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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중 신명덕 / 중심 없는 흐름

이선영

중심 없는 흐름

  

이선영(미술평론가)

  

담갤러리에서 열리는 김범중 신명덕 2인 전에서 장지에 연필로 그린 평면과 나무를 깍아 만든 입체에는 잔잔한 운율이 있다. 재료의 물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작가의 손맛 또한 공통적이다. 그들의 작품은 자판을 두들기거나 디지털 스크린을 터치하는 손가락에 의해 퇴화되어 가는 손맛이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영역 중의 하나가 바로 예술임을 나타낸다. 아나로그적 감성이 물씬 풍기는 종이와 나무는 물리적으로 공통점이 있다. 식물의 잔해를 감싸는 나무를 깍아 드로잉 하는 김범중, 조각칼로 나무 위에 ‘그리는’ 신명덕의 작업에는 그 방식 면에서 유사하다. 강도 높은 그들의 작업은 종이와 나무 위에 새겨진 것이다. 그렇게 구현된 화면은 시각성을 넘어 촉각성에 호소한다. 음악을 주제로 하는 이번 전시에서는 청각성 또한 가세한다. 종이와 나무 위에 새겨진 그 수많은 반복의 흔적 속에서 차이를 일궈내는 것은 그들 손의 연장이라 할 만한 도구(연필, 조각칼)이다. 



김범중, Decorum_장지에연필_20x100cm_2017



예술은 일상의 반복 속에서 일궈내는 차이이다. 예술의 동일성은 바로 차이이다. 반복과 차이는 양과 질의 관계이다. 몰입은 양에서 질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 몰입이 없다면 예술은 변죽만 울릴 뿐이다. 그렇게 될 때 작업은 노동에 머문다. 노동은 예술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몰입의 결과물은 몰입을 전염시킨다. 그것이 이 두 작가의 예술적 소통 방식이다. 이 전시에서 미술인이지만 미술만큼이나 음악을 사랑하는 두 작가를 이어주는 것은 음악적 요소다. 김범중은 음의 파장에, 신명덕은 울림과 공명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파장이나 공명 같은 주제는 곧장 그와 관련된 테크놀로지를 연상시키지만, 그들은 드로잉과 조각이라는 오래된 매체를 가지고 그러한 주제를 소화해왔다. 전시장에 전선줄이 이리저리 늘어져 있는 장황함 속의 빈약함이 아니라, 단순함 속의 복합성이 그들 작품의 특징이다. 


미술은 날로 새로워지는 테크놀로지의 진화에 이러한 내포적 다양성으로 대처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시각예술에는 청각적 요소가 강하게 배어있다. 장지에 연필로 선을 그어 만들은 김범중의 길쭉한 작품들은 섬세한 현악기를, 나무를 통째로 깍아 내부를 텅 비워놓은 신명덕의 작품은 울림통이 넉넉한 타악기를 떠올린다. 눈과 귀를 동시에 만족시켜주는 악기는 비슷한 미학적 목적을 가지는 두 작가에게 이상적인 모델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악기, 특히 장인의 솜씨가 배어있는 오래된 악기는 그 형태만으로도 심미적인 만족감을 준다. 떨림과 울림을 야기하는 두 작가의 ‘조형적 악기’에는 소리가 잠재해 있다. 그 작품들에 공감하는 관객의 눈이 그것을 작동시킬 것이다. 음악적 요소는 벽과 바닥을 각기 차지하고 있는 두 작품 군들을 이물감 없이 어울리게 한다. 음악은 세대와 삶의 이력이 다른 두 작가의 가교가 되며, 서로에게 대화적 상상력을 야기했다. 



신명덕, [무제], 육송에 채색,410x430x1800mm, 2017년.



고집스러울 만큼 자기색이 분명한 작가들은 의외로 통하는 바가 있다. 결국 서로 다른 것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다름만이 대화를 활성화시킨다. 음악은 미술가 이전에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던 그들에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었고, 시간의 시험을 이겨내고 현재로 다시 호출되었다. 무한 회귀하는 이 전시장의 음악처럼 말이다. 전시부제 ‘Discreet Music’은 두 작가가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음악가 브라이언 이노의 앨범에서 온 것이다. ‘Discreet Music’은 삶의 무대 한가운데를 도드라지게 차지하지는 않지만 지속적으로 흐르면서 무대에 진입한 것들을 감싸 안는다. ‘Discreet Music’ 전의 작품들은 그들이 선택한 음악이 그러하듯, 기승전결 없이 단순하고 반복적으로 흘러간다. 중심과 주변의 관계가 해체되어 오직 전체적으로만 들어줄 것을 요구하는 음악에서 생성되는 중심 없는 흐름은 두 작가의 작품과도 공통된다. 


[Discreet Music](1975년)은 원래 미술을 전공했으며, 록과 비(非)록음악 모두에 영향을 준 독특한 뮤지션인 브라이언 이노의 대표적 작품이다. 고요하게 흐르는 가운데 각성을 야기하는 그 음악은 환경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우면서 새로운 시대(New Age)를 연 기념비적인 앨범으로 평가된다. ‘Discreet Music’은 그 이전 시대의 음악처럼 주체의 요란스런 열정이나 광기보다는 자신이 놓인 환경에 녹아나는, 가령 빗소리나 파도소리 바람소리 같은 자연스러운 소리처럼 흘러가려 한다. 그 음악은 배경이라 할 만 한 것을 전경으로 잡아끈다. 그렇다고 그것이 단지 일상의 소음을 약화시키는 배경음악인 것은 아니다. 주어진 시공간을 찰랑찰랑 채우는 음향은 자신의 존재감을 약화시킴으로서 오히려 존재감을 확보하는 독특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것은 나를 비움으로서 나를 찾아가는 동양사상의 영향력이 컸던 지난 세기 후반기를 반향 한다. 이러한 부류의 음악은 ‘엠비언트 뮤직(Ambient  Music)’으로 불리며, 브라이언 이노는 그 창시자로 평가된다. 


전체 환경을 아우르는 엠비언트 뮤직은 브라이언 이노가 처음 몸담았던 진한 색깔의 화려한 록음악에 비한다면 거의 침묵에 가깝다. 그러나 인생에서든 예술에서든 외침만큼이나 침묵도, 강렬함 만큼이나 잔잔함도 필요하다. 시간은 침묵과 잔잔함으로 기울게 한다. 잔잔함은 강렬함의 앞뒤라는 맥락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삶이 가능하기 위해 삶의 앞뒤에 펼쳐진 더 긴 시공간대가 요구되듯이 말이다. ‘Discreet Music’은 김범중의 그림과 신명덕의 조각을 에워싼다. 그러면서 상호적으로 고양된다. 미술 같은 음악에 음악 같은 미술이 화답하는 것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는 지났지만 청년기를 가득 채웠던 음악은 영혼과 육체에 스며들어 다시금 예술작품이라는 영혼과 육체의 산물에 나타난다. 음악은 단순한 배경이 되지 않고, 제2의 천성이 되어 무의식적으로 발산되고, 작품의 내재율이 된다. 두 작가의 매체인 연필과 조각칼은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판의 홈을 스쳐지나가는 바늘처럼 그들의 몸과 영혼에 새겨진 것들을 풀어 놓는다. 

    

김범중-종잇장에서 들리는 소리


김범중은 20x100cm 크기의 패널 10개를 일정한 간격으로 벽에 걸어 놓았다. 규격을 맞춘 형태이다 보니 작품들 사이의 간격 또한 작품의 일부, 즉 여백이나 빈 공간처럼 다가온다. 소리란 공기가 있어야 울린다. 작가는 작품을 단지 벽에 건다는 맥락이 아니라 설치를 통해 이러한 공간을 마련했다. 최근 몇 년 동안의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장지 위에 연필로 그은 선들이 모눈종이처럼 나눠진 칸칸을 채우는 스타일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된 작품들은 각자 독자적으로 존재하지만 따로 또 같이 작동한다. 동질이상(同質異像)의 형태를 가진 작품들은 한 곡에 대한 변주처럼 전개된다. 악기 같이 생긴 형태들에서 다양한 현악기가 합주를 하는 듯한 모습도 상상된다. 선은 강도와 밀도를 달리하면서 배열되어 낮에서 밤으로, 또는 밤에서 낮으로, 또는 점차 커지거나 작아지는 듯한 시각적 소리의 계열이다. 그의 작품은 소리를 포함하여 다양한 원인을 가지는 대상, 또는 현상의 강도를 나타내는 신호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음악은 소수 매니아들의 취향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김범중, Cogito_장지에연필_20x100cm_2017



특히 이 전시에 깔리는 음악은 보다 포괄적인 보편성을 추구한다. 가령 엠비언트 음악의 주제인 환경은 특정 시공간에서만 특정 부류에서만 중시될 수 없는 문제이다. 엘리안 스트로스베르는 [예술과 과학]에서 인간의 음악에 대한 본능적인 사랑은 심장이나 호흡 기관의 생물학적인 리듬에서 유래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빛과 소리에 있는 파장은 생명의 내재율에 상응하는 것이다. 김범중은 이러한 내재율을 사뭇 엄격한 추상으로 표현한다. 형태안의 형태가 계속 이어지는 그의 작품은 음의 반복을 공간적으로 번역한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괴델 에셔 바흐]에서 음악이  허공을 날아다니는 진동의 연속이면서, 두뇌속의 정서적 반응의 연속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정서적 반응에 이르기 전에 일단 진동이 있어야 한다. 김범중의 작품에서 사각형 속의 사각형들, 그 안을 채우는 미세한 선들은 진동에 대한 감각을 표현한다. 그것은 이 전시에 깔리는 것처럼 음악일 수도 있고 단순한 소리일수도 있다.  자연의 소리, 인간의 목소리 등 타자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들이 포함된다. 그것은 중심을 향하는 주체의 독재적 시선을 사방에 흩뿌린다. 소리는 편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각처럼 지시대상에 얽매이지 않기에 자유롭다. 그러나 음악도 기보법과 연주방법이란 것이 있듯이, 자신이 정한 규칙의 한도 내에서 자유롭다. 김범중의 작품에서 사각형 속의 사각형, 그 안을 채우는 선들은 밀도를 달리할 뿐 비슷한 시각 상을 보여준다. 명암의 차이를 보여주는 모듈화 된 사각형은 각 작품들마다 달리 배치되며, 어떤 것은 그 배열을 변화시키려는 듯 깊은 균열을 보여주기도 한다. 변모는 규모를 달리하며 항시적으로 일어난다. 특히 심연에서 나왔다가 다시 심연으로 돌아가는 듯한 미세한 선들은 음고를 달리해서 반복적으로 연주되는 음악처럼 덧씌워진 고리들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에는 구조적 단위들이 있으며, 단위들은 동형관계(isomorphism)를 가진다. 호프스태터는 동형관계라는 용어를, 한쪽 구조의 각 부분이 다른 구조의 상응하는 부분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두 개의 복합구조가 서로 사상(寫像) 될 수 있는 경우에 쓰인다고 정의한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김범중의 작품은 브라이언 이노의 음악과 동형관계를 이루며, 이미지는 소리와 동형관계를 이루고, 그것들이 함께 작용하여 관객의 마음에서 의미를 창출하는 동형관계가 있다. 


물리적으로 보자면, (아나로그적인) 음반에 새겨진 홈 선과 음 사이에는 동형관계가 존재하며, 전축은 그 동형관계를 물리적으로 실현하는 메커니즘을 가진다. 소리와 이미지 사이를 왕래하는 작가에게 두 기호의 그물 관계(또는 동형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물론 양자 간의 정확한 번역이란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지만 말이다. 김범중의 작품에서 전경과 배경의 구별을 해체하는 사각형들의 행렬은 기승전결의 구별이 약화된 채 무한 회귀 식으로 흘러가는 엠비언트 뮤직과 동형관계를 이룬다. 그것들은 모두가 전경이거나 아니면 모두가 배경인 것이다. 소음이나 우연한 소리, 심지어는 침묵 같은 것들도 작품의 중요한 요소로 삼는 현대음악의 기조는 조직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동렬에 놓는 패러다임의 변화에 의한 것이다. 김범중의 작품에서 동질이상의 제각각의 것들은 동등한 가치를 가지며 동시에 전체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요구된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그러한 맥락에서 현대예술과 동양사상, 특히 참선과의 유사성을 말한다. 참선이 추구하는 전일주의(holism)는 사물을 오직 전체로서, 즉 부분의 합이 아니라 전체로서만 이해한다.

   

신명덕-나무통에서 들리는 소리


신명덕은 은행나무나 플라타너스 나무 같은 단단한 재질의 나무를 통으로 깍아 낸다. 단면을 나무통의 형태가 남아있는 둥근 고리로 남겨두기도 하고 오메가 모양의 홈을 파서 변주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에서 둥그스름함은 정확한 반지름을 가지는 원의 기하학을 벗어난다. 이러한 둥그스름함이 출발했던 원점 그 자리로 바로 되돌아오지 않고 우회하며 회귀하게 한다. 중심은 서서히 이동하거나 사라진다. 단면의 둥근 형태는 나무 자체의 생애 주기가 그러하듯 순환적이다. 나무는 여름과 가을, 겨울을 지내고 봄에 다시 태어난다. 나무의 기념비적인 크기와 수명은 인간의 시공간 개념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인류가 죽음으로 끝나는 삶을 넘어서 순환에 대해 생각했을 때 해와 달, 별 같은 천체의 주기만큼이나 인간과 마주서있는 지상의 그 기념비적 존재의 삶을 참고했음이 틀림없다. 오늘날 순환적 시간성은 종말론적 비전을 가지는 직선적 시간에 대안으로 다가오고 있으며, 환경을 생각하는 문화의 기본 바탕이 된다. 작가는 자신이 다루는 재료의 내재율을 최대한 존중한다. 예전 작품에서 씨앗이나 열매를 닮은 목 조각 또한 그러하다.


 

신명덕, 은행나무, 250×240×380mm, 2015년.



씨앗은 그와 닮은 열매를 낳을 것이고 열매는 다음 세대의 씨앗을 품을 것이다. 이러한 무한한 회귀의 과정은 전시장에 울리는 음악을 닮았다. 색이 없거나 나무의 정체성을 최대한 살리는 색과 형태, 그리고 그것을 낳았을 딱히 노동과도 구별할 수 없는 행위는 단순하다. 실생활에서 사용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만큼 튼튼해 보이는 구조는 굳이 예술품과 물건, 작업과 노동, 자연과 기술의 구별을 무색하게 한다. 그의 작품에서 예술은 쓸모없는(특정한 기능으로 한정되지 않은) 물건이고, 물건은 쓸모 있는(삶에 필연적인) 예술이다. 접합 부위가 없이 한 통을 이루는 큼직한 나무는 인간만큼, 또는 그 이상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 나무통의 표면에는 일정한 리듬으로 깍인 칼자국들이 무늬 아닌 무늬를 만든다. 이러한 무늬는 작품마다 다르다. 작품마다 다른 호흡, 즉 다른 영혼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기계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한 것이라 어느 것 하나 똑같지 않지만 리드미컬한 반복이 느껴진다. 고정된 중심을 해체하고 단순하게 흐르는 [Discreet Music]과 함께 구조적으로 동형관계에 있는 작품들이 그렇다. 그의 작품은 음악과 동형관계이지 음악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이 리듬이 울려 퍼질 내부적 빈 공간을 마련한다. 그것은 시각적인 메아리를 야기한다. 나무를 깍는 조각칼의 리듬이 새겨진 표면은 시간의 공간화이며, 운동의 이미지, 즉 지속을 보여준다. 신명덕의 작품은 완결도가 있으면서도 그 내부에서 시간성이 추적된다. 닫힘은 열림을 위한 조건이다. 여기에서의 시간은 단순히 ‘운동의 수’(아리스토텔레스)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베르그송의 철학적 개념인 지속, 즉 생의 약동으로 사유되는 근원적 시간에 가깝다. 과학적 합리성으로 파악될 수 없는 지속은 자기로 내려감으로써 체험된다. 예술적 몰입에서 느껴지는 것이 바로 지속이다. 작가는 이 지속 속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 생산과 소비 일색의 일상은 이러한 지속을 기계적 반복으로 와해시키려 한다. 시간예술인 음악은 그자체로 지속을 구현하며, 공간예술인 미술 또한 지속의 상태에 접근하려 한다. 작가가 공감하는 음악과 관련된 이 전시는 여러 겹으로 지속을 구현한다. 레비나스는 [신, 죽음 그리고 시간]에서 베르그송에게 지속은 미래를 향한 자유라고 평가한다. 




신명덕, 플라타너스 나무에 채색, 250×300×390mm, 2015년.



레비나스는 베르그송의 지속이라는 개념에서 흘러가는 것의 흐름, 사물들의 유출, 운동 그 자체를 보며, 이 모든 것이 의식의 흐름에서 빌려온 은유라고 본다. 작업 중의 작가에게 시간은 연대기처럼 인식 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된다. 현대예술은 임의의 시간에 불과한 순간을 물신화하는 관례를 벗어나기 위해, 비(非)선형적인 시간을 내포하는 지속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음악 또한 이러한 내재적 시간성을 가진다. 신명덕의 작품에서 시간은 미리 결정된 결말을 향해 나가가는 것이 아니라, 데이비드 노만 로도윅이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에서 말한대로, ‘창조적 진화’(베르그송)라는 견지에서 새롭고 예기치 않은 것을 향해 부단히 움직인다. 창조적 진화는 의식과 물질 시간 사이에 연속성을 상정한다. 여기에서 시간성은 순간적 상태의 연속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다. 나무 표면에 새겨진 시간성들은 서로 관계망을 이루며 지속된다. 전시 공간에 편재하는 음악처럼 나무 조각들은 시간 기호(chronosigne)를 변주한다. 나무의 안과 밖에 각인된 시간들은 ‘살아있음의 특징인 열린 전체’(들뢰즈)를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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