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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영 / 아직 끝나지 않은 여행

이선영

아직 끝나지 않은 여행

  

이선영(미술평론가)

  

박선영의 작품은 자신의 경험, 그리고 그러한 경험들이 모여 만들어졌을 정체성을 담은 ‘그릇’이다. 그 그릇은 대체로 넉넉하지만 때로 내용물이 넘쳐 흐르기도 한다. 물론 경험 그자체는 그것이 제아무리 특별해도 예술이 될 수 없다. 경험은 예술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작업이라는 과정을 통해 경험은 완성된다. 그러지 않아도 충만한 경험은 그자체로 예술일 것이다. 또는 종교일 것이다. 거기에는 사족을 붙일 필요가 없고, 전유를 위한 재구성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 그런 자족적인 경험은 극히 드물다. 그래서 예술이라는 것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별것 아닌 경험도 충만한 경험으로 완성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문화도 그러한 역할을 하지만, 예술은 문화보다 좀 더 밀도와 강도가 세다. 예술은 처음의 것을 보기 좋게 각색하는 수준부터, 그 출발을 무화시킬 정도의 이질적 국면으로 고양될 수 있다. 어떤 단계이던 간에 작품이 없다면 경험은 유야무야 사라지고 만다. 



청춘열전 전시전경(사진; 클래이아크 미술관 제공)






작업 또한 경험이다. 일반적인 경험 보다 더 뜨거운 작업이라는 경험을 통해 다른 경험들을 녹여낼 수 있다. 박선영에게 특히 그러하다. 작품이라는 고에너지의 집적체는 물론, 하다못해 블로그 같은 곳에 일상의 사소한 경험을 쏟아놓을 때조차도 조리 있는 방식이 필요하다. 이 젊은 작가  또한 자신의 독특한 경험을 SNS같은 보다 보편적인 방식을 통해 소통해왔다. 경험은 일상에서 휘발되는 것을 그치고 작업으로 통합 되어갔다. 자신의 도예작품에 글자를 새겨 넣은 한 작품이 말하듯이, 작업에 표현된 경험의 가독성은 더 떨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작업에 포함된 경험은 시시콜콜한 보고서를 넘어서 또다른 차원으로 도약한다. 이러한 과정에서는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불확실해 진다. 심지어 현실은 무한히 가지치기 가능한 상상의 작은 단초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박선영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둥 같은 방식으로 구성된 작품들은 끝없이 자라는 나무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한다. 


한 시기의, 또는 여러 시기의 작품들을 한데 모으는 전시는 도약이 내딛는 지점을 암시하며, 그 다음을 기약한다. 그래서 작업이나 전시는 중독처럼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작업과 전시는 한 인간이 작가로 도약하는 극한의 체험을 안겨 준다. 고통보다는 성취감에 따른 희열이 조금 더 많기에 작업은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경계를 넘어야만 그 이전이 보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전을 볼 수 없으면 이후도 없다. 작업은 어떤 시간을 통과한 주체의 직간접적인 기록이다. 자신의 독특한 경험을 담으려는 박선영의 작업은 수많은 소통 방식 중에서 예술이 있어야할 이유를 알려준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작업을 계속해야 할지 말지 회의적인 상태로 떠난 여행의 결과이기도 하다. 20대 초반, 잠시 작업을 내려놓고 휴학 중에 떠난 여행은 최근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여행지에서 작업을 한 것은 아니고 1-2년의 시간차가 있었으니 만큼, 작업은 기억이기도 하다. 기억은 예술처럼 얼마든지 재편집 될 수 있다. 그러한 예술적 속성 때문에 ‘잃어버린 시간 찾기’는 예술의 주제가 되기 쉽다. 




Banana tree pots B 2017



Detail, Banana tree pots B 2017



Dreamy dream column3 2017



박선영은 ‘도리스’라는 분신을 창조하여 기억을 재창조 한다. 과거 영국령이었던 지중해의 한 섬으로 떠난 작가는 자기 앞에 놓인 많은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영어라도 확실히 해놓자’라는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도구적으로 합리적인 언어는 예술 보다는 호환성이 있는 지적 자산이다. 그러나 박선영은 여행을 통해 오히려 작업을 해야 할 필연적 이유를 찾았고, 최근 작품은 아직도 생생한 경험들의 추체험에 해당한다. 사실, 진지한 작가 중에서 작업이나 작업하는 삶에 대해 한번이라도 의심해 보지 않은 이가 어디 있을 것인가. 매번 다시 시작해야 하는 작업은 그러한 의심들을 작업의 필수 요소가 되게 했다. 무엇을 어떻게 경험했는가는 어떤 개인을 알려준다. 경험을 담는 자아라는 그릇은 넘치기 마련이고, 때로 누수의 지점들이 있다. 흘러넘치는 유약의 궤적을 표현의 요소로 삼는다든가, 여러 구성요소들이 모여지만 유기적으로 딱 맞아 떨어지는 완결된 방식이 아니라, 다소간 느슨하게 연결된 방식이다. 


그 틈은 또 다른 생성을 위한 자리이다. 경험은 있는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다. 재현이 아닌 생성의 차원에서 보자면, 과거는 미지의 것이며 미래처럼 도래해야 할 것이다. 작은 테이블에 여러 가지를 올려놓은 한 작품이 그러하듯, 박선영의 작품 구성 요소들은 서로 자리바꿈이 개방적이다. 기둥 형식 또한 여러 단계로 접붙여 올라갈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매우 젊기 때문이다. 박선영의 작품들은 지금도 변형 중인 형성되어가는 주체성을 표현한다. 불과 흙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도예는 그 자체로 인간과 비슷한 점이 있다. 신화적 종교적 상상력에서 신은 인간을 흙으로 빚었다고 간주되기도 한다. 불은 흙으로 대표되는 생명의 기본재료들을 응집하거나 해체시키는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박선영의 작품에서 도예와 인간의 비유는 직접적이다. 입주 작가 보고 전 ‘청춘열전’에 전시된 작품들은 기둥처럼 세워져 있는 것이 많았는데, 뭔가 서있는 모습은 누군가의 초상을 생각하게 한다. 




Installation 유니콘 코스프레2017



유니콘 코스프레2 2017



여행지는 대부분 유적지나 박물관들이 많았을 것이고, 거기에서 기둥은 가장 오래 남아있는 요소이다. 유적지의 기둥들이 시간의 흔적이 새겨진 잔해라면, 박선영의 기둥은 새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고미술품 애호가였던 프로이트는 유적에서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비유를 발견한 바 있다. 무의식은 고고학처럼 불연속적 단층을 이룬다. 유적지/무의식은 발견의 대상이고 해석되어야 한다. 때로 치유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박선영의 경우 유적지(대부분 관광지)의 기둥 양식과 자기탐구가 겹쳐진다. 작품들은 인체를 떠올리는 기둥에다가 여러 상징적인 요소가 삽입된다. 기둥은 그자체로 남근적인 요소--그것은 처녀지를 점령한 후 세우는 기념비의 보편적인 형태이다--가 있는데, 여기에 바나나같은 열대 과일의 소재가 가미되면서 작가 말대로 ‘야릇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박선영의 작품은 자기 탐구적 요소가 있기에 그러한 적나라한 형태가 야기할 수 있는 다소간의 부끄러움도 개의치 않는다. 


작품 [바나나 나무 화분 B](2017)에서 맨 아래에는 남자 얼굴이 있고, 그 위에 성기같은 형태가 둥글게 감싸인 기둥이 올라간다. 맨 꼭대기에는 마치 발기한 남근같은 분홍색 바나나가 놓여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열대과일 보다 더 야성적으로 생긴 그것은 여행지에서 본 인상적인 과일형태이기도 했다. 작가의 여행담에 의하면, 나일강 한가운데 떠 있는 바나나 아일랜드에서 처음 본 바나나 나무는 덩치도 크고 핑크 빛의 괴상한 꽃이 달려 있었다. 그것은 나중에 욕망의 상징으로 각인된다. 꽃은 식물의 생식기이며 바나나 또한 직설적인 은유이다. 향과 색이 짙고, 크고 화려한 열대의 식물은 활짝 피어난 욕망의 현신처럼 나타난다. 게다가 작가가 1년간 머문 지중해의 섬은 온갖 인종들이 모이는 관광지이기도 해서 일탈에 이르는 자유와 방종이 난무하는 곳이기도 했다. 아무도 모르는 남국의 섬나라에서 누구든 금기를 위반하는 아담과 이브를 꿈 꿀 수 있을 것이다. 




Detail 유니콘 코스브레2 2017



Installation 위 청화백자 알로에화분1,2  아래 Still inside1,2,3



박선영에게 맘껏 저질러 볼 수 있는 분신이 필요했던 이유이다. 해변가의 파라솔이 생각나는 푸른 스트라이프 무늬의 좌대가 있는 작품 [still inside#1 like me](2016) 또한 문명과 일상으로부터 억압받아온 욕망이 분출하는 형태이다. 남자의 초상 위에 병이 올라가 있는 작품 [mixed series, variation#3](2017)에서, 병 안에 든 것은 길쭉한 선인장이다. 그 안에 있어야 할 것이 폭발하기라도 하듯, 남성의 얼굴 위로 유약이 흘러내린다. 머리가 의식이라면, 머리가 바닥에 깔려 있는 이 작품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는 전도된다. 여행이라는, 자신을 다른 맥락에 놓을 수 있는 실험적 상황에서 욕망과 무의식은 전면에 나선다. 놀기 위해 모였을 때 의식의 자리는 협소해 진다. 그 점에서 유희와 예술은 공유지점이 있다. 다만 예술은 유희처럼 소비에 머물지 않는다. 유희가 은유라면 예술은 더 우회적이다. 때로 처음의 참조대상이나 출발점을 완전히 지워버릴 만큼. 


박선영의 작품에서 바나나는 유니콘이라는 소재로 전이된다. 바나나에 원시적 이미지가 있다면, 유니콘은 유럽의 신화와 관련된다. 유니콘이 등장하는 작품들 또한 욕망 이미지의 변주이다. 작품 [my selves](2017)는 알같은 형상에서 올라오는 기둥 맨 위에 유니콘이 있는데, 돌출된 형태에서 줄줄 흐르는 유약은 분출된 욕망을 표현한다. 유니콘 아래에 놓인 자화상같은 인물은 부풀어 오르고 터지고 흐르는 남근적 은유가 반드시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하얀 기둥 위에 어두운 색의 유니콘이 놓여 있고 바나나 모양의 뿔에 하얀 체액같은 것이 흐르는 작품 [유니콘 코스프레](2017)를 ‘처녀가 아니면 뿔로 찔러 죽인다’는 유니콘의 신화에 빗대어 본다면, 성적 억압이 강한 만큼 넘쳐흐르는 욕망 간의 밀접한 관계가 유추된다. 유럽의 경우, 이러한 관계는 책상다리마저도 야하게 볼 만큼 과민 했던(그래서 위선적이었던) 빅토리아 시대에서 발견된다. 




Still inside1,2,3 2016,2017



MUN_8760



Dertail, Where are you..Doris 너 도리스니,2017



기둥, 분홍 바나나, 바나나 모양의 뿔을 가진 유니콘 ....상상 속에서 여러 가지로 전이되는 욕망의 이미지는 무의식의 풍경이라 할 만하다. 무의식은 꿈을 닮았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그 점을 잘 이용했는데, 성적 은유로서의 말이 등장하는 박선영의 작품은 영국의 화가 존 헨리 푸셀리의 [악몽](1782)을 연상 시킨다. 그것은 침실로 고개를 쑥 디민 말이 잠자는 처녀를 가위눌리게 하는 기괴한 그림이다. 그것은 박선영이 유니콘의 도상을 끌어왔던 구스타프 모로의 작품과 함께 후대의 초현실주의자를 열광케 한 작품 중의 하나이다. 고삐 풀린 욕망이 넘실대던 여행지에서 다소간 보수적으로 자라왔던 작가는 혼돈에 빠졌을 것이다. 박선영은 자신에게 밀려왔던 낯선 경험들을 약간은 거리감 있게 추체험할 분신을 만들었다. 분신은 자신을 반영한다. 자기가 의기양양할 때 분신도 그렇고 자기가 의기소침할 때 분신도 그러하다. 박선영의 작품에서 분신 ‘도리스’는 이런 저런 상황 속에 배치된다. 분신은 실제의 자기 대신에 행동한다. 


작품 [where are you? Dors...?](너 도리스니?!)(2017)는 좌대삼은 나무 테이블 위에 선인장들이 가득 놓여있고, 그 안에 작은 도리스가 얼굴에 가면을 들고 서 있다. 가면을 쓰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들고 있다는 것은 주체의 유동성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다른 작품들에서 선인장이 남근적인 면모를 가졌다고 할 때, 작가는 그러한 남근적 우주에서 작은 케익 장식같이 쪼그라든다. 분신은 벌거벗은 몸에 평면적인 가면을 들고 ‘여긴 어디? 나는 누구?’하는 식으로 엉거주춤 서 있다. 작품 [청화백자 알로에 화분1,2](2017)은 캔버스에 그려진 수채화이다. 한문이 씌여진 동양적 그릇에 야성적 형태의 열대 식물은 황금빛 액자에 담겨있다. 그림 속 그릇에 씌여진 한문은 ‘가린다, 꾸민다’의 의미를 가지는 장(裝)이다. 장식은 야성적인 형태를 자라나게, 반대로 제한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릇은 얼마간은 그 안의 것의 성장에 도움을 줄 테지만, 그릇은 곧 작아진다. 보호막은 성장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황금빛 액자를 설치적 요소로 활용한 방식 또한 뭔가 담는 그릇의 상대성을 알려준다. 




도리스 몰타 시리즈 2015



DORIS was in malta 2014



실제의 식물을 심어놓은 화분 형식의 작품은 그릇이 좀 작다 싶은 것이 다른 작품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장’은 장식미술의 ‘장’에 해당되기도 한다. 작가는 여행 중에 자연에 바탕한 장식미술의 기교들을 재발견했고, 그것은 작업에 대해 자의식을 갖게 해주었다. 유럽의 장식미술관에서의 감흥은 설치방식에도 이어진다. 그래서 박선영의 작품은 마치 박물관에 진열된 방식으로 배치된다. 동서양의 여러 양식이 공존하는 모습은 여러 스타일을 ‘믹스’--혼합은 자주 일어나서 박선영의 작품 목록에는 ‘믹스드’ 시리즈가 있을 정도이다--한다. 이러한 혼종의 방식은 지구촌 시대에 더욱 가까워진 시공간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이전 작품에서 동그란 지구 위에 붙어있는 비행기는 시공간의 단축을 암시한다. 그 앞에 세워진 핑크 바나나는 유약을 푹 뒤집어쓰고 양측에 돌기까지 내고 주체 못할 정도로 흐드러진 열대 식물 그림과 조응한다. 욕망은 계속 꿈틀대면서 불가능한 만족에 이르기 위한 이동을 지속 한다. 박선영은 아직 여행지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며,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출전; 클래이아크 김해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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