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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와 함께하는 이야기

이선영

이미지와 함께하는 이야기

  

이선영(미술평론가)

  

그림 같은 여행


‘그림 같은 여행’이라는 전시부제는 이미지와 여행의 관계를 암시한다. 통상적으로 여행(journey) 뒤에는 많은 이야기가 따르고, 이야기를 듣는 것은 여행(trip)에 해당된다. ‘그림 같은 여행’ 전의 보다 구체적인 전시 내용은 이야기와 이미지의 만남이다. 이야기 없는 이미지의 극단적인 예는 추상화라고 할 수 있지만, 추상화조차도 작가의 의도나 미술사적 맥락 등, 이야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추상미술은 이전의 재현주의 미술이 그러했던 것과는 달리, 이야기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이미지에는 이야기가 따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야기가 따른 다면 그것은 소설처럼 긴 것일 수도 있고, 시처럼 압축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이미지라는 보다 즉각적인 언어에 의해 순간적인 깨달음처럼 이야기가 와 닿을 수도 있고, 텍스트나 컨텍스트의 부재에 의해 관객과의 소통은 보다 긴 우회로를 거쳐야 하는 수도 있다. 여기에 참여한 7명의 작가들은 주로 책의 삽화나 캐릭터 디자인, 카툰 등, 일종의 응용미술이라 할 분야에 종사해왔다. 




김인호



윤예지



그들은 주로 우리의 일상 속에 편재하는 이미지들을 생산하고 소통시켜온 문화생산자들이다. 미술관에서의 전시는 기능이나 의미로부터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다. 의미나 기능 역시 물리적 조건 이상의 상상력이 요구된다. 구체적인 물건이나 환경으로부터 독립되는 전시에서 상상력은 전면에 놓인다. 현실 속에서 유통되는 최종적인 결과물은 작업에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현실화된 것보다 더 많은 잠재적인 영역이 있을 수 있고, 이 전시는 후자의 소통에 집중한다. 그렇다고 이 전시의 작품들이 ‘순수’한 조형 예술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장르 간 구별이 좀 더 유연한 포스트 모던한 흐름에 의해 순수/응용의 구별은 느슨해진 면이 있다. 각 장르의 순수화를 꾀하던 근대적 전통에 의해 이미지는 이야기와 분리됨으로서 서로가 빈곤해졌다. 이 전시는 이러한 결핍을 극복하기 위해 이미지를 통한 이야기, 즉 여행을 권유한다. 평소 그들의 작품과 함께 있었던 텍스트와 컨텍스트라는 지지대가 없기에 여행은 보다 자유로울 것이다. 

 

 참여 작가들


박오롬의 작품에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인물이 전면에 있다. 작가가 작품으로 불러 세운 인물은 전형성을 띄며, 소년과 소녀, 할아버지와 아줌마, 끼 있어 보이는 소녀까지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들에게는 따로 말풍선 같은 것은 달려 있지 않지만, 표정 하나로 어떤 이야기를 함축한다. 초상화 스타일의 작품에서 귀여운 푸른 눈의 금발소년은 다른 작품 속의 단발머리 소녀와 함께 앞을 응시한다. 그들의 눈에는 사람의 실루엣이 비춰진다. 그것은 이야기란 늘 인간의 이야기라는 것, 사건이란 어떤 전형적 인물과 또 다른 전형적 인물이 만나는 것임을 알려준다. 인물이 아닌 사물이 나오는 작품에도 이야기가 있다. 푸줏간의 고깃덩어리처럼 매달린 우유 곽의 단면이 살코기인 작품은 ‘인간적’인 삶을 위해 희생된 다른 생물체를 환기시킨다. 그것은 인간의 얼굴만큼이나 사물의 단편도 말을 건넬 수 있음을 알려준다. 현대인은 사물에 더 많이 에워싸여 있기에 인간 없는 이야기도 설득력이 있다. 



박오롬



김인호


김인호의 작품은 인물인지 동물인지 알 수 없는 유기체가 둥그스름한 형태와 따스한 질감으로 표현된다. 그것들의 기이하게 보이는 것은 과감한 단순화 때문이다. 어떤 것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변형의 과정 중에 있다. 작가는 이러한 유기체들의 모음을 ‘기미노 동물원(Gimino zoo)’이라고 표현한다. 그것들은 작가만의 상상적 동물원인 셈이다. 작품이 늘수록 미지의 생명체의 숫자도 늘어날 것이다. 상상의 가지치기가 연속되어 생겨난 일종의 괴생물체들은 동양의 고전 [산해경]같은 스타일이지만, 집단의 상상이 아니라 개인의 상상이라는 차이가 있다. 그의 괴물들은 구멍처럼 생긴 눈이 특징적이다. 얼굴에 비해서 크고 다른 기관이 생략되어 있을 때도 눈구멍 자리는 분명하다. 김인호의 작품에서 검은 눈구멍은 보는 눈이기 보다는 카프카의 [변신]처럼 주체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비상구로 다가온다. 변신하는 존재가 괴물이고, 괴물은 코드화된 세상에서 탈주를 꾀한다. 


윤예지의 작품에서 인물과 동물, 그리고 식물, 더 나아가선 광물까지 등장한다. 바다 위에 물개들이 둥둥 떠 있는 모습이 마치  파티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 [on the rocks]에서 동물은 인간들보다 더 자유롭고 유쾌하다. 유예지의 작품에서 인간은 동물처럼, 동물은 인간처럼 행동한다. 작품 [숲 속 깔맞춤]에서 호랑이, 표범무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하얀 두건을 함께 쓰고 달리는가 하면, 작품 [tropical falls]에서는 열대 과일들로 이루어진 우주 한 켠에서 표범이 책을 읽는다. 작품 [촛농 바다와 선양 항해자들]에서는 초와 성냥이 각각 빙산과 선원이 된다. 스스로 행한 행위에 의해 위험에 빠진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하다. 앞뒤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단편처럼 제시되는 작품들은 생략된 부분을 상상하게 한다. 많은 이미지들이 다양한 크기로 다닥다닥 벽에 걸려 있는 작품 [Sunday's Fantasy]는 관객이 보는 순서에 따라 각자 다른 이야기가 짜여 질 것이다. 



윤예지



한병호


한병호의 작품에는 오래된 사물이 함께 하며, 그 사물을 에워싸고 일어났을 이야기를 풀어낸다. 물론 그것은 과학적 역사가 아니라 예술적 고고학에 가깝다. 오래된 사물들은 낫, 놋쇠 숟가락, 작은 나무 실패, 단추, 비녀, 작은 성냥곽들, 시계부품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다양한 성냥곽들과 나비 이미지가 함께 한 작품에서 보여지듯, 그의 작품은 수집품같은 분위기가 있다. 그가 수집한 것들은 대부분 골동품 수준으로, 시간의 뒤안길로 퇴장한 물건들이다. 그것들은 한 때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이제 알아보는 사람만 알아보는 심미적인 대상이 되었다. 작가는 그것을 작품화함으로서 심미화 과정을 완성시킨다. 작가는 선택된 사물을 틀 안에 배치하고 액자틀과 사물 사이의 공간에다 무엇인가를 그린다. 사물과 예술 사이의 공간이 그의 작업 공간이다. 액자 가운데에 작은 나무 액자가 있는 작품은 그림 또한 머지않아 오래된 사물의 반열에 오를 것 같은 예감이 있다.   


유준재는 서커스같은 우주를 연출함으로서 동물과 인간을 포함한 구성원들의, 그리고 그들 간의 균형 잡기의 중요성을 말한다. 허공에 불쑥 떠 있는 기하적 구조들은 그 상징적 우주의 구성원으로 하여금 고도의 균형감각을 요구한다. 그의 작품에서 세계는 서커스의 무대로 비유되기에 충분하다. 그가 출판한 그림책 [균형](문학동네)을 보면 풍선을 닮은 거대한 푸른 점 위에서 균형 잡고 있는 젊은 삐에로가 보인다. 원뿔을 모자처럼 이고 있는 그 캐릭터는 균형을 잡지 못하면 바로 머리 위의 그것이 떨어질 것임을 표현한다. 이미지와 함께하는 문장들은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과 균형 잡기의 어려움을 말한다. 그에게 균형은 스스로 뿐 아니라 타자들과의 균형을 말한다. 타자는 사랑하는 이 뿐 아니라 동물들 또한 포함한다. 균형 잡기가 놀이처럼 행해지는 서커스 무대는 그 모든 구성원들이 긴밀한 그물망을 이룬다. 이러한 상황은 작업 뿐 아니라 사회와 우주에 대한 유비로 확장된다.   



유준재



오정택


오정택의 작품은 작업의 결과보다는 다양한 변수들이 경합하는 과정을 드러낸다. 그의 작업은 절대적 기준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상대성의 세계를 향한다. 그의 개인전 제목이 ‘비표준 매뉴얼’이었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그러한 상대성은 현실이 아닌 작품에서 극대화된다. 지평선, 또는 수평선이 화면을 가르고 그 위에 나무, 벽돌 육면체 등이 자유롭게 떠 있는 [everything is possible]에서 작품 속 단어 ‘possible’은 앞의 ‘im’이라는 부정적 접두어를 떼어낸다. 거기에는 작품에서만큼은 모든 것이 가능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의지가 담겨있다. 모눈종이 위에 실제 오리와 도널드 덕을 나란히 세워놓은 작품 [oviparous twins]에서는 현실과 허구의 관계를 보여준다. 글자들만으로 이루어진 작품 [진실의 조건]에서 관객은 작가의 생각을 직접 읽을 수 있다. 그는 여기에서 ‘누구에게는 6 다음이 7이 아닐 수 도 있고 누구는 3+2의 답이 4일수 있다지’라고 하면서 ‘진실의 조건’이 상대적임을 말한다. 


이 전시의 유일한 외국 작가 상하이 탱고의 작품은 한 칸 또는 몇 칸으로 나눠진 무대를 통해 이야기하는 만화적 어법을 구사한다. 광고인으로부터 출발했던 그는 이제 50만 명이나 되는 팔로워를 거느린 인기 만화 예술가가 되었다. 탱고(본명 Gao Youjun)가 출간한 [불면(sleepless; 睡不着)]과 [탱고, 꿈을 꾸다(Tango, I Have A Dream)]는 그가 꿈과 무의식을 포함한 광대한 영역을 무대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임을 보여준다. 가령 다양한 그림자놀이를 하는 동물들을 표현한 작품은 보이는 세계 너머에 대한 상상 실험을 하기에 적절한 무대로 나타난다. 그의 작품에는 약자에 대한 배려가 특히 눈에 띈다. 탱고는 상상 속에서 동물이나 사회적 약자를 주변에서 중심으로 이동시킨다. 이러한 역전 속에서 대중은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다. 흑백의 단순한 선으로 그려진 작품들은 따스한 공감적 웃음부터 촌철 살인같은 단상을 풀어놓는다. 


  

시간과 이야기


이 전시의 작품들은 상상을 위한 상상이 아니라, 현실에 뿌리를 둔다. 자연적 존재로서의 경쟁에 문화까지 가세하는 현대의 상황은 긴장된 국면을 조성하였고, 그만큼 사람들은 이완되기를 원한다. 가혹한 뉴스가 많을수록 유머 란도 풍성해지는 것은 실제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따스함보다는 냉소적 유머가 대세인 것은 어쩔 수 없다. ‘순수’ 예술은 현실에 괄호를 치곤한다. 남는 것은 형식적 관례가 되고, 그러한 관례에 관심을 가진 소수만의 리그가 되곤 한다. 그러면서 이미지는 대중과 멀어지고 단지 소모품이 전락했다. 그러나 현실에 뿌리를 둔 상상이 더 풍요롭다. 이전시대의 신화나 종교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풍요로운 것은 지속적이다. 지속적인 한 더 굳건하다. 하나의 가지가 잘려도 다른 가지가 보충이 되기 때문이다. 이 전시의 작품들은 차가운 현실에 맞서는 대안의 세계를 제시한다. ‘그림 같은 여행’ 전은 대안적 세계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전시의 작품에서는 종종 이미지와 함께 문장이 등장한다. 문장은 이미지와 상호보완하면서 의미를 전달한다. 




오정택



유준재




어떤 작품(오정택)은 문장으로만 되어 있는 것도 있다. 그것은 일종의 칼리그래피처럼 문장과 이미지를 일치시킨다. 작품 속 균형을 잡는 삐에로의 막대기처럼 한 줄로 첨가한 유준재의 문장들은 이미지를 더 선명하게 각인시킨다. 그러나 많은 작품은 이미지로 말한다. 이미지는 문장 없이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공간 예술인 이미지에 시간성이 개입함으로서 가능하다. 요컨대 이 전시에서 이미지와 함께 하는 여행에서 관객이 어떤 이야기를 읽거나 상상하는 것은 시간성의 문제이다. 시리즈 작업이나 만화처럼 여러 칸으로 되어 있다면 프레임의 순서에 따라서, 만약에 한 칸으로만 되어 있다면 어느 지점부터 보는가가 이야기의 실마리가 풀려질 것이다. 이미지와 문장은 전달방식이 다르다. 이에 대해 우리는 선적 문장으로 이루어진 시간예술인 소설의 이론을 참고할 수 있다. A.A 멘딜로우는 [시간과 소설]에서 언어는 연속적이고 선적이기 때문에 동시에 일어난 두 가지 이상의 경험을 전달할 수 없다고 본다. 


작가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효과적으로 구성해야 한다. 그것이 단순한 기술(記述)과 달리 서사의 예술성을 결정할 것이다. 다른 시간 예술은 결말을 향해 전진하기를 강요한다. 시간예술은 공간예술과 달리, 상하좌우 마음대로 시선을 옮길 수 있고 어떤 한 점에  오랜 시간 시선을 고정시킬 수 없다. 조형예술의 관람자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어느 크기의 부분이든, 얼마 동안이 됐든 어떤 순서로든 마음대로 바라볼 수 있다. 이 전시의 주제처럼 이야기가 있는 이미지의 경우, 시간예술과 공간예술이 상호보완 된다. 즉 말의 연속성과 이미지의 공존성이 협력한다. 이 전시는 각 매체가 가질 수 있는 특성에 한정되지 않고, ‘공간예술에서 시간적 연속성을 그려내고, 시간예술을 통해 공존적 환상을 전달하려는 노력’(멘딜로우)을 통해 각 매체가 가질 수 있는 한계를 극복한다. 그것은 ‘그 매체의 시간성과 공간적 한계 내에서 측정 될 때 최대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레싱)는 고전적 논리를 극복할 수 있다. 계몽주의 시대 레싱의 관점은 모더니즘에서 극대화된다. 




박오롬



한병호



상하이 탱고



모더니즘의 옹호자 그린버그는 여러 개별 예술에서 불필요한 관례들을 점차 제거하는 환원 과정을 통해 시간을 초월하는 단계에 도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신념은 회화를 단순한 평면으로 한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것은 결국 예술을 ‘어떤 한 순간에 회화로서의 자기작품의 동일성을 유일하게 확립하는 관습들을 발견하는 것에 한정하는 것’(마이클 프리드)으로 축소시킨다. 물론 이렇게 해서 구현된 평면성의 조건에 의해 근현대의 그래픽 디자인도 발전될 수 있었다. 반대로 근대 디자인으로부터 근대 회화가 얻어낸 영감 또한 분명하다. 그래서 미술사가들은 모더니즘과 대중문화는 근대에 태어난 쌍둥이 분체로 간주하기도 한다. 모든 것을 분리시키는 근대적 독단을 거부할 필요가 있다. 멘딜로우는 예술가의 중대한 실험이나 개혁은 그들 각자의 매체에 고유하는 특질의 완전한 개발에만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체의 특질을 초월하고 한정적인 매체의 엄격한 용량을 넘어서는 효과와 환상을 전달하려는 노력 때문이라고 말한다. 삶에 대한 철학적 단상까지 포함하여 다양한 장르의 특성이 함께 녹아있는 그림 같은 여행전은 융복합 시대의 패러다임을 보여주고 있다.


출전; 천안 예술의 전당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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