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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주 / 영혼과 육체가 만나는 장

이선영

영혼과 육체가 만나는 장

  

이선영(미술평론가)

  

클래이아크 미술관에서 열리는 김명주의 ‘비밀의 형상들’ 전은 도자작품 뿐 아니라 드로잉과 회화가 함께 하면서 겹겹이 싸인 비밀을 암시한다. 2차원과 3차원, 그리고 그 사이의 차원 까지 아우르는 작품들은 거울의 방처럼 서로가 서로를 반영하면서 비밀을 증폭시킬 뿐, 막상 그것을 풀려는 의지는 없어 보인다. 만약 전시부제가 ‘비밀의 형태들’이라면 비밀을 풀릴 가능성이 있지만, ‘형상들’이라면 다르다. 2013년 스위스에서의 개인전 키워드로 쓰기도 했던 형상(figure)은 형태(form)와 달리, 무엇인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므로, 해석될 수도 없는 것이다. 재현이나 표현에 전제된 주체/객체의 이원 항은 김명주의 작품에서 녹아내리며 분리불가능하게 얽혀 있다. 3차원 상에 서있는 단단한 도자 작품은 여러 형태와 색이 거칠게 덧붙여가며 만들어진 모습이 회화적이다. 이러한 회화적인 도자 작품에서 내용물을 안전하게 담아내는 형태는 발견되지 않는다. 






비밀의 형상들 전시전경



부글부글 끓어서 내용물이 다 넘쳐 흐른듯한 모습에는 적절함이 아닌 과도함이 있다. 넘치는 것은 잠시 축제같은 활기를 띄지만, 기괴한 변모(metamorphosis)를 거치면서 아래로의 우울한 흐름을 낳는다. 김명주는 ‘...멜랑콜리하지만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이미지가 좋다. 멜랑콜리한 것은 단순히 우울한 감정이 아닌, 내면의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존재에 대한 상실과 질문, 잃어버린 시간, 어떠한 부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잃어버린 기억들...,’(작가노트)을 말한다. 유약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풀어놓은 작품들은 액체와 우울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미셀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우울증의 세계를 ‘축축하고 무거우며 차갑다’고 말했듯이, 우울은 빗물처럼 눈물처럼 핏물처럼 흘러내리는 것이다. 물론 작품 [생각하는 화분]이나 [조용한 빛]에도 나타나듯, 우울은 정념 뿐 아니라, 사유와도 관련된다. 그러나 사유 또한 한계를 넘어 흐른다.


그녀의 작품에서 흐름은 중력 이외에 어떠한 힘에도 조율되지 않은 채다. 그것은 고정이 아닌 과정 중에 있다. 흙으로 빚어져 고온에 구운 대상이라는 점만이 자연적 흐름을 멈춰주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정은 물감의 흐름을 굳이 조율하지 않는 회화에서도 발견된다. 전시 작품들 각각은 과도하지만 주어진 공간과 중력에 맞춰서 각자의 영토를 구축한다. 시든 화분이라고 해도 화분은 화분이며, 식물이 생육하기 위해 모든 것을 조금씩 갖추고 있는 화분이란 일종의 소우주인 것이다. 벽과 바닥에 흩어져 있는 각각의 작품들이 외딴 섬들처럼 존재한다. 그것들을 연결시켜주는 것은 그것들이 한 작가에게서 나왔다는 사실 하나 뿐이다. 대부분 특별한 배경 없이 한 화면에 하나씩 그려진 형상들은 밖으로 꺼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려져 있는 것은 만들어져 있고, 만들어져 있는 것은 그려져 있다. 명확한 계획 없이 만들어진/그려진 것들에는 공통적으로 우연적이고 파생적인 형상들이 종종 발견된다. 




식물의 몸(앞), ceramic,2017



깨어남(Rêve-il),2016



부분



가령 동양화처럼 그려진 [잎으로부터]에서 자유롭게 그은 선들 사이에서 우연한 얼룩이 또 다른 얼굴로 변모하는 것이 그것이다. 도자 작품에서도 하나의 선은 또 다른 선을, 하나의 덩어리는 또 다른 덩어리를 낳곤 한다. 작가는 여러 작품에서 하나의 형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한’과 ‘그리고’를 연발한다. 울증과 상보적인 관계에 있는 조증은 빠르게 전개되는 이접을 추동한다. 합리적 인과관계와 거리가 있는 이러한 반복적 추가는 비정상과 비정상의 끝인 죽음—프로이트는 반복강박과 죽음충동과의 관련을 주장한 바 있다—을 떠올린다. 육체의 동체를 떠올리는 화분과 그 위의 얼굴이나 머리, 손 같은 형상들은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기괴하게 행렬을 이룬다. 몇몇 작품은 카니발같은 모습이 연출된다. 유기체적인 경계를 넘어서 증식중인 형상들은 죽음에 가까이 있다. 그러나 죽음을 불사하고 왕성한 활동력을 지닌 형상들은 괴로운 종말이 아니라, 끝까지 가야만 누릴 수 있는 열락을 내포한다. 고통을 넘어서야만 도달 가능한 열락은 예술 고유의 영토이다.


김명주의 작품에서 그리기는 만들기를, 만들기는 그리기를 추동한다. 그림에서건 도자에서건 시든 화분이라는 모티브는 공통적이다. ‘비밀의 형상들’ 전은 화분의 변형들이 화분 거치대 같은 나무 탁자 위에 하나씩 놓인다. 그 나무 탁자들은 조형적 대상을 받쳐주는 견고한 반석 같은 좌대의 위상을 가지지 않는다. 작품 [식물이 있는 테이블 2]처럼 다리를 가진 식물도 있지만, 탁자/좌대는 그 위에 놓인 것들의 수동적 상황을 암시한다. 화분 속 식물은 자연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자생적 생물과 달리, 누군가에 의해 이리 저리 옮겨지며 판매되기도 하고 때로 파괴되거나 버려지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누군가의 지속적인 관심과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시든 화분은 그러한 배려로부터 배제된 상태를 말한다. 물론 이러한 배제(또는 면제)는 자유로움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사람이나 태양을 향해 활짝 피어 있어야 할 화분은 방치된 지 오래된 상태이다. 거기에는 십 수 년 전 가족과 일을 뒤로 한 채 아무런 준비도 없이 먼 타국으로 가서 생존과 작업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삶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생각하는 화분 I, 2017



머리 잎, 2016



타국에서의 시간들은 뿌리 뽑힌 자로서의 두려움을 가지게 했다. 유럽에서는 작업 면에서 배움과 전시 등, 적지 않은 성과를 낳았지만, 작가로서의 삶 자체에 원초적으로 존재하는 어려움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우울함을 비롯한 삶의 정념을 담는 것은 자기라는 용기(容器)이다. 한국과 벨기에에서 도자예술은 전공하고 프랑스와 일본에서 전시회도 다수 열어왔지만, 정작 ‘그릇은 잘 못 만든다’고 고백하는 김명주의 작품은 명백한 그릇의 형태로부터 벗어나 있다. 무엇인가를 담기 전에 이미 담겨 있고, 또한 내용과 형식 또한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 화분이라는 모티브는 그릇과의 관련을 말해준다. 물론 이 ‘그릇’은 물리적이기 보다는 심리적인 그릇이다. 그것은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검은 태양; 우울증과 멜랑콜리]에서 언급했던, ‘자아의 배설물과 추락에서 생기는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김명주의 시든 화분은 정념에 의해 다 타버려 시체와 쓰레기가 된 어떤 것— ‘슬픔 속에서 나와 뒤범벅이 되는 폐기물’(크리스테바)--을 담는다. 


깊은 슬픔에 빠지게 했던 잃어버린 어떤 것, 그러나 표상될 수 없는 어떤 것을 담아내려 하는 것이다. 이 깊은 우울은 가족을 포함한 사랑하는 이들과의 분리임을 추측할 수 있다. 동시에 이러한 분리는 작업을 추동하는 원동력이 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어머니로부터 분리된 아이의 슬픔에 대한 심리적 과정을 생애의 원초적인 사건으로 본다. [검은 태양; 우울증과 멜랑콜리]에 의하면, 어린아이는 생애의 첫 몇 마디를 내뱉기 이전에 이미 치유할 수 없을 정도의 슬픔에 빠진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절망적으로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인데, 이는 아이에게 우선은 상상 속에서, 그다음에는 낱말들 속에서 다른 사랑의 대상들과 함께 어머니를 다시 찾으려 노력하도록 마음먹게 한다. 그러나 모성과의 분리는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자립과 관련되는 사건이기에 필연적이다. 상실은 인정하는 것은 괴롭다. 그래서 상실한 자는 ‘언제나 다른 곳에 있는 이 불가능한 사랑과의 결합’(크리스테바)을 꿈꾼다. 




전시전경



식물이 있는 테이블 II, ceramic,2016



조용한 빛(오른쪽), ceramic,2015



이 전시에는 상처 난 어머니의 초상을 비롯하여 어머니와 그 관계에 대한 잠재적 형상이 적지 않게 출몰한다. 특히 핏빛으로 얼룩진 듯한 작품 [Apparition]이 그러하다. 그것은 ‘어머니의 상실은 생물학적이고 정신적인 필요이고 자립화의 첫 단계’이기에 ‘모친 살해는 우리 자신의 개체화에 필요 불가결한 조건’(크리스테바)임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어머니의 품에 절망적으로 매달려 있으려는 아이는 분리의 불안 및 슬픔이 전달된다. 심리적이고 육체적으로 떨어지기 싫은 대상을 부정해야 하는 현실은 나와 일체화된 대상의 부정에 의해 야기된 ‘대양적 공허’(크리스테바)가 흘러넘친다. 불어에서 바다(La mer)와 어머니(La mere)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또한 이러한 관계는 생명이 비롯된 것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점에서, 삶/죽음의 긴밀한 호환성을 말해준다. 김명주는 생애의 어떤 시기에 예기치 못한 이별을 했지만, 그녀의 작품들은 단순히 자서전적인 주석이 아니다. 실제로 정신분석학에서 논의되는 모성과의 이별 및 살해 같은 (정신분석학적)서사는 모년 모일에 실제 벌어진 사건이 아니다. 상처와 치유를 말하는 정신분석학은 실증적 과학이 아니라 해석학이다. 


외상은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머나먼 과거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도 없다. 김명주의 작품은 정신분석학에서 주장된 인간의 보편적 조건을 말한다. 약간 솔직한 작품은 그저 자기만을 표현할 따름이지만, 더 깊은 솔직함은 이미 자신을 초월하고 타자들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김명주의 작품은 철저히 작가 개인으로부터 나왔지만, 결코 사사롭지는 않다. 관객 앞에 이런 저런 형식으로 서있는 것들이 잠재적인 (자기)초상이다. 축 처진 엽맥은 아래로 늘어진 머리털과 중첩된다. [잎으로부터] 시리즈에서도 식물의 잎을 이루는 섬유소와 머리털의 흐름이 조응한다. 잎과 긴 머리의 여인은 가면처럼 떨어져 있다가도 콩과 콩깍지처럼 하나가 되기도 한다. 그것이 인간이라면 식물의 요정 같은 것이 아니라, 무기력한 ‘식물인간’이다. 무엇인가를 담는 그릇으로 비유되는 몸은 폐허가 되어있다. 토해낼 것을 다 토해내면 차라리 시원하듯이, 김명주의 작품은 고통과 카타르시스를 연결한다. 




Apparition, Acrylic on canvas, 2017



잎으로부터, 2016



작품 [식물의 몸]은 두 개의 몸통이 붙어 있는 듯한 모습이고, 얼굴 부분에 수많은 얼굴이 있는 모습이 분열적이다. 웃는지 우는지, 웃다가 우는지, 또는 울다가 웃는지 명확히 읽혀지지 않는 얼굴이다. 김명주의 작품은 ‘영혼과 육체가 만나는 장소’(푸코)인 열정(때로 광기와 구별되지 않는)의 장(場)이다. ‘이성의 이면이 광기’(푸코)이고 그 반대도 성립된다면, 하나의 장면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관객은 작품을 돌아가면서 봐야 그 다양한 면모를 다 볼 수 있다. 동물에게 어울리는 단어인 ‘몸’은 그 분열적 존재로부터 발산되는 에너지를 보여준다. 개체는 시들면서 내재된 에너지를 밖으로 풀어헤친다. 작품 [깨어남]은 여러 형태들이 한데 모여 녹아내린 듯한 모습이다. 여름에 빨리 녹지 말라고 첩첩이 쌓아주는 빙수같이 복합적인 요소들이 시든 화분 위에 아슬아슬하게 얹혀 있는 듯하다. 맨 위 왕관을 쓴 듯한 하얀 얼굴이 기괴하게 웃고/울고 있고 요소마다 작은 얼굴들이 박혀있다. 


작품 [머리 잎]은 시든 잎이자 머리카락 같은 형상이며 벽에 붙어 있다. 마치 벽의 구멍에서 뭔가 흘러나오는 듯한 느낌도 준다. 작품 [생각하는 화분]은 작품명 그대로 차분한 분위기지만, 아래로의 우울한 흐름은 여전하다. 그것은 뒤러의 작품 [멜랑콜리아](1514)처럼 사유와 우울을 연결시킨다. 턱에 손을 고이고 있는 형태는 불상의 아름다운 손놀림을 떠올리며, 작가 말대로 [반가 사유상]같은 형상이 중첩되기도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유는 광기와 연결된다. 너무 많이 생각하여 화분이 두 개가 겹쳐진 것 같은 모습의 형상은 거대한 아가리처럼 위로 벌려진 머리를 가진다. 이것은 과도한 사유가 합리보다는 광기를 일으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광기는 새로움 또는 차이를 위해 타자를 한껏 받아들여야 하는 예술에서 재난이 아니다. ‘사유의 과제는 자신이 사유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사유하는데 있다’(레비나스)는 역할을 광기가 해준다면 말이다. 




식물의 눈,2016



식물의 눈,2016



시듦의 힘, 2016



작품 [생각하는 화분 2]는 화분의 시든 잎이 머리카락이 되어 얼굴 전체를 뒤덮고 만다. 가시 면류관을 쓴 예수의 두상을 떠올리는 작품 [조용한 빛] 또한 사유와 멜랑콜리가 연결된다. 눈물인지 핏물인지 알 수 없는 액체가 흐르는 하얀 얼굴과 조응하는 것은 머리카락처럼 아래로 내려 뜨려진 검은 흐름이다. 신학적 사고에서 ‘신은 최상의 존재로 탁월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김명주의 작품에서는 ‘존재와 다르게’(레비나스) 있다. 성스러움이 천상에 존재하는 기독교적 사유에서 아래를 향한 흐름은 추락을 떠올리며, 이는 추락한 것들이 원래 유래한 위를 향한 운동을 낳는다. 이리저리 뜯겨진 머리 위의 수직적 형상들은 빛을 향한 승화의 움직임이 녹록치 않음을 알려준다. 작품 [식물의 눈]은 이파리 같은 형상이 가면처럼 뒤의 충혈 된 눈을 가진 얼굴 앞에 놓인다. 그것은 ‘영혼이라는 사물화하지 않은 얼굴’(레비나스)로 자신을 드러낸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로부터 윤리를 끌어내지만, 예술가는 (정형화되지 않은)미학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김명주의 작품 속 붉은 색은 식물의 푸른색과 대조되는 것으로, 식물을 몸으로 생각하면서 동물성을 부여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동물은 변온동물을 빼고는 체온을 유지하면서 자기 항상성을 유지한다. 반면 식물은 차갑다. 붉은 빛 동물적인 열기는 식물을 시들게 할 것이다. 동시에 붉음은 창백한 식물을 생생한 욕망으로 충전시키고, 넘치는 욕망이 향하는 죽음을 예언한다. 작품 [식물의 눈]은 화분 아래의 부분은 붉게 시들어 있지만 윗부분은 아직 꼿꼿한 푸르름을 간직한다. 뒤에 숨어 있는 눈은 다른 작품처럼 피눈물을 흘리기 보다는 관객을 멀뚱히 바라본다. 작품 [시듦의 힘]은 거의 등신 크기로 서있는 초록 덩어리이다. 잎과 줄기 등이 체계적으로 갖춰진 고등식물보다는 녹조류같이 생긴 이 원초적 덩어리는 외부 자극에 대해 좀 더 융통성 있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 안에 있는 타자들의 힘을 제어하지 않는 김명주의 작품들은 그렇게 자신들만의 어법으로 인간존재가 피할 수 없는 태생적 트라우마와 그 이후를 말한다.

  

출전; 클래이아크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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