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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정 / 풀려나오는 존재의 실타래

이선영

풀려나오는 존재의 실타래

  

이선영(미술평론가)

  

갤러리 피아룩스에서 열리는 고은정의 ‘the air-감춰진 것’전의 작품들에는 고요한 가운데 술렁임이 느껴진다. 이러한 정중동의 느낌은 정지된 매체인 그림이 바랄 수 있는 최상의 효과 중 하나일 것이다. 어디선가 풀려나와 화면 가득히 흐트러져 휘날리고 있는 실타래 같은 선들은 바다, 대지, 숲, 하늘같은 것들로부터 발산되어 나오는 기운처럼 보인다. 이러한 기운은 단순한 대상이나 인간들이 만들어낸 대부분의 얍실한 물건(상품)에서는 나오기 힘들다. 여기에서 그림은 한갓된 가상이길 그치고, 자연적 실재에 근접할 만큼 파고드는 매체가 된다. 고은정의 작품에 실재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레비나스가 [신, 죽음 그리고 시간]에서, 하이데거의 공헌 가운데 가장 특기할만한 것은 ‘존재’를 ‘존재하다’라는 동사의 새로운 울림으로 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즉 ‘존재하다’는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동사이고 존재의 활동이라는 것이다. 존재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활동일 때, 그것을 정확히 포착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What makes the forest, acrylic on canvas,89.4x130.3cm, 2013



What makes the forest, oil on canvas, 162.2x260.6cm, 2017



존재는 자명한 것이 아니라, ‘망각당하거나 망각에 내맡겨지고, 스스로 은폐되어’(레비나스) 있다. ‘the air-감춰진 것’ 전은 이렇게 감춰진 것을 드러내는 활동이다. 이러한 활동에서 요구되는 것은 막연하게 주체와 객체가 합일되는 신비적 의식이 아니다. 고은정의 작품은 낭만적 숭고미에 호소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의 과학자의 활동에 근접할 만큼의 집요한 관찰의 결과이다. 작품 제목을 보면 숲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지만, 고은정의 숲은 대상이 아니라 과정으로 와해되어 있다. 작가에게 관찰은 무엇인가 확실히 고정시키기보다는 불확실성을 더욱 늘려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역설적 상황은 ‘불확정성의 원리’(하이젠베르크)같은 현대물리학의 이론이 아니더라도, 과학사에서 종종 발견된다. 가령 과학사에서 태양이 ‘가장 순수하고 명료한’ 원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불순하고 얼룩투성이라는 사실’(갈릴레오)이 발견된 것은 조화로운 세계에 대한 이전 시대의 상징주의가 아니라, 과학자의 치밀한 관찰 덕분이었다. 


이데아같은 명료한 관념의 세계를 상징해왔던 태양은 과학적 관찰에 의해 활화산처럼 활동하는—태양풍처럼 태양에서 품어져 나온 원소들은 지구의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는 전파들에 영향을 준다--실재로 밝혀진 것이다. 고은정이 지척에 두고 자주 들르던 숲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그녀의 작품에는 자연처럼 지속적인 흐름이 있다. 지속하는 자연, 즉 만물이 비롯되고 다시 돌아갈 자연은 무한하다. 공간을 가득 채우는 에너지, 혹은 기(氣)에 관련된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1889)가 있다. 그 작품에서 짙푸른 달밤의 하늘에 휘몰아치는 선이 굵은 밧줄이라면, 고은정의 그것은 극세사(micro fiber)에 해당될 것이다. 고은정의 작품에는 ‘만물은 흐른다’는 자연철학이 깔려 있지만, 원시적 애니미즘이나 물활론, 낭만주의적인 질풍노도는 아니다. 새벽이나 저녁 무렵을 떠올리는 푸른 색조가 많은 작품에는 풍부한 상징을 낳을 고대적, 또는 근대적 신화 대신에, 기계로 측정하면 수치가 나올법한 냉랭한 현실이 있다. 




What makes the forest, oil on canvas, 32.5x90.9cm, 2016



A cold moon, oil on canvas, 31.8x40.9cm, 2016



푸른 색 계열이 지배적인 작품은 언뜻 단색조의 추상 회화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단순한 관념이나 감수성,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철저히 실제의 풍경을 바탕으로 한다. 작품 제목으로도 종종 암시되어 있는, 그곳에 가보지 않고는 그릴 수 없는 고은정의 풍경에는 실재하는 공간의 두께가 있다. 그러나 그 실재는 단단한 출발점이 아니라, 언제 도달할지 모를 도착점에 있는 불안정한 것이다. 그러한 미지의 대륙에 도달하기 위해 그 수많은 선들이 촉수처럼 시공간을 더듬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바람처럼 느껴지지만 볼 수도 잡을 수 없는 것을 현실화시키려 한다. 우리의 일상어에서 ‘뜬구름 잡는다’는 비아냥이 있지만, 거의 그 수준이다. 몽상적이고 신비하게까지 보이는 화면에 가득한 이런저런 흐름들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초능력자만 볼 수 있는 비전인가. 그 비슷한 예로 고지에서의 체험을 들고 싶다. 드높은 곳에 오르다 보면 평지에서 저 멀리 뭉게구름으로 보이던 대상을 실제로 관통하는 순간이 도래한다. 그 때 ‘구름’이라는 관념적 대상은 촉촉하고 서늘한 기운으로 우리를 휩쌀 것이다. 


구름의 형태를 만들던 경계는 사라지며,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직면한 주체의 경계 또한 불안정해진다. 쇄도하는 원소와의 얽힘과 뒤섞임만 남는다. 고은정의 작품은 주체와 객체의 상호적 변화를 전제한다. 이때 주체는 객체에 대하여 자신을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열리게 된다. 자신의 기원을 자신으로 삼는 유아(唯我)론은 지양된다. 레비나스는 인간을 단순히 육화한 혹은 개별화한 보편적 이성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벗어나며 자신의 존재를 비우고 자신을 뒤집는 그런 존재의 주체성, 즉 ‘존재와 달리’ 있는 주체성을 강조한다. 고은정이 붙잡을래야 붙잡을 수 없는 자연(그리고 그림)과 끝없이 직면할 때, 작가는 ‘자아로서의 주체’, 즉 ‘스스로를 유지하고 스스로를 소유하는 자’로서의 특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림을 시작하는 것은 작가지만, 그것이 언제 끝나는지는 반드시 작가의 결정에 맡겨있지는 않다. 그래서 고은정의 작업실에는 수년간 지속되고 있는 작품들이 세워져 있곤 한다. 그림은 작가와 떨어져 스스로 무르익으며, 때를 통지하고 주체를 소환한다. 작업은 부지런한 행함만큼이나 하염없는 기다림을 요구한다.  




A cold moon, oil on canvas, 53x33.4cm, 2016



The way to go to Paju, arcylic on canvas, 72.7x 60,6cm, 2013



고은정의 작업은 의식적으로 이끌어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율적이지 못한 어떤 과정에 열어 놓는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타자와의 관계 속에 타율성이 있다. 이러한 타율성은 소외도 아니고 노예화도 아니며 유일성의 상실도 아니다. 단지 달라짐이다. 고은정은 그러한 변화에 민감하다. 자연과 작품이 유동하는 만큼이나 자신 또한 그러하다. 레비나스는 오만이란 ‘자기 속에서 안정을 구하는 데서 성립한다’고 비판한다. 레비나스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작가는 ‘세계의 주인이듯 그자신의 주인’이 되어 ‘모든 것에 앞선 듯한 시작’을 외치는 주체를 포기한다. 남는 것은 자연과의 ‘얽힘에 연루된 균열된 주체’이다. 고은정의 작품은 환상적으로 보이지만 현실체험과 맞닿아 있다. 풍경에 바탕 한 작품들은 극적이긴 하지만, 이정표가 있는, 알아볼 수 있는 명소는 아니다. 보통 가까운 거리에서 갈 수 있는 장소일 뿐, 일부러 멋진 풍경을 찾아다니지는 않는다. 작가는 한 자리에서 오래 관찰하며, 가봤던 곳도 여러 번 찾아간다. 


그러한 시간적 투자—레비나스는 인내라고도 표현한다—만이 변화를 낚아채게 할 것이다. 작가가 자연에서 직접 보고 느낀 결과물은 가상이나 환상, 상상과는 거리가 있다. 작가가 대면한 현실은 고정되지 않고 공기처럼 움직인다. 그러나 공기 배후의 것들 또한 공기처럼 유동적이다. 그것들은 가까이 다가가면 그만큼 더 멀리 달아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고정된 대상의 재현이 아닌, 과정적 요소들로 제시되었다. 냉정한 관찰자로서의 태도는 재현 보다는 재현을 전복시키는(또는 초과하는) 또 다른 감성을 낳았다. 그것은 경이로움이다. 그것은 자연이라는 대상을 괄호치고 자아의 환상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더 자세히 관찰한 결과이고, 작품은 그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라 할 수 있다. 고은정은 풍경을 만드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작가는 원래 있던 것을 계속 보면 조금씩 달라지는, 초자연적일지도 모르지만 존재하는 것이 드러나는 느낌을 받는다. 고은정의 작품에서 ‘이것은 무엇을 그린 것인가’라고 물을 때 ‘이것’에 해당하는 것, 즉 몸통들은 두툼한 공기층 뒤에 있지만 감춰져 있고, 이따금 공기의 베일이 살랑거리거나 요동칠 때 희미하게 암시되곤 한다. 




The way to go there, oil on canvas, 65x90.9cm, 2016



Everything goes by, oil on canvas, 65x90.9cm, 2016



눈에 확실하게 박히는 것은 없지만, 작품 제목과 연동해서 오래 주시하다 보면 달이나 숲 같은 실루엣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술렁임이나 분위기의 근원이 객체인지 주체인지는 불확실하다. 아마 둘 다 일 것이다. 자연이 너무 멀게 느껴진다면 그것에 비견할 만한 인간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인이나 성자, 또는 특별한 어떤 사람에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그렇다. 그러나 고은정은 인물을 그리지는 않는다. 비록 어떤 작품은 출렁이는 머리카락이나 빽빽한 털, 체취나 입김 같은 것이 느껴진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녀의 그림에는 특정 시공간의 좌표계를 잠시 변화시켰을 특정 인물, 즉 작가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 어떤 계에 진입 한 후 작가는 그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주시한다. 그곳에 진입한 순간부터 미세한 상호작용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한 작용은 보통 사람이라면 감지하기 힘든 미시적 차원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미시적 사건들이 쌓이고 쌓여 거시적 변화를 만들어낼 것이다. 


영원히 회귀하는 반복적 움직임이 차이를 만들듯이 말이다. 작은 차이가 변화의 문턱을 만든다. 앞서 말했듯이, 이 변화의 물결에는 주체 또한 포함한다. 그것은 멈춤이 아닌 작동 중으로서의 세계이다. 노동이나 인식 등, 주체의 개입에 의해 변화했을 객체가 아닌, 하나의 장에서 벌어지는 원소들 간의 이합집산을 말한다. 입자이자 파동일, 물질이자 에너지일 요소들은 쉼 없이 내뱉고 끌어당기는 흐름을 만들어낸다. 작품 [What makes the forest](2013-2017) 시리즈는 숲과 만나 숲이 되었을 작가의 체험이 드러난다. 그 작품 앞의 관객은 숲이라는 두툼한 자연의 실재로부터 풀려나오는 에너지에 감싸인 작가의 체험을 공유할 수 있다. 누군가의 지각과 기억이 쏟아 넣어진 작품에서 최초의 그것에 상응하는 지각과 기억이 파생된다. 작가의 체험이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 생성으로 소급된다. 이러한 과정은 그녀의 작품이 소통될 때 마다 반복될 것이다. 우리는 그 단계에서만이 ‘무한’이나 ‘예술의 영원성’ 따위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Willow tree, oil on canvas, 91x116.8cm, 2016



숲의 나무들로 추정되는 희미한 기둥들 사이로 흐르는 기운들은 수많은 나뭇가지나 뿌리의 흐름들과도 조응할 것이다. 자연을 대상이 아닌 원소처럼 표현하는 방식 속에서 소리와 향기도 느껴진다. 고은정의 작품에서는 달 풍경 역시 원소로 흩어지고 휘몰아친다. 작품 [A cold moon](2016) 시리즈에서 관객은 달을 약간 밝은 점 정도로 인식할 수 있을 따름이다. 푸른 바탕에 명도와 밀도를 다르게 하는 하얀 타래들이 흐릿한 중심을 싸고돈다. 냉기가 있는 작품은 눈가루가 흩날리는 듯하다. 작품 [The only place we know](2014)처럼 밝은 작품은 구름이나 바람이 지나가는 하늘같은 느낌이며, 작품 [Those things that are there](2016)처럼 어두운 작품은 선의 흐름이 더욱 두드러진다. 대상보다는 그 대상을 감싸고 있는 두터운 공기층에 더 관심을 가지는 고은정의 작품은 어느 것이든 고정된 것이 없어서, 볼 때 마다 다른 느낌이다. 자연의 에너지 그 자체를 표현하는 작품들에서, 그 에너지에 무엇이 실려 오는지는 매번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연이 과정 중에 있고 그림 또한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그것을 감지, 또는 인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때 우리는 공간보다는 시간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세한 차이만이 무한한 계열을 이루고 있는 고은정의 작품은 공간에 한가득 풀려나온 시간성을 강조한다. 타자에 한껏 열어놓은 자아의식을 가지는 고은정의 작업은 시간이 ‘동일자 안의 타자’(레비나스)임을 보여준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시간은 변화하면서 흘러가는 성질들의 형식’이다. 시간은 직선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직선이라고는 발견되지 않는 고은정의 작품에서는 유동적인 시간이 있다. [신, 죽음 그리고 시간]에 의하면 베르그송에게 직선적 시간은 시간의 공간화인데, 이것은 지성의 소산인 물질에 작용을 가하기 위한 것이다. 반면 근원적 시간은 지속이라고 불린다. 이 지속은 생의 약동으로 사유된다. 그것은 또한 무한과의 관계, 포함할 수 없는 것과의 관계, 더 나아가 미래를 향한 자유로 말해진다. 여기에서 미래는 열리며, 따라서  매 순간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는 과거의 규정된 것을 다시 문제 삼을 수 있다. 




Those things that are there, oil on canvas, 89.4x130.3cm, 2016



The only place we know, acrylic on canvas,112x162.2cm, 2014



고은정의 작품에서 시간의 궁극적인 메타포는 흐름이다. 거기에는 사물들의 유출과 운동이 있다. 난류처럼 복잡한 흐름을 보여주는 작품 [The way to go to Paju]( 2013), 색을 달리 한다면 마치 산불이 난 듯한 세찬 기운이 느껴지는 [Everything goes by](2016), 물살처럼 보이는 작품 [The way to go there](2016)는 어디론가 가지만 시점과 종점이, 그리고 그 방향성조차 불확실한 여정을 표현한다. 미세한 것들이 쌓이고 움직이는 그것은 수많은 시공간이 겹쳐진 것이다. 그것은 순간이 아니라 지속이다. 지속은 재현의 동일성에 갇히지 않는다. 지속은 동일성을 넘어서고 그것을 파열시킨다. 레비나스는 내 안에서 동요를 일으키는 이런 방식을 생기(animation)라고 말한다. 우리는 타자에 의해 생기를 띤다. 은총같이 다가오는 타자와의 우연한 만남은 자아의 경계를 넘어서게 한다. 고은정의 작품에는 이렇게 경계가 와해되는 시공간이 있다. 작가는 그 시공간을 상상하기 보다는 기술(記述)한다.  예언하기 보다는 증언한다. 예감하기 보다는 실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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