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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교 / 쇠조롱의 역설

이선영

쇠조롱의 역설

  

이선영(미술평론가)

  

최덕교의 작품에 등장하는 새장은 집처럼도 보이고 얼굴처럼도 보인다. 조각의 전통에서 관객과 마주 서 있는 형태는 인간이라는 은유가 있다는 점에서, 새장은 인간이나 얼굴로 보일 수 있다. 그것은 캔버스 한가운데 있는 그 무엇이라도 인간의 초상을 떠올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매체의 전통은 어느 정도 형태의 의미에 대한 방향을 결정짓는다. 가령 의자 위에 놓인 새장이 마치 사람이 앉아있는 듯한 작품 [새장-의자]는 새장이 인간을 비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술은 빈 새장과 빈 의자의 조합처럼 부재하는 것을 재현하려 한다. 집은 오랫동안 자아의 상징이었다. 상징적 우주 속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소통하는 주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인 언어의 산물이다. 언어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지만,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선험적 구조로서의 언어는 개인을 길들이고 억압하곤 한다. 진부함과 반복에 맞서 새로움과 이질성을 창출할 예술은 이러한 구조로서의 언어에 도전한다. 


그러나 예술 역시 언어이므로 구조와 충동간의 관계가 중요하다. 가령 광기 그 자체는 예술이 될 수 없다. 광기가 예술이 되려면 언어를 통과해야 한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성적 충동은 언어를 변형시킬 수 있지만, 언어자체를 무화시킬 수는 없다. 언어는 인간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 조건이 너무 견고하면 인간은 ‘언어의 감옥’(프레드릭 제임슨)에 갇힌다. 그것은 때로 형식주의로 흐르곤 했던 근대의 문예사조사에서 발견된다. 정보혁명을 통해 코드로의 환원이 전면화 되는 현대에도 보이지 않는 감옥은 편재한다. 최덕교의 작품에서 구조는 새장으로 나타나며, 그 안팎으로 원초적 현실이 유동한다. 금속이나 돌같은 고전적 재료를 주로 쓰는 조각 작품에서 이 유동적 현실은 일순간 고정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가 있다. 그 작품에서 집의 비유는 작은 새장부터 신전이나 궁전에 걸쳐있다. 무대 또는 건축적 공간을 구성하는 재료로 금속 뿐 아니라 돌도 활용된다. 


작품 속 새장이 얼굴처럼 보이는 것은 새가 드나드는 입구가 벌린 입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브론즈 작품 [새장-슬픈 입술]은 그 제목부터 새장의 입구가 입이라는 은유이다. 먹기도 하고 말도 할 수 있는 입은 안팎 사이의 왕래가 가능한 소통 창구이다. 먹는 것만큼이나 말하는 것은 인간의 조건이다. 인간은 자연 뿐 아니라, 상징적 우주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인류학부터 정신분석까지 광범위하게 쓰이는 개념인 상징적 우주는 언어를 포함한 인간 사회의 많은 형식을 규정한다. 상징적 우주는 인간 안팎에서 법으로 작동한다.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모를 법을 따라야 하는 인간은 자유롭지 않다. 최덕교의 작품에서 사각형 입은 동그란 그것보다 더 경악스럽다. 그 경직된 형태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말이 아니라, 비명을 지르다가 그대로 굳어버린 짐승같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표정이 있는 그의 작품은 보이지 않는 깊은 목구멍 속으로 밖으로 빠져 나가야할 비명 소리가 되감겨 들어가는 듯하다.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 못나가거나 안으로 되돌아오는 현상은 그로테스크하다. 미학에서 그로테스크는 해결되지 못한 갈등과 관련된 개념으로, 이러한 갈등은 경계선 상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최덕교의 작품에서는 새장이 그러한 경계다. 이 경계에 문이라는 또 다른 경계가 있다. 그의 작품에서 문은 상당기간 다시 나올 수 없는 감옥같은 곳을 향한다. 대부분의 ‘새장’의 내부가 불투명하기에 그러한 불길한 인상은 강화된다. 작가가 작품 제목의 일부로 쓰는 ‘새장’은 일단 새의 집이지만, 근대화의 과정에 대해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관료제의 쇠조롱’이라는 표현을 쓴 이래, 계몽의 부정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보를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기도 했다. 그것은 전 세계가 공유하는 보편적인 과정이 되었다. 이러한 보편적 과정이 자유와 평화를 낳았는지 억압과 전쟁을 낳았는지의 여부는 의문에 부쳐져 있다. 근대에 대한 반성적인 거리감을 가지게 된 시대에 이러한 의혹은 더욱 강해진다.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몰려든 근대에 주체의 자유는 공공의 질서를 위해 제한되어야 했다. 부자유를 안겨주는 질서는 진보를 가능하게 할 것이기에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유의 남용에 의해 받게 될 위험으로부터 보호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증대하는 양극화는 무엇을 위한 진보이고 양보인가를 불확실하게 한다. 정당한 제한은 부당한 압력으로 다가온다. 많은 비판이론가들이 주장했던 ‘계몽의 역설’(막스 베버)이다. 작가는 ‘새장이라는 오브제를 변용하여 구속과 속박, 그리고 자유라는 내용 속에서 현대인의 새로운 꿈을 표현하고자 하였다’고 말한다. 최덕교의 작품 속 새장과 함께 등장하는 새들은 자유를 떠올린다. 새는 부재하지만, 새장이 뭔가 넘쳐흐른 흔적으로 ‘오염’ 되었을 때 틀과 그 틀을 벗어나려는 어떤 것과의 길항관계를 증거 한다. 새장은 자체의 존재보다는 관계, 즉 경계로 다가오며 경계에서 일어나는 사건 흔적들로 점철된다. 


경계나 흔적들은 절대적 자유도 절대적 구속도 없음을 알려준다. [새장-흔적]은 철사로 된 새장 위에 한지를 붙여서 만든 작품이다. 정방형 새장 살에 붙어 있는 우툴두툴한 형태는 그곳을 들고나고 했던 많은 존재, 또는 반복적 행위의 흔적이다. 관록 있는 쇠창살은 존재의 영원한 조건처럼 보인다. 브론즈 작품인 [팽창]은 맨 처음 반듯했던 것이 내부로부터 발원하는 어떤 힘에 의해 부풀어 오른 모습이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부패나 기타의 사건들은 돌이라는 육중한 재료로 강조된 밀폐감으로 폭발 직전의 상황이다. 작품 [새장-8601(궁전)]은 새장 바깥으로 범람하는 것을 표현한다. 대칭형의 구조 사이를 비죽비죽 흘러넘치는 것은 위기감을 준다. 작가는 이 넘치는 무엇에 구체적 얼굴을 부여하기도 한다. 작품 [새장-8701(갈등)]에서 비좁은 새장 바깥으로 머리를 내민 것은 반듯한 구조들에 억눌려 있던 야수적 속성을 말한다. 


자연에 속했던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우뚝 섰을 때 억압해야 했던 것은 자기 안의 자연, 즉 동물성이었다. 인간으로서 그것은 의식에 의해 억압되는 무의식, 정신에 의해 억압되는 몸 등을 떠올린다. 새장 옆구리로 새들이 나오는 작품 [새장-평화메시지]는 동물성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홉스)를 연상시키는 늑대같은 동물이 아니라,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언제부터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언어에서 ‘비둘기파/매파’ 할 때 그 의미는 분명하다. 작품 [새장-고독]에서 창살 바깥으로 넘치는 것들은 아래로 흘러내린다. 빛에 반짝이는 액체적인 그것은 땀과 눈물이다. 몸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범람하고 흘러내리는 것들은 ‘문명화 과정’(엘리아스)에 의해 속속들이 감추어졌지만, 그것이 여전히 작동되고 때로 긍정적인 힘을 발휘하는 분야는 예술이다. 이전시대에 이러한 범람이 이루어졌던 주요한 장은 종교였다. 


종교는 심리적 육체적 파토스가 분출하는 카타르시스의 순간을 의례에 활용하곤 했다. 새장과 함께 있는 건축적 구조는 새장을 집이자 자아로 비유한다. 새장과 건축적 구조, 그리고 그 위에 새장으로부터 벗어나는 듯한(또는 돌아오는 듯한) 새의 날개 짓이 있는 작품 [새장-궁과 한]은 구조 속의 구조이다. 뾰족 지붕 같은 구조 안의 새장이 등장하는 작품 [새장-초당풍경] 역시 구조 속의 구조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구조는 새와 구름들이 자유롭게 들고나는 보다 유연한 구조로 다가온다. 청동과 화강석이 함께 사용된 작품 [새장-정원에서] 새장은 야외의 테이블에 놓인 소풍 바구니 같은 모습이다. 300x250x700cm의 거대한 크기의 작품 [새장-꽃밭에서]는 그 안에서 날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새장이다. 건축적 스케일의 공간이 있는 이 작품의 상층부에는 인간은 물론 구름 같은 형태도 들고난다. 그래도 여전히 새장은 새장이다. 그것은 억압을 억압으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편재화 된 구조를 예시한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16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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