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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영의 작품 〈더러운 잠〉을 둘러 싼 논란

이선영

이구영의 작품 〈더러운 잠〉을 둘러 싼 논란

  

이선영(미술평론가)

  

지난 1월 국회 의원회관 로비에서 열린 《곧, 바이!》전(1.20~1.31)(편집자 주1)에 출품된 작가 이구영의 작품 〈더러운 잠〉이 전시 기간 중이었던 1월 24일 보수단체 회원들에 의해 파괴된 사건이 있었다. 시국적 상황을 포함한 세태 풍자적이 작품이 이런저런 논의는 될 수 있어도, 실제로 그것이 파괴됐다는 사실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그 행사에 관련된 정치인은 징계도 받았다. 예술은 실제가 아니라 허구이다. 그것은 놀이와 같다. 놀이에는 규칙이 있다. 파격이라는 것도 규칙과의 관련 속에서 일어난다. 미술사를 포함한 역사는 그 규칙이 변화하는 여정이다. 속임수를 쓰는 자보다 더 치사한 자는 규칙 자체를 거부하면서 판을 깨는 자다. 그런 부류들이 더 힘을 가진다면 전쟁도 불사할 것이다. 성조기와 태극기를 휘날리고 다니는 보수단체 회원들은 아직도 제국주의와 유신시대 독재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공공연히 계엄령을 촉구하고 그렇게 해서라도 빨리 나라의 ‘질서’가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구영의 작품



그러나 폭압적 힘에 의한 사이비 질서는 북한 체제(그들이 제일 싫어하는 ‘빨갱이’)에서 보고 있지 않은가. 얼마 전에 블랙리스트 수사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보수단체들은 국가와 재벌들로부터 지원받는 얼마의 돈으로 충성경쟁을 하느라 그런 짓거리를 하고 다닌다고 하니, 우리는 더러운 정경유착의 고리가 끊어야할 또 다른 이유를 찾아낸 셈이다. 이번의 작품 파괴 사건은 블랙리스트에 오른 민중미술의 작가가 화이트리스트에 올라있는 보수단체 회원에게 테러를 당한 것으로 정리될 수도 있다. 이러한 불상사에도 불구하고 정의가 다시 서기 전까지는 진실을 밝히려는 게임을 멈출 수 없다. 즉 우리는 시국 풍자적 작품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시작으로 또 다른 담론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 때문에 몇 달째 나라가 시끄럽지만, 정작 그 당사자는 아직도 구중궁궐에 숨어서 거짓 해명만 늘어놓고 있으니, 힘겨루기는 계속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민의 한사람이자 작가에게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 방식은 작품 활동이다. 평소에 예술에 대해서는 눈꼽만치의 관심도 없던 이들이 주먹과 발길질로 어떤 예술 작품에 대답한 사건 때문에, 더 근본적으로는 대다수 국민의 스트레스 지수를 높이고 있는 최고 권력자와 그 하수인의 어이없는 행적들, 그리고 이러한 괴물들을 탄생시켰던 한국의 불투명하고도 권위주의적인 정치문화 때문에, 작품 〈더러운 잠>은 우리 사회의 수면에 떠올랐다. 현대미술 자체가 가지고 있는 소수자의 입장은 이러한 사건—다른 예로는 예술작품의 천문학적 가격이나 위작에 관련된 사건—을 통해서나 주목받는다. 어떤 예술가들은 이러한 사건성을 전략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실제로는 보지 못하고 뉴스를 통해 접한 이구영의 작품은 ‘예술성’은 그다지 없었지만, 시의성이 있었다. 그 작품은 시대정신까지는 아니어도 국민적 의혹과 관련된 시의 적절함이 있었다. 한편 독창성과 자율성 등을 가치를 내포하는 ‘예술성’이라는 기준은 이러한 패로디 스타일의 작품에는 적용될 수 없다.


근대가 자신의 힘을 다 고갈시킬 무렵, 신처럼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듯한 천재 예술가에 대한 신화는 깨졌고, 작품이란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텍스트들의 조합이라는 것이 강조되었다. 거기에는 마네의 <올랭피아>(1863), 그리고 그보다 앞선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같은 ‘침대 위의 비너스’라는 텍스트가 깔려있다. 이러한 선재하는 텍스트와 관련된 이구영의 작품이 공유하는 도상적 전통은 여성을 물화, 상품화시키는 것이기에 비판을 받았다. 관객의 시선을 맞받아치는 마네의 작품은 그 도발성으로 당시에 큰 물의를 일으켰고, 그러한 스캔들은 그를 근대미술의 시조에 올려놓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마네의 작품 속 여성 이미지에는 근대미술의 특징이 되었던 평면성이 두드러진다. 마네의 작품 속 인물은 못생긴 창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평면성 때문에 이전시대의 비너스보다 더 강하게 눈앞으로 당겨져 온다. 반면 작품 속 박대통령의 몸은 좀 더 입체감이 있다. 


그것은 마네도 참고한 더 이전 시대의 비너스의 몸이다. 검은 색의 하녀와 대비되는 하얀 색 평면에 불과했던 올랭피아의 몸이 육감적이지 않다면, 그 이전 시대의 비너스는 그녀를 감싸고 있는 비단처럼 부드럽고 따스한 혈색이 있었다. 마네의 여성이 조형적 언어를 강조한다면, 그 이전 시대의 비너스는 이러한 형식적 거리감이 없다. 그래서 더 감정이입적이고, 관점에 따라서는 더 음탕할 수 있다. 침대위의 비너스들은 성녀와 창녀로 이분화 된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가진다. 신화와 종교의 그림자가 여전한 이전 시대의 비너스에서는 창녀의 모습이 감춰져 있지만, 검은 띠 목걸이를 하고 있는 마네의 비너스의 경우 그 시대 유럽인이라면 누구나 알아 볼 수 있는 창녀인 것이다. 성녀는 성녀대로 창녀는 창녀대로 성적 환상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확립된 이분법적 여성이미지는 현대까지도 계속 이어지면서 소비되었다. 




마네, [올랭피아](1863)



지오르지오네, [잠자는 비너스](1510),



남성에게는 물론 남성의 시선을 받고 싶은 여성에게도 소비되었다. 가령 이구영의 작품에서 미용 관련 주사바늘을 꽃다발처럼 들고 있는 최순실/하녀와 함께 60대 여성으로서는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의 몸 관리를 받아왔던 침대위의 여인 또한 그러한 소비자였을 것이다. 그녀는 공인이기에 누구 돈으로 그런 것들을 소비했는지, 언제 어디서 그런 관리를 받았는지가 ‘여성으로서의 사생활’과 무관하게 의문에 붙여질 수 있다. 작품 <더러운 잠>의 핵심적 물음이 거기에 있다. 하녀가 들고 있는 꽃다발 자리에 가득한 주사들은 현실, 가령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경악할만한 사건들로부터, 그리고 늙어가는 몸으로 부터 회피하는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 사악한 하녀는 이러한 눈가림에 앞장서고 뒤로 자신의 사익을 챙겼다. 백옥(글루타티온) 주사, 태반(라이넥) 주사, 신데렐라(티옥트산) 주사 등으로 알려진 회춘관련 주사제들, 그리고 성형관련 마취주사제, 대리처방, ‘주사 아줌마’, ‘기(氣)치료 아줌마’를 포함한 비(秘)선 진료의 실체가 상당부분 알려져 있는 바이기에, 그의 작품은 풍자적으로 다가온다. 


<더러운 잠〉이라는 제목 자체도 세월호가 침수되는 장면이 방송에 실시간으로 전달되던 날 일곱 시간이나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아직도 속 시원히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손이 많이 가는 올림머리를 다시 매만지고 뒤늦게 나타나 엉뚱한 소리를 늘어놨던 국정 최고 책임자에게 쏠린 의혹과 관련된다.(주2) 이구영의 작품은 먼 훗날 미술사가들이 보면 이해하기 힘든 여러 텍스트들이 짜여있는 알레고리이다. 이전시대의 신화적 종교적 역사적 알레고리를 걷어냈다고 평가받는 근대미술 또한 알레고리가 있다는 미술사의 연구가 있다. ‘새로움’의 시작 마네 또한 그렇다. 근대를 열었던 마네는 역사를 많이 참조했다. 근대는 다름 아닌 역사의 시대이다. ‘진보’라고 알려진 이 역사적 시간감각 속에서 새로움은 더욱 날카롭게 의식되었다. 당대에는 현실이라는 맥락을 통해서 이해되는 공통의 어법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호해진다. 세월과 함께 언어도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언어를 써야 하고 그것이 시와 역사의 차이라고 논구되지만, ‘보편성’ 자체가 상대적인 것이다.


창문으로서의 그림을 지양했던 마네의 근대적 작품에서 관객의 시선은 어둡게 처리된 실내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비너스에 집중된다. 그러나 여러 시대의 비너스를 다층적으로 참조한 이구영의 작품은 오른쪽 상단에 창을 뚫고 실내의 나른한 한가로움과 대조되는 급박한 현실을 띄웠다. 가라앉지 않은 부분에는 아직 생존자가 있을 것인데, 볼수록 안타까운 장면이다. 그러나 작품 속 인물은 창밖 대신에 자신의 몸 쪽을 향한다. 강아지를 보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그것은 침대위의 비너스에 존재하는 나르시시즘적인 시선이다. 그자체가 시선의 대상이 되는 비너스들은 흔히 거울을 들고 있었다. 그 거울에는 보여 지는 자신을 보는 시선이담겨 있다. 가장 유명한 예로는 벨라스케스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1647-1651)가 있다. 변기나 샤워꼭지 등에 매우 까다로웠다는 박대통령은 거울에 대해서도 그랬다고 전해진다. 그녀가 화장을 할 땐 배경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하며 그래서 늘 새하얀 스크린을 설치했고, 주변에 밝은 조명들을 배치했다. 그런 시스템은 관저 뿐 아니라, 해외순방 때도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준수되었다고 한다. 


1월 18일자 SBS 뉴스에서는 박대통령의 또 다른 근무지였다는 관저 내부구조를 소개한 바 있다. 이 뉴스는 국민적 의혹에 붙여진 세월호 당일 행적과 관련된 미묘한 사안과 관련된 것으로, 개인의 사생활을 캐는 류의 선정적 논조와는 거리가 있다. 뉴스에 따르면, 대통령의 주장과 달리 공식적인 집무실이라고 볼 수 없는 관저에는 사방에 거울이 있는 방이 있었다. 이구영의 작품 속 나르시시즘적 시선에 갇힌 침대위의 비너스는 거울의 방, 또는 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비춰서는 안 되는 거울 세팅을 필요로 했던 누군가를 풍자한다. 박대통령의 회춘 프로젝트의 추진 및 의상 공급 책이기도 했던 하녀/최순실은 주인공의 나르시시즘에 일조한다. 또한 작가는 박대통령 뒤에 걸린 태극기의 문양에 박힌 최순실의 얼굴을 통해 대한민국을 사유화한 죄를 심문한다. 또한 그것은 작품 <더러운 잠>을 실제로 짓밟은, 태극기를 휘날리고 다니는 세력을 떠올리는데, 봉건 독재 시대의 회귀를 꿈꾸는 그들은 하늘과 같은 ‘왕’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이다.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



벨라스케스, [거울을 보는 비너스](1647-1651)



권력으로부터의 모종의 대가를 기대한 대기업으로부터의 수금을 포함한 국민적 의혹에 대해 ‘정당한 통치행위’였다고 주장하는 권력자에게 위법 사실은 초법적인 권리로 대치된다. 이구영의 작품은 검찰조사와 매체를 통해서 밝혀진 진실과 사실을 취합하여 한 장의 이미지로 정리한다. 관객은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알레고리들을 하나씩 찾아내 읽을 수 있고, 사실들 간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명백히 밝혀진 사안에도 무조건 아니라고 우기고 있는 오만하고 고집스런 이에게는 아직도 권력의 방패막이가 있다. 그 정체가 수상한 야매 의료인들은 물론, 말 장수까지 자유롭게 드나들던 청와대는 국민의 위임을 받은 특검의 수색을 아직도 거부한다. 돈으로 매수된 법률 전문가들은 죄인들의 함구와 거짓말을 합법적으로 돕고 있다. 추운 겨울날 수개월동안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촛불 민심 덕분에 그나마 조금씩 수사가 진전되는 상황이다. 이 잡지가 나올 3월 쯤이면 결론이 날지도 모르지만, 문제의 전시가 열렸던 그 때, 그리고 그에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밀고 당기기는 계속되고 있다. 


이구영의 작품은 이러한 투쟁의 와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즉 그의 작품은 언제 누군가에게 보여질 지에 대한 기약이 없이 막연하게 예술성만을 고려해서 만들어졌다기 보다는, 당면한 현실의 요구에 답하려는 시의적 성격이 강하다. 제작기간도 그리 길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의 머릿속에 온통 휘몰아치고 있는 분노가 작품을 추동했을 것이다. 이구영의 작품은 본격적인 회화라기보다는 만평같은 성격을 가진다. 미술사는 위대한 화가이면서 만평가였던 이들을 적지 않게 기록하고 있다. 고야나 도미에가 그 예이다. 그러나 패로디라는 형식, 기성의 것에 의지하는 기생적 방식은 한계가 있다. 패로디는 비판하고 풍자하면서도 기성관념을 일정부분 인정하기 때문이다. 패로디는 그 스스로 서있기 힘들다. 선재하는 텍스트에 기대는 방식은 소통을 원활하게도 하고 방해하기도 한다. 남성 작가로서 이구영은 이 작업을 할 때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는 ‘유구한’ 전통을 반복했다. 그것은 아마도 무의식적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무의식은 뿌리 깊다. 그래서 더 자연스럽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작용한다. 


작가에게는 불의에 투쟁한다는 ‘진보적’ 의식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정작 구사된 조형 언어는 그렇지 않았다. 언어는 무의식적이다. 결과적으로 이구영의 작품은 보수단체들 외에 또 다른 적대자를 생산해 냈으니, 그것은 이 작품이 ‘여성혐오를 부추킨다’는 여성계의 비판이다. 나 또한 문제의 그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 거부감은 여성계의 반발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이제 뉴스에 그 얼굴만 나와도 거북해지는 누군가가 너무 예쁜 모습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작품 속 여성은 비너스처럼 젊은 여자의 몸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다름 아닌 젊음이다. 이러한 생물학적 기준은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젊은 여성의 몸은 이제 뿌리째 사라져버려야 하는 노쇠한 세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의도가 어떻든 이구영의 작품이 여성의 성적 대상화라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 점이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에 팽배한 여성 혐오는 두 번의 보수정권 동안 더욱 어려워진 경제사정 때문에 남/녀 조차도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한 결과이다. 


여성을 진짜 혐오하게 만든 것은 박대통령이다.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서 나름의 기대를 받았던 그녀는 여성의 위상을 철저히 추락시켰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사적 영역/공적 영역의 구별이 없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그러한 행태가 이 ‘여성’ 대통령에게서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거울의 방이 딸려있는 관저, 즉 철저히 사적인 공간에서 공적 업무를 봤다는 대통령은 퇴임 후를 기약하여 만든 재단에 기업을 압박하여 사적 이익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한 정경유착의 피해자는 민초들이다. 작품 속에서 권력에 알랑거리면서 음모가 스타일로 등장하는 하녀—그러나 최순실을 하녀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그녀는 대통령이 하루에 평균 세 번꼴로 전화를 하며 깊이 의지했던 ‘멘토’같은 인물이기 때문이다—의 모습 또한 극악스럽게 이기적인 ‘아줌마’에 대한 고정관념을 재생산한다. 박대통령 주변에는 자신의 지시만을 따르는 꼭두각시 같은 인물을 제외하고는 공적인 여성정치인이 거의 없었고, 그녀의 통치기간 동안에 여성의 지위가 향상된 것도 아닌 이상, 보다 큰 틀로 이구영의 작품을 본다면 여성혐오라는 오해는 불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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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세계 편집자주 1)  <곧, 바이!> 전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명단에 포함된 일부 예술인들이 ‘표현의 자유를 향한 예술가들의 풍자 연대’와 함께 국회의원회관 1층 로비에서 진행한 전시다. 더불어 민주당 표창원 의원은 전시가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릴 수 있도록 행정적 도움을 주었으며, 전시 관련해서 진행된 ‘곧, 바이! 토크콘서트’에 참여했다.

  

(미술세계 편집자주 2) 세월호가 침몰되어 많은 승객이 배 안에 갇히는 과정이 TV에서 생중계되었음에도, 박근혜 대통령은 뒤늦게 중앙재난 안전대책 본부에 나타나 “다 그렇게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라고 질문하여 논란이 되었다.

 

출전; 미술세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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