일은 큰 작업을 좋아하긴 하지만, 보따리 시리즈의 경우 누구나 들고 갈 수 있는 크기의 보따리라는 적정 규모를 유지한다. 


현장에서 사진을 찍어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곳에서 받는 영감은 더 중요하다. 그의 작품에서 시점과 다른 종점은 많이 발견된다. 실제는 사진에 찍혀 천에 출력되어 입체가 되고, 그것은 다시 그림이 된다. 입체-평면-입체-평면...의 복잡한 ‘세탁’ 과정을 거치면서 차원은 변주된다. 이 과정을 통해 현실의 어떤 면은 삭감되고 어떤 면은 강조된다. 출력물은 가운데를 중심으로, 다른 풍경의 밑이 서로 닿아 있다. 그래야 서있는 보따리에서 풍경이 그럴듯하게 배치될 수 있다. 이미지와 보따리가 잘 맞게 만드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한다. 컴퓨터상에서의 작업도 빠지지 않는다. 가상이든 현실이든 관객 앞에 제시되는 것은 끝없는 조정의 결과이다. 접힘에 의해 변형되는 풍경은 실제 모델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보따리 안에는 허접쓰레기 같은 것이 뭉쳐져 있을 뿐이다. 이러한 안과 밖 사이의 불연속은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현대 조각사]에서 주장한 현대예술의 특성이기도 하다. 가령 초현실주의가 대표적인데, 그것은 안팎(또는 중심과 주변)과의 관계가 투명하게 파악되는 고전주의나 구성주의와 달리, 속(안, 중심)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는 피막이 자주 등장한다. 




 He-story 150x150cm oil on canvas 2016



He-story 32x41cm acrylic on canvas 2016



인체의 해부학적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긴 망토를 걸치고 있는 로댕의 발자크 상같은 것이 아니어도, 예술로 흘러들어온 모든 사물들이 어느 정도는 그러한 수수께끼 같은 양상을 가지고 있다. 상황의 예술(포스트모더니즘)이 이성의 예술(모더니즘)을 대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박용일의 작품에서 안과 밖은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다. 기존의 현실을 휩쓸고 지나간 힘은 쓰레기를 비롯한 각종 파편을 남겼을 터인데, 보자기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 바로 현장의 잔여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연속성은 의미의 차원에서만 그렇다. 보자기 위의 이미지 자체가 보따리가 될 때 생기는 매듭과 주름은 수많은 균열과 간극을 내포한다. 우리의 실제 삶이 그러한 것처럼. 관념이 아닌 실제로부터 출발해야 기계적 반복이 아닌 차이를 둔 반복이 가능하다. 실재가 다양한 모양새로 꼬일만한 수많은 가닥들을 거느리고 있다면, 관념은 무엇인가로 환원될 단조로움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실제 오브제로부터 출발한 그의 작품은 계열을 이루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이야기를 한다. 사각형 평면인 보자기에 출력된 현실의 이미지는 보따리를 통해서 급격하게 변형된다. 보따리는 수평적으로 펼쳐진 풍경을 소용돌이치는 듯한 형태로 변화시킨다. 박용일의 작품에서 보따리는 떠남을 상징하는 서정적인 사물이기 이전에, 우리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어떤 압축된 힘을 표현한다. 통째로 묶여 이동되는 현실에는 (탈)근대적 의미의 ‘시공간의 압축’(데이비드 하비)이 발견된다. 우주적 공간을 떠올리는, 블랙이 많이 등장하는 최근 작품에서 그 힘은 현대물리학의 가설과 연관된 힘이 느껴지기도 한다. 미시와 거시 우주 사이에, 거대한 표면으로서의 세계화 시대에 대한 비유가 있다. 현대문명 비평가들은 세계화를 평평함과 비교하곤 한다. 경계가 소멸된 ‘평평한’ 세계에서 어디로든 진출하는가, 알 수 없는 힘에 떠밀려 다니는가는 그가 어떤 계층에 속해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유목’으로도 포장되는 지구 촌 전체가 보따리 세상이다. 




 He-story 45x45cm oil on canvas 2015



 He-story 25x25cm oil on canvas 2015



보따리 싸기에는 어떤 것을 안에 넣고 어떤 것을 바깥에 남기는 선택을 전제한다. 우리사회에서 선택하는 자와 선택 당하는 자의 괴리는 더욱 커져 간다는 점은 보따리 싸기 같은 사소한 행동마저도 의미심장한 것으로 만든다. 보따리가 됨으로서 뒤죽박죽되는 건물들은 지상 위에 굳건히 서있어야 할 삶을 터전을 뒤흔든다. 지상에 뿌리를 내려야 할 것들이 유체가 되어 뒤섞인다. 구체적 대상보다는 붓질을 드러내면서 흐릿하게 처리한 작품들은 기체의 느낌도 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액체 근대]에서 주장했듯이, 근대는 액체와 비유될 수 있다. 박용일의 작품은 파괴가 전제된 진보(창조, 발전)라는 모더니티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꽃나무 등으로 대표될 수 있는 자연은 건물로 나타나는 문명 보다는 덜 추레하다. 자연풍경의 비중이 많은 보자기는 어떻게 묶어도 안정감이 있다. 건물은 그렇지 않다. 지진이라도 난 듯이 어수선하다. 박용일의 작품에서 자연과 문명은 보자기라는 지극히 평범한 형식적 장치를 통해 그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보다 많은 인류가 문명에 속하게 되면서 자연에 비해 문명에서의 판도변화는 더욱 크게 다가온다. 붉은 고추를 널은 장면이 담긴 작품은 자연이자 삶의 풍경으로 적절한 균형감을 갖춘다. 박용일은 같은 보자기를 반복적으로 그리지는 않지만, 고추 널은 풍경은 몇 점 발견된다. 꽃나무 이미지들은 마치 꽃무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보자기 아랫부분을 흐릿하게 처리하는 등, 장식이나 재현으로 보여 질 여지를 차단한다. 그러나 줄무늬 등 추상적 무늬의 보자기가 없는 것은 아니며, 매듭의 위치마저 달리했을 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는 힘들다. 그때 전면에 나타나는 것은 자유로운 붓질, 즉 회화의 리얼리티이다. 여러 작품에서 발견되는 속도감 있는 붓질은 견고한 지시대상을 스치는 바람으로 만들고 화면상에서 색을 섞으며 의외의 결과를 얻어낸다. 무엇을 지시하고 의미하고를 떠나 회화만이 가능한 어떤 결과가 나온다. 가령 붓질이 강하게 남아 있는 보자기의 경우 아래 드리워졌을 그림자는 보자기의 일부처럼 색이 있다. 




 He-story 112x162cm oil on canvas 2016



 He-story 45x45cm oil on canvas 2016



여기에서 재현주의적 환영은 깨진다. 보자기의 한 귀퉁이만 표현된 작품의 경우, 보자기 일부는 현란한 색이 분출하는 장이 된다. 보자기 위에 찍혔을 땡땡이 무늬에서는 물감 국물이 줄줄 흐르기도 한다. 보자기는 무엇도 싸고 있지 않은 것처럼 완전히 평면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때 물감은 지시대상의 외곽선을 사정없이 녹여낸다. 붉은 색의 자연에서 물감이 떨어질 때는 마치 유기체가 깊은 상처를 입은 양 핏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박용일은 보자기로 무엇인가 싸서 그것을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하지 않는다. 즉 소비되려 하지 않는다. 전형적인 대중문화—산뜻한 외곽선을 가지고 있는 대중문화는 쉽게 소비될 무엇인가를 충실하게 전달한다—가 그러하듯이 부담 없이 소비되기에는 불편한 현실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이미지는 평면에 갇히지 않고 바깥으로 불쑥 삐져나오기도 한다. 더 이상 얌전히 싸여만 있을 수 없다는 듯이. 


재개발 현장에서 발견될 법한 붉은 기나 무너져 내리는 낡은 건축의 일부가 보자기 밖으로 나오는 형상들은 우리에게 닥치는 현실의 강도를 전해준다. 구멍을 뻥뻥 뚫린 보자기나 보자기 아랫부분이 사라져 담긴 내용물이 쏟아져 내리는 장면은 바닥없는 현실을 풍자한다. 발전주의자들이 유토피아를 제시한다면, 그것은 보다 많은 다수의 바닥없는 침몰을 전제로 한 것이다. 바닥없는 추락은 번잡해 보이는 중소도시 풍경—누군가에게는 싸그리 정리되어야 하는 변두리 풍경—뿐 아니라 뭉개진 꽃에서도 발견된다. 그것은 문명 주변의 자연도 같은 운명임을 시사한다. 그는 보따리의 배경을 잘 그리지 않는다. 보따리는 증명사진처럼 중성적 배경 위에 놓인다. 보따리 아래에 그림자가 있다든지, 어떤 것은 없다든지 하는 것은 작가가 전달하고픈 메시지에 따라 좌표를 달리한다. 배경에 특별한 형상이 없어도, 좌우로 긴 화면은 풍경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거기에는 중성적인 배경을 넘어서, 보다 거시적인 관점으로 문명을 관조하는 듯한 장대한 거리감이 있다. 



 He-story 25x25cm oil on canvas 2017



 He-story 45x45cm oil on canvas 2017



 He-story 45x45cm oil on canvas 2017



 He-story 25x25cm oil on canvas 2017



 He-story 25x25cm oil on canvas 2017



이때 보자기는 크기와 상관없이 기념비적 위상을 가진다. 박용일의 보따리들은 한눈에 들어오는 들고 갈 만 한 보따리에서, 지평선에 도열한 문명을 모두 아우르는 듯한 거대한 상징으로서의 보따리 까지 다양한 차원을 아우른다. 그의 보따리에 담긴 사회적 의미만큼이나 우주론적 공간감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따리라는 도상은 사각형 캔버스에 담기기 마련이지만, 작가는 배경을 생략함으로서 대상의 독특한 공간적 특성을 부각시킨다. 보따리는 무엇인가를 담는 매개체이지만 상자와는 다르다. 상자의 전형은 원근법에 충실한 고전주의나 사실주의이다. 상자 안에서 대상은 차곡차곡 담겨진다. 원근법은 대상을 쟁일 수 있는 합리적 공간에 대한 틀이다. 직관적인 원근법은 예전에도 있었지만 그것이 체계화, 즉 과학화된 것은 르네상스 이후이다. 그것은 근대가 르네상스까지도 소급되는 이유일 것이다. 고전주의 시대 뉴턴 역시 상자 같은 공간으로서의 우주를 가정했다. 그것은 상하좌우의 구별이 있는 이전 시대의 질적이고 상징적인 공간이 아니라, 물리적 법칙이 전개되는 빈 공간, 즉 중성적인 공간이다. 


이러한 양적 공간 관으로부터 근대가 탄생했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에서 뉴턴이 가정한 공간은 절대적 공간으로, 그 공간은 본성상 어떠한 외적 사물과도 관계없이 항상 동형, 부동의 것으로서 존속한다고 본다. 칸트에 의해 ‘선험적 공간’으로 해석된 뉴턴의 절대적 공간은 현대과학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면서 상대화 된다. 마가릿 버트하임은 [공간의 역사]에서, 단지 무형적이고 특색이 없는 공간인 뉴턴의 절대 공간은 단순히 물질운동의 배경일 뿐이라고 본다. 뉴턴의 공간 관에서 공간은 단순히 물체가 놓여있는 수동적인 영역, 즉 공간은 본질적으로 텅 비어있는 상자, 영원히 뻗어나가는 3차원의 무한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상대적 공간은 광대한 얇은 막과 비교된다. 버트하임은 막으로서의 공간은 더 이상 물질의 운동이 전개되는 중립적 영역이 아니라, 거대한 우주 드라마의 적극적인 참여자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텅 빈 상자가 아닌 막으로서의 공간관은 박용일이 선택한 보자기라는 독특한 기하학적 존재에서도 발견된다. 



 He-story 30x60cm oil on canvas 2016



 He-story 50x162cm oil on canvas 2016



그는 보자기로 무엇인가를 싸지만, 보자기 자체가 바로 세계이다. 그의 작업에서 보자기 안의 것은 보자기라는 평면에 부피를 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기 때문이다. 보자기에 싸여진 세계, 또는 보자기로서의 세계는 막으로서의 우주처럼 변화무쌍하다. 자본의 세계, 네트워크의 세계 또한 그러하다. 보자기는 상자와 달리 예측할 수 없는 만남을 가능케 한다. 박용일이 주목하는 풍경은 그러한 만남이 상당부분 폭력적인 변화의 증후를 보인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면이 강하지만, 보다 시점을 멀리하면 보다 유연한 현대 우주론의 공간성을 발견할 수도 있다. 절대적 시공간이 유클리드 기하학을 바탕으로 한다면, 상대성이론의 시공간은 비유클리트 기하학을 바탕으로 한다. 한스 라이헨바하는 [시간과 공간의 철학]에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견 이후, 물리적 공간과 가능적인 공간의 이중성이 인식되었다고 말한다. 현대의 화가가 주목하는 것은 가능적인 공간일 것이다. 박용일의 작품에서 보따리의 다양한 굴곡 면은 중력에 따라 휘어지는 공간을 떠올린다. 


마가릿 버트하임은 해양처럼 상대론적 공간은 파동, 기류, 그리고 소용돌이와 비교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별과 별 사이의 바다와 같은 공간에서 거세게 굽이치고 물결치는 거대하고 유동적인 4차원 곡면에 의해 부단히 변형된다. 그에 의하면 공간은 물체가 항해할 수 있는 바다일 뿐 아니라, 복잡한 구조물들을 형성할 수 있는 매우 유연한 토대가 되기도 한다. 버트하임은 새로운 물리학이 제시하는 공간은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판 같아서, 태양 같은 거대한 덩어리는 우주 공간의 얇은 막에 변화를 일으킨다. 즉 태양은 평평한 곳을 쑥 들어가게 함몰시킴으로서 주위의 공간을 변형시킨다. 다양한 곡률을 가지고 있는 보따리에 담긴 이미지들도 그와 비슷한 변화를 내포한다. 무엇이든 담아서 변화시키는 보따리-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주체가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He-story; in and out’ 전에서. 나풀거리는 보자기의 평면이 안과 밖의 관계를 더욱 유동적인 것으로 만든다. 안팎이 연동하는 유연한 평면은 우리의 몸부터 사회적 몸체를 거쳐 우주공간에까지 이른다. 계열을 이루는 수많은 보자기는 다르게 접혀지고 펼쳐지면서 다양한 차원의 경관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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