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클럽 몬스터 (Club Monster) 전 / 괴물들의 축제

이선영

괴물들의 축제

클럽 몬스터 (Club Monster) 전 (2016.11.23 ~ 2017.02.26, 국립아시아문화의 전당) 

  

이선영(미술평론가)

 

오랜 기다림이나 기대감이 있는 전시 관람을 앞두고는 설레기 마련이지만, 특히 음악이 있는 전시에서의 감흥은 보다 물리적이다. 머리보다는 심장이 즉시 반응하기 때문이다. 어느 시기에 머리와 몸이 억지로 분리된 이후, 몸과 보다 직접적인 관련을 맺는 감각은 원시적이라고 폄하되거나 반대로 과도한 평가를 받곤 했다. 음악과 미술이 함께하는 공(共)감각적인 작품들은 차분한 관조 보다는 즉각적인 몰입을 야기한다. 물론 이러한 특성은 누군가에게는 정신사납고 그 순도가 의심될 수 있다. ‘이것도 저것도’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전시는 순도보다는 강도를 지향한다. 용광로 속 같은 강한 에너지만이 낱낱으로 흩어지는 것을 모아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몰입은 모더니즘 이후 새롭게 평가받는 오래된 정조(情操)이다. 컬트(cult)를 포함한 종교적 제의나 놀이는 몰입적이다. 이 전시 또한 심각하면서도 유희적인 몰입 유형이 발견된다. 




전시장 입구(기획자; 이기모)



전시장 전경(이하 사진 출처; 국립아시아문화의 전당)



제바+다보츠



전시장 초입에 걸린, 기획자가 손수 그린 ‘Club Monster’의 글자 디자인부터 심상치 않다. 대부분 불법이기에 재빨리 그리고 도망가야 하는 하위문화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 줄줄 흘러내리는 금속성 색채의 레터링 디자인은 차갑고 단단한 쇠도 녹일 듯한 전시장 내부의 열기를 가늠케 한다. 전시는 아시아문화의 전당의 널찍한 공간 3개 층의 공간을 촘촘히 나누어서 국내외 작가 24명의 작품 31개를 하나씩 배정하는 거의 비엔날레 급의 규모라서 축제적인 느낌은 더욱 고조되었다. 거기에는 전형적인 화이트 큐브에서 발견되는 숨 막히는 고요함이 아니라 놀이터나 시장 같은 활기, 즉 단조로운 독백이 아니라 ‘대화적 상상력’(미하일 바흐친)이 편재한다. 가운데의 넓은 공간을 중심으로 둥글게 배열된 각 방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전시장 내외벽을 현란하게 덮고 있는 벽화들, 그리고 신나는 음악에 맞춰 공간 한 귀퉁이에서 빙빙 돌아가는 미러볼 까지 클럽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패놉티콘을 떠올리는 원형 공간은 그 구조에 전제된 음습한 상호적 감시보다는 바이러스처럼 전파되는 흥겨움을 떠올린다. 때로 같은 뮤지션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각 방의 작품들은 ‘따로 또 같이’ 연동하는 것이다. 작품의 전면 또는 후면에 강하게 또는 잔잔하게 깔리는 음악가들은 섹스 피스톨스부터 노래를 찾는 사람들까지 다양하지만, 전체적으로 하위문화(subculture)의 코드가 강하게 흐른다. 기획자에 의하면 ‘클럽 몬스터’이란 제목에서, ‘몬스터’는 헤비메탈 밴드 메탈리카의 ‘some kind of monster’에서 유래했다. 그 괴물들은 ‘여성, 성소수자, 아동, 난민, 이주민’ 등 지배사회에 의해 타자화 된 이들이다. 주체에 의해 대상화된 부류들은 제어되어야 할 무질서한 괴물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해체주의 철학이 강조하듯이 주체 자체가 타자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들뢰즈와 가타리가 [소수집단의 문학을 위하여]에서 주장했듯이, 소수는 다수가 된다. 현대사회는 주류에서 배제된 타자들의 숫자를 점차 늘려왔고, 더 이상 소수에 한정될 수 없는 문화와 예술을 낳았다. 




게리 힐



사이몬 페이스풀



피피로티 리스트



하일 알틴데레



힘 있는 자들의 부당함에 저항하기 위해 모였을 때, 가령 한국에서 몇 달째 열리고 있는 촛불집회 같은 혁명적 행사에서 함께 부르는 노래는 양희은의 [아침이슬]이나 들국화의 [행진]같이 아래로부터 공감되어온 언더그라운드 음악이지 ‘한류’같이 위로부터 기획된 문화상품이 아니다. 클럽 몬스터의 전시 컨셉은 어찌 보면 단순하다. 누구나 좋아하는 음악은 있을 것이고, 그 음악으로부터 영감 받은 작품을 한 두 편 씩 내놓으면 된다. 다만, 그 ‘누구나’가 현대예술 작가이기에 결과물은 특별하다. 그들은 음악을 단순히 소비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에 상응하는 또 다른 것을 만들기 때문이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음악이 활용되었다면,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은 더욱 다양해진다. 그 역동적 과정은 참여 작가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관객은 지각과 기억이 동시에 활성화되는 작품의 공간 안에서 자신이 포함된 또 다른 텍스트를 짤 수 있다. 


가령 어떤 작품에는 내가 알던 바와 다른 존 레논/요코 오노가 있을 수 있다. 현대미술보다는 조금은 더 친숙한 대중음악은 그 매개가 된다. 매개는 단순한 일대일 짝짓기가 아니다. 들어가는 구멍은 하나일지 모르지만 나오는 구멍을 여럿이다. 여기에서 작품의 가치는 대중들로 하여금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전환할 수 있는 정도에 달려 있다. 작년에 한국의 여러 지방에서 열린 비엔날레들이 하나같이 난해한 주제에 각자 스타일의 작품들로 뿔뿔이 흩어져 그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했기에, 이러한 단순명료한 전시개념은 반갑다. 물론 전시의 출발이 된 음악이라는 소재 자체는 단순하지 않다. 전시라는 기회를 통해 시작의 단순함은 내포적 다양성으로 확장되었다. 전시 맥락을 더욱 풍부하게 하기 위해 작품과 별개로 첨가된 영화와 음악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중요한 현대문화의 텍스트다. 그것들은 훌륭한 예술작품처럼 볼 때 마다 음미해야 할 또 다른 가닥들이 불거져 나오는 다층적 텍스트다. 




임승천



장민승



유현미



세월호 희생자들을 떠올리는 국화와 노란 리본이 있는 임승천의 작품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에 깔려있는 밥 딜런의 동명 노래는 수 십 년의 세월과 장소를 건너 뛰어 어이없이 침몰하는 배 속에서의 절박한 상황과 여전히 지지부진한 의혹규명을 촉구한다. 장민승의 작품 [사계]는 민중가요 그룹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 깔려 있는 역설을 공유한다. 노찾사의 음악에 미싱사들의 비참한 노동환경을 발랄한 리듬에 실려 있다면, 작업하는 손가락을 찌를 듯이 움직이는 위협적인 기계는 스크린으로도 활용된 놀라운 기계수 작품을 낳았다. 배영환의 작품 [유행가-물 좀 주소]는 독재자에 의해 억압받았던 노래로 뮤직비디오 같은 작품을 만들었다. 그 배경은 세운상가 뒷골목 풍경이다. 세면의 벽 전체를 스크린으로 삼은 배영환의 작품 속에는 학창시절 남동생과 함께 불법 음반을 사러 종종 가곤 했던 세운상가의 야생적 기운이 여전하다. 질서 속에 무질서를 품고 있는 도시는 양가감정을 자아낸다. 


힙합음악에서 쏟아져 나오는 가사처럼 쉴 새 없이 이미지들이 토해지는 제바의 그래피티 작품 [이곳은 짐승의 뱃속]은 조증(躁症, mania)의 광기가 느껴진다. 다보츠의 그래피티 작품 [concrete jungle]은 그가 살고 있는 도시 자카르타를 정글로 표현했다. 이 작품은 도시라는 콘크리트 정글 속에서 확연하게 눈에 띄는 굵직한 패턴들로 구성된다. 비누로 벽돌을 만들어 쌓은 신미경의 작품 [벽]은 부드럽고 향기도 나지만 속에 철장을 숨기고 있는 벽은 분명하다. 한쪽 면은 핑크 플로이드의 명반 [the wall]의 기괴한 이미지들이 나오지만, 다른 면은 관객이 자기의 소원을 새겨 넣을 수 있는 쌍방향적인 벽이다. 뮤지션과 현대미술작가들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에 민초들과 함께 저항한다. 쩐 루웡의 작품 [coc cach]에는 격렬한 시위 장면들이 뮤직 비디오처럼 편집되어 있다. 거기에는 광주시민들에게 친숙한 [임을 위한 행진곡]이 포함되어 있다. 권혜원의 작품 [바리케이트에서 만나요]는 존 바에즈의 노래 [we shall overcome]을 깔고 역사상에 있었던 수많은 전선들을 추적한다. 




배영환



신미경



요코 오노



근대부터 시작하여 21세기에도 계속되는 전쟁과 혁명은 원치 않는 이주민과 난민을 낳았다. 하릴 알틴데레의 작품 [homeland]는 시리아 래퍼인 아부 하자르와 협력해 고향을 떠나는 험난한 여정을 표현한다. 난민이기도 했던 래퍼의 노래는 타자가 다른 대변인을 거치지 않고 곧장 발언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전쟁터는 저 멀리에도 있지만, 모든 것이 코드화되고 있는 시대에 몸 또한 전쟁터이다. 전시 개막 즈음 강연자로도 나섰던 게리 힐은 작품 [wall piece]에서 어두운 벽에 자신을 계속 내던지는 한 남자를 등장시킨다. 벽에 부딪힐 때 마다 비명처럼 단어를 내뱉는 남성에게서 언어적 동물인 인간이 앓아야 하는 병이 처절하게 전달된다. 옷을 입은 채 심해를 끝없이 걷는 사이몬 페이스풀의 작품 [going nowhere 2]은 ‘walking’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음악들을 배경으로, 때로는 숨 막히는 맹목적 여정으로 느껴지는 인생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피피로티 리스트의 [blutclip]은 생리혈이 낭자한 경쾌한 뮤직 비디오같은 작품이다. 작품의 배경인 숲이나 행성은 여성과 자연의 오래된 연결망을 환기시킨다. 여성의 자연적 ‘본질’은 억압의 빌미도 되었지만 해방의 계기도 된다. 


하릴 알틴데레의 또 다른 작품 [siren]은 터키에서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한 트랜스젠더가 매혹적인 인어로 등장한다. 성적 소수자는 서커스의 구경거리 같은 비천한 이미지를 벗고 신비로운 존재로 재탄생한다. 부정과 비판만큼이나 긍정 또한 중요한 가치이다. 1966년에 처음 발표되었지만 이 전시를 위해 특별히 다시 만든 요코 오노의 [ceiling painting]은 관객이 위태로운 사다리를 올라가서 돋보기로 천정을 잘 찾아보면 ‘yes’라는 단어가 나온다. 비록 깨알 같은 작은 글자지만 거기에는 전쟁과 경쟁이라는 지배적 가치에 대립하는, 사랑과 평화라는 1960년대의 대안적 가치가 메아리친다. 유현미의 작품 [종이 카페]는 소복이 쌓인 눈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는 치유의 공간으로 다가온다. 또 다른 작품 [그려진 그림자]는 탁자 위에 놓인 신문지들이 다른 형상의 그림자를 낳는 모습이 연출되어 있다. 콩 심은데서 반드시 콩이 나지 않는 상황은 기만적이지만, 그런 뜻밖의 여지가 있어야 함도 알려주는 듯하다. 하루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관람 여정의 마지막 부근에 배치된 고기영의 작품 [빛의 숲]은 밤하늘 별같이 빛나는 뮤지션들을 생각하며 쉴 있는 자리이다. 음악과 미술이 만난 이 전시는 서로를 배경으로 삼기보다는 상호침투하면서 제3의 경험을 만들어 내고 있다.  

  

출전 ; 아트인컬처 3월호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