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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희 / 아나로그와 함께 가는 디지털

이선영

아나로그와 함께 가는 디지털

  

이선영(미술평론가)

  

서상희의 [가상정원virtual garden]전은 디지털과 아나로그 언어의 만남을 유도한다. 아나로그는 자연을, 디지털은 ‘정보적 시뮬레이션’을 수단으로 한 ‘전자적으로 매개된 의사소통’(마크 포스터)를 말한다. 이러한 조합은 ‘디지로그’라는 말을 탄생시킬 만큼 정보혁명 시대의 현실에 뿌리를 둔다. 최근 수년간의 전시에서 작가의 관심이 쏠려있는 정원이라는 무대는 가상과 실재 사이의 색다른 융합을 가능하게 한다. 인류창조의 무대로도 등장하는 정원은 낙원의 모델이며, 실낙원 이후에도 인간은 이러한 이상적 정원을 재현하기 위해 애써왔다. 정원 자체가 반은 인공이고 반은 자연인, 어느 정도 절충적인 영역에 존재한다. 정원은 야생의 숲, 또는 인간에게 식량을 제공하기 위해 완전히 기능주의적으로 작동하는 경작지와도 구별된다. 철학자 롬바흐는 [살아있는 구조]에서 ‘정원의 철학’을 논한다. 그에 의하면 경작지는 정원의 반대그림이다. 


그것은 노동을 의미하고, 대지에 대한 폭력, 땀, 괴로움, 법규, 인공적 질서, 많은 조건들에게 복종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은 풍부한 수확물과 법과 공공성과 공동체를 가져다준다. 즉 문화를, 보다 높은 단계의 안정성과 자의식을 갖는 삶을 가져다준다. 동시에 지속적인 일방성이 수반된다. 반면 정원에서의 활동은 여성적이다. 자크 브로스도 [식물의 역사와 신화]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적절한 무질서 속에서 자라나는 정원을 말한다. 그는 이 정원의 담당자가 여성임을 말한다. [식물의 역사와 신화]는 가부장제도 이전에 존재했던 모계사회를 암시하면서, 농업에 앞서 도처에서 마당을 가꾸는 경작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책에 의하면 자연 과정에 개입함으로서 수확량을 증가시키는 곡식재배는 결국 어머니인 대지의 여신을 범함으로서 출현했다. 자크 브로스는 인간이 어머니인 자연을 가혹하게 다뤄서 길들이는 행위는 원예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본다. 원예는 양식을 주는 대지와의 내밀하고 평화스러운 협력과 교감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원예를 이은 농경에서 상황은 역전된다. 밭을 갈고 농사를 지음으로서 가족들을 부양하는 것은 남자의 몫이 되었다. 본격적인 곡물 재배는 인구를 폭발적으로 늘렸고, 문명을 탄생시켰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 하고 있듯이 최첨단 문명에 가상현실 기술이 있다. 서상희의 작품에서 ‘가상’이나 ‘정원’은 단순한 소재이기 보다는 자연과 문명의 관계를 사고하는 매개다. 화분 속에 담긴 식물들이 그렇듯이 서상희의 정원은 원초적 자연과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순수한 자연, 즉 공포와 매혹의 근원이 되는 낭만주의적 관념 속의 자연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자율적인 거리감을 가지게 된 인간적 존재와 어울리는 자연이다. 루소적 열망과 달리, 대재앙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인간이 원초적 자연으로 되돌아갈 일은 없다. 이 전시에서의 디지털 언어는 상당부분 자연으로부터 자율성을 쟁취하면서 진화해온 인간의 상황과 관련된다. 말하자면 인간화된 자연이 정원이다. 그래서 정원에는 ‘정원술’이 따라 붙는다. 


예술 또한 자연과 인공 양영역에 걸치는 바가 있다. 예술은 자연에 뿌리를 둔 (인공적인) 언어이다. 가상의 영역이 빠른 시간 동안에 엄청나게 확장되어서 그렇지, 실재의 영역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예술은 실재, 즉 예술가의 육체와 무의식에 의존한다. 예술이 의식에만 기댄다면 예술의 정체성은 사라진다. 예술보다 좀 더 효율적--소통의 투명성과 생산력과의 밀접한 연계라는 점에서--인 과학, 기술, 철학 등이 언제나 예술에 있어서의 합리적 이성과 경쟁한다. 작품 [가상정원]은 정원에 내재된 절충적인 속성(자연+인공)을 디지털 미디어를 활용함으로서 강조한다. 시뮬라크르 문명에 관련된 서상희의 작품은 ‘한 술 더 뜨기 전략’(장 보드리야르)을 통해서 이미 존재하지만 잘 인지되지 않는 현실을 부각시킨다. 예술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을 제시하는 한갓된 환상에 머물지 않는다. 그리고 그 점에서 예술은 소통가능성을 담보한다. 디지털 미디어는 인공에 속하지만, 오늘날 디지털 언어는 가히 또 다른 생태계라고 평가되는 제 2의 자연을 형성한다. 


서상희가 주목하는 것은 아나로그나 디지털 그자체가 아니라, 서로 구별되는 것 간의 경계이다. 그 경계들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공간, 그리고 서로 다른 것이 만나 충돌하여 생성되는 에너지와 사건에 주목한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할 수 없는 경계에서 행해지는 것을 실험이라고 한다. 작가는 이런저런 기술적 장치의 실험을 통해 그 경계를 늘려나간다. 작품은 실내에 구축되어 있지만 자연처럼 두꺼운 층을 지향한다. 자연에서 주목되는 점은 코드로 환원될 수 없는 실재의 두터운 층이다. 3D로 프린트된 식물 이미지는 그러한 층중의 하나를 형성한다. 부조적인 면에 빛을 쏘아 음각/양각의 면이 더 밝게 빛나는 3D 프린트물은 영상이 투사되는 벽을 배경으로 서 있어서, 마치 벽에서 나온 듯하다. 또한 그것은 작가말대로 ‘정원을 화석화’한 듯한 이미지이다. 작가에게 정원의 원초적 모델은 유년기의 기억에 남아있는 조부의 집이다. 서상희에게 정원은 집에 대한 관심을 뒤이은 것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 공간(집, 정원)은 기억으로 남아, 잃어버린 시공간을 탐색하는 예술적 여정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작품 [가상정원]은 층을 이루고 있지만 그 층이 지층처럼 고정된 것은 아니다. 무엇이라도 전경으로 나올 수 있을 만큼 유동적이다. 디지털 미디어는 그러한 유동성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무엇인가 전경으로 나오면 다른 것들은 중경이나 후경이 된다. 관계망은 매번 다르게 짜여 질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의 지각에 의해 촉발되는 기억 또한 유동적인 것이 된다. 기억은 단지 언젠가 일어났던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꿈과 무의식을 포함한 미지의 차원으로 도약하며, 역사가 아닌 예술이 다룰만한 것이 된다. 어둑한 전시장 중심부에 몰아서 배치하고, 공중에서도 걸려있는 식물들은 벽에 영사되는 (작가가 그린)식물들과 함께 촘촘한 풍경을 만든다. 자연의 개입은 안을 바깥으로 변화시킨다.  


디지털 미디어에서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빛과 소리 등은 실제와 그린 것의 자연스러운 연결망을 형성한다. 물론 그 사이의 틈은 존재하며, 작가는 굳이 그 틈을 메우려고 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스펙터클은 이음매 없는 매핑으로 소비자의 시선을 한시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이미 그런 징후는 발견된다. 현대인은 이미 스마트폰이라는 작은 인터페이스에 온통 시선이 빼앗겨 있다. 성큼 다가온 가상현실 기술은 현실의 식민화에 박차를 가한다. 근대를 일궈왔던 계몽주의가 빛을 잃고, 다시금 플라톤의 동굴과 같이 된 현실 속에서 자연의 빛을 등지고 앉은 군중들은 가상에 열광한다. 가상 자체가 또 하나의 생태계로 간주되는 만큼, 서상희의 [가상정원]은 가상만으로도 충분할 법한데, 실물 또한 중요시 된다. 관객이 빛을 통해 상호작용하는 작업을 위해 약간 어둡게 연출된 전시장에서 실제 식물은 입체 스크린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그 스크린은 하얗지도 않고 울퉁불퉁해서, 영상에 담긴 이미지를 변형시킨다. 정보의 관점에서 본다면 노이즈다. 


식물은 빛을 필요로 하기 때문인지, 공간에 편재하는 빛의 일렁임은 노이즈의 부정적 측면을 상쇄시킨다. 가상은 실제와 만나서 불투명해진다. 실제 또한 가상을 만나 불투명해 진다. 벽에서 반사되고, 때로 식물에 직접 투사되는 이미지는 자연적 존재에 변형을 가한다. 작가는 실제와 가상이 함께 연출하는 불투명한 망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여기에서 관객은 실제와 가상이 융합된 스펙터클을 단순히 소비하지 않고, 상호작용할 것을 요구받는다. 식물에 전시장에 비치되어 있는 후레쉬, 또는 관객이 소지하고 있는 스마트폰 불빛을 비추거나 만지면, 빛의 양을 감지하여 소리(인공적 사운드)를 내게 하는 장치가 그 역할을 한다. 디지털 언어는 아나로그인 식물에게 소리를 내게 해준다. 실제 식물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바람이 지나가면서 소리가 날지언정 식물 자체는 동물처럼 그 내부에 입과 항문을 이어주는 빈 공간이 없기에 소리를 낼 수 없다. 문명은 자연을 변화시키고 그 역도 성립된다. 서상희의 가상정원은 문명과 자연이 공진화하면서 예술에 끝없는 영감을 제공함을 예시한다. 

  

출전; 대구문화예술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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