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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와 다문화, 그리고 삶의 연대

이선영

이주와 다문화, 그리고 삶의 연대

    

이선영(미술평론가)

    

들어가며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현대 미술을 조망하는 대전 시립미술관의 특별전 ‘헬로우, 시티!’의 주제는 크게 ‘영원’, ‘환상’, ‘재생’, ‘삶과 죽음’, ‘탄생’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같은 날 개막한 ‘호주원주민 미술; 꿈의 여정’도 같은 비슷한 주제를 공유한다. 여러 주제 중에서 ‘이주와 다문화’라는 이번 강연의 주제는 전시된 작품들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강연은 11명의 국내외 참여 작가 중에서, ‘이주와 다문화’라는 주제와 관련된다고 생각되는 세 작가/팀(리나 베너지, 이사벨&알프레도 아퀼리잔, 마리아 네포무체노)의 작품을 포함하여, 그와 관련된 국내외의 현대미술 작품 80여점을 같이 보면서, 이 주제가 현대 사회와 미술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결국 타자와의 공존을 위한 소통, 그리고 그러한 소통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삶의 연대에 예술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술적 모색은 타자가 결국은 동일자의 몸통임을 보여준다. 요컨대 타자는 부차적인 것으로 재현되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 문제의 핵심으로 제시된다. 


동일자(중심)와 타자(주변)의 보이는/보이지 않는 전쟁과 경쟁이 지배하는 근대와 근대 이후의 세계에서, 예술은 한가로운 장식이나 잉여이기를 그치고, 그러한 세계와 치열하게 상호작용해 왔다. 특히 ‘헬로우, 시티!’전에서 조명하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현대미술은 근대에 가속도를 붙인 세계화의 파고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고자 했다. 정체성은 추상적 본질이 아니라 구체적 관계의 문제이다. 그것은 중심/주변부로 갈라진 세계 속에서 더 좋은 삶의 기회를 찾아 떠나는 이주의 역사이기도 했다. 이동은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에서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그렇게 새로운 삶의 좌표에 던져진 자들의 자리 잡기 과정에서 여성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여성은 추상적 공간이 아니라, 구체적 자리를 담당해 왔던 것이다. 강연은 편의상, 세계화의 반작용으로서의 종족적 감수성, 실제 또는 상상으로 떠나는 이동 또는 유목의 감수성, 그리고 대안적 삶의 터전을 일궈나가는데 있어서 핵심적이었던 여성적 감수성 등으로 나누어 진행되지만, 세 항목은 끊을 수 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1. 근대 열강의 제국주의가 낳은 원시적 감수성


화려한 르네상스 문화를 낳은 상업자본주의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근대는 서구 유럽의 헤게모니를 가능케 한 원동력이다. 그때 성립된 주도권은 근대이후의 국면까지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밝혔듯이 자본의 축적을 가능하게 한 금욕주의적 종교관이 큰 역할을 했다. 동양의 불교도 금욕주의를 말하지만, 천국까지 이어지는 삶 을 보장할 현세적 실천의지로서의 금욕주의는 서구에 특수한 것이다. 그것이 물질적 차원의 발전을 포함해 지금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 진보주의를 낳았다. 개별적으로 소유한 보물이나 재물은 조직화된 사회적 관계망을 타고 흐르면서 생산과 소비의 주기에 포함될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자본이 된다. 자본주의에서 생산력을 진일보시켰던 과학기술의 경우, 근대 이전에는 동서양이 비슷했거나 오히려 동양이 앞서기도 했다. 수 백 년 간 서서히 이루어진 근대화가 19세기에 절정에 이르면서, 자본주의의 중심에서 주변에 대한 지배도 더욱 공고해졌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단계를 거치면서 주변을 폭력적으로 동화해 나갔다. 식민지는 노동력과 자원을, 나중에는 새로운 소비시장을 제공해 주었고 그들 각자가 속해 있던 전통으로부터의 탈피를 야기했다. 중심/주변은 일방적인 지배와 억압이기 보다는 어느 정도 성장을 공유한다. 그러나 차이는 유지되거나 점점 확대된다. 중심과 강하게 동일시하는 집단은 주변부에서 또 다른 주변부를 만든다. 근대예술은 이러한 주변화와 관련된다. 중심에서도 사회로부터 소외된 ‘저주받은 예술가’가 생겨났다. 모더니즘은 보다 내향적으로, 아방가르드는 보다 외향적으로 이러한 소외를 극복하고자 했으며, 이는 전통에 비교하여 진보적인 것이라 여겨졌다. 근대는 자율적이고 순수한 예술을 낳았다. 민족을 대변하는 박물관과 미술관이 국가에 의해 집중적으로 건설된 때도 근대이다. 이러한 과정을 뒤늦게 압축적으로 실현되었던 주변부는 중심에 대한 추종과 거리두기를 동시에 수행한다.



Maria Nepomuceno의 작품



식민지배에 대한 대안적 움직임 속에서 자민족의 전통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다. 그것은 지배계급에 의해 보존되어온 박제화 된 전통문화나 세계화 속에서 경쟁 중이었던 다른 국가의 자본에 맞서 급조된 민족주의와도 차이가 있다. 그것은 원시라고도 할 만 한, 보다 긴 시간으로 역행(퇴행과는 구별되는)이다. 가령 이번 전시에서 브라질 태생의 작가 마리아 네포무세노(Maria Nepomuceno)의 작품 [색의 신들에게 바치는 제물]에는 종족의 무의식적 우주가 펼쳐져 있다. 여기에는 유리섬유 및 수지같은 산업사회의 재료도 포함되지만, 밀짚, 비즈, 도자기, 철, 그릇, 도자기, 조롱박같은 전통적 소재가 주를 이룬다. 이러한 재료들을 엮어나가는 방식은 근대적 의미의 예술보다도 더 오래된 전통이다. 작가가 개발한 ‘나선형 로프 코일 바느질(sewing coils of coloured rope in spiral configurations)’은 남미의 공예 전통과 똑같지는 않지만, 무한정으로 뻗어나가는 연결망의 한 축을 그 전통에 기댄다.

    

2. 이주에서 항구적인 유목으로


세계화는 어느 날 때가 돼서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중심으로부터의 시장 확장으로부터 추동되었다. 오늘날 가장 보편적인 것은 시장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체험되듯이 시장 지배적 질서는 비대칭 관계를 깔고 있다. 마찬가지로 자본은 세계 어디든 자유롭게 이동하지만, 노동은 그렇지 않다. 그 점은 시장이라는 보편적 질서를 진정한 보편성으로 간주할 수 없게 한다. 인류 보편적인 가치가 자유나 평등, 인권이라면 말이다. 지금도 지중해를 건너는 아프리카 지역의 보트 피플에게 자유는 죽음을 담보로 한 엄청난 도전이다. 그들에게 자유는 태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투쟁해서 얻어내야 하는 것이다. 전통으로부터 벗어난 근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이동은 대개 근대의 식민 지배를 통해 비슷한 문화권이 된 중심을 향한다. 대량 살상과 난민을 야기하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종교 분쟁 등 자국 내의 문제에 한정되지 않는다. 


전쟁은 대개 국제적 자본이 얽힌 이해관계의 산물이다. 한국의 분단이 남과 북의 문제만은 아니듯이 말이다. 1세계는 자기이익에 따라 제3세계의 독재정권을 뒤에서 지지하기도 한다. 1세계에서 난민이나 테러문제는 외재적이지 않다. 그것은 유럽 열강들이 산업화시기에 경쟁적으로 식민지에 빨대를 꽂아온 결과이다. 북미의 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호주 원주민들 역시 백인들로부터 집단적으로 학살당했고, 지금은 보호구역에서 이런저런 관광사업과 관련된 것으로 생존한다. 세계화를 통해서 더 비좁아진 공간에서 자기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이때 유목민의 정신이 되살아난다. 많은 자원을 집중적으로 소비하는 지본주의 시스템 때문에 사막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지구촌에서 유목민은 좋은 의미든 아니든 현대에 걸맞는 정체성으로 다가온다. 떠돌아야하는 상황이 강제적인 것도 있는 만큼 유목이란 결코 낭만적일 수 없다. 각지에서 떠나온 유목민들은 다른 유목민이나 정착민과 땅과 바다를 공유한다. 




Isabel Aquilizan & Alfredo Aquilizan의 작품



자크 아탈리가 말하듯이 오늘날 요구되는 것은 유목민으로서의 자질과 유목에 필요한 물품이다. 이전의 유목민이 작은 공예품 등을 가지고 다녔다면, 오늘날의 유목적 예술가는 스마트 폰에 자기 작품을 담아 다닌다. 그들은 경계들을 지나면서 이것과 저것을 연결 짓는다. 자발적으로 또는 타발적으로 쫒겨 간 개체들이 다른 곳에 적응하는 과정은 새로운 진화의 동인이다. 유명한 예는 동서양이 만나는 자리에 생겨난 도시의 문화적 풍요로움이다. 이 전시에서 필리핀 출신의 작가 이사벨 & 알프레도 아퀼리잔 (Isabel Aquilizan & Alfredo Aquilizan)의 [항로: 다른 세상을 계획하다]는 기회를 찾아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배를 표현한다. 수출입 상품을 과적한 컨테이너처럼 실린 것은 세계 각지에서 버려진 골판지들을 모아 만든 것이다. 배가 하나의 건물이나 도시이기도 하듯, 거기에는 이것저것이 만나 건설된 소우주가 있다. 벽을 따라 수평선을 맞춰 붙여놓은 바다 풍경들은 미지의 세계들에 대한 설렘이 가득하다.  

    

3. 자리 잡기와 여성


근대사회는 변화만이 항구적이라는 역설을 낳았다. 그러나 변화만 요구된다면 그 또한 고통일 것이다. 진정한 변화는 정지 또한 필요로 한다. 먼지처럼 떠돌지 않으려면 결정적인 방향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중심으로, 또는 주변으로 이동하는 와중에 인간은 잠시 자기가 속한 위치한 곳에서 중심을 잡는다. 이제 전통사회의 신화와 종교 등에서 언급하는 신성한 중심—그것은 권력의 중심으로 이데올로기화되기도 한다—은 없다. 다만 중심을 만들어가는 자리 잡기가 요구될 뿐이다. 실낙원 같은 상실감보다는 변신의 감각이 요구되는 자리잡기의 과정은 특정 공간을 차지하는 문제가 아니라, 시간과의 관계이다. 상징적 공간을 재현함으로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축을 따라 흘러가며 향유하는 것이다. 자리에서는 하나의 거대 서사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담론들이 발생한다. 종교학자 조너선 스미스가 [자리잡기]에서 말하듯이, 자리(place)는 공간(space)에 비해 구체적이다. 


근대과학과 자본이 촉발한 것은 추상적인 공간이다. 이에 비해 자리는 구체적이다. 자리의 대표적인 예는 고향이나 집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영원한 정주에의 희망처럼, 향수의 대상이 되었다.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을 나누고, 이를 각각 남성과 여성으로 할당한 근대적 분업은 자리를 여성에게 배정했다. 여성은 집이다. 집은 주체를 보호하지만 억압하기도 한다. 생명을 낳고 보살피는 집으로서의 여성은 안정감을 요구한다. 그것은 문화적인 만큼이나 생물학적이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식의 낭만적으로 포장된 남녀 관계는 유기체로서의 자기 보존 본능이 강하게 스며있는 것이다. 이 또한 생명공학의 시대에 변화를 요구받는다. 그렇지만 고향-자리에 대한 원초적 향수는 남아있다. 이 모성적 공간은 단지 무엇인가를 담는 주어진 공간이 아니라, 상상과 희망에 의해 창조된다. 이때 인간은 ‘위치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존재하게 한다’(조너선 스미스) 




Rina Banerjee의 작품



이 전시에서 인도 출신의 작가 리나 베너지(Rina Banerjee)는 아기를 보호하는 요람같이 생긴 구조물부터 ‘떠돌아다니는 힌두여신(Devi)’까지, 여성을 떠올리는 도상을 제시한다. 치마 폭같은 지붕을 가진 요람 안에 놓인 것은 해골이기도 한데, 여기에서 삶과 죽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골동품 도자기 인형머리 등이 조합된 여신에겐 수많은 다리가 달려있다. 그것은 이 유동적인 현대 사회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서 물밑의 오리발 같은 끝없는 움직임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듯하다. 앞으로 벌린 팔 같은 날카로운 구조물은 여성에게 기대되는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있다. 그녀의 작품에는 상호 이질적인 것들이 구슬 꿰듯이 엮여 있다. 그리고 만들기 자체에 대한 즐거움이 묻어난다. 그것은 순수성과 유일성을 강조하는 가부장적 문화가 주변화 시킨 것이다. 그녀의 작업은 가부장적 권력으로 점철되어 있는 ‘History’ 아래에 억압되어 있던 ‘Herstory’를 들려주려 한다.

  

출전; 대전시립미술관 특별전시연계 시민강좌(요악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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