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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현 / 다양성의 원천으로서의 공생

이선영

다양성의 원천으로서의 공생

  

이선영(미술평론가)

  

[공존의 숲]이라는 일괄적인 제목을 가진 강동현의 최근 작품들은 동물들을 소재로 한다. 코뿔소부터 고래에 이르기까지 육해공을 망라한다. 그것은 온 세상에 생명이 편재함을 말한다. 극지방에도 사막에도 사람이 살고 있듯이 자연에는 빈틈이 없다. 지상에 태어난 모든 것들에는 나름의 자기 자리가 있다. 비록 이러한 자연의 순리가 인간중심주의에 의해 흔들리고 있지만 말이다.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을 부당하게도 자신을 독립된 과로 분류한다. 생물학자 마굴리스는 ‘사람, 침팬지 그리고 오랑우탄은 동일한 분류학적 집단이다. 사람을 독립된 과로 분류할 어떤 생물학적 근거도 없다’고 말하면서, ‘두 손을 자유롭게 덜렁거리면서 두 발로 직립해서 걷는 동물들은 부당하게 확대되어 원숭이과가 아니라’, ‘사람과’로 분류 되었다고 비판한다. 인간은 이러한 아전인수적 자의식을 통해서 ‘자연을 지배하고 더 나아가 또 다른 인간들을 지배’(막스 호르크하이머) 해왔다. 




공존의 숲  50x15x32  스텐레스 스틸, 우레탄 도색  2016



공존의+숲++530x130x290++스텐레스+스틸%2C+우레탄+도색++2016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도구적 이성비판]에서 근대시대에 ‘인류의 지구지배는 그 어떤 시대에도 유례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도구적 이성비판]에 의하면 문명은 자연선택을 합리적 행위로 대체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화 과정은 시장을 기획하는 소수의 의식 안에서 결정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계층으로 나뉜 체계에서 소수의 이익을 위해 발휘되는 도구적 합리성은 많은 인간을 포함해 자연을 착취한다. 예술 또한 자연과 마찬가지로 지배적 질서의 바깥에 있는 존재로 자연과 동병상련에 있다. 그래서인지 예술작품에 등장하는 자연은 우울한 느낌이 있다. 강동현의 작품처럼 찬란하고 굳건하게 서있는 모습일수록 더욱 그렇다. 스테인레스스틸로 만들어진 후 우레탄으로 도색한 그의 작품들은 매끄러운 표면으로 주변을 반사함으로서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은 물론 그것이 놓여 있는 환경도 그 내부에 품고 있다. 


강동현의 작품 속에 나타난 동물들이 지금과 같은 속도로 멸종된다면 그것들에 비춰진 환경이나 인간들 또한 같은 운명일 것이다. 자연은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비로 그 거울이 ‘생산의 거울’로 퇴색하여, 인간의 단기적 이윤을 위해 착취되고 있지만 말이다. 그 표면이 나뭇가지로 둘러싸인 모습은 동물이면서도 식물을 포함한다. 그것들은 나무가 그러하듯이 아래의 밀도가 강하고 태양을 향해 가지를 뻗는 부분은 바깥으로 열려 있다. 안정감이 있으면서도 자유롭게 트여있다. 각 동물들은 종 특유의 모습을 갖춘 자체 응집성을 가짐과 동시에 환경의 일부가 된다. 그것들은 자신이 놓인 자리의 공기를 한껏 품고 있다. 숲을 품은 동물의 형태는 은신과 보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가 되듯이, 동물들도 자연계에서 먼저 자리를 잡고 지상의 모든 생명을 가능하게 한 식물을 자신의 내부에 품는다. 




공존의 숲  590x130x840  스텐레스 스틸, 우레탄 도색  2016



공존의+숲++340x110x440++스텐레스+스틸%2C+우레탄+도색++2016



움직일 수 없는 식물 역시 동물이 아니면 번식하기 힘들므로 양자는 공생한다. 강동현의 작품은 동물의 이동성과 식물의 자생성을 결합한다. 또는 동물의 유연성과 식물의 견고성을 결합한다. 그의 작품에서 키워드 중의 하나인 ‘공존’은 그러한 상호협력 관계를 말하며, ‘숲’은 그러한 협력이 일어나는 장을 말한다. 동물이 죽으면 다시 숲으로 돌아가 환경을 비옥하게 하고 또 다른 생명의 시작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생명의 시계는 공평하게 주어져 있다. 모든 존재는 지상에 잠시 머물다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어떤 생명의 시간을 빼앗아 또 다른 생명의 시간에 추가하려는 자본의 집요한 노력은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할 것이다. 숲은 동물만큼이나 그 자리를 위협받고 있다. 동물들이 자신의 터전에서 쫒겨나듯 숲도 점차 좁아질 것이다. 동물의 표면을 이루는 나무형태는 동물로 치면 내부, 또는 미시구조를 가시화한 것이기도 하다. 


가령 그것은 동물의 신경계나 혈관계 등을 떠올린다. 만약 외부 골격계를 가진 동물이라면 공유되는 부분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에너지가 흐르는 망의 구조는 식물이나 동물이나 다를 게 없다.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내부나 외부나 마찬가지다. 인공적 구조물도 마찬가지다. 순리를 거스르는 인공구조물에 대해 자연은 다시 원형태를 찾아주곤 한다. 나뭇가지처럼 계속 갈라지면서 표면을 덮는 구조는 생명의 기운이 흐르는 통로를 가시화한다. 생태계는 평등하다. 비록 거기에도 포식자와 피식자가 있지만, 그 위치와 상황이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순간적으로 소유할 뿐, 인간들처럼 축적하고 대물림하면서 지배구조를 영속화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역사라는 것을 가지게 되었다. 자연은 한결같지만 역사는 차별을 추구한다. 근대시대에 특히 힘을 발휘한 ‘새로움과 진보’는 역사의 것이다. 




공존의 숲  440x160x600  스텐레스 스틸, 우레탄 도색.



공존의 숲  570x150x600  스텐레스 스틸, 우레탄 도색



물론 자연도 진화라는 것을 하지만, 자연사에서의 시간감각은 인간사와 비교하지 못할 만큼 크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강동현의 동물조각은 자연과 인공의 교차점을 보여준다. 특히 그 그물망 형태가 그러하다. 알렉스 라이트는 [분류의 역사]에서 계층구조를 타파하는 하이퍼링크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네트워크와 계층구조 간에는 근본적으로 긴장관계에 있다. 계층구조는 상위집단이 포함된 체계이다. 대조적으로 네트워크는 밑에서부터 나타난다. 네트워크에는 꼭대기란 것이 없다. 각 지점들은 동등하며 스스로 방향을 결정한다. [분류의 역사]는 한 무리의 새들이나 월드와이드웹 부터 민주주의까지 네트워크로 포괄한다. 강동현의의 작품에서 ‘공존’이라는 키워드는 그물망적인 형태와 조응한다. 그것은 다양한 차원을 포괄하는 네트워크의 평등주의적 방식을 말한다. 알렉스 라이트는 스스로 결정하는 생물학적 계층은 상호작용하면서 더 고차원의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이 네트워크는 다시 더 복잡한 생물학적 계층구조로 합쳐진다. 생명은 이와 같은 계층구조와 네트워크의 상승작용을 통해 진화한다. ‘공존’을 중시하는 사고에서 진화의 동인은 배타적인 경쟁보다는 공생에 두어야 할 것이다. 경쟁은 적자생존이나 적응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공생은 다양성의 가능성을 연다. 프리초프 카프라는 [생명의 그물]에서 공생기원설(symbiogenesis)을 소개한다. 이 이론은 항구적인 공생적 배열을 통해 새로운 생물형태가 창조되는 것을 모든 고등동물의 주된 진화 경로로 간주한다. 그 예가 세포속의 중요한 기관인 미토콘드리아이다. 생물학자들은 미토콘드리아가 원래는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던 박테리아였고 아득한 과거에 다른 미생물 속으로 침입해 들어가 그 속에서 항구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으로 추측한다. 새로운 생물학적 가설에 의하면 이 같은 ‘공생적인 결연동맹’(마굴리스), 즉 합쳐진 생물들이 진화를 이끄는 힘이다. 




공존의 숲  900x450x480  스텐레스 스틸, 우레탄 도색.



공존의+숲++670x150x540++스텐레스+스틸%2C+우레탄+도색++2016



식물과 동물이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있는 강동현의 작품에서 ‘공존’은 이러한 공생을 떠올린다. 공생이론에 의하면 자연선택은 협조자들만이 살아남고 계속 진화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진화과정은 분화의 증가라는 특징을 갖는다. [생명의 그물]에 의하면 생물계 전체에 걸쳐 진화는 생물이 그 환경에 대한 적응으로만 국한될 수 없다. 그 이유는 환경 자체가 적응과 창조성이 가능한 살아있는 시스템들의 연결망에 의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공존’은 서로가 서로에게 적응한 것을 말한다. 그것은 단순한 진화가 아니라 공(共)진화를 의미한다. 강동현의 작품은 공생이론이 예시하는 것처럼, 이질적인 것이 비적대적으로 뒤섞여 전에 없던 것이 생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의 ‘공존의 숲’은 다수를 고통에 몰아넣는 적자생존 및 경쟁의 시대에 대안이 되는 사고를 제시한다. 이러한 사고는 자연과 예술이 다양성이라는 공통점이 있음을 알려준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1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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