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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선 / 미지의 세계를 위한 과거의 회복

이선영

미지의 세계를 위한 과거의 회복                              

  

이선영(미술평론가)


  

최승선의 ‘생존하는 기억’ 전에 등장하는 인물은 작가로 추정되는 소년이다. 그 소년과 어울리는 소녀, 그리고 익명의 사람들, 동식물, 사물, 바다와 하늘, 마을 등등이 등장한다. 소년은 다양하게 펼쳐지는 상징적 화면 속에서 아득한 시간 여행의 안내자가 되어 준다. 작품은 무엇인가를 구구절절 말하기 보다는 상징적으로 던져진 대상 간의 조합으로 작가가 깔아 놓은 이야기를 상상해야 하지만, 작품 주인공이 화가이며 화자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소년이라는 화자의 위치는 중요하다. 그것은 작가가 즐겨 읽었던 실존주의 계열의 철학/예술처럼, 자신의 선택에 의한 환경이 아닌 곳에 던져진 부조리한 상황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현실이나 관념 속에서 이성/상황, 존재/실존의 대립 항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그러한 반목과 갈등은 정치적 행동만큼이나 예술적 실천을 요구한다. 던져진 상황은 특정 개인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 실존주의의 보편성(그리고 인기)을 알려준다. 나의 이야기지만 보편적인 울림을 주려한다. 




종을 든 소년, 80.3×130.3cm, oil on canvas, 2014



파수꾼, 91×116.8cm, oil on canvas, 2016



최승선의 작품과 실존주의 철학의 차이는, 그가 삶의 어둠 속에서 빛을 끌어낸다는 점이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연이라는 배경은 어떠한 비극적 상황도 서정적인 분위기로 반전시킨다. ‘생존하는 기억’ 속에 끌어내어진, 그리고 어느 정도는 현재에도 그렇게 아름다운 자연의 현존은 그림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근거 없는 낙관주의나 해피엔딩으로 귀착시키지 않는다. 변혁기였던 1980년대식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그의 작품에서 전망은 자연일 것이다. 특히 구름의 배치를 통해 다양한 표정과 상징을 보여주는 높은 하늘은 초월까지는 아니어도, 그 아래 펼쳐지는 인간사를 상대화시킨다. 작업 또한 그렇지 않을까. 작업이란 삶과 관계는 되지만 삶 그자체로 등치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근대사가 압축적으로 재현되었을 법한 그의 삶의 연대기가 반영된 작품들을 보면, 화가가 되지 않았다면 순탄치 않았던 과거와 화해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미술대학 진학을 위해서 고향을 떠났지만, 화가인 지금 그때의 기억은 현재의 작업에 큰 몫을 차지한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렇게 되지 않을까. 유년기의 기억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원초적 기억이 되기 때문이다. ‘생존하는 기억’은 잔가지는 제거되고 굵은 줄기만 남은 중요한 기억으로 생각되지만, 그의 작품에서 생존하는 기억은 세부가 살아있다. 부차적으로 보이는 것이 전경을 차지한다. 오히려 굵은 장면들—가령 1980년대 탄광의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벌어졌을 계급투쟁이나 피폐해진 탄광촌 주민의 삶 등을 반영하는—은 전경을 차지하지 못하고, 풍경 먼발치에서 암시되고 있을 뿐이다. 작품의 주요 무대가 되고 있는 작가의 고향은 한국에서 가장 먼저 탄광촌으로 개발된 지역이었지만, 폐광 역시도 빠르게 진행되었던 마을로, 학교가 폐교되고 이웃들이 하나둘 떠나 유령도시가 된 곳이다. 군대에 갔다 오니 카지노가 들어서는 등, 한국 사회의 지각 변동을 온몸으로 격어내야 했던 작은 마을이었다. 




여행자_130.3×162.2cm, oil on canvas, 2016



구름지도, 60x100cm, canvas, acrylic, pastel, 2016



소년의 눈으로 그가 속한(또는 속해진) 사회의 낯선 풍경을 보는 관점은 영화 [정복자 펠레](1987)나 [집시의 시간](1989)을 떠올릴 만큼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이다. 환상이 비극적 현실의 유일한 탈주로인 이들 작품에서 현실과 환상은 대극에 있다기보다는 서로를 고양한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현실은 환상의 일부라고 생각될 것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예술작품을 통해 오늘의 현실은 기억되는 것이며, 최승선 역시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생존하는 기억’ 전은 기억의 생존을 말해야 할 정도의 기억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기억의 불완전성은 그림에 있어서 서사가 상징적으로 압축되어야 한다는 점과 중첩된다. 그림은 모든 것을 일일이 다 말할 수 없다. 결정적인 한 장면으로 전후의 맥락을 상상하게 해야 한다. 생존하는 기억은 ‘잃어버린 시간 찾기’(프루스트)처럼, 미술이나 소설의 본질적 특성을 함축한다. 기억은 유의미한 형식이 아니고선 구체화되기 힘들다. 우리를 둘러 싼 수많은 정보들은 시간의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대부분 사라진다.


현실을 낱낱이 식민화시키려는 정보사회의 야망과 달리, 생애의 중요한 모든 순간에 카메라가 대기하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작품 속 1980년대 강원도의 한 탄광촌 아이는 마치 폐허 위에 서있는 듯하다. 그곳은 기존의 질서가 처참하리 만큼 붕괴되었지만, 새로운 질서가 정착된 것도 아닌 과도기적 공간이다. 유토피아를 공약하는 거센 근대주의의 힘이 훑고 지나간 자리는 디스토피아가 되었다. 이질적 언어인 예술적 형식은 디스토피아를 헤테로피아로 만든다. 탄광 마을 자체가 열악한 산업사회의 풍경이지만, 그나마도 쇠락하면서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열악한 노동조건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러한 노동조차도 박탈된 상황이다. 작품 [종을 든 소년](2014)은 더 이상 앞으로 가지 않는 녹슨 기차를 놀이터 삼아 앉아 있는 소년을 보여준다. 아이가 비행을 꿈꾸며 썼을 항공모자는 쇠락한 현실과 거리를 둔 높고 푸른 하늘과 어울린다. 항공 점퍼를 함께 착용하기도 한 소년은 작가의 분신이나 캐릭터처럼 보인다.




이방인, 80.3×130, oil on canvas, 2015



떠나가는 날, 50×100cm, oil on canvas, 2017



작품 [파수꾼](2016)에서 어두운 전조를 알리는 까마귀들이 날고 있는 빈 건물과 방호복을 입은 인물들은 성장을 위한 파괴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위험한 공간을 암시하며, 이를 마주보는 소년을 병치시킨다. 소년이 작은 새와 함께 들고 있는 시계는 종말로 끝나는 진보의 시간이 아닌, 무한회귀의 시간을 가리키는 듯하다. 회귀를 추동하는 것은 기억이 될 것이다. 작품 [이방인](2015)은 현실에 능동적 작용을 가하기보다는, 현실이 휩쓸고 가는 어떤 힘에 부유하는 삶을 표현한다. 다른 작품과 달리 거친 터치가 남아있는 작품 [구름지도](2016)에서, 말 탄 소년이 전진하는 방향은 하늘색 배경 아래 숨어있는 유년시절 학교 주변의 모습과 탄광시설물, 우물 등의 흔적이 있는 곳이다. 여행은 [만월야행(滿月夜行)](2016)처럼 밤에도 이루어진다. 목마 끄트머리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는 소년이 있는 [여행자](2016)는 그 여행이 물리적인 이동이기 보다 희망사항임을 암시한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오브제인 목마는 탄광 노동자였다가 부상으로 이동식 놀이 기구로 가계를 꾸렸던 아버지를 상징한다. 이러한 상징물을 타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 담긴 작품들은, 기억이란 여행이기도 함을 보여준다.


작품 [빈 방](2017)에서 누추한 방을 단번에 상상의 공간으로 도약시키는 것은 바닥의 격자무늬이다. 최승선의 ‘생존하는 기억’에는 떠나는 사람들 뒤에 떠날 수 없었던 사람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라면 현실적 어려움은 보다 완화되지 않았을까. 마주하는 힘들이 충돌하는 듯한 그의 푸른 군상 시리즈는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계급사회를 추상적으로 반영한다. 민머리의 누드 상들은 해부학에 충실한 고전적인 어법으로 사회적 갈등을 표현한다. 이러한 집단 누드상은 행위를 통해 내용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연극이나 춤의 무대를 떠올린다. 구체적 배경은 등장하지 않는 진공 속의 장면이다. 그러나 다른 작품들은 공기의 느낌이 있다. 햇빛과 바람과 사람들의 입김이 통과하는 공기의 느낌이. 이러한 공기의 느낌이 독특한 아우라를 만들어 낸다. 그의 작품에서 그러한 공기는 유랑하는 삶 또한 감싸고 있다. 산업사회의 급격한 변화가 몰아닥친 작은 마을에는 자발적 의지가 아닌 타의에 의해 떠도는 삶이 편재한다. 반갑지 않은 변화의 바람은 바깥으로부터 불어온다. 




유랑극단, oil on canvas, 91×65.1cm, 2015



작품 [유랑극단](2015)은 폐광된 마을을 떠나는 주민을 수레 위에 얹힌 집들로 표현했다. 서커스 천막은 새로이 도래한 현실, 즉 후기 자본주의의 기표이다. 이제 산업사회는 자연과의 게임에서 벗어났으며, 새로운 질서가 몰려올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 대 인간의 게임이다. 자연과의 게임이 절대평가—생산력의 진보는 일정부분 물질적 풍요를 공유하게 한다는 점에서—라면, 인간과의 게임은 상대평가이다. 후자는 반드시 패배자를 낳고, 패배자의 비율은 점차 커진다. 최승선의 작품에서 이 모든 과정은 드라마틱한 표정의 창공아래에서 전개된다. 별빛 총총한 하늘을 배경으로 수레집이 나란히 있는 작품 [별 헤는 밤](2014)은 이주의 운명이 낭만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지역에 뿌리를 둔 개인의 삶을 뒤흔들었을 이주는 수레에 얹힌 집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이 독특한 도상은 미대 진학을 위해 도시로 간 작가가 바람과 햇빛이 들 창도 없는 비좁은 고시원에서 고생했을 때, 비록 누추하긴 하지만 바람과 햇빛만큼은 풍족하게 누렸던 고향 마을이 다시 그리워졌던 상황을 반영한다. 


내가 어딜 가든 고향집을 가지고 다닐 수 있다면 하는 희망사항이다. 수레를 탄 집의 형태는 현대 문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인 ‘유목’과도 관련되는 이미지이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가속화된 코드화란 과거에 누구나 누리던 공공재에도 관철되며, 생산이자 소비의 대상 된다. 만물의 코드화는 생산력이 진일보해도 현대인에게 휴식이 없는 이유가 된다. 작품 [떠나가는 날](2017)의 수레 집들은 외나무다리에 놓여있다. 위태로운 것도 위태로운 것이지만, 하나의 선택밖에 없음이 더욱 슬프게 다가온다. 하늘과 바다는 여전히 무한하지만, 지상의 삶에는 다른 여지가 없는 것이다. 작품 [야적장](2015)에서 목재 더미 뒤에서 연기 콸콸 뿜어내는 화력 발전소는 전형적인 근대의 풍경이다. 수레 집은 낡은 예인선 위에 실려 어디로 갈 것인가. 막연한 지평선을 향해 출발하는 수레 집 옆에 떨어진 작은 목마가 있는 작품 [pm04:30](2015)이나 폭풍우가 몰려올 것 같은 바닷가의 수레 집을 간신히 붙들어 매주는 것은 예술가의 기억이다. 




별헤는 밤, 50×100cm, oil on canvas, 2014



파랑주의보, 30x55cm,  oil on canvas, 2015



야적장, 33.4×45.5cm, oil on canvas, 2015



작품 [파랑주의보](2015)에서 꽃나무가 아닌 꽃나무 그림 앞의 수레 집이 그것을 말해준다. 정처 없는 떠남의 이미지는 소년의 또 다른 자아—타자에 대한 사랑이 그러하듯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리따운 소녀가 개입될 때 더욱 애틋해 진다. 소녀는 어릴 적 친구이기도 하고, 어머니의 소녀 적 모습이기도 하다. 작품 속 여성은 구체적인 개인이기도 하고, 작가가 젊은 남성인 점을 떠올려 볼 때 막연한 그리움의 대상일 수도 있다. 배고플 때 따서 먹기도 했다던 진달래가 가득 피어난 고개에 소녀가 있는 [화절령(花絶嶺)](2015), 공중에 붕 뜬 건물 위에 방어적 자세로 서있는 소녀가 있는 [신기루](2017), 폭력과 공포를 상징하는 동물에 위협받는 듯한 여성이 있는 [field](2017), 잡목 무성한 버스 정류장 안의 소녀가 있는 [정류장](2014)의 주인공은 소녀이다. 소녀가 어떻게 묘사되었든 그녀가 거기에 있어야만 하는 이유나 소속감은 발견되지 않는다. 근대화 과정을 보면 가장 먼저 (취약한)지역을 떠나는 이들 부류가 소녀이다. 


거꾸로, 소녀가 결혼 등을 통해 지역으로 온다면, 그녀는 유폐된다. 최승선의 작품에서, 어머니를 염두하고 그린, 영원히 오지 않을 버스를 기다라는 화관을 쓴 소녀 이미지처럼 말이다.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한 소년과 소녀가 있는 [시절인연(時節因緣)](2015)이나 [파애(破愛)](2015)에서,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는 환상적 무대에서 펼쳐짐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구체적이다. 작가는 [파애]가 ‘현실의 자화상을 모델로 그려낸 몇 되지 않는 작품 중 하나’라고 말한다. 그들은 한 공간에 있어도 다른 곳을 주시한다. 지금 여기의 대중들처럼 말이다. 지금은 서울을 왔다갔다 하면서 강원도에서 작업하고 있는 작가에게 ‘생존하는 기억’을 보충할만한 자료 수집은 필수적이다. 작품 [망막에 남은 기억](2014)은 거울처럼 쪼개진 마을 위에 화가의 주요한 보조 도구이기도 한 카메라를 얹어 놓는다. 카메라에 찍힌 장면들처럼 장면들은 단편으로 남아있다. 어디선가 떨어져 나온 단편은 다시 연결되기를 기다린다. 




화절령, 60.6×90.9cm, oil on canvas, 2015



시절인연(時節因緣), oil on canvas, 60.6×72.7cm, 2015



최승선_파애, 90.9×72.7cm, oil on canvas, 2015



작품 [자작나무 숲](2017)이나 [진달래](2017)는 파스텔 톤의 밝은 배경 아래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상징적 소재들을 나열식으로 도해했다. 그의 다른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사물, 인물, 자연물 등은 수직 수평으로 이동될 수 있는 좌표 상에서 다른 위치를 차지한다. 그 요소들이 어떻게 짜이는 가에 따라 서사는 조금씩 차이를 보일 것이다. 최승선의 작품에서 이야기는 시간의 축, 즉 기억을 따라 진행된다. 기억의 무대는 공간, 구체적으로는 고향이다. 창조와 파괴가 결합되어 있는 근대화를 통해 많은 이들이 고향자리를 떠나 추상적 공간에 재배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재배치는 항구적인 유동성이라는 역설적 상황을 낳았다. 좋게는 기회이고 나쁘게는 불안정이다. 최승선의 작품은 단지 주어진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 투사에 의해 창조된 공간이다. 공간에 대한 종교적 통찰을 보여주는 조너선 스미스는 [자리잡기]에서 장소에 대한 가치가 담긴 친밀하고 의미 있는 경험을 고향자리(home place)에 대한 성찰로부터 끌어낸다. 


조너선 스미스에 의하면, 고향자리로서의 자리는 뚜렷이 노스탤지어--‘고향에 돌아옴’의 뜻인 그리스어 ‘nostos’에서 파생한 단어—의 범주이다. 최승선의 작품에도 고향은 단지 내가 태어난 자리나 내가 살던 자리를 넘어서, 기억이 머무는(housed) 곳이다. 그래서 그의 고향 풍경은 심상지도(mental map)같은 면모를 보인다. 작품 속 그곳들은 물리적 환경을 넘어서 작가의 깊은 체험과 관련되는 것이다. 조너선 스미스 기억의 착오를 가리킬 때 쓰는 ‘생각 안나(I can't place it)’라는 문장을 환기하면서, 기억과 자리의 깊은 관련성을 말한다. 최승선이 고향을 비롯한 자리를 호출하는 것은 상실, 떠돎, 유배의 자리를 기억하려 함이다. ‘생존하는 기억’은 단순한 상실감을 넘어서, 생성하고자 한다. 생성은 기억이 과거에 붙잡히지 않고 미지로 도약함으로서 가능하다. 작품에 내재된 수많은 균열과 공백들은 그러한 도약의 자리가 된다. 




정류장, 35×65cm, oil on canvas, 2014



빈 방, 45.5×60.6cm, oil on canvas, 2017



[자리잡기]는 상실이 꼭 불화, 타락, 비존재라는 카오스로의 침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강조한다. 가장 대표적인 상실의 신화는 실낙원이다. 이데아의 세계로부터 멀어져 다시금 그 세계를 상기를 통해 되찾으려는 플라톤주의, 지상으로 추락해 있지만 천상으로 되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영지주의까지 광범위하다. 이전시대의 종교나 신화가 아니더라도, 모든 것이 유동적이 된 근대사회에서 불일치는 필연적이다. 대표적인 것은 존재와 의식의 불일치이다. 이러한 불일치로부터 누군가는 부조리와 운명을 말하고, 누군가는 이데올로기와 계급투쟁을 말한다. 고향은 달라져 있고, 나 또한 원하는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다. [자리잡기]에서 상실과 불일치는 다른 맥락에서 접근된다. 즉 그것들은 존재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하지만 현재로서 남아있는 것을 조율하고 변화시키는 복합적인 과정의 출발점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실감과 불일치는 주체로 하여금 잃어버린 시공간에 접근가능한 중요한 동기를 부여한다. 


최승선의 작품에서 자리에 대한 기억은 유년의 시공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날짜를 특정할 수 있는 어떤 순간의 재현은 아니다. 아직 사회에 진입 또는 개입하기 이전의 소년은 보다 낯선 눈으로 변화를 관찰할 수 있다. 그것은 그의 작품 제목의 하나처럼 ‘이방인’의 시점이다. 그램 질로크가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에서 지적했듯이, 작가의 작업은 유년시절의 잃어버린 시간 뿐 아니라, 도시의 감춰진 균열들까지 찾으려 한다. 벤야민에게는 근대의 격동기를 통과하고 있는 유럽의 큰 도시들이었지만, 한국의 작은 광산촌이라고 해서 그 기본적 과정이 다른 것은 아니다. 중심의 질서는 주변부에서 더욱 강력하게 재현되기 마련이다. 그것은 실재보다 더한 시뮬라크르의 상황이다. 벤야민에게 파리의 파사주에서 발견할 수 있는 쇠락한 유행은 낡음을 새로움으로, 파괴를 진보로 포장하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발견하게 했다. 기표가 기의로부터 떨어져 나가 수수께끼가 연출되는 상황을 제대로 활용한 최초의 유파가 초현실주의이다. 초현실주의의 일파는 신비에 머물지 않고 혁명을 추구하기도 했다. 현실에 대한 재확인 보다는 꿈과 무의식에 대한 발견적 가치에 비중을 두고 있는 최승선의 작품 또한 초현실주의에 기대고 있다.

 


진달래, 72.7×60.6cm, oil on canvas, 2017



자작나무 숲, 60x100cm, acrylic, 2016



최승선의 작품은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 등 유럽의 대도시에 대한 벤야민의 텍스트처럼, 시시콜콜한 자전적 소묘가 아니라 ‘특별한 장소와 시간 그리고 도시와 과거에 대한 기억들의 모음’(그램 질로크)이다.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했던 유년시절은 사실적 재현을 위한 시점이 아니라, 맞딱뜨려진 세계에 대해 생생한(또는 낯선) 인상을 간직했던 순간에 대한 회귀이다. 이러한 이질적 감성이야 말로 작가에게 필요한 자질이기 때문이다. 그램 질로크는 벤야민이 단지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찾으려하지 않고, 오히려 잃어버린 지각, 어린아이의 습관화되기 이전의 시선을 다시 포획하려 시도를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잃어버린 시간 찾기는 미래를 향하며 미래로까지 연장’된다. 그는 ‘출현할 사물들을 위해 과거를 회복’(그램 질로크)하는 것이다. 최승선의 작품에서 소년은 사회와 얽히기 이전의 이방인의 시점이다. 이러한 거리 감각은 소외의 징후이기도 하지만, 현실의 이면, 또는 현실에 잠재된 균열과 간극을 탐침하기 위한 조건이다. 또한 그것은 현실원리에 떠밀려갔던 쾌락원리의 발견을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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