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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량 / 의미하지 않고 낭비되는 기호

이선영

의미하지 않고 낭비되는 기호

  

이선영(미술평론가)

  

올해 갤러리 그림손에서 전시되는 ‘명제형식’과 ‘무경산수’ 시리즈는 이태량이 수년째 집중적으로 이어온 주제로, 하나는 추상화, 다른 하나는 산수화 형식을 갖추고 있다. 추상화나 산수화가 관념에 기댄다는 점에서 둘은 연결될 수도 있겠다. 뿐 아니라 문자를 비롯한 몇 가지 조형적 요소들은 두 시리즈에 연속성을 부여한다. ‘명제형식’이라는, 다소간 딱딱해 보이는 철학적 제목, 그리고 전래의 틀을 상당 부분 따르는 산수화라는 형식은 그의 작품이 바둑판이나 체스판같이 엄격한 규칙을 따르는 놀이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한다. 예술이 규칙이라고 해서 반드시 규칙으로의 환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법칙과 달리 규칙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변경될 수 있다. 파격 또한 규칙과의 상보적 관계에서 발생한다. 설치작업을 포함한 그의 수많은 이질적 작업 목록에서 우리는 어떤 규칙 또는 파격을 찾아낼 수 있을까. 




명제형식 propositional form     oil on paper    33.3 x 45.5cm     2016



명제형식 propositional form     mixed media on canvas    72.7 x 91cm     2015



규칙/파격은 한 작가의 독특함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수도 있다. 협소한 의미의 실증주의처럼 현실을 의미 없는 모래알로 낱낱이 분해하려하지 않는 이상, 누구나 자신이 직면한 현실을 구성하는 원리, 즉 규칙을 알고 싶어 한다. ‘원리’는 우리의 현재 좌표와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은 작가 스스로에게 조차도 확실성은 담보되지 않는다. 이태량의 경우, 작업의 목적이 앞에 전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뒤에 있는 미지의 것이라는 점에서 작품 앞의 관객은 난제에 직면한다. 작가도 모르고 관객도 모르는 담론들이 떠돌 수 있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이즘들로 점철되어 있는 미술사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새로움의 이데올로기가 득세한 근대에 들어서 선언을 앞세운 사조들이 생겨나긴 했지만, 이즘은 나중에, 종종 얼떨결에 붙여진 것들도 있다. 물론 이태량의 작업은 인간의 분류하고 명명하려는 관습에 대한 주제 또한 포함한다. 실재와 명명의 관계에 대한 문제 또한 철학의 역사를 수놓은 진지한 게임 중의 하나였다. 


그의 작업은 놀이의 자유로움을 가능케 하는 것이 규칙이라는 역설을 잘 보여준다. 이태량의 놀이방식은 임의성을 최대한 늘리는 우연놀이, 즉 로제 카이와가 [놀이와 인간]에서 분류한 방식 중 ‘Alea’에 가깝다. 우연놀이에 충실한 화면은 지시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운 물감이 어디로 튈지, 불뚝 튀어나온 선이 어디로 나아갈지, 어떤 글자가 쓰여질지 또는 어떻게 지워질지 예측하기 힘들다. 이러한 예측불가능성은 관객 뿐 아니라, 당사자인 작가에게도 해당된다. 그리고 그러한 예측 불가능성만큼의 다양성, 또는 이질성이 존재할 수 있다. 또는 다양성—이때 다양성은 난해성, 임의성 등을 포함할 수 있다--는 한 가지 특질로 수렴될 수도 있다. 만약 이질성이라면 그것은 동질적인 몸이 삼키기 어려운 것일 수 있다. 이러한 다양성과 이질성은 현대미술이 쓸모없는 난해함과 물신주의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유가 된다. 간혹 한지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개 캔버스를 활용하는 그의 작품들은 매번 다시 주사위를 던지는 막막한, 그래서 흥미로울 수도 있는 게임 같다. 그동안 자신의 전부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부분을 쏟아 부은 캔버스라는 하얀 판을 갱신해 왔다. 




명제형식 propositional form     oil and acrylic on canvas     227.3 x 130.3cm     2016



언어의 시각적 장치-1 VDL(Visual Device for Language)-1    installation work: electric motor, black oil,video     577 x 270cm     2014



언어의 시각적 장치-2 VDL(Visual Device for Language)-2  독백의 방 Room of Soliloquies    video and installation work     850 x 150 x 3cm     2014



[명제형식] 시리즈는 추상적 화면 위에 숫자나 글자가 보이고, 때로는 인쇄물이 꼴라주 되기도 한다. 최근의 [무경산수] 시리즈는 이전의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좀 더 구축적이다. 동양화에는 시서화의 전통이 있고, 서양도 예술이 자율적이지 못한 시대에 화면에 글자(신화, 종교, 역사 등)가 나오기도 했지만, 입체파의 꼴라주처럼 근대 미술사에서 화면에 글자가 등장하는 경우, 그것은 화면의 평면성을 확인하는 자기지시적인 맥락이 있다. 물론 그것은 읽혀지기 보다는 조형적 구성요소로 다가오며, 이는 이태량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의 작품에서 글자는 굳이 읽으려면 읽을 수도 있겠지만, 두터운 물감 안팎으로 명멸하는 글자들은 일종의 흔적처럼 다가온다. 이 흔적 속에서 기억과 망각은 부침을 거듭한다. 그림의 표면은 못 부친 편지처럼 씌여지고 지워지기를 반복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고의 흐름은 이 작품에서 지워진 글을 다른 작품에서 나타날 수 있게도 할 것이다. 


많은 층위들로 되어 있는 그의 그림은 재현적 원근법이 아니라 추상적 원근법을 가지며, 이미지만큼이나 2차원적 평면에 자리를 잡는 글자나 숫자들도 그 층위중의 하나를 차지한다. 이태량의 회화는 압축파일처럼 다층적이어서 이것을 3차원 공간으로 펼치면 설치작품이 된다. 이전의 설치작업을 보면 회화에 등장하는 요소들이 공간화 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설치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회화 내부에 들어가는 효과를 낳는다. 같은 맥락에서 무경산수는 눈으로 산수 내부를 탐사하도록 할 것이다. 어디서 온지 알 수 없는 인쇄물을 붙이기도 한 화면에서 쓰고 지우기가 반복된다. 두 행위는 반대 항이 아니라 한 행위의 이면이다. 여러 층의 물감이 두툼하기에 모래나 진흙 위의 문자처럼 새겨진 느낌을 주기도 한다. 평소 비망록에 기록해 두었던 아이디어 스케치나 단상, 메모 등과 관련된 그것들은 반석위의 문자처럼 견고하지 않고, 곧 물감이나 여타의 다른 힘에 의해 덮여질 것 같은 가변성이 있다. 




명제형식 propositional form     video and instaiiation work     40 x 40cm     2016



자화상 Self-portrait   oil on hanji paper   34 x 53 cm   2016



그의 작품에서 문자는 생성되거나 소멸 중이다. 그것은 무(無)도 유(有)도 아닌 그 사이의 과도기적인 과정을 보여준다. 작가에 의하면 작품은 ‘아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찾아가는 와중에 그려진/씌여진 것’이다. 그는 아크릴과 유화, 목탄을 주로 사용하는데 특히 목탄은 구체적인 것이나 의도 없이 거침없이 표현하기 쉽다. 읽을 수 없거나 읽기 힘든 문자들은 원래 말이 없는 그림의 속성을 부연한다. [명제형식]이라는 제목은 철학적 주제를 떠올린다. 특히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언명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전의 작품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않아야 한다](2016)는 얼굴 부분을 뭉갠 자화상으로, 말의 주체, 요컨대 문장의 주어를 차지하는 나를 지워버린다. 가령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근대적 주체를 탄생시켰던 언명은 ‘나’의 자리가 불분명해짐으로서 ‘존재’ 또한 모호해 진다. 


이태량의 전시 이력에서, 1995년 서호 갤러리에서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000년까지 이루어진 4번의 전시 제목이 모두 ‘존재와 사고’였음은 볼 때, 그것은 그의 초창기 작업을 가득 채웠던 주제였다. 주체의 자리를 비워놓는 것은 행위나 행위의 대상 또한 모호하게 한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언명과 노자의 '자연의 도'에 대한 진술인 ‘하는 것이 없기에 아니 하는 것이 없다(無爲而 無不爲)’와의 유사성을 말한다. 합리주의의 극단에서 신비주의로 빠져든 듯한 지적 여정에서 동양화는 새롭게 다가왔을 것이다. [무경산수] 시리즈가 시작된 것은 2015년 말 경, 겸재 정선에 관련된 기획전에 참여하면서 부터다. 그러나 2017년의 작품들은 겸재와 무관한 현재진행형의 작업이다. 작가는 그것이 거의 우연적으로, 바깥으로부터의 자극에 의한 것이었지만, 자신의 기존 작업과 이어지는 부분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바깥으로부터의 자극은 자신에 잠재해 있는 어떤 요소를 현실화시키는 것이다.




무경산수 Liberated Landscape     oil and acrylic on canvas     112 x 194cm     2017



무경산수 Liberated Landscape     oil and acrylic on canvas     112 x 194cm     2017



무경산수 Liberated Landscape     oil and acrylic on canvas     112 x 194cm     2017



작품이라는 자극을 통해 관객에게서 새롭게 현실화되는 잠재성도 마찬가지 과정이다. 잠재성과 현실성의 긴밀한 관계를  대화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이러한 대화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진행되는 것만은 아니다. 한국 미술사에서 겸재는 기존의 관념 산수에서 실경과 진경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작가로 평가된다. 이태량이 차용한 산수화라는 틀은 관념보다는 실재에 대한 느낌을 강조하고, 화면 또한 이전보다 구축적이다. 작품 전면에 흩어져 있던 에너지는 보다 응축적인 형상 안에 모아 놓았다. 그의 풍경에는 산수화에는 없는 직선이 발견된다. 직선은 자연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요소이다. 노장사상을 비롯하여 동양사상이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자연은 침해된다. 자연에 의거한 담론들 역시 위반된다. 이태량의 ‘산수화’에서는 산등성이를 따라선 직선을 포함하여 산의 추상화로 생각되는 피라미드 형태도 발견 된다. 


무경산수의 ‘無境’을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장소 없는’ 산수가 될 것이다. 그것은 지시대상과 상관없이 펼쳐졌던 추상화의 어법과도 연결된다. 즉 그것은 작가 말대로 자유로운 풍경(liberated landscape)일 것이다. [무경산수] 시리즈에도 [명제형식] 시리즈 처럼 글자가 등장하지만 작품 상단 부분, 즉 보통 하늘로 간주되는 여백 부분에 씌여진 붓글씨와 붉은색 낙관은 훼손되어—필자는 2008년의 평문에서 ‘손상된 기호와 사물’이라는 제목을 붙인 바 있다—있지 않다. 다른 글자들과 달리 뭉개지거나 지워지지 않고 올곧이 박혀있는 모습은 그의 자유로운 풍경을 ‘산수화’로 보게 하는 최소한의 틀이다. 그것은 보는 이에 따라서는 괴물스러운 산수로의 변형 기준이 된다. 그러나 풍경 여기저기에는 지워진 듯한 글자들이 있는 것은 이전의 작품과 연속적이다. 자신의 작품과 관련된 영문, 거꾸로 쓴 숫자, 화살표나 가위표 연산 기호 등도 보인다. 




무경산수 Liberated Landscape     oil and acrylic on canvas     70 x 160cm     2016



무경산수 Liberated Landscape    acrylic on hanji paper   70 x 94cm     2016



플러스(+)나 가위(X) 표는 더하고 빼는 것이 빈번한 화면을, 그리고 화살표는 물질과 에너지 사이의 변환과 그 방향을 은유하는 듯하다. 캔버스에 유화와 아크릴로 그린 이태량의 산수화 아랫부분을 여백으로 남겨두고 물감을 흘리는가 하면, 가로 진행 방향의 글자들을 써놓기도 한다. 산수는 중력의 방향에 충실하지만 작가는 종종 이 전체를 공중에 둥 띄워 놓거나 이미지와 반드시 상응한다고 할 수 없는 글자들로 채움으로서, 그림이라는 고전적인 환영의 자리를 말소 하에 놓는다. [무경산수] 또한 [명제형식]처럼 바닥없는 심연에 놓인다. 그러나 무경산수는 추상적인 화면 속에서도 산줄기나 계곡, 폭포 모양 등이 유추된다. 전경 중경 원경을 층층이 쌓아놓는 위아래로 길쭉한 포맷에 여러 폭으로 된 무경산수도 보인다. 그러나 산수화라고 해서 이전작업에서 감지되는 격렬한 자기 발산적 행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경향은 형태를 그저 형태로 놓아두지 않고 문자를 그저 문자로 놓아두지 않는다. 


그것은 문자의 육화를 꾀하면서 서구의 재현주의 전통을 무너뜨리려 했던 앙토냉 아르토의 ‘잔혹연극’론을 떠올린다.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아르토의 최우선 관심사는 작품을 해독 불가능의 심급에 놓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데리다의 인용에 의하면, 아르토는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문맹자들을 위해서’였다. 아르토는 ‘독해 불가능에 속하는 모든 것이 무대를 장악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는데, 그것은 연극을 통해 우리를 ‘위험에 그리고 생성에 돌려보내고자’ 한다. 위험과 생성에의 의지에서 예술의 모방적 충동은 사라진다. 이때 예술은 모방이 아니라,  ‘모방의 파괴가 선보일 특권적 장소’(아르토)인 것이다. 그러한 경향은 작가(창조자)의 의도를 얌전하게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푸닥거리같은 연행을 낳았다. 그렇게 해서 작품에는 순수한 감각적인 것만을 제시하고자 했다. 아르토는 스스로의 말처럼 ‘예술이 인생의 표현이 되는데 그치지 않고, 인생의 순수한 창조이고자’ 했던 것이다. 




무경산수 Liberated Landscape     oil and acrylic on canvas     각 40 x 90cm     2016



언어의 부정, 또는 변형은 ‘단순한 무력함, 할 말이 하나도 없음의 불모성, 또는 영감의 결여가 아니라, 영감 그자체’(데리다)가 되었다. 탈(脫) 모방론에 대한 아르토의 새롭고도 근본적인--‘무지배 상태(anarchy)의 가능성은 역사 속에서 근원성(archisme)에 결부 된다’(데리다)--사고는 연극론에서 나온 이론이지만, 그것은 이후 주체의 표현이나 현실의 반영(재현) 같은 미학을 넘어서 연극성을 따라갔던 미니멀리즘 이후의 현대미술의 경향을 예시하는 선구성을 가진다. 사실, 르네상스의 원근법 이래, 무대와의 비유는 쉽게 이해할만한 것이 되었다. 이태량이 ‘내 그림은 중요하지 않으며, 정작 중요한 것은 내 그림 밖의 모든 것들에 있다’라고 말한 것은 회화나 회화 이외의 작품 형식에 압축된 연극적 충동을 말한다. 안(동일자)이 아니라 밖(타자)을 향하는, 미니멀리즘 이후의 현대미술은, 데리다의 표현에 의하면 ‘배설물로서의 작품의 역사’를 보여준다. 즉 예술은 ‘분변학(scatologie) 자체’가 된다는 것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작품은 배설물이나 마찬가지로 분리를 상정하고 분리로부터 생산된다. 작품은 내 밖에서 언제나 넘어지고 곧 허물어진다. 


작품을 일종의 심신의 배설로 읽는 이러한 냉소적이고 신랄한 독법은 현대예술에 대한 비판과 찬양에 대한 동시적 근거가 된다. 이태량의 작품에서는 글자 뿐 아니라 모든 것이 차이적 관계 속에서 해소된다. 즉 ‘말소 하에 놓인’(데리다)다. 그의 작품에서 반쯤 지워진 문장들, 거꾸로 배열된 숫자들, 맥락 없이 떠 있는 각종 부호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것은 불연속이다. ‘문장에 구멍을 뚫는 듯한’(데리다) 행위의 결과는 끝없는 미끄러짐이다. 특히 주체와 그 주체의 앞에 놓인 객체가 구멍들로 미끄러지며 빠져 나간다. 그러한 구멍들은 어떤 철학자(들뢰즈)에게는 변모한 주체의 탈주로로 제시된다. 기원과 목적을 연결 짓는 매끈한 선형적 질서가 해체되면, 기호는 의미하지 않고 낭비된다. [글쓰기와 차이]에서 인용되는 또 다른 저자인 바타유는 ‘아무런 목적 없이,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아무런 의미 없이 낭비나 될 뿐인’ 잉여 에너지를 상찬한다. 바타유에 의하면 ‘글쓰기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보증해서는 안 되고 우리에게 아무런 확신도 효과도 이익도 주지 않아야’ 한다. 




무경산수 Liberated Landscape     oil and acrylic on canvas     112 x194cm     2016



무경산수 Liberated Landscape     oil and acrylic on canvas     140 x258cm     2016



그러한 글쓰기는 모험적이다. 그것은 운이지 테크닉이 아니다. 이 맥락에서 데리다는 ‘시는 의미를 가지지 못할 위험을 언제나 안고 있지만 이러한 위험이 없다면 시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글쓰기는 ‘단어들을 죽음의 쾌활한 긍정 속에서 태우고 소멸시키고 소비하는 기호들의 포트래치의 일종’(바타유)이다. 요컨대 희생이요 도전이다. 예술은 이러한 극도의 소모적 행위와 다를 바 없다. 개체의 항상성을 유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유기체에게 소모의 부정적인 의미를 새삼 논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소모의 극단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삶이 의미라면 죽음은 무의미다. 그러나 ‘살아있는 채 죽음을 체험하는’(바타유) 예술(또 하나는 에로티시즘)은 죽음과 무의미를 작품 한가운데 위치시킨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끝 모를 비관주의가 아니라, 소모를 통해 생성되는 것이다.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생산과 재현에 깔린 전제이다. 그것은 확고부동해 보이는 일상적 현실을 낳는다. 일상의 진부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현대의 많은 작가/이론가들이 소모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다. 


앞서 언급한 아르토나 바타유에 모리스 블랑쇼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정한 시는 숨 쉬는 내면이다. 진정한 시를 통해 시인은 자신의 생명을 소진하고, 리듬 있게 스스로를 발산하여 공간을 증대시킨다. 우리의 삶은 정복하기 위해서 혹은 획득하기 위해서 어떤 결과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무(無)를 위한 순수한 관계, 순수한 소비 속에 희생된다. 변모는 이제 존재의 행복한 소진과 같다. 환희의 언어는 소멸 속에, 소멸해가기 전에, 단 한번 소멸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의 절망은 누군가의 희망으로 읽힌다. 절망과 희망은 뫼비우스 띠처럼 돌고 돌면서 예술 하는 삶을 채운다. 쓰기와 그리기가 혼합된 넓은 의미의 드로잉에 가까운 이태량의 작품이 미술이 아닌, 현대문학이나 연극 같은 다른 영역에서 그 이해의 근거가 찾아지는 것은 흥미롭다. 그림은 협소한 자기규정을 넘어서면서 보다 큰 문화적 맥락, 더 나아가 미지의 실재에 근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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