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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을 / 예술, 삶, 그리고 예술 하는 삶

이선영

예술, 삶, 그리고 예술 하는 삶

  

이선영(미술평론가)

  

스페이스 몸 미술관에서 열리는 김을의 ‘나쁜 그림(Bad Drawing)’은 예술, 삶, 그리고 예술 하는 삶에 대한 사유와 감각이 녹아 있는 전시이다. 전시된 작품의 면면을 볼 때 ‘나쁜’은 일단 독창적 기술이 집약된 형식이나 심오한 주제, 그것들을 뒷받침해주는 노동과 자본 등이 부족하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무한경쟁 시대, 자유로워야 할 예술 또한 많은 조건들이 붙기 때문이다. 대부분 그러한 잡다한 조건들은 예술이 스스로 돌파해야할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지 않는다. 다만 대행적으로 소비해주는 장치들에 불과하다. 김을의 작업 방식이나 작품은 그러한 거품들이 제거 되어 있다는 점에서 필자는 ‘좋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세상의 기준은 다르니까. 김을은 20 여 년 간 드로잉에 전념해서 드로잉만 3만점 정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작업을 해온 시간과 양만큼 회화에 대한 신념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는 열심히 작업해왔지만, 그런 만큼이나 그림에 대해 회의적이다.  




(참고작품) Beyond the painting 14-7, mixed media, 185.5x231x14cm, 2014. 



작품들과 오브제들이 가득한 공간 한 켠에 걸린 작업복에 그가 손수 수놓은 글자인 ‘그림이 필요 없는 즐거운 세상’은 이러한 역설(양면성)이 읽힌다. 작품 속에서 발견되는 그의 다른 어록들처럼 가벼운 말투지만 그 무게는 만만치 않게 다가온다. 만약 인류가 진보하여 자유와 평등이 모순되지 않는 이상사회가 도래한다면 예술은 불필요할 것이다. 예술이야 말로 개인적 자유의 최고봉이며, 예술은 인류가 평등하게 누릴만한 항목 중 맨 마지막에 자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소수의 자유가 다수의 자유를 해친다. 단적으로 자본가의 자유와 노동자의 자유가 반대편에 있는 현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타자의 부자유에 눈감는 가짜 자유와 하향 평준화된 가짜 평등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세계관에 따라 다르다. 좌파는 진정한 이상사회가 도래할 때 까지 예술은 이상적 정치운동에 복무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예술을 지양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전위에 의한 ‘예술의 죽음’이 주장되어 왔다. ‘회화의 죽음’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좌파에게 있어 예술은 인간해방의 도정에 놓인 과도기적 수단이지 최종 목적이 아니다. 반면 우파는 개인의 신성한 소유권과 마찬가지로 예술 또한 소수의 소유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예술을 물신화한다. 예술의 자율성, 예술을 위한 예술, 순수예술, 형식주의 등등의 명칭이 붙은 일련의 가족유사성을 가지는 개념들은 예술을 사회와 대립시키면서 예술에서 사회를 배제하려 한다. 그것은 한쪽을 아예 배제시킴으로서 모순을 해결(또는 방치)하려는 손쉬운 해결책이다. 이러한 해결책은 예술을 위선적이고 불구의 것으로 만들었다. 물론 좌파적 해결책 또한 진정한 ‘리얼리즘’이 아닌, 진선미의 통일이라는 고전주의적 해법에 머물러 왔음이 밝혀졌다. 김을이 생각하는 ‘그림이 필요 없는 즐거운 세상’은 어쩌면 좌파적 이상과 닿아있지만, 그가 예술을 정치 도구화하는 경향에 찬성할 리가 없다. 




(참고작품) beyond the painting, mixed media, 135x167x14cm, 1996



(참고작품) installation view (gallery Royal, 2012



다만 현재로서는 ‘살아있는 현실바닥과 나의 이상적인 것과의 균형’이라는 절충적인(?) 대안을 가지고 있다. 김을이 이 전시에서 ‘나쁜’이라고 칭하는 그림들은 그가 비판하는 세간의 경직된 그림들을 말하는 것인지, 누가 보면 ‘이게 그림인가’라고 물을 수도 있는 자신의 그림을 향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어쨌든 그는 이 전시에서 그림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 2전시실을 채우는 [beyond the painting] 시리즈는 그림 자체에 대한 비판적 그림, 즉 ‘메타 페인팅’을 지향한다. 그는 여기에서 그림의 표면을 ‘거짓과 가식, 꾸밈과 왜곡의 장으로 인식’하고, 그 이면에 관심을 갖는다. 그에 의하면 주제의식이나 형식 등에서 그림을 대단하게 여기는 사고가 자연스러운 작품이 아닌 경직된 작품을 낳는다. ‘너희가 그림을 아느냐’ 식의 태도는 주체를 비대화하는 낭만주의적 예술가상과 어우러진다. 예술가로서의 자의식 또한 마찬가지다. 이 전시에서 바닥에 거꾸로 세워진 이목구비가 지워진 얼굴은 최소한의 자의식마저도 지워버리고 싶은 심정이 드러난다. 


지움은 쓰기를 가능케 할 것이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인지심리학에 관련 된 책 [괴델 에셔 바흐]에서, ‘선불교의 불자는 자기가 추구하려는 자기의 모습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가운데, 그리고 모든 규칙과 관행을 깨는 가운데 자신을 사로잡았던 것에서 벗어나려고 함으로서 자기 자신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타자는 동일자의 지표가 된다. 동일자 자체가 타자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새로움을 위해 지움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전의 것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고 흔적을 남긴다. 김을은 ‘그림도 짧고, 인생도 짧다’고 말한다. ‘인생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보는 작가에게 예술은 ‘의미 없는 것을 의미 없음으로 그대로 봐주는 것’이다. 즉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대로 보는 것’, 그것이 예술이다. 무의미의 의미를 탐색하는 그의 작품은 예술/비예술의 경계선 상에 있다. 그에게 드로잉은 회화를 포함한 조형적 틀을 벗어날 수 있는 융통성 있는 장이다. 특히 그것은 최초의 신선함을 간직하기에 소중하며, 삶으로부터 비롯된 여러 가지 단상을 포함한다. 


드로잉은 쓰기와 함께하며, 글과 이미지는 상보적이다. 예술과 삶의 문제는 논란은 많지만 답이 있을 수 없기에 심오한 주제이지만, 김을은 그 특유의 허술해 보이면서도 헐렁한 스타일로 풀어나간다. 물론 전시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일정한 시공간 내에서 그동안 실행해온 수많은 작업 중에서 선별하고 조직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3 전시실은 드로잉과 전시장 안팎의 사물을 엮어서 연출한 드로잉 설치 작업을 보여준다. 작업이 주는 중압감 대신에 가벼운 보폭으로 나아가는 그의 주요 어법은 드로잉과 오브제이다. 미술사적으로 드로잉과 오브제의 가치가 부각된 것은 다다와 초현실주의이다. 드로잉과 오브제는 잠재되어 있거나 억압된 무의식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작업실에는 그동안 수집해온 오브제들이 가득하다. 2016년 올해의 작가전에는 그러한 작업실의 한켠을 재연해 놓기도 했으며, 2010년 스페이스 공명에서의 전시는 그러한 오브제를 450여 개나 풀어 놓기도 했다.  


평면작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종이를 따로 사지 않는다...항상 줏는다’고 말한다. 어디선가 취해온 기존의 것을 지우거나 가필하면서 의도치 않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그 예가 [죽은 그림 살리기]시리즈(2004년)이다. 한발 더 나아가 ‘불순한’ 평면에 오브제가 붙어있기도 하다.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사물을 향한다.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예술의 출발점은 사물들 속에 있다’는 릴케의 말을 인용하면서, ‘사물을 ‘겸손하고 말이 없으며 심각한 존재들’이라고 말한다. 사물은 상품이나 물건, 그리고 예술작품과 달리 유용성이나 쓰임새, 의미로부터 자유(또는 불확정적)롭다. 김을의 전시는 ‘예술’과 ‘작품’이라는 말 자체에 서려있는 무거움을 걷어낸다. 대신에 그는 쉼 없이 작업한다. 작업실에서의 시간 뿐 아니라 잠을 자기 한 두 시간 전에도, 그리고 꿈속에서도 작업에 대해 생각한다. 의식이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도 작업을 향한 무의식의 불은 켜져 있는 것이다. 




(참고작품) TZ studio (MMCA, 2016)



(참고작품) installation view (so here....is there a bird), SPACE GONG MYUNG, 2010



예술은 직업이 되기는 힘들지만, 예술에 통으로 바쳐진 삶은 있을 수 있다. 일상인이 노동과 소비적 삶에 분주히 매몰되어 있는 동안, 작가라는 존재는 쉼 없이 예술에 대해 생각하고 실행한다. 그러한 실행을 각자의 정치적, 미학적 지향에 따라 실험과 실천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작가란 실행(실험, 실천)의 결과를 타자들과 공유하려는 자이다. 3 전시실의 드로잉 설치작업은 가벼움을 추구하다 못해 중력으로부터도 벗어나려는 듯하다. 지지대도 없이 종이에 달랑 그려진 드로잉들은 줄에 집게로 매달려 있거나 붕 떠 있는 책상 위에 놓여 있곤 한다. 실이나 나뭇가지에 의지하는 그것들은 바람에 펄럭거리고 빙빙 돌기도 한다.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은 드로잉들은 작품은 날아 갈까봐 돌멩이를 얹어 놓았고, 쇠구슬이나 추를 매달아 놓기도 했다. 낡은 책상은 기둥에 묶여서 공중에 떠 있고, 자화상 하나는 마치 처박혀 있는 듯 바닥에 거꾸로 놓여 있다. 설치된 드로잉들은 어떤 것도 관객에게 안정된 시각 상을 제공하지 않는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것들 조차도 자세히 보려하면 위로 올라서는 수고를 요구한다. 


스치듯이, 또는 어딘가에 간신히 붙어있는 그것들은 삶 속에서 예술의 자리의 취약함을 알려준다. 그러나 작품들이 단지 붕붕 떠 있는 것은 아니다. 각 드로잉의 무게중심을 실어주는 것은 이미지와 함께 있는 글, 즉 작가의 사유이다. 대부분 작은 종이에 작업한 것이라서, 글은 이미지보다도 더 적절하게 자기 자리를 차지한다. 한 두 줄로 써 있기에 맥락이 충분치 않은 문장들은 선문답처럼 보이기도하고, 동양의 시서화의 전통을 떠올리기도 한다. 책상 위의 한 작품을 보자. 그는 하얀 종이 위에 돌멩이 하나 올려놓고 ‘하얀 종이 위에 돌멩이 하나....천지개벽은 이제 시작되었고 세상이 요동치기 시작하고 있다’고 써 놓았다. 작은 종이 위의 작은 돌이지만, 배치의 결과는 기념비적이다. 평면 위의 돌은 거대한 암석이나 산처럼 보인다. 또는 그 돌멩이는 마치 그려져 있던 이미지가 물리적 실체로 변한 마술적 순간을 비유한 것일지 모른다. 



(참고작품) learning machine (백남준아트센타, 2013)



(참고작품) Untitled, mixed media, 45+31+31cm, 2012



그림은 단순히 세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평행하게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이다. 이러한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은 현실에서 소외되기 십상인 자유로운 영혼들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지배적 체계는 인간의 몸과 함께 남아있는 이 마지막 영역을 장악하기 위해 엄청난 자본과 기술을 투입한다. ‘꿈의 공장’에서 생산된 그러한 스펙터클이 미술을 대신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김을은 작가나 작품에 대해 끝없이 회의한다. 자신이 가짜일수도 있다는 생각, 이목구비를 생략한 채 뒤집어 놓은 자화상이 그렇다. 빨래처럼 집게에 걸어놓은 작품에 써있는 ‘누가 무엇인가를 들판에서 태우고 있는 풍경’은 작업실에서 본 어떤 작품을 떠올릴 때, 자신의 작품을 불태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이 있다. 그는 자신의 드로잉을 태워서 재를 만들거나 떡 모양으로 빚어 쌓아 놓기도 했다. 재로 화한 드로잉들은 예술이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회의주의가 엿보인다. 


한편 떡처럼 쌓아놓은 드로잉은 예술도 밥이 되었으면 하는 예술가들의 보편적 희망사항이 담겨 있는 듯하다. 떡(삶)이든 재(죽음)든 드로잉은 삶과 죽음 사이의 과정에 놓여 있다. 선적인 드로잉은 늘 시간을 떠올린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벗어날 수 없는 생로병사의 과정은 시간이라는 축으로 전개된다. 작품이라는 것이 소우주라면, 그리고 그 작품이 한 장의 종이처럼 가벼운 존재라면 우주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기둥 벽에 묶인 인형과 각목, 쇠구슬에 매달린 작품은 우주를 말 그대로 한 장의 종이에 담았다. ‘당신은 죽어서 우주의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문장과 함께 미라처럼 꼿꼿한 플라스틱 인형이 우주도 속에 자리한다. 먼지로부터 탄생한 우주와 생명은 다시 원래의 먼지로 되돌아갈 것이다. 무한히 회귀하는 윤회적 사상은 시간의 끝을 전제하는 종말론에 비해 긍정적으로 다가온다. 햇빛에 반사되어 흩날리는 먼지 입자들처럼 그렇게 우주와 생명을 담은 이미지 또한 무작위로 펄럭거리면서 그림이라는 환영의 장치를 해체한다.

 

토대가 없는, 또는 토대를 제거한 그의 작품은 작품들이 놓인 현실 그 자체를 심연으로 변모시킨다. 그 방식은 가볍고 투명하며 엄밀하며 일관적이다. 그리고 단순하다. 그러나 이 단순함은 즉물적이 아니라 보다 고차원적인 단순함이다. 수학이나 물리학은 고차적인 지식일수록 단순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로 가득하다. 김을은 작가라서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작품으로 그렇게 만들었지만, 각자의 환경을 이루는 모든 것들, 특히 소유물이나 생산물들 또한 그렇게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것은 아닌가. 6개의 드로잉이 따로 또 같이 작동하는 설치방식은 그림 또한 사물처럼 다루는 오래된 관심의 발로이다. 그는 2006년 아르코 아트센터에서의 전시에서 이미지의 띠를 나선형으로 만들어서 공중에 띄워놓기도 했다. 드로잉을 설치하는 작업은 원근법적 시선이 투과하는 공간적 거리가 아니라, 시시각각 다가오는 지각적 체험의 장을 중시한다. 그림이 재현이라면 사물은 제시이다. 김을은 그림도 사물처럼 제시한다. 현대미술이 재현주의로부터 벗어나려 할 때 사물은 중요한 방향타가 되어주었다. 


입체파의 꼴라주나 초현실주의 오브제 등이 그 예이며, 보다 가깝게는 개별 작품이 아니라, 사물들로 연출 된 체험의 장(場)으로 변화한 미니멀리즘 이후의 현대 미술의 추세가 그러하다. 2 전시실의 ‘beyond the painting’은 그림을 창으로 간주한 고전적 은유를 가지고 유희한다. 김을의 작품에서 창/벽/공간은 조합의 수가 많은 레고 블록 놀이 같다. 그림은 세상을 비춰주는 투명한 창이었지만, 작가는 그림이라는 창에 또 다른 창을 그린다. 창속의 창은 윈도우 화면처럼 계속 열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동어반복이고 자기지시적인 행위이다. 그것들은 그림에 대한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을 반성하는 ‘초월적’ 그림이다. 그러나 그에게 초월은 머나먼 곳에 있거나 ‘척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재귀지시성을 가진다. 그는 창이 붙어있는 벽을 함께 그림으로서, 고전-사실주의에서 모더니즘으로 건너가면서 창에서 벽으로 변모한 그림의 위상 또한 암시한다. 




(참고작품)installation view, (drawing energy), ARKO ART CENTER, 2006



또한 그것은 재현일수도 있는데, 구성요소는 비슷하지만 여러 가지 변주가 있는 창문 이미지는 그의 작업실이 있는 서울 인근의 컨테이너 하우스나 조립식 건물 등에 기계적으로 뚫려 있는 창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두 개의 창문 아래에 선을 넣으면 근대의 ‘살기위한 기계’에 살고 있는 익명적 현대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여기서 창은 눈이지만 바깥을 향하고 있지 않다. 투명성을 지향하는 근대적 시선은 실은 맹목적 시선이다. 도시에 아파트가 있다면 도시인근에는 조립식 건물이 있다. 그것들은 모두 모듈화 된 방식으로 대량 생산된 것이다. 구름이 떠있기도 하지만 대개 푸른색 계통으로 평면적으로 칠해진 바탕 면은 그것이 창이 뚫린 벽의 일부인지, 하늘인지 모호하게 한다. 하얀 구름 대신에 물감 뿌린 자국이 있는 작품이 있는 것으로 봐서 벽과 창은 유동적이다. 창, 또는 문은 원근법적으로 배열되어 있기도 하다. 전자라면 재현에 가깝고 후자라면 환상에 가깝다. 어쨌든 그림이란 원초적이든 메타적이든 재현과 환상이 만나는 자리이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그림은 근대에 탄생했지만, 그림의 근간을 이루는 사고는 고대철학으로부터 소급된다. 줄리언 벨은 [회화란 무엇인가]에서 고전적 사유의 두 흐름과 회화를 비교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이미지를 만드는 이유는 지식을 바라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플라톤은 이미지를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의 헛된 욕망들을 탐닉하기 위해 이미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줄리엔 벨에 의하면 플라톤의 이데아란 인간의 마음 보다는 신의 마음에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는가의 문제였다. 형태(form)란 그리스어인 이데아의 일반적인 번역이다. 플라톤적인 미의식은 고전주의나 추상미술과 맥이 닿아있다. 미메시스에 충실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 대상을 최대한 유사하게 복제하는 눈속임 기법을 낳았다. 그러나 관념이든 대상이든 유형화를 피할 수 없다. 그 둘은 무엇인가를 재현하려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관념을 다른 하나는 대상을 재현한다는 차이일 뿐이다. 이러한 재현주의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현대의 철학과 미학을 지배해 왔다. 그림 자체에 대한 자기반성을 행하는 김을의 작품 또한 재현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다. 그가 계속 문제 삼는 틀이나 체계는 결국 재현적 장치와 관련된 것이다.  




(참고작품) Untitled, mixed media, 67+50+8cm, 2012



(참고작품)



[beyond the painting] 시리즈에서, 푸른 바탕에 자리한 검은 창들은 단자처럼 존재하면서 그자체가 우주의 구성요소이자 우주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김을은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올해의 작가상 전에 이러한 단자(monad)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우주를 보여준바 있다. 작품 하나하나가 자신과 예술, 삶에 대한 단상이며, 그 전체가 일종의 자화상이 된다. 이번 전시에서도 정신적인 원자라고 할 수 있는 모나드로 이루어진 우주가 펄럭거리는 한 장의 드로잉으로 제시된다. 버려진 인형처럼 뻣뻣한 자신의 시체가 포함되어 있는 이 우주도의 네 귀퉁이 중 하나는 고정되어 있지 않아 전시장 벽에 설치된 소형 선풍기 바람에 흔들린다. 찢어질 수도 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이미 그 그림자체가 재활용 종이—그의 작품 중 검은 그림들은 대개 검은색 아크릴로 그전에 있던 이미지를 지운 결과물이다--에 그려져 있으며, 만약에 훼손되면 그 또한 우주의 중심으로 돌아갈 터이다. 


바람에 나부끼는 한 장의 종이는 앞면과 뒷면을 가졌으며, 3차원 공간에 이런저런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회화에 대한 전형적인 정의가 그러한 것처럼 단순한 2차원적 표면이 아니다. 회화의 자기 동일성이라고 간주되는 2차원적 표면만을 강조할 때 그림은 벽에 부딪힌다. 르네상스로부터의 대단한 이탈로 여겨졌던 모더니즘은 창에서 벽으로의 이동일 뿐이다. 벽과 창이 함께 그려진 작품 [beyond the painting]에 비춰 본다면, 이러한 이동은 근소하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체계의 불완전성을 다룬 책인 [괴델 에셔 바흐]에서, 평면과 공간 사이의 갈등을 주제로 하는 에셔의 그림을 분석한 바 있다. 이 책에 인용되는 에셔의 말인 즉, ‘2차원적인 것은 사실은 그 어느 것도, 심지어는 반질반질하게 광을 낸 얇은 거울조차도 완벽한 2차원은 아니기 때문에, 알고 보면 4차원이라고 말하는 것 못지않게 허구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벽이나 종이는 평평하다는 관행에 집착한다...그런 평평한 표면에 토대를 두어 공간의 착시를 만든다’ 




(참고작품) korean artist prize 2016(MMCA, 2016



호프스태터는 에셔의 경우에서 ‘제 아무리 우리가 3차원을 2차원으로 시뮬레이션 하려고 애써봐야 3차원성의 본질은 늘 빠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결국 우리는 ‘그림 안에 있는 내적인 의미, 즉 어떤 식으로든 이차원 안에 포착된 다차원적인 측면들에 반응한다’는 것이다. 근대미학의 온갖 감언이설이 있지만 그림이라는 평면은 결코 충만하지 않다. 3차원적 현실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차원의 전이와 변형에서는 흥미로운 지점들이 있다. 중요한 것은 여기나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서 저기로, 또는 저기에서 여기로의 과정이다. 김을은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한다. 그가 드로잉을, 그것도 확장된 의미의 드로잉을 중시하는 것은 과정에 방점을 찍기 때문이다. 이전 작품에서 사루비아 다방의 메모지 206장에 종이컵 지름의 동그라미를 그려 넣고 드로잉 한 작품은 좋은 예다. 작품 [파이50](2004년) 시리즈에서 그는 지름 5센티 안에다가 믹스 커피 한잔 마실 동안 그 순간 생각나는 것을 그렸다. 


거기에는 하루에 1장 씩 근 1년 동안 자신이 점심 먹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가 담겨있다. 뭘 그려야 하겠다는 생각은 없지만, 그것들이 모두 모이면 자신의 자화상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명확한 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미지의 것으로 된다. 김을은 ‘내 손재주로 할 수 있는 것을 매일 오밀조밀하게 하루 종일 한다’고 말한다. 특정한 목표 없이 ‘그 순간 스쳐지나가는’, 궁극적으로는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그린다. 거기에는 주체(객체)가 없는 가운데 주체(객체)가 있다. 그러한 ‘메모지’ 스타일의 작업은 작년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전시처럼 거대한 벽면을 통째로 채우고 우주이자 자화상인 작품으로 고양될 수 있다. 그 또한 최종적일 수 없는 과정적 실행의 일부이다. 그에게 작업이란 답은 없고 물음만이 있는 실행이다. 마치 자연스러운 인생처럼 말이다. 그러한 김을의 실행은 ‘무엇이 참된 길입니까’에 대한 물음에, ‘날마다 가는 그 길이 참된 길이다’라는 선승의 답을 떠오르게 한다.  

  

출전; 스페이스 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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