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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엽 / 아무 이유가 필요 없는 존재의 아름다움

이선영

아무 이유가 필요 없는 존재의 아름다움

  

이선영(미술평론가)

  

권경엽이 그려왔던 핏기 하나 없는 백옥 피부의 미소녀가 최근작에서 봄을 만났다. 이전 작품에서 하얀 붕대를 칭칭 감은 상처받은 영혼은 엄혹한 내적 투쟁의 시기를 통과해야 했다. ‘화이트 시리즈’이후 열정적인 붉은 옷을 걸친 인물이 나오는 ‘레드 시리즈’는 얼음(또는 눈)과 불의 싸움을 연상시킨다. 레드 시리즈 중 붉은 옷을 입고 하얀 소파에 기대여 비스듬히 허공을 응시하는  작품 [Scarlet](2013)은 손을 머리에 댄 모습이 멜랑콜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붉은색 옷을 입은 작품 [Romance](2015)나 Red Moon](2015)은 눈물이 고인 얼굴 표정이나 무릎을 안고 있는 방어적인 포즈가 트라우마와 관련된 감정의 수위를 말해준다. 상처 입은 만큼의 반대급부적인 공격성이 감지되는 작품들에서 레드는 경고, 즉 금지나 위험으로 다가온다. 동시에 머리칼과 피부의 색을 더욱 창백하게 보이는 이 강렬한 색은  위축된 상황을 타파하려는 내부의 열정을 상징한다. 




Sweet Love_60.6X72.7cm_oil on canvas_2015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있듯, 레드는 강렬한 만큼이나 지속기간도 길지 않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속성이기도 하며 그러한 아름다움의 운명이 멜랑콜리를 자아낸다. 화이트 시리즈는 제로, 또는 영하의 상태지만 그만큼 앞으로의 희망이 있다. 그러나 레드는 식을 일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생명력의 정수인 피의 색이자 불처럼 위로 타오르는 레드는 이상을 위해 현재를 불사른다. 에바 헬러의 [색의 유혹]에 의하면, 색 중의 색인 레드는 사랑에서 증오까지,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모든 종류의 열정을 나타낸다. 작가, 또는 작가의 제 2, 3의 자아의 상을 중심으로 한 작품에서 색은 중요한 상징적 위상을 가진다. 색은 외연의 확장보다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내포적 상징을 중시해온 권경엽에게 크다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변화를 알리는 소리 없는 깃발이다. 그것은 다른 감정으로의 변화를 알리는 것이다. 의상이나 배경 색은 그와 어울리는 피부(또한 그 연장인 머리카락) 빛의 미묘한 변화를 야기한다.


작가는 최근 10 여 년간의 작품 변화를 화이트 시리즈에서 레드 시리즈로, 그리고  최근의 보태니컬 시리즈로 구분한다. 이번 전시에서, 이전 시리즈와의 차이와 연속 속에서 집중적으로 선보일 것은 2015년부터 그리고 있는 ‘보타닉 가든(Botanic Garden)’ 시리즈이다. 초록, 연노랑, 오렌지 색등이 풍부한 이 시리즈는 화이트 시리즈의 차가움과 레드 시리즈의 뜨거움 사이에, 소리로 친다면 침묵과 외침 사이에 존재한다. 화이트 시리즈의 냉랭함 속에서 기억마저도 얼어붙어 흐릿해졌다면, 그리고 레드 시리즈에서 한 가지 색으로만 불타올랐다면, 보타닉 가든 시리즈에서는 다양한 식물의 색이 등장한다. 초상과 함께하는 꽃이 입부분에 그대로 놓인 듯 한 입술을 가진 초상들은 따스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잔잔한 향과 다정한 속삭임이 느껴진다. 인물과 함께 하는 식물들은 정신건강으로 친다면 약초 같은 존재들이다. 끝내 얼음은 녹고 봄이 다가왔다. 또는 붉게 타오른 재로부터 또 다른 탄생이 시작되었다. 




Romance_60.6X72.7cm_oiloncanvas_2015



레드문Red Moon_60.6X72.7cm_oiloncanvas_2015



보타닉 가든 시리즈에서 도자기 같이 냉랭하리만치 완벽한 피부는 여전하지만, 파스텔 톤의 색감과 어우러져 봄같이 따스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봄꽃 향기는 상처이전의 행복했던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관객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상념에 잠긴 소녀의 아련한 표정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오렌지색 의상에 어울리는 머리칼을 한 소녀를 그린 작품 [I lock the door upon myself](2015)는 하얀 의자에 기대어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그 인물이 자리에서 일어난 듯한 작품 [Dreamy Spring](2016)에서는 의자 뒤로 노란 꽃들이 보인다. 오렌지 빛 작품 [Stellaria_lemon flower](2016)도 그렇고, 동일인물들이 등장하는 시리즈 작품들을 나란히 놓고 보면 동감이 느껴진다. 살아있는 꽃은 조화와 달리 먼지가 내려앉지 않는다. 작품 속 꽃을 닮은 깔끔한 인물들은 살아있는 인물이지 인형이 아니다. 그러나 일상성과는 거리가 있는 배경은 작품 속 인물들을 화관을 쓴 요정이나 여신 같은 면모를 부여한다. 


[Primavera]나 [Flora]라는 작품 제목에 있듯이 작품 속 그녀들은 봄의 여신들이다. 작품 [Spring], [spring vibe](2015)처럼 봄 자체가 주제가 되기도 한다. 상큼한 오렌지 빛의 여인들은 봄꽃 향기를 즐기듯이 눈을 감고 있다. 향기는 그녀들로 하여금 지금 여기를 벗어나게 한다. 작품 [Flora](2016)에서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세 가지 이상의 꽃은 현실의 장면이라고 하기 에는 거리가 있다. 때로 봄의 여신은 여성잡지의 화려한 모델처럼 꽃과 나비들로 장식된 아름다운 얼굴이 화면 가득히 잡혀 있기도 하다. 여성에게 몸은 얼굴과 다를 바 없이 물신 숭배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작가는 몸을 과감히 생략했다. 온 몸이 부스러지는 듯한 사고의 기억을 담은 이전의 작품 역시 주요부위는 붕대로 가렸다. 권경엽의 작품 속 꽃과 함께 여성들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관객의 탐욕스런 시선에 부응하는 성적 속성이 강조되어 있지는 않다. 




Scarlet_91X116.8cm_oil on canvas_2013



남성을 그린 예외적인 작품 [민트스타](2016)에는 여성적 분위기가 있다. 성형과 화장, 염색과 써클 렌즈를 착용하는 실제의 남성 아이돌스타가 그렇기는 하지만, 그러한 소재의 선택에서 여성적 코드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읽혀진다. 작품 속 여성들은 자기만의 세상, 즉 현실보다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징적 우주 속에서 살아가기는 더 이상 소수의 취향이 아니다. 권경엽의 작품 속 인물들은 바깥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현대의 은둔형 인간을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이전 작품에서는 아카데믹한 방식으로 실제와 가까운 모습을 그렸다면, 최근 작품에서는 사진과 비교되거나 착각을 야기할 염려는 없다. 현대에 편재하는 스펙터클에서 사진의 보편성은 뛰어난 묘사력을 가진 화가에게 차이를 요구하는 것이다. 유화지만, 음영은 조금만 들어가는 선 위주의 표현은 동양화에 가까운 평면성과 단순함이 특징적이다. 유화로 밝은 색을 내기 위해 여러 겹 올라가는 붓질은 자연에 근접해지려는 고도의 인공적 기술과 중첩된다.  


화면 가득히 클로즈업된 얼굴에서 특히 피부의 표현이 미묘하다. 티끌 하나 없는 하얀 피부는 여림, 부드러움, 순수함, 깨끗함 등등을 떠올리는 이상적인 피부를 알려준다. 인체의 기관 중에서 가장 넓은 표면적을 차지하는 피부는 안과 밖의 경계가 된다. 눈 코 입이 안팎 사이를 연결하는 분명한 구멍들을 알려준다면, 작은 모공들이 뚫린 피부의 소통은 보다 미시적이다. 다이앤 애커먼은 [감각의 박물관]에서 세계와 우리 사이에 있는 피부는 우주복과 같다고 한다. 그것은 성적 매력을 부여하는 핵심기관이기도 해서 이상적인 캔버스로 장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상적인 캔버스는 흠 없이 하얀 표면을 자랑한다. 다이앤 애커먼은 18세기 유럽 여성들은 피부를 더욱 희게 만들어주는 비소를 기꺼이 먹었다고 전한다. 비소는 혈액 속의 헤모글로빈을 파괴하여 부서질 듯한 달빛처럼 흰 피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이전의 시리즈보다는 창백한 정도는 덜하지만 자연스러운 혈색이 도는 인물들은 아니다. 




Dreamy Spring_50X72.7cm_oil on canvas_2016



Primavera_63X91cm_oil on canvas_2016



권경엽의 작품에서 인물과 함께 있는 꽃들이 꽃가루를 옮겨주는 새와 곤충을 유인하기 위해 색을 이용한다면, 빛나는 하얀 얼굴은 그 색과 상보작용을 한다. 밝은 피부는 여성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젠더는 색으로 표현’(뤼스 이리가라이)되는 것이다. 이전의 화이트 시리즈에서 창백한 낯빛 뿐 아니라 일종의 의상으로 작용했던 붕대, 그리고 동양인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머리칼이 검은 경우는 없는 초상들은 여성성이 극대화되어 있다. 가장 보편적인 대립적 사고에서 여성이 화이트라면, 남성은 블랙이다. 존 하비는 [블랙 패션의 문화사]에서 19세기에 ‘하얀 천사’--여기에서 하얀 옷을 입은 소녀는 칠하지 않은 순수한 종이의 영역과 비교되곤 한다—로 상징되었던 여성과 공식적인 검은 의상을 입었던 남성을 대조한다. 즉 옷과 성의 관계에서 검음/밝음, 남자/여자의 엄격한 대조가 상업과 산업이 확장된 시기에 발전했다. 근대는 젠더가 아닌 섹스를 강조한다. 남성의 검은색이 자신을 가리면서도 강조하듯이, 여성의 흰색 역시 자신을 가리면서도 강조한다. 


존 하비는 검은색이나 흰색이 상실이나 부정의 색, 자신을 지워버리는데 쓰이는 색이라고 본다. 그는 남자와 여자를 ‘각자의 성’으로 만드는데 있어 부정이 얼마나 활발한 역할을 했는가를 강조한다. 화이트 시리즈가 눈이나 얼음 같은 냉랭한 밝음이었다면, 보타닉 가든 시리즈에서는 따스한 봄빛을 생각하게 하는 밝음이다. 4월의 여신 프리마베라와 봄의 여신 플로라는 고전적인 주제이긴 하지만, 현대적인 방식으로 구현되었다. 작가는 프리마베라와 플로라의 전체를 그리지 않고 상체만 클로즈업하여, 명상적인 분위기 가운데에서도 직접적인 대면의 효과를 강조한다. 그래서 초상들은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색채로 칠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인상을 준다. 소녀에서 다소간 성숙한 여인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은 꽃에 둘러 싸여있다. 여신의 분위기를 가지는 권경엽의 작품은 식물과 인류의 신화적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Apple Blossom_27.3X22cm_oil on canvas_2016



Primavera_72.7X60.6cm_oil on canvas_2016



마이클 조던은 [초록덮개]에서 네안데르탈인의 유골과 함께 발견된 수많은 꽃가루의 존재로 부터 꽃과 인간의 관계를 추론한다. 이미 원시시대부터 인간들은 시신을 꽃으로 둘러싸서 그의 영혼에게 회복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예로부터 식물에게서 부활과 재생을 보았다. 식물의 다채로운 변형은 인간의 변형을 야기한다. 술이나 향수, 약초나 독초 등에서 발견되는 식물이 가지는 최면효과는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동물과 달리 이동할 수 없는 식물은 그 자리에서 재생을 포함한 다양한 변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초록덮개]는 빙하기의 원시인들에게 봄은 정신적인 부활을 의미했다고 말한다. 봄의 도래는 신화적 인간으로 하여금 봄의 제전을 준비하게 한다. 권경엽의 작품에서 화관을 쓴 여신적 존재들은 ‘자연의 재생과 새 삶의 시작, 즉 새로운 창조의 주기적 반복을 명백히 드러내주는 상징이지 제의’(엘리아데)를 떠올린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종교사 개론]에서 식물숭배는 고대의 존재론적 직관에서 유래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존재론적 직관에 의하면, 실재하는 것은 단지 자신과 동일하게 무한히 지속해나가는 것일 뿐만 아니라, 유기적이고 순환적인 형태로 생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식물의 출현은 새로운 시간적 주기의 시초가 된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봄은 우주적 삶의 부활이며, 따라서 인간 생명의 부활이다. 모든 재생은 그때마다 새로운 탄생이며, 재생되는 형태가 처음으로 나타난 신화적 시간으로의 회귀이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권경엽의 화관(또는 화관처럼 화면 위에서 꽃이나 꽃나무 가지들이 내려오는)을 쓴 여성들은 우주 창조의 원초적 행위를 반복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꼭 인류의 유년기나 우주론적인 차원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행복했던 시기로의 복귀라고 할 수 있다. 제인 해리슨은 [고대 예술과 제의]에서 화관을 쓴 이들로부터 봄을 돌아오게 하여 여름으로 실어 나르려는 제의주의자들을 본다. 권경엽의 작품에서 그 인물이 젊은(때로는 어린) 여성인 것은 미의식과 관련된다. 




Flora_72.7X90.9cm_oil on canvas_2016



Stellaria_lemonflower_22.7X15.8cm_oil on canvas_2016



제인 해리슨은 고대로부터 아름다움의 감각은 ‘건강한 젊은 신체에 만발한 젊음’(아리스토텔레스)과 관련된 쾌라고 말한다. ‘청춘은 가장 우아한 것’(호머)이라 생각되던 고대부터 숲의 신 디오니소스는 환상에 잠겨있는 아름답고 꿈꾸는 듯한 젊은이를 상징했다. 제인 해리슨은 사라짐과 다시 나타남은 죽음과 부활을 흉내 내는 것만큼이나 성년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의례라고 본다. 식물은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전환의 의례를 자연스럽게 상징할 수 있다. 순환적 세계관에서 이러한 전환은 불사(不死)가 아니라 회춘(回春)에 가까울 것이다. 엘리아데도 [종교사 개론]에서 식물적 상징 옆에 있는 여신의 모습은 고대 성상이나 신화에서 나무가 가진 의미, 즉 우주적 풍요의 무궁한 원천이라는 의미를 확인한다고 본다. 꽃, 식물, 여성 모티브의 공존은 무궁한 창조라는 중심적 관념에 의해 설명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권경엽의 상징적 인물들이 고대를 넘어서는 지점은 현대에 발명된 향수와 관련된 모티브에 있다. 물론 인류는 고대부터 향기를 활용하였지만, 향수가 상품으로 개발되어 대중의 소비품목 중의 하나로 생산된 것은 20세기의 일이다. 향기가 야기하는 기억의 모티브 또한 20세기적이다. 작가는 꽃의 여신 플로라같은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꽃과 식물들은 휴식과 치유의 의미를 가진다’고 하면서, 촉각과 후각적 요소가 함께 있는 작품들은 ‘장미와 백합 그리고 오렌지블라썸, 애플블라썸, 실크블라썸 등 향수를 제조할 때 쓰이는 꽃을 소재로 그렸다’고 밝힌다. 그 결과 핑크, 오렌지, 그린, 옐로우 등의 컬러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촉각성과 달콤하고 향기로운 후각성을 야기한다. 작품 [Apple Blossom](2016)과 [Pink Blossom](2017), [Silk  Blossom](2015) 등이 그 예다. 당면한 현실에 눈을 감은 작품 속 인물들은 꽃향기를 타고서 이미 다른 세계로 떠나버린 듯하다. 




Pink Blossom_60X60cm_oil on canvas_2017



좋은 향기는 좋은 기억과 연관될 것이다. 그 반대의 상상도 가능하다. 한편 한 방울의 향수가 만들어지기 까지 얼마나 많은 꽃들이 ‘희생’되어야 하는지를 생각—레이첼 허즈의 [욕망을 부르는 향기]에 의하면, 1 파운드의 방향유를 만들기 위해 50 파운드 이상의 재스민 꽃이 필요하다—하면, 부활과 재생이라는 식물 신화적 주제에 깔린 어두운 측면도 생각할 수 있다. 권경엽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체취하기 위해 13명의 여자를 죽이는 작품 [향수]의 예를 든다. 작품 냄새의 신이라 할만한 [향수]의 주인공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탐미주의자이다. 또한 작가는 그 작품의 원저자가 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회피하는 은둔 형 인물이라는 점에서 자신과의 동질성을 발견한다. 권경엽이 후각적 요소에서 중시하는 것은 기억과의 관계이다. 작가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처럼 ‘한 순간에 내 마음 속에 지평이 확 열리는’ 행복한 순간을 기억하고자 한다. 


봄기운 물씬 풍기는 보타닉 가든 시리즈는 화이트, 레드 시리즈에 선명했던 상처와 질곡을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다. 작품은 기분 좋은 상상으로 가는 기억의 문턱이 되고자 한다. 권경엽의 그림 속에 잠재된 후각적 요소는 일종의 심리적인 향기요법(aromatherapy)이 되는 것이다. 레이첼 허즈는 [욕망을 부르는 향기]에서 후각은 우리가 정서적으로 신체적으로 성적으로 사회적으로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특히 후각과 기억의 관계를 강조한다. 레이첼 허즈에 의하면 우리의 현재를 만드는 것은 기억이다.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의 맥락에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와 현재의 순간들이 계속적으로 혼란스럽게 이어지는 망망대해에 떠다닐 뿐이다. [욕망을 부르는 향기]에서도 마르셀 프루스트가 인용된다. 프루스트의 기억에 관한 대작 7권 중에서 첫머리에 나오는, 홍차에 적셔먹은 마들렌 과자의 맛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반가운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 유명한 장면이다 




spring vibe_45.5X53cm_oil on canvas_2015



Spring_45.5X53cm_oil on canvas_2015



‘프루스트적 기억’이라는 용어까지 탄생하게 한 그 원초적 경험은 냄새로 인해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일이 생생한 감정을 동반하여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것을 말한다. 프루스트라는 걸출한 예술가의 압도적인 표현을 통해 냄새는 우리의 과거를 들춰내는 최고의 단서로서 등극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가장 즉각적이고 중심적인 경험은 순수한 감정이고, 기억의 내용은 나중에야 채워진다. ‘프루스트적 기억’의 또 다른 특징은 이런 기억이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하다는 점이다. 향기가 기억을 불러올 때면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엄청난 감정의 물결에 휩싸인다. 그러나 레이첼 허즈가 과학실험을 인용하며 밝히듯이, 어떤 좋은 향기(나쁜 냄새 역시)라도 15분 정도 맡으면 더 이상 냄새를 효과적으로 지각하지 못한다. 적응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후각은 좀 더 ‘고차적’인 시각이나 청각에 비해 제어하기가 힘들다고 지적된다. 그것이 재현될 수 있다면 혁명적일 것이다. 한편 그림은 물리, 화학적적 의미에서의 향기의 한계, 즉 느릿하게 공간을 채우면서 분리 불가능하게 뒤섞이고 코를 금방 취하게 하여 무감각해지는 속성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시각에 비해 무시되었던 후각에 대한 독특한 연구서에서 또한 흥미로운 것은 여성과 향기와의 관계이다. [욕망을 부르는 향기]에 의하면 5세기 경 인도인들의 성애의 경전인 [카마수트라]는 여자들의 냄새를 높이 평가했고, 여자의 아름다움은 외모보다 냄새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세계적인 화학 향료 회사에서 화학자로 일하던 인도태생의 무케르지 박사는 힌두 경전에 감화를 받아 아름다운 여자의 체취를 직접 포착하려고 시도했다. 꽃과 인간이 내뿜는 향기 분자를 포착해서 분석할 수 있는 ‘살아있는 꽃’이라는 기술을 사용한 무케르지 박사는 아름다운 여자가 내뿜는 대부분의 향기가 꽃과 비슷하다고 한다. 그는 연꽃이나 목화꽃의 예를 들었지만, 아름다운 여자와 꽃의 비유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미학적으로 권경엽의 작품 속 꽃은 유미주의를 상징한다. 그것은 19세기말 유미주의 계열의 화가 페르낭 크노프의 동명 작품 [내 마음의 문을 잠갔네](1891)를 인용한 것에도 분명하다. 




I lock the door upon myself_50X72.7cm_oiloncanvas_2015



권경엽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럽의 회화—유미주의, 심미주의, 상징주의, 예술을 위한 예술, 심지어는 ‘데카당’으로 불리웠던—에서 ‘아름다움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려고 한’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예술의 시기’를 (재)발견한다. 작가가 인용한 페르낭 크노프의 경우 사랑했던 누나만을 그렸는데, 그것은 작품에서 한 인물을 고수하는 자신의 경향과 겹쳐진다. 권경엽의 경우, 요즘 작품에서는 많이 완화되었지만, 작품 속 인물은 자신이라는 점에서 나르시시즘적 속성이 강했다. 나르시소스가 불가능한 사랑 때문에 결국은 죽음에 이르렀던 신화적 인물임을 떠올릴 때, 미나 예술에 대한 사랑 역시도 같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전업 작가라면 누구라도 매순간 확인되는 바이지만, 외부와 단절된 채 그림만 그리다 보면 죽음은 친숙해 진다. 유용성을 중시하는 생산중심의 사회는 예술을 삶보다는 죽음 쪽에 가까운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보타닉 가든 시리즈에서 피어나는 꽃들(그리고 살아있는 꽃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조용히 외치고 있는 것은 어떤 유용성이 아니라 존재자체에서 파생되는 의미이다. 꽃이 바로 그런 존재다. 물론 자연의 모든 존재가 그러하듯 무의미한 것은 없다. 가령 꽃은 결실과 관계될 것이다. 그러나 꽃은 결실을 예기할 뿐 그자체가 결실은 아니다.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이들이 자기 대에서 그 결실을 누린 바는 별로 없다. 그것은 뿌려진 씨앗처럼 나중에야 결실을 본다. 유파에 따라서는 아름다움 또한 그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꽃은 유미주의적 사고에서 중요한 상징이 되어 왔다. 가령 21세기 권경엽의 화이트 시리즈의 소녀들과 비교될만한, 19세기의 [하얀 옷의 소녀](1862)를 그린 휘슬러는 유미주의 운동의 대변자이기도 했는데, 휘슬러에게 그림은 ‘그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아무런 이유도 필요 없는 아름다운 꽃처럼 보여야’ 했던 것이다. 권경엽의 보타닉 가든 시리즈는 ‘신성한 봄’(Ver Sacrum)을 고대했던 19세기말 20세기 초 근대미술의 21세기 버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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