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정은영(siren jung) / 변신, 치명적 매혹의 무대

이선영

변신, 치명적 매혹의 무대

  

이선영(미술평론가)

  

정은영의 작품 [정동의 막 Act of Affect](2013)은 근대의 해방공간에 10여년 정도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이제는 ‘보존회’를 중심으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여성국극(이하 국극으로 표기)을 소재로 한다. 지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볼거리가 많지 않았던 1940년-50년대에 전통적인 판소리에 (서구의) 연극적인 요소—그래서 국극에서의 창을 ‘연극소리’라고도 했다--를 도입한 국극은 한때 근대 대중문화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국극은 전쟁 통의 피난지에서도 공연을 했을 정도로 강력했다. 최고 정점을 찍었을 때 하루 4번이나 공연을 했다는 국극은 말 그대로 돈을 쓸어 담았다. 국극은 판소리라는 청각의 문화에서 연극, 영화라는 시각의 문화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다. 바네사 슈와르츠가 [구경꾼의 탄생]에서 영화의 초기형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예를 들 듯이, 군중 속 개인들은 선정적인 일상생활의 구경거리를 탐욕스럽게 소비했다. 





[구경꾼의 탄생]은 집단적 관음을 포함한 시각 문화를 지배계급에 의한 억압이나 통제의 방식으로만 보지 않고 대중적 욕망의 문제로 보았다는 관점이 있다. 억압적이든 해방적이든 소리가 지배했던 전통과 비교해서 근대는 시각성의 문화가 득세한다. 그러나 이도 저도 아닌 돌연변이적 방식은 국극이 부흥하는 원인이자 소멸하는 원인이 되었다. 동시에 이러한 혼성의 방식은 오늘날 다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유이다. 국극이 여성 예인들의 공동체였다는 점은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진다. 그들은 교묘한 전략보다는 맹목적 열정을 앞세웠기 때문이다. 전쟁과 해방공간을 거치고 근대의 가부장적 권력이 정비되기 시작하자 남성중심의 문화계는 여성 국극을 정통성이 없는 것이라고 폄하했다. 지배적 권력의 무시 뿐 아니라, 대중문화 차원에서도 영화 같은 좀 더 강력한 스펙터클이 밀려 들어왔다. 국극은 전통이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는 순간에 전통으로 호출되곤 했다. 


이러한 흥미로운 내용을 포함한 작품에 대한 박사논문과 책을 출판할 정도로 정은영의 연구는 깊었지만, 15분 분량의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은 신기한, 때로는 기괴해 보이기까지 한 특정 시대의 문화를 재현하는데 목적이 있지는 않다. 가령 작품에는 정작 공연하는 모습이나 관객의 궁금증을 풀어줄만한 이야기들이 없다. 서사는 은유적으로 전개되고 남아있는 빈칸은 철저히 상상의 몫이다. 물론 정은영은 점차 공연으로 확장되어 갔던 다른 작품들에서 현재 남아있는 여성국극 문화와 그 관계자들에 대한 참여관찰 및 연구에 대한 성과를 반영한다. [정동의 막]은 진기한 소재를 소비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풍부한 은유가 동원된 간접화법이 구사된다. 남자역할을 하는 여성배우라는 독특한 캐릭터에 대한 연구가 단지 역사에 대한 호기심에 머무를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단번에 성(젠더)의 문제를 전면화하기 때문이다. 남성 역할을 위한 변신은 분장에 의한 외모변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작가가 만난 배우 중 하나는 ‘남성 역할을 할 때 젖가슴이 쪼그라드는 듯한’ 느낌을 가진다고 말한다. 작가에 의하면 당시의 여성관객은 부드러운 남성의 이미지에 매료되어 일종의 팬덤 현상까지도 벌어졌다. 공연은 여성주체가 뭔가 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작업이었으며, 당시 여학생이나 양공주를 비롯해 사회적 소수자들이 안전한 여성공동체 만들어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동성 친밀성 생겨나고 평가한다. 국극 배우들은 여성도 남성도 아닌 오묘한 존재에 대한 매력을 가졌다. 낸시 에트코프는 [미]에서 실험적 통계치를 인용하면서, 남녀 모두 과도한 남성적 얼굴을 매력적이지 않다고 평가한다고 지적한다. 남성적 여성, 여성적 남성 같이 오묘한 이들은 인기는 무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진짜 성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프로이트는 [문명 속의 불만]에서 ‘근본적으로 아름다움과 매력은 성적 대상의 속성이다. 그러나 성기 그자체가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 따라서 아름다움의 속성은 2차 성징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다른 성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의지하는 것은 진짜 성이 아니라, 2차적인 기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장, 가장, 규칙, 의례, 유혹의 연쇄 망을 생각할 수 있다. 다른 성을 연기해야 하는 배우에게 무대는 무대고 현실은 현실이지만, 양자가 교차하는 지점이 있을 수 있다. 국극 배우들의 수행은 성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수행성을 가지고 있다는 페미니즘의 가설의 예이다. 더구나 한국 최초의 여성 예술인 공동체라는 독특한 역사적 지점도 발견된다. 멋있는 남자 역할을 해야 하는 여성배우의 행동은 만들어진다. 즉 여기서 성(젠더)은 수행적이다. 국극 배우에서 퍼포먼스 되는 젠더, 즉 주디스 버틀러가 [젠더 트러블]에서 이론화한 ‘젠더 수행성(gender performativity)’이 발견된다. 배우들의 분장에서 발견되는 기괴한 기표들은 성과 관련된 금기들과 관련지어 읽혀진다. 여성국극에 대한 작가의 10년 가까이 되는 연구와 작업은 영국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공부를 한 이론적 관심이 없다면 일시적 호기심 이상 더 나아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정은영은 현대미술 작가이지 역사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를 위한 역사, 현학적인 관심에 머무는 많은 역사적 연구가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그것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직면한다. 물론 그러한 핵심적이고도 절박한 질문은 한가로운 아카데미의 연구자에게는 면제되지만 말이다. 여성 국극에 대한 관심은 이념적 대립으로 모든 것이 환원되어 버렸던 엄혹한 1980년대를 넘어서 다원주의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던 1990년대에 20대를 보냈던 작가에게 첨예하게 다가왔던 페미니즘과 관련된 화두를 포함한다. 작가가 여성 국극에서 감지한 것은 젠더의 비규범성(탈규범성)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성을 규범으로만 볼 수 없다고 반론을 펼칠 수 있다. 여성 또는 남성이 생물학적 본질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수행되는 성이라는 페미니즘 일파의 주장은 아직도 또는 영원히 답해질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답을 향한 서로 다른 사고와 행동의 경쟁이 있기 때문에, 지나간 역사에 대한 연구/작업은 현재적 의미와 생동감을  가질 수 있다. 


성을 포함한 몸, 자연을 단지 수행의 문제, 또는 언어의 문제로 간주하는 것은 자연/문화의 대립을 재생산한다. 고통과 죽음도 언어적인 것인가? 몸도 다른 모든 것과 같이 단지 텍스트인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최소한의 확실성은 여성이 오랫동안 임신과 육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문화 예술의 창조에는 참여하기 힘들었고, 기껏해야 소비자로 주변화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에는 종의 생산과 관련된 두 성의 차이가 깔려 있다. 임신과 출산을 조절하고 선택할 수 있게 된 현대 이후에나 여성은 자연으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유전자가 모두 해독되고 그 기능이 모두 밝혀져 인공적으로 인간이 창조될 수 있는 신의 경지에까지 이르지 않는 이상, 유기체는 그 불투명한 실재를 가진다. 이 ‘본질적  측면’은 억압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권력에 의해 조절되지 않는 마지막 해방구로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유전자도 유전자형(genotype)이 표현형(phenotype)으로 변환되기 위해서는 아직 과학이 파악하지 못한 많은 과정을 거친다. 


생물학에서는 개체가 형성되기 위해서 DNA에 잠재되어 있던 정보가 발현(revelation)되어야 하며, 그것을 표현형이라고 정의한다.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되기 위한 과정들이 있고, 여기에 자연뿐 아니라 문화의 힘이 가세할 것이다. 물론 자연적 차이는 문화적 차별로 변화할 수 있기에 결국은 섹스가 아닌 젠더가 중요하다. 이반 일리치는 [젠더]에서 (젠더가 아닌)섹스는 극도로 분업화된 근대에만 해당되는 편협한 정체성이라고 평가한다. 정은영의 작품에서 다른 성을 연기함으로서 생겨나는 남장 배우의 독특한 정체성은 양성을 생물학적 논란이 아니라, 사회적인 논의의 장으로 이끌어 낸다. 작품 [정동의 막]은 그러한 복잡한 논의를 깔고는 있지만, 답은커녕 질문조차도 명확히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에 깔려 있는 정동(Affect) 자체가 담담하거나 멜랑콜리하다. 작품 속 배우는 현존하는 배우들이 대부분 80대인 것과 달리, 40대의 ‘신예’이며, 여성국극 배우의 제일 막내에 해당된다. 그녀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가 30대에 우연히 국극을 접하고 무대자체도 불확실한 현장에 투신했다. 


무대에 비해 초라한 현실에 좌절하여 중간에 국극을 그만두고 ‘경력 단절녀’가 되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그녀를 다시 찾아낸 것도 작가의 열성 때문이었다. 이 작품 이후 이 젊은 배우는 간혹 사회에서 ‘전통’으로 호출되는 국극 무대에 참여하면서도, 남성게이 합창단 등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과 연대하는 복합적인 무대에 종종 섰다. 젠더 수행성이라는 공통점이 일본과 대만 등 여러 나라에서 행해진 무대들을 관통했다. 이때 정은영은 시나리오 집필자, 연출자, 감독 등이 되어 공동 참여자들과 함께 대화적 상상력을 가동시켜왔다. 대화적 상상력은 소수자들을 타자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러한 상상력이 발휘된 작품이 종종 축제적인 양상을 띄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국극의 배우들이 설 수 있는 무대가 없다는 점에서, 현대미술이라는 맥락에 있는 복합적인 장은 배우에게도 작가에게도 새로운 기회로 다가왔을 것이다. 싱글채널 비디오로서는 마지막 작품이었던 [정동의 막] 이후 점차 무대 연출로 확장되어 가는 작품 목록 속에서 작품 속 배우는 국극 보다는 국극이라는 문화를 소재로 한 현대 미술 현장에서 활발할 활동을 이어가는 모습이 발견된다. 


작품 [정동의 막]은 붉은 커튼 내려진 무대를 바라보는 남장 배우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배우는 어깨 부분 옷매무새를 고치는데, 그것은 남성에 비해 좁은 어깨를 가진 여성이 풍채 좋은 남성의 역할을 위한 행위이다. 그러나 빈 무대와 객석은 배우로 하여금 깊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게 한다. 그리고 나서 일상복을 입고 동작과 노래 연습을 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장면들은 여럿으로 쪼개지며 쪼개진 개별 화면에도 전체가 잡히지는 않는다. 남성역할을 하지만 매우 섬세한 몸매를 가진 배우 몸의 부분들이 인상적이다. 때로 물신적인 시선이 느껴질 만큼. 배우가 국극에 매혹되어 힘든 길을 가고 있듯이 작가 자신도 그 비슷한 여로에 있다. 정은영은 물론 현대미술 분야에서 각광받는 작가지만, 현대미술이 처한 상황은 빈 무대나 객석같은 환경을 친숙하게 바라 볼 수밖에 없다. 여성국극에 관한 작품에 관한한 그것들이 저 멀리에 있는 객관적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배우와 작가는 여성 예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이 속한 계의 썰렁함은 현대미술가도 공유하는 운명이다. 


더구나 시간은 더욱 가속화되어 국극이 전성기를 구가했던 10년이라도 버틸 수 있는 예술적 문화적 ‘이즘’이라는 것이 있을까도 회의적이다. 실제적 내용이 아니라 이름만 활용됐던 ‘페미니즘’ 또한 이 회의적 항목에 포함될 수 있겠다. 매혹과 실망, 또는 초창기의 매혹을 이어가기 위한 치열한 자기갱신, 선택에 따른 고통과 책임 같은 상황이 겹쳐질 수밖에 없다. 배우의 한숨은 작가의 한숨이며, 그 와중에 미지의 무대가 열리기를 바라며 꾸준히 열정을 불사르는 모습 또한 그러할 것이다. 연습 장면이 부분들로 포착된 장면들이 쪼개져 재연된다. 최대 4개의 장면이 동시에 플레이 되고, 아무 장면 없는 검은 부분도 있다. 사연으로 친다면 이루 말할 수 없음, 예술 형식으로 친다면 총체적으로 재현될 수 없음이다. 이러한 부분적인 재연은 수많은 밤과 낮이 바뀌어도 배우는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자기가 해야 할 것들을 해왔음을 암시하는 형식적인 장치로 다가온다. 화면의 3/4가 어둠에 잠겨있을 때도 있고 지친 듯이 누워서 연습하는 모습도 있다. 


다중적인 화면에 맞게 소리 역시 일상의 소리와 노래 소리가 섞여 들려온다. ‘천하기로 마음조차 천 할 손가. 입은 옷이 더럽기로 이내 청춘 더러우리. 서러워서 못살겠네. 이 내 소원 이루지 못할 바엔 차라리....’하는 노래가사는 배우의 심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수염이나 가슴을 동여매는 천은 상투에 갓, 겹겹이 갖추어 입은 사대부 복장과 더불어 전통적 남성성을 수행하기 위한 소품들이다. 배우가 연기하는 남성역할 또한 유형화된 것이지만, 미묘한 차이는 남는다. 남성성을 연기하기 위한 여러 장면 중에서 가슴을 천으로 처매는 장면은 독특한 ‘정동’을 선사한다. 프로이트는 젖가슴의 상실을 최초의 상실로 본다. 정신분석학은 남성(그리고 여성도) 어른이 되기 위해 젖가슴을 떠나 부성적인 성격을 띄는 상징계의 언어로 돌입하기 위해 이러한 상실은 필연적이라고 본다. 젖가슴 상실은 자신의 주체성을 획득하기까지 겪어야 하는 모든 상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이다. 


프란세트 팍토는 [미인]에서 프로이트의 해석으로부터 쾌락과 우울을 동시에 본다. 즉 여성의 젖가슴은 시선의 대상이 잃어버렸던 충만의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한, 보는 행위에 쾌감이 담겨있지만 그 대상이 이미 잃어버렸던 것으로 기억되는 한, 보는 행위의 쾌감에는 모순과 갈망, 그리고 우울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국극 특유의 과장된 눈 화장을 한 배우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이 잠시 보이면서도, 육중하게 떨어지는 붉은 커튼은 배우를 삼켜버리고 다시 열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던진다. 작품이 종반을 향해 갈 무렵 텅 빈 객석을 둘러보는 카메라는 갑자기 흔들리며 객석과 허공, 무대 막 등을 훑는다. 마치 떠도는 유령처럼. 마지막에 자막이 올라가고 작품이 끝나는가 싶더니 배우가 다시 연습복입고서 무대 이곳저곳을 점검한다. 내일도 설 무대라서 그런지, 아니면 그것이 마지막 무대여선지 알 수 없는, 기대라고 하기에도 아쉬움이라고 하기에도 불확실한 감흥이 흐른다. 무대란 여기(현실)과 저기(허구)를 나누지만, 정은영의 작품은 편집을 통해 둘을 섞는다. 


거기에는 몰입의 순간과 몰입을 위한 과정이 함께 있다. 분산된 시선을 묶어주는 것은 정동이다. 마지막 국극 배우일지도 모를 인물과 그 인물을 둘러싼 무대 안팎의 상황은 다소간 멜랑콜리하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검은 태양; 우울증과 멜랑콜리]에서 멜랑콜리는 우리를 정동들, 즉 고뇌 공포 혹은 기쁨의 불가사의한 영역으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작품 [정동의 막]은 멜랑콜리를 비롯하여 열정과 회의 같이 주체의 변동하는 에너지가 기록된 작품이다. 멜랑콜리는 ‘살고 싶은 의욕마저도 잃어버리게 만드는 의사소통 불능의 고통’(크리스테바)이지만, 국극 배우/작가는 그러한 고통을 다시 소통의 장으로 이끌어낸다. 그녀(들)의 말과 노래는 크리스테바가 [현실적 진실]에서 말한 현진실(Vréel)이다. 작업은 ‘어떻게 이 현진실에 대한 강박관념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까. 어떤 방법으로 사회 속에 그것을 삽입시킬까. 그것은 조정될 수 있을까’(크리스테바)의 문제가 된다. 


작품 속 국극 배우에게서 우리는 또 다른 의미의 여성적 언어를 듣는다. 크리스테바는 ‘여성적 언어’를 광인의 언어처럼 항상 뭐라 결정지을 수 없는 욕망, 다시 말해 불가능에까지 동요하는 언어라고 말한다. 그것은 현실과 허구가 혼동되기 십상인 경계위의 존재들의 언어인 것이다. 이 언어는 정확한 의미가 아닌 감흥을 전달한다. 정은영은 이 작품에 대해 ‘남역 배우의 고민과 갈등을 끌어안은 채로 분출하는 비언어화 된 어떤 뜨거운 이끌림과 열망/ 정동에 감응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밝힌다. 작품 속 배우는 확실하게 남성을 연기하는 것은 아니다. 대사도 노래도 끝까지 들리는 것은 아니다. 무대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열정이 고조되거나 맥 빠지는 상황이 전달될 뿐이다. 거기에는 다른 성이라는 허구가 되어가는, 또는 현실이 되어가는 과정 중의 주체가 드러난다. 그렇게 함으로서 작가는 사라진 듯 보이는 한 문화에서 현대예술의 핵심적 주제를 찾는다.  

  

출전; 토탈미술관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