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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 프로젝트 / 과학과 예술의 학제 간 대화

이선영

과학과 예술의 학제 간 대화

  

이선영(미술평론가)

  

과학과 예술을 결합하여 영원한 생명 에너지(Eternal Vital Energy)를 표현하는 ‘EVE 프로젝트’는 이제는 다소간 고풍스럽게 다가오는 ‘키네틱 아트’를 새로운 맥락에 배치한다. 전기를 비롯해 여러 동력원으로 펼쳐지는 기계들의 움직임은 활기찬 표현을 넘어 에너지를 표출한다. 지난 세기 중 후반기에 등장한 키네틱 아트가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우선 문명과 문화에 있어 ‘기계’의 몫이 더 확장되어 가는 현대사회의 흐름과 관련된다. 산업시대의 기계와 달리, 탈산업 시대의 기계는 자신의 기능을 밋밋한 표면 아래로 숨기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지만, 그럴수록 아나로그적 형태를 통한 상징적 역할이 중시되기 때문이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이러한 예술적 방식, 즉 보다 감성적이고 직관적으로 대상에 접근하는 방식이 선호되고 선택될 것이다. 고대와 중세,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까지도 한 몸이었고, 근대에 와서야 과학자와 예술가라는 각자의 이름을 얻게 된 과학과 예술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공(共) 진화해왔다. 


실제적 쓸모가 아니라 상징적 기능을 가지는 이 ‘기계’들은 자연의 법칙에 대한 지식, 즉 과학에 머물지 않고, 인간과 예술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준다. 이런저런 기계적 움직임은 단순히 관객의 관심을 끌기위한 유인적 전략, 또는 첨단예술과 첨단기술을 동일시하는 피상적 장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이 전시의 작가들에게 기계적 움직임은 시간의 흐름에 따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들 작품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여, 인간의 희로애락과 생로병사에 깊숙이 관여한다. 김동현과 왕지원은 촘촘한 망으로 이어진 세계에 대한 생태학적이고도 종교적인 비전을, 김진우와 한승구는 인간과 기계에 대한 관계를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의 작품은 나에 대한 인식부터 자연과 세계, 그리고 우주에 대한 이미지에 까지 이른다. ‘영원한 생명 에너지’라는 프로젝트 주제는 기계가 더 이상 외재적이지 않음을 알려준다. 그것은 생명 내부의 장기나 영혼처럼 작동한다. 




김진우_세상속으로_steel, stainless steel, aluminium, LED_310x170x170cm_2011

ABC 행복학습 타운(으뜸관 갤러리 시흥) 전시 전경



과학은 딱딱하고 예술은 부드럽다는 선입견이 좌뇌/우뇌에 관련된 가설만큼이나 널리 퍼져 있지만, 유네스코의 학제 간  문화연구 프로그램의 하나로 기획된 책 [예술과 과학](엘리안 스트로스베르)이 말하듯이, 예술과 과학은 모두 세계를 해석하는 방법이며, 기술이라는 공통점으로 연결된다. 또한 과학과 예술의 대화와 상호작용은 미래의 ‘초분야적 문화(Trans-Displinary-Culture)’를 향한 흐름에 조응한다. 이 프로젝트의 참여 작가들은 회화나 조각 같이 자신에게 익숙한 어법을 넘어서 새로운 어법을 확장해왔으며, 이브 프로젝트 안에 포함된 교육 프로그램과 페스티벌 같은 다채로운 부대 행사는 그 경험을 공유하는 자리이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관객과의 소통을 중시한다. 각 작품에 내재된 유희적 요소와 과학 기술은 효과적인 매개가 된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업실은 실험실이나 공장에 가깝고, 그들의 정체성은 골똘하게 연구에 몰입하는 발명가에 가깝다. 그러나 작업은 대규모 분업이 아니라, 특수한 영역의 전문가들끼리의 만남을 바탕으로 한다. 


그들의 작품은 과학으로의 환원되거나 과학을 예술적으로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 간의 근접을 지향한다. 과학은 분석하고 증명하기에 앞서 예측하고 모델을 구성한다. 이때 예술적 감성이나 영감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술과 과학]은 ‘인간이 인식과정에서 느끼는 행복은 외부 대상 및 행동이 인간의 정신 가운데 미리 존재하는 내적인 이미지와 일치할 때 생기는 것 같다’는 물리학자 파울리의 말을 인용한다. 또한 과학은 가설을 현실화시켜 예술가에게 새로운 재료와 구체적 방법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보편적인 언어에 바탕 하는 과학은 물질적 이익을 포함한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일단 공유되면 빠르게 진부화 된다. 예술의 언어는 보다 특수해서 소수로부터 인정받고 조금씩 확산된다. 예술은 선적인 발전의 역사를 초월하여 매번 새롭게 읽혀지고 다시 쓰여진다. 그러나 과학과 예술은 자연에 대한 구조적 이해를 통해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시킨다는 점에서 같은 노선을 따른다. 

  

김동현-꼬불꼬불 이어져 있는 세계 


김동현은 관객이 시작한 행위가 끊일 듯 말 듯 이어지는 연쇄 반응을 일으켜 연주를 비롯한 여러 결과를 낳는 기계장치를 선보였다. 조화로운 음의 발생이라는 신비로운 결과는 연쇄작용의 긍정적인 면--작가가 짜놓은 계획이 성공적으로 수행 되면 작은 선물 또한 받는다—을 강조한다. 물론 촘촘히 연결된 세계에는 부정적인 면도 있을 것이다. 가령 세계화가 강자와 약자의 차이를 더욱 벌려가는 신자본주의의 추세에 의한다면, 상호연결 된 세계에서 악기가 아니라 무기가 작동될 수도 있는 것이다. 김동현의 설치 작품에서 관객이 핀볼 게임을 하면서 과녁을 맞추면, 롤링 볼 머신이 작동되어 양편의 기계가 타악기를 자동적으로 연주한다. 핀볼게임에 그려진 창자같이 꼬불꼬불한 이미지를 횡단하는 쇠구슬은 마찬가지로 여러 굴곡 면을 가지는 기구의 쇠구슬을 작동시킨다. 구슬이 움직이는 동력은 놀고 싶은 마음과 중력이다. 만유인력의 세계에서 모든 것은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연결된다. 




김동현_히치하이커를 위한 대위법 이야기1_wood, steel, aluminium, arduino, sensor, D.C. motor, variable installation, dimensions variable_가변설치_2016



김동현_히치하이커를 위한 대위법 이야기1_wood, steel, aluminium, arduino, sensor, D.C. motor, variable installation, dimensions variable_가변설치_2016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제목은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한 비판적 코멘트이다. 주사위 놀이란 우연과 무작위성을 강조하므로, 자연의 연속성에 대한 신념에 대한 도전을 나타낸다. 물론 주사위 놀이도 무한히 반복하면 통계학적 인과성이 성립된다. 근대/현대 물리학은 다른 패러다임을 가지는 만큼이나 궁극적으로는 인과론에 대한 믿음을 공유한다. 김동현의 작품에서 원인은 어떤 결과를 낳지만, 그 과정은 그림에서도 등장하는 꼬불꼬불한 길처럼 우여곡절을 거친다. 때로 주어진 길을 벗어나기도 할 것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롤링 볼 머신은 양 옆의 고풍스러운 악기만큼이나 따뜻한 느낌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고가 오래된 것임을 알려준다. 작품 [호피인디언의 거미할머니 이야기]에서 작가는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에 나오는 거미할머니로부터 영감 받아 온 세상을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거미줄의 비유를 눈에 띄는 낙서화법으로 그린다. 


그 이미지는 정적인 사각 캔버스가 아니라, 바다나 육지의 굴곡 면을 타고 이동하는 보드에 그려져 있다. 그것은 오래되었으면서도 미래적인 연결망을 타고 신나게 이동하는 느낌을 준다. ‘서핑’이란 표현은 정보의 바다를 항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격세유전적인 사고는 가장 몸집이 포유류인 큰 대왕 돌고래가 기계장치들과 결합되어 있는 이미지를 담은 작품 [Engine]에서도 나타난다. 뼈와 뼈가 결합되어 있듯이, 기계적 요소들이 접합되어 있다. 작품 속 소우주는 이렇게 비틀비틀 이어지는 이접의 연속이다. 두 기둥에 걸쳐 걸어놓은 그림 아래에는 스마트폰 앱과 연동되어 움직이는 바퀴달린 인형이 왔다갔다 한다. 그림과 설치, 또 전자기기는 상호연동 되면서 미시-거시적으로 연결된 세계상에 대한 생각을 전달한다. 김동현의 작품에는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잇닿아 있다’(보르헤스)는 사고가 깔려있다. 작가가 수년간 몰입해온 키네틱 아트는 이러한 사고에 동역학적 과정을 부여한다.

  

왕지원-시계처럼 돌아가는 우주 


왕지원의 작품은 시계처럼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우주를 표현한다. 톱니바퀴의 운동 한 가운데에는 움직이는 연꽃 속의 여성이나 명상에 잠겨있는 남성이 등장하기도 한다. 왕지원이 활용하는 기계는 탈진기(escapement)로, 탈진기는 시계의 정밀도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로 1회전은 60개로 나누는 역할을 한다. 작품 [Mechanical Buddhahood L]은 184개의 기어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기어 위의 인물은 자화상이다. 작가는 파도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부처같이 고요한 표정으로 중도를 유지한다. 작품 [The Birth of Sun]은 연꽃에서 아름다운 여성이 탄생하는 모습이다. 정밀한 시계 속 세상에서 태어나는 여성은 비너스이자 사이보그이다. 구름 또는 바다처럼 보이는 움직이는 구조물 한 가운데의 인간상은 마치 대지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식물처럼 이질감이 없다. 그것은 개체 또한 빈틈없는 기계적 움직임으로 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상황은 육체에만 한정되지 않음을 알려준다. 왕지원의 작품에서 연동되는 수많은 톱니바퀴들은 구름이자 바다이고 만다라인 것이다.




왕지원_The Birth of Sun_urethane, metallic material, machinery, electronic device (CPU board, motor)_35x35x30cm(2EA)_2014



왕지원_Mechanical Flying Fairy_urethane, metallic material, machinery, electronic device (CPU board, motor)_ 50 x40 x50cm(2EA)_2014



움직이는 톱니바퀴 한가운데 있는 것은 자신과 아내이기도 하지만, 보이는 그대로 부처나 비너스로 간주한다면, 그 고풍스러운 이미지와 기계의 결합은 좀 더 이질적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게 돌아가는 세계와 종교적 세계관이 그리 멀지 않음을 예시한다. 그 세계관의 기원은 작품의 주요 요소이기도 한 만유인력과 관련된다. 그러나 그 전에 시계는 중세의 수도원에서 이미 발명되었다는 것, 이후 현대의 로봇의 기원인 자동인형 등의 주요원리가 되었음을 상기시킨다. 균일한 간격으로 흐르는 시계의 양적인 시간관에서 정신의 몫은 점차 줄어들어 결국 우리 앞에 펼쳐진 바와 같은 완전한 세속의 세계를 준비했다. 작가는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의 반대가 아니라, 그 정점에서 다시금 주체와 정신, 자연 등을 호출한다. 세계가 만약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돌아가는 기계라면, 그것을 설계한 자는 누구인가라는 원초적 물음이 남아있는 것이다.


제임스 글릭은 [아이작 뉴턴]에서 중력의 발견자이며 근대의 기계적 세계관을 연 뉴턴에게 제 1동자(prime mover)는 신일 수 있음을 예시한다. 뉴턴은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담은 책 [프린키피아]에서 ‘태양과 행성과 혜성으로 이루어진 이 아름다운 태양계는 전지전능한 존재의 계획과 지배에서 비롯될 수 있다’며, ‘신이 시간과 공간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뉴턴이 말년에 연금술과 고대의 역사, 그리고 성서연구에 몰두한 것은 시계로서의 우주에 남아있는 비합리적인, 또는 초합리적인 세계에 대한 여지를 상기시킨다. 이때 자연 그 자체를 신으로 생각할 뿐, 따로 존재하는 신을 상정하지 않았던 동양적 사고는 대안이 될 수 있다. 불교의 도상중의 하나인 연꽃 한가운데의 여성이나 부처상과 하나가 된 자아가 있는 왕지원의 작품은 과학을 그저 유희나 예술로 삼았을 뿐, 산업 기술과 연계시켜 물질적 진보--또한 그것이 야기한 창조와 파괴—에 몰두하지 않았던 또 다른 세계를 가리킨다.  

  

김진우-사람과 로봇


김진우의 입체작품들은 그 옆에 걸린 드로잉 속의 상상들이 현실화된 듯하다. 실제로 굴러갈 수 있는 자동차까지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이 있다 보니, 전시장에 있는 두 대의 로봇은 수많은 구상 중 몇몇 샘플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작품 [플라잉 맨–1]은 관객이 가까이 다가가면 눈빛이 번쩍이고 머리끝과 가슴의 프로펠러가 돌아간다. 이번 전시에서 손은 움직이지 않지만, 그가 강조한 신체부위, 가령 이성적인 머리와 따스한 가슴, 뇌의 연장인 눈, 그리고 직립하는 다리와 움직이는 팔 등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요소이다. 납작한 청소기가 있듯이 기계는 굳이 인간을 닮을 필요가 없다. 상징이기에 인간을 닮게 한 것이다. 김진우가 구현한 로봇은 친근하고 따뜻한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익명적 경쟁 사회에서의 생존을 위해서 차가운 단독자가 되어야 하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자동적으로 실행되는 많은 서비스에서 이미 인간보다 더 살가운 소통이 시도된다.  




 김진우_자연, 인간과 기계를 품다_Acrylic, oil on canvas_160x800cm_2016



전시장 천정에 닿을 듯이 큰 키의 로봇 형태의 작품 [세상 속으로]는 [플라잉 맨–1]의 인간적인 규모를 벗어난다. 몸체 이곳저곳에 뚫린 형태들은 창문이다. 그 창으로 여러 색과 강도로 빛나는 LED가 보이고, 이러한 빛의 움직임은 그것이 작동 중임을 예시한다. 근대 건축가들이 집을 살기 위한 기계로 간주했듯이, 건축은 기계이다. 근대 건축가들이 인간적 스케일인 모듈을 생각했듯이, 김진우의 작품에는 휴머니즘과 기계/건축과의 유비가 있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과 로봇은 서로의 자리를 빼앗는 냉혹한 경쟁자가 아니라, 소통하고 공존하는 친구같은 사이이다. 작은 드로잉들과 그것의 확장인 작품 [자연, 인간과 기계를 품다]에서는 그러한 관계가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거기에서 인간, 동물, 식물, 기계 등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력처럼 자연스럽게 접합된다. 여기에 거북선같이 역사적인 기계에 대한 관심도 덧붙여진다. 드로잉에는 수많은 하이브리드들이 등장한다.


그것들은 위협적인 괴물이나 음산한 비정상이 아니라, 유쾌한 ‘잡종공동체’(도미니크 르스텔)를 이룬다. 김진우의 로봇은 인간을 닮았을 뿐 아니라, 로봇을 통해 인간의 상황이 역추적 된다. 부르스 매즐리시는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에서 로봇의 선조인 자동인형에서 ‘자동(auto)’은 그리이스어로 ‘동일(autos)’을 뜻하는데, 불어로 ‘나 자신’이라고 말할 때의 의미라고 한다. 즉 자동화된 인간은 항상 같은 질문, 즉 이것들은 인간과 어떻게 다른가, 요컨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강요한다. 매즐리시에 의하면 가장 명백한 대답은 ‘인간은 기계공’이다. 그것은 ‘엔지니어이자 예술가’로 자신을 소개하는 김진우의 정체성과 어울린다. 그러나 매즐리시는 로봇—체코의 소설가 차페크가 만들어낸 말로, 일이라는 뜻의 체코어 robota에서 왔다고 하며 차페크의 희곡에서 인간은 불완전한 기계로 묘사 된다—과 노동자와 비유하기도 한다. 이 기계/노동자가 감정과 기억을 갖게 될 때 예술과 혁명은 다시 만날 수 있다.

 

한승구-인간을 넘어서


동서양의 미인들이 망라된 일곱 미인 사진들은 관객을 바라본다. 그러나 일렬로 배치된 사진을 따라 걷다보면 마스크가 보인다. 렌티큘러 작품 [Mirror Mask]는 실제 얼굴과 마스크를 함께 심어 놓았다. 얼굴이 마스크로 변하는 순간 사이보그 같은 분위기가 강해진다. 가면은 똑같고 얼굴은 다르다. 미인에 대한 기준을 두루 충족시키기에 비슷해 보이는 이미지에서 얼굴 자체가 가면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 안의 가면이 본질인가? 얼굴과 가면의 어지러운 자리 바꾸기는 사회관계 속에서 작가가 절감하고 있는 현대인의 위장하려는 욕망과 관련된다. 그가 마스크를 거울같이 표현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실제가 아니라 상상의 자아를 반영하는 거울은 코드화된 상상의 나래를 따라 비슷한 모습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거울은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을 재생산한다. 마주 보는 거울이 대상을 무한히 복제하듯, ‘생산의 거울’(장 보드리야르)은 상품을 넘어서 몸 또한 그렇게 생산할 것이다.




 한승구_Mirror mask_lenticular_58x100cm(6EA)_2010-2011



한승구_Skin of Skin_white 100_computer, projector_1024X748(pixel)_2016



프로젝터를 이용한 동영상 작품은 그러한 재생산의 과정을 보여준다. 벽에 걸린 얼굴의 입체 모형에 투사되는 영상은 얼굴이 발생/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구축/해체되는 과정이다. 거울조각은 모자이크처럼 맞춰져 얼굴이 되지만, 곧 파편들로 떨어져 나간다. 모든 파편이 떨어져 나간 후 남은 카오스 같은 암흑 공간에서 명멸하는 빛은 얼굴/가면이 구축/해체되는데 투입/발산되는 에너지 아닐까. 맞은편에 걸린 또 다른 영상 [Skin of Skin –White 100]은 3D 마야 프로그램을 이용한 것으로, 촘촘하게 연결된 하얀색 큐브들이 서서히 파동 치며 발산과 수렴을 반복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개체의 경계라는 것을 무색하게 한다. 한승구의 작품에서 생성 또는 생산은 이질적인 것의 만남이 아니라, 동종의 것들이 늘어나는 무성생식의 이미지를 가진다. 거울 마스크에 내재된 복제의 메커니즘은 미시적인 단계에서 되풀이 된다. 생명 또한 태생적인 우연에 내맡겨 지는 것이 아니라 코드화된다. 


생명의 지도인 유전자가 코드이다. 도미니크 바뱅은 [포스트휴먼과의 만남]에서 무성생물을 불멸의 생명체로 평가한다. 이들에게 생식은 세포 분열만으로 이루어지고 분열을 통해 생겨난 두 개체는 완전히 똑같으므로 하나의 개체가 성장과 번식을 거듭하면서 여러 세대에 걸쳐 생존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무성생식으로 번식하는 박테리아의 경우 그것들은 지속적으로 유전자를 교환함으로서, 수직적으로 대를 이어가는 유성생식에 비해 삶과 죽음이라는 관계로부터 좀 더 유연하다. 무성생식의 메커니즘은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샌더 길먼은 [성형수술의 역사]에서 인류가 더욱 건강해지기 위해서 완벽한 인간의 복사물을 클로닝 하여 각각의 것이 새로운 생명주기를 반복적으로 시작함으로서 영원한 젊음을 유지한다는 발상을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계급적 사회에서 클로닝을 통한 영원한 회춘 프로젝트는 혜택 받는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에게는 디스토피아일 것이다. 

  

출전; 시흥 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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