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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명, 핑크 포이즌 전 / 보기와 다른 세계

이선영

보기와 다른 세계 

  

홍순명 전 (3.10-4.2,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핑크 포이즌 전 (3.10-6.11,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이선영(미술평론가)


구민정, 심래정의 ‘핑크 포이즌’ 전과 홍순명의 ‘장미빛 인생’ 전은 핑크라는 공통 코드가 들어있다. 유서 깊은 공간에 전방위적으로 작업을 펼친 구민정과 심래정은 신세대적인 감각이 톡톡 튀는 설치작품을, 최근 몇 년 사이에도 미술관급 전시들을 많이 소화해온 홍순명은 사회 비판적 성격이 농후한 회화를 선보였다. 구민정, 심래정은 30대이고, 홍순명은 50대 중견작가다. 성과 나이, 감성과 태도, 매체와 메시지 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전시는 불그스름하게 익은 과일 같은 달콤함의 씁쓸한 이면을 들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의 핑크는 겉과 안이 달랐던 것이다. 두 전시에 공통적인 역설은 우리의 삶을 냉소적으로 반영한다. 우연찮게 두 전시의 개막일도 3월 10일로 같았는데, 그날은 대한민국 국민이면 잊지 못할 극적인 날이었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 했을 그날은 같은 사건에 대해 얼마나 다른 사회적 해석이 가능한 지가 극명하게 드러난 날이기도 했다.




핑크 포이즌 전시전경



홍순명 전시전경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분홍색 세상은 너무 아름다워서 현실일 수 없다’고 하면서, ‘핑크빛 생각은 회색의 일상에 낙관적으로 접근하는 삶의 원칙’이라고 말한다. 속이 거북할 때 먹는 소화제로터 유래한 ‘핑크 포이즌’이나 유명한 샹송 제목이기도 한 ‘장미빛 인생’은 에바 헬러가 ‘우울증 환자의 기분을 전환시켜 주는 향정신성 약제는 분홍 알약’이라고 불렀다든지, ‘프랑스 사람들은 꿈같은 삶을 장밋빛 인생 같다’고 표현했다든지 하는, 분홍의 전형적 상징과 관련된다. 그러나 세 작가의 작품은 이 환상적 색이 감추고 있는 기만적 현실을 추출한다. 그리고 아련한 꿈같은 분홍에 내재된 실재의 몫을 암시한다. 현실과 허구의 접점에서 작업하는 작가들에게 분홍은 중간에 있다. 분홍은 피와 살 같은 현실(붉은색)과 빛과 공백같은 비현실(하얀색)의 중간에서 경계를 넘나든다. 작가들이 제시한 분홍 빛 세계에서 현실과 비현실은 한 몸체의 서로 다른 측면으로 나타난다. 

   


삶의 역설을 대하는 두 자세, 또는 스타일 

  

구민정과 심래정 2인 전에서 ‘Pink Poison, 粉紅色藥’은 미국의 소화제 펩토 비스몰(Pepto Bismol)로부터 왔다. 이 약의 겉모습은 마치 딸기 맛 사탕 같다. 에바 헬러는 ‘분홍을 보면 달고 부드러운 맛이 기대된다’고 말한 바 있지만, 문제의 그 약은 매우 쓰다. 단맛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는 쓴맛은 약과 독의 관계가 질이 아닌 양의 차이라는 점도 상기시킨다. 특히 배탈 날 때 효과가 좋다는 그 소화제는 현대인에게 만연한 섭식장애와 관련된다. 무시무시한 식인 이미지가 출몰하는 심래정의 작품이나 공간 지하의 높은 벽을 활용하여 이미지들을 토해내듯 쏟아놓은 구민정의 작품은 먹고 싸는 것에 얽힌 난맥상을 드러낸다. 젊은 여성작가들이라 아기자기한 분홍 코드로 엮었을 법하지만, 정작 그들의 신랄한 작품 속에서 정작 분홍은 많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분홍은 사탕발림된 현실을 상징하며, 가상과 달리 현실은 쓰디쓰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작품이 이러한 현실을 깨우치는 약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를 비친다.  






심래정_식인왕국 생산공장_2017_ink on laminting paper_dimensions variable



심래정은 만화같은 이미지를 반투명한 막에 출력해서 철제 구조물에 붙였다. 칸칸마다 아우성치는 듯한 이미지들은 하얀 종이에 잉크로 한 드로잉 원화를 스캔 하여 만들었다. 아나로그와 디지털 사이에 있는 작품은 만화적인 줄거리도, 원화의 아우라도 없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맹렬하게 자신의 영토를 구축하고 탈주하기를 반복한다. 심래정의 작품은 겉은 모던한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지만, 미로처럼 얽힌 야생적 공간으로 재탄생한 공간과 어울린다. 작품 <식인 왕국: 생산 공장>은 절단된 몸과 식인 이미지가 넘쳐난다. 거기에는 자연은 물론 사회적 관계에서도 상대의 영양가를 따지는 경향과 먹고 먹히는 관계가 깔려있다. 정신분석학과 인류학에서 식인은 ‘신체의 일부를 흡수함으로써 그 사람에게 속해 있던 특성을 소유한다’(프로이트)는 믿음에 따른다. 그러나 식인적 환상은 현대의 제로섬 게임에서 의미가 달라진다. 그것은 원시적 제의처럼 타자와의 소통이 아닌 공격적 탈취인 것이다.






구민정_ㅁㅁㅁㅁ_2017_mixed media_dimensions variable_detail



벽과 바닥은 물론, 작은 모퉁이나 난간 등도 활용하는 구민정의 작품 <ㅁㅁㅁㅁ>는 회화와 설치가 한데 어우러진다. 벽에 붙은 평면 이미지에서 털이 돋아나 봉제 인형같은 촉감을 지닌 덩어리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추상화는 아니지만 딱히 뭐라고 규정지을 수 없는 이미지들이 분열적으로 폭주하는 화면은 가상성이 농후하다. 코드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매끈한 인터페이스 안에 갇혀져 있을 법한 가상은 촉각적 대상으로 변화한다. 마치 이모티콘이 실제로 주물럭거릴 수 있는 따스한 인형으로 탄생(또는 상품화)하듯이 말이다. 가상과 현실의 관계는 그 어느 때 보다도 가까워졌다. 많은 시간 인터페이스에서 눈을 떼지 않는 현대인은 과도하게 정보를 섭취하고 배출한다. 이미지/정보의 폭식증은 끝없는 결핍과 욕망의 증후일 뿐, 근본적인 해소가 아니다. 작가는 모든 것들이 이미 요리되어 디스플레이 되어 있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질병을 조증(躁症)의 어법으로 표현한다.     

  


속는 자의 욕망에 부응하는 속이기

  

홍순명의 ‘장밋빛 인생( La vie en rose)’ 전에서 장밋빛 환상을 퍼트리는 자는 주로 정치가로 짐작된다. 가로가 7미터 가까이 되는 대작들이 지지난 정권의 4대강 프로젝트에 관련된 소재이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나를 뽑아주면’, 또는 ‘내가 이런 것을 추진하면’ 신세계가 펼쳐질 것이라는 벅찬 기대를 퍼트리곤 한다. 그러나 작품 속 4대강은 장밋빛 미래가 아니라, 번져 나가는 핏물처럼 생태계의 파괴를 증언한다. 대자연의 흐름을 거슬렀지만, 실제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던 대형 국책 사업은 대국민 사기극으로 밝혀지고 있다. 특히 그 뒤를 이은 보수 정권 수장의 거듭된 거짓말이 들통 나고 있는 지금, 그의 작품은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선거의 여왕’에서 ‘거짓의 여왕’으로 전락한 누군가는 한국의 보수정권에서 금기시되는 붉은색을 상징 색으로 들고 나왔지만, 그 색은 거의 매일 하나씩 밝혀지는 추문들로, 작품 <Defense Industry Corruption>처럼 빛바랜 무늬로 남아있다.




홍순명, 4대강-낙동강_oil on canvas, 200x660cm_2017



4대강-남한강 1_oil on canvas, 130x162cm_2016



낙동강과 한강 등의 개발 현장을 담은 작품들은 땅/육체를 사정없이 파헤친 상흔처럼 보인다. 전시장 한 면에 한가득 설치된 작품 <4대강-한강 1-1>에서 다리 아래의 강은 핏빛으로 물들어간다. 그의 작품은 사건 자체보다는 사건 전후에 조용히 퍼져나가는 증후를 암시한다. 하나의 화면이 아니라 작은 패널들을 11x4, 또는 11x5열로 연결하여 만든 풍경들은 진실이 아니라 조작의 분위기가 농후하다. 일률적인 크기의 패널들이 조합된 화면은 권력에 의해 움직이는 구조들로 보인다. 작품 <4대강-낙동강>에서도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는 트럭들은 권력-기계의 자동적 실행을 표현한다. 그것은 보편화될 수 없는 일개 개인의 욕망을 증폭시켜 현실화하는 장치들이다. 핑크 빛 강을 가르며 나아가는 배를 그린 작품은 녹조가 뒤덮인 비정상적인 생태계를 보색으로 표현했다. 한국 같은 황당한 규모는 아니지만, 권력이 불투명하게 작동하는 비정상적인 국가의 방치된 공사현장도 보인다. 




홍순명, Piltdown man 1_oil on canvas, 65x53cm_2016



홍순명, Bobby&John Grey_100x80cm_2017



홍순명, Defense Industry Corruption_oil on canvas, 100x80cm_2017



홍순명의 작품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필력을 휘두르는 본격적 회화 보다는 판화, 영상, 사진, 설치 등 작가가 섭렵해온 여러 매체의 경험이 한데 녹아있는 중성적이고 슴슴한 분위기를 가진다. 그의 작품은 정보화 사회의 현실과 조응하여, 상세한 조사를 바탕으로 한다. 죽은 주인의 무덤을 14년 동안 지켰다는 충견과 인류의 기원으로 제시된 초상 등도 ‘Bobby&John Grey’, ‘Piltdown man’ 등의 검색어를 치면 그 사연이 죽 나오는 유명한 조작극, 요즘 유행하는 ‘가짜 뉴스’들과 관련된 작품이다. 사기는 한쪽 방향에 의해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속이기는 속는 사람의 욕망에 부응하기 때문에 성공한다. 남부럽지 않게 잘 사는 나라를 ‘건설’하고 문화를 ‘융성’하겠다는 권력은 물질적 성장을 진보와 동일시한 거짓된 신화에 바탕 한다. 그 신화는 거짓, 또는 거짓을 거짓으로 알지 못하는 자기 최면적 중독으로 유지되었을 뿐이다. 그동안 더 좋은 나라를 향한 한국의 장밋빛 미래는 철저히 배반당했다.   


출전; 아트 인 컬처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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