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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한(Anna Han) / 오감이 교감하는 푸른 방

이선영

오감이 교감하는 푸른 방

  

이선영(미술평론가)

  

몇 년 전 블루를 주제로 한 기획전에서 애나한(Anna Han)의 작품을 처음 접했다. 전시가 열린 살롱 드 에이치의 한 켠에 푸른 네온 빛으로 연출한 공중전화 부스를, 다양한 바다 빛을 연상시키는 단색 회화들과 어우러지게 한 작품이었다. 청소년기에 한국을 떠나 오랫동안 타국생활을 한 작가의 이력을 떠올려 본다면, 바다 건너 먼 곳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깔려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스펙트럼의 가장자리에 속하는 푸른색은 먼 곳을 상징한다. 경험적으로 볼 때도 따뜻한 색일수록 가깝게 느껴지고 차가운 색일수록 멀게 느껴진다. 그러나 타오르는 불꽃을 보면 심지에 더 가까이 있는 푸른빛은 노랑이나 붉은 빛 보다 더 뜨겁다. 단파장의 블루는 더 강한 에너지를 가진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어떤 색이건 멀어지면 흐려지면서 파란 빛을 띤다고 말한다. 공기층이 색을 덮기 때문이다. 맑게 갠 날 하늘은 빛나는 파랑이다. 물과 공기는 실제로 파란색이 아니지만, 파랑으로 느껴진다. 유리병에 든 공기나 물은 아무 색도 없지만 깊은 바다는 파랗게 보인다. 






공간이 깊어지면서 모든 색이 파랑 속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바 헬러는 파랑을 경계가 없는 무한한 차원의 색이라고 평가한다. 물리학적 색채론에서 블루의 위상을 생각할 때, 그 색에서 나오는 감성을 이해할 수 있다. 블루는 여기가 아닌 저기에 있는 색이다. 여기라면 저기를, 저기라면 여기를 그리워하는 것이 인간이다. 여기의 돌멩이도 저기에 있으면 빛나는 별이 된다. 광물학적으로 돌멩이와 별은 질적 차이를 가지지 않는다. 저기에 있다는 사실 하나로, 그곳에 가기 쉽지 않다는 것 하나로 거기는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푸른색은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처럼 절대적인 거리와 관련된다. 블루는 저 먼 곳에 있는 하늘같은 초월적 위상, 즉 영원함을 내포한다. 그러나 영원이란 현실이 아닌 희망사항이다. 아련한 향수에 불가능과 좌절의 기미가 덧붙여지면 멜랑콜리가 된다. 푸른색이 주조인 이번 전시에서 필자는 향수를 생각했지만, 청주시립미술관의 거대한 전시 공간에 다시 풀어놓은 애나한의 작품은 단순한 향수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전의 작품도 그랬듯이, 기하학적 느낌을 주는 외곽선들의 깔끔함과 가공하지 않은 기계/사물의 병치에서 나오는 쿨 한 도시적 감수성은 고향/자연을 향한 원초적 향수와는 다소간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의 공간은 높이 10m, 길이 20m나 되는 직사각형의 거대한 방으로, 원래는 방송국의 공개방송 자리였다고 한다. 방송촬영을 위한 하얀 공간은 이번 전시를 위해 짙은 북청 색으로 칠해졌다. 최초의 용도와 마찬가지로 그곳은 마치 블루 스크린처럼 촬영된 영상이 편집되어 다른 배경과의 조합의 용이함을 위한 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곳은 애초부터 어떤 내용을 내포한 질적 공간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담을 수 있는 중성적인 공간이다. 마치 도시처럼, 어디에서 기원했든 모든 것을 코드화하여 배열하거나 쌓아놓는 공간이다. 코드로서의 속성은 색도 예외가 아니다. 작가는 ‘2185C ONTO THE GREEN SHADOW’란 단어를 전시장 귀퉁이에 놓인 검은 우산 아래 비밀스럽게 깔아 놓았는데, 그것은 페인트로 상품화되어 나온 블루의 표준색과 관련된 기표이다. 








사회적 약속인 표준색이란 것이 있어도, 그것이 어떤 표면을 거쳐 드러나느냐에 대해 차이가 있다. 여기에서 작가는 나만의 블루를 고집하지 않는다. 블루로 유명한 작가 이브 클라인은 자기의 색으로 특허까지 냈지만 말이다. 작가는 색채에 대한 탐구의 일환이기도 한 이 전시가 반드시 블루가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블루/색은 작가의 자기표현 바깥에 놓여 있다. 특히 상품 및 사물의 날카로운 외곽선과 결합할 때, 반 고흐의 소용돌이치는 밤하늘 같은 뜨거운 표현으로서의 색과는 더욱 멀어진다. 그러나 들쭉날쭉한 자연재료의 색이 아닌 화학적으로 만들어진 색 역시 확실성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차이는 오류를 낳곤 하지만, 천이나 네온 등 여러 재질의 재료가 동원 된 전시에서 차이는 즐길만한 것이 된다. 작품은 장소 특정적이면서도 화이트 큐브에 가까운 애매한 공간에서 출발한다. 현실이 부분적으로만 발췌되어 재구성되는 애나한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속했던 곳이기 보다는 속하고 싶은 공간이다. 


친숙하기 보다는 미지의 공간이다. 특정 인간이 속한 공간이 아니라, 개인을 초월한 구조적 공간이다. 주체가 있다면 그것은 공간의 중심이 아니라, 공간에 편재해 있을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속하고 싶은 공간이 드물기에, 작가는 공간을 재현하지 않고 구축한다. 누구든 낯선 생태계에 던져지면 자신의 좌표를 확실히 하기 위해 공간을 다시 짜게 된다. 인간은 낯선 상황에서 자기보호를 위한 마법의 원을 긋는다. 현대인에게 주어진 공간은 대개 항구적이지 않고 일시적이지만, 그렇게나마 인간은 자신이 속한 여기로부터 상징적 공간을 재구축하려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 공간을 전유한다. 몇몇 특권적인 계층만이 일시적 전유가 아니라 항구적인 소유가 가능할 것이다. 풍경이자 실내에 들어온 것 같은 애나한의 작품에서 이전 시대의 안팎 풍경에서와 같은 안정감은 없다. 이전 시대의 풍경에는 사물은 물론 그 안에 있는 사람마저도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듯한 확실함이 존재한다. 








수 백 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그 푸른색이 바래지 않은 [베리 공의 화려한 기도서]를 떠올려 보라. 그래서 우리는 전통적인 작품을 볼 때 안정감을 느낀다. 이러한 고정성을 유동적인 것으로 변화시킨 중요한 미술 사조는 인상파이다. 여기에서 허공의 먼지 입자처럼 떠도는 분석적인 색 점들은 매순간 결합과 해체를 거듭하면서 화면을 만든다. 인상파는 그림자를 이전시대처럼 갈색 계통이 아니라 푸른색으로 칠했다. 인상파 화가들은 이전 시대의 화가들보다 자연을 더 자세히 관찰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시대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조형언어의 자율성을 구축하는데 일조했다. 그것은 고정된 전통과 달리, 유동적인 근대 사회 및 근대적 감수성을 반영했다. 애나한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푸른 색 면들로 이루어진 추상화는 인상파로부터 시작된 혁명의 결과일 것이다. 거기에 더해진 문자의 열은 평면성을 더욱 강조한다. 전유든 소유든, 넓은 공간을 차지할 수 없는 현대인에게는 실제적 이동보다는 자리 바꾸기를 선호한다. 


매번 다른 이야기를 전해주기 위해 동원되는 사물은 달라지고 배치도 달라질 것이다. 이야기는 계속 진행될 것이기에, 선택된 사물과 그 배치는 애초부터 가변적이다. 텍스트를 포함하여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작가가 동원한 것들은 징검다리처럼 띄엄띄엄 놓인다. 사물의 밀도가 높지 않아 생기는 훌렁훌렁함은 단지 전시장이 넓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변형이 가능하기 위한 공백이다. 산문이 아닌 시로 씌여진 텍스트들처럼 말이다. 특별히 시가 아니더라도 문자의 간격이 없다면 메시지의 전달 자체가 불가능하다. 서사가 시간을 바탕으로 한다면, 공간적 여백은 그러한 시간적 진행에 할애된 잠재성이다. 전체 공간과 대화적 관계에 있는 이 작품은 단순히 물리적이기 보다는 상징적이다. 상징적으로 구축된 공간은 주춧돌을 놓는 식의 거창한 행위까지는 아니어도, 자신이 나아가야할 새로운 세상을 향한 베이스 캠프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주어진 공간 전체를 총괄하는 작품을 해왔던 애나한의 작업은 상징적 우주의 (재)구축이라는 인간의 원초적 행위와 관련된다. 심미적이기는 하지만, 장식성과는 거리가 있는 스타일이 그것을 말해준다. 






작가는 공간이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대로 융통성 있게 펼치거나 접는다. 작품에 따라서는 공간 전체를 총괄하는 스타일이 아니어도 좋다. 올해 2월 갤러리 바톤에서 열린 개인전이 그러했다. 작가는 한여름에 오픈한 이번 전시에서 사막 같은 뜨거운 도시를 푸른 공간으로 전치시킨다. 푸른색은 냉 감이 있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우리가 파랑을 차갑게 느끼는 이유는 추울 때 파랗게 변하는 피부와 입술 등의 경험에 근거한다고 본다. 얼음도 눈도 푸른빛을 낸다. 파랑은 흰색보다 더 차갑다. 흰색은 빛을 의미하지만 파랑은 그늘을 뜻하기 때문이다. 에바 헬러는 파랑이 시각적으로 공간을 개방하기 때문에 냉기가 밀려드는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전시장에서는 9미터 길이의 냉 감 소재의 천이 내려와 서큘레이터가 만들어내는 공기의 이동에 반응하여 하늘거린다. 길게 드리워진 천들은 이 거대한 푸른 방을 깊은 공간으로 전치시킨다. 바다가 깊다면 짙푸른 저녁이나 새벽도 깊다. 벽에 걸린 둥근 조명은 서늘한 달을 연상시킨다. 


세계 어디에서나 보이는 달은 향수의 상징이다. 달은 태양과 달리 시간성에 더 민감한데, 작가는 마침 크기가 딱 적당하여 맞추지 않고 구입한 이 둥근 조명을 조정하여 숨 쉬는 느낌을 부여했다. 맞은 편 벽에 빛으로 만들어진 문은 개방감을 높인다. 귀퉁이에 놓여있거나 천정에서 내려오는 검은 우산은 따뜻한 느낌을 주는 알전구들의 빛을 가려 간접조명으로 만든다. 벽의 둥근 조명은 달은 연상시키지만, 우산이 활용된 조명은 샹들리에를 연상시킨다. 안과 밖의 구별은 없다. 이전의 ‘블루’ 전에서의 작품과 연관되는 것은 블루라는 코드는 물론이고, 빛과 소리이다. 다른 것은 시적 텍스트의 첨가이다. 작업 단상을 비롯한 비망록이야 늘 있었겠지만, 애나한의 작품에서 텍스트가 조형의 중요한 요소로 끌어내진 것은 근 몇 년에 한정된다. 전시 부제인 ‘Fear Me Not’는 이제는 LED에 밀려 고풍스러운 기운마저 풍기는 네온으로 된 텍스트에 포함된다. 어두운 도시에서 빛나는 간판처럼 멀리서도 보이는 이 텍스트는 비딱하게 걸려 있다. 






두려움은 예술가의 실존에 필연적이다. 그것은 작가 말대로 ‘나이가 먹을수록 더 편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상황’에 대한, 영원한 유년기를 감내하거나 향유하는 예술가로서의 자의식과 관련된다. 작가는 전시부제 ‘Fear Me Not’과 전시를 이루는 조형적 요소, 즉 ‘큰 방, 큰 파랑, 큰 면, 그리고 선, 점’을 색만 다르게 해서 뒤섞어 써 놓았다. 블루와 옐로우로 빛나는 텍스트는 내용과 형식에 빛과 그림자의 관계를 부여한다. 가장자리가 날카로운 평면들로 이루어진 설치작품은 하드에지(Hard Edge) 추상처럼 자칫 철지난 모더니즘처럼 보일 염려가 있다. 회화를 가장 회화답게 하기 위한 형식적 장치를 이성적으로 계산하는 모더니즘의 전통이 있다. 그러나 새로운 내용에서 생성되는 말랑말랑한 형식이 물화되는 국면인 형식주의가 세련된 장식으로 변질되는 것은 한끝차이다. 작가가 2014년부터 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설치작품에 첨가해온 텍스트는 모더니즘이 물화시킨 시각성을 넘어서기 위한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텍스트는 시각적으로 다 보여주지 못한 것을 말로 대신하는 어설픈 수단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저런 재료로 물질화된 텍스트는 시각성 뿐 아니라, 시간성을 고무한다. 공간적 범주와 시간 사이의 차이를 생각하면, 이 전시에서 텍스트는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핵심적이다. 한 줄로 배열된 문자를 읽는 것에는 시간성이 요구된다. 달 모양의 조명에 숨 쉬는 리듬을 부여한달지, 천정에서 내려오는 쇠 봉이 궤종시계처럼 움직이고, 그 끝에 달려 있는 LED 조명이 바닥에 일정한 간격으로 깔려 있는 아크릴 거울들과 반응하여 난반사하는 공간은 그 자체가 시간에 의해 활성화되는 공간이다. 여기에 스피커로 공간에 울려 퍼지는 컴퓨터로 만든 사운드 또한 가세한다.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시간성은 물리적이거나 상징적인 장치에 의해 발생한다. 시간성은 일점 원근법이나 결정적인 순간을 요구하는 고전적, 근대적 공간을 넘어서려 한 현대미술에서 중요 요소였다.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선택한 블루, 그 무한한 색의 계열에 내재된 차이 자체가 시간적 개념이다. 보다 큰 차원에서의 시간성은 설치작품에 있는 연극성에서 찾아진다. 






애나한의 작품은 관객이 거대한 푸른 공간에 진입해서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지각적 체험을 중시하는 것이다. 단색화처럼 보이는 평면마저도 그라데이션을 넣어서 가상적 움직임을 주었다. 빛이 포함된 평면인 그라데이션은 평면과 텍스트 모두에 적용된다. 완전한 문장은 아닌, 애나한의 시적 텍스트는 전체 공간에 띄엄띄엄 놓여 진 것들처럼 비약이 있다. 그러나 시에 포함된 내용처럼 ‘고요 속에 이어진다(But it is continuum in solitude)’ 그것은 동양화의 여백이나 메아리까지 감안한 음악과 같다. 하늘거리는 천위에 씌여진 텍스트 뒤에는 푸른색 반짝이들이 깔려있다. 거기에는 계단 모양의 구조가 달려 있어서, 그 아래 떨어져 있는 푸른색 반짝이들을 시어에 나와 있는 ‘심연의 빛(the light from abyss)’으로 만든다. 언어 자체가 기표와 기의의 분리에 기초한다. 시는 산문보다 기표의 표류가 더 심하다. 이 전시에서 블루는 텍스트를 포함하여 간격이 있는 것들을 연결시켜주는 매개로 작용한다. 각각의 요소보다는 요소들의 관계망이 중요한 애나한의 작품은 주체를 표현하거나 객체를 반영하는 대신에, 관객마다 다르게 엮어낼 관계의 지점들을 제시할 뿐이다. 이 때 블루는 하늘이나 바다처럼 만물이 떠도는 넉넉한 바탕이 되어준다. 

 

출전; 청주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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