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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순 / 나를 보여주지 않는 거울

이선영

나를 보여주지 않는 거울

  

이선영(미술평론가)

  

김필순의 작품 속에서 여러 방향으로 촉수를 뻗으며 증식하고 때로 화려한 꽃을 피우기도 하는 생명체들은 인공과 자연이 중첩된 제3의 존재다. 여기에서 기계와 유기체는 중첩되어 있다. 우주를 시계로 간주했으며 동물은 물론 인간까지도 기계와 비유한 데카르트의 시대 이래로 생명과 기계 사이의 비유는 끊인 적 없었지만, 그 가능성이 상상을 넘어서 현실화의 가능성으로 다가온 것은 생명 또한 본격적으로 정보화, 산업화되기 시작한 20세기 이후일 것이다. [CHANNEL-소통]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작품들의 겉모습은 선인장이지만, 그 내부는 식물의 세포나 기관 대신에 복잡한 회로도로 가득하다. 흑백과 컬러로 여러 겹 중첩된 회로도들은 선인장 형태의 입체 안팎을 모세관처럼 둘러싸면서 정보와 에너지를 주고받는다. 상호간의 링크들로 복잡한 그물망은 살아있음에 대한 비유다. 섬세한 그물망은 수동적으로 나열될 뿐인 장식적 패턴을 넘어서 있다. 


방사하는 촉수는 빛이 발하는 듯한 발광체의 형태이며, 이 유기체-기계가 작동 중임을 암시한다. 선인장의 내외골격을 따라 배열된 회로도는 물질감이 최소화되어 있는데, 그것은 비트로 바뀐 정보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선인장의 다육질은 컴퓨터 네트워크 같은 정보공간이 되었다. 컴퓨터를 발명한 로버트 위너는 ‘정보를 받고 또 사용하는 과정은 외부환경의 우발성에 대비해서 적응하고, 또한 환경 속에서 효과적으로 생을 영위하는 과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단색으로 표현된 바탕에 명확한 외곽선으로 둘러진 선인장의 형태는 생명체의 특징인 항상성을 보여준다. 즉 이 기계-생명체는 자신이 놓여 진 환경과의 구별을 통해 조직된 것을 붕괴하고 의미 있는 것을 파괴하려는 경향에 대항한다. 물론 완전한 항상성은 생명체에게는 죽음에 다름없기에, 내부와 외부를 통하게 하는 촉수들이 존재한다. 촉수들은 생명체를 감싸는 막과 같은 것으로, 안팎의 소통을 통해 생존을 가능케 한다.  


단색의 배경 위에 드러나는 회로도는 투사된 자연 그것들은 자연의 외관을 넘어서 자연을 구조적으로 모방한다. 구조가 파악되어야 기능을 모방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적 모방을 통해 생산과 진보가 가능하다. 반투명하게 내부와 외관을 보여주는 화법은 뼈대부터 자연을 재현하려 한다. 미술사에서 이러한 단계를 수행한 것은 구성주의였다. 김필순의 작품에는 유전자의 관점으로 인간을 보는 것같은 구성주의의 관점이 있다. 수많은 생명체들 중에서 작가가 선택한 선인장들은 그 생태도 상징적이다. 선인장은 아래에 뿌리를 두고 줄기와 잎을 가지는 전형적인 식물이기 보다는, 꺽꽂이처럼 기관으로부터 기관으로도 증식할 수 있다. 이러한 증식의 방식은 싹을 틔우거나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없는 환경에서 유용하다. 그것은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 관계에 기초한 증식이 아니라, 부분에서 부분이 생겨난다. 그것은 부분과 전체라는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연결망이다. 


횡적인 연결망에서 접속은 보다 유연하다. 그것은 리좀적이고 유목적인 방식으로 확장된다. 김필순의 작품에서 푸른색, 분홍색, 노란색 등 평평한 단색을 배경으로 한 선인장들은 여러 방향에서 또 다른 선인장으로 자라난다. 꼭대기 뿐 아니라 허리춤에서도 덩어리들이 증식한다. 하얀 바탕의 아래 화면에 노랑 선인장 머리들이 놓여있고, 검은 바탕의 위 화면에 파란 선인장들 위가 잘린 가로로 길게 제작된 작품의 경우, 유기체-기계는 화면의 한도를 넘어서 확장하고 있는 듯하다. 확장적인 형태들은 개체이기 보다는 군체로서의 면모를 가진다. 군체적 생태는 집단지성이 생성되는 정보망의 특징이다.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생겨난 특이한 외관과 생태를 가진 선인장은 점차 사막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다가온다. 특히 작가는 잎이 변한 선인장의 가시를 중요한 상징으로 간주한다. 김필순의 작품에서 바깥을 향해 돋아난 가시들은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내놓는 소통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획일화된 자기애를 가진 현대인을 대변’(김필순)하기도 한다. 주체를 중심에 놓는 철학이 강조하는 바와 달리, 주체는 타자로 되어있다. 그렇다면 타자가 획일적인 것인가. 타자를 주체로 환원하는 것이 획일적인 것이다. 바깥과의 소통이 차단된 주체들이 획일적인 것이다. 무엇인가로 환원될 수 있다면 타자는 타자가 아니다. 자신만을 보여줄 뿐인 미디어 거울의 방 속에 갇힌 주체는 타자들과 절연되어 있다. 소통의 무늬만을 가진 소통이 주체들을 같은 모습으로 고정시킨 채 고립시키는 것이다. 개체의 꼭대기 정중앙에서 커다란 꽃이 피어있는 선인장들은 나르시시즘을 잘 보여준다. 동그란 형태의 선인장의 경우 마치 머리털처럼 돋아난 가시들은 타자에 대한 욕망을 상징하지만, 그것이 진정 바깥이나 타자에 가닿기 위해서 극복해야할 자기중심을 향한 중력은 너무 강하다. 이러한 자기중심주의, 아전인수 등등의 행태는 궁극적으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극도의 경쟁사회에서 번성한다. 


타자를 향한 열림을 통해 다양성이 꽃피워야할 예술계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인터넷을 비롯한 모든 정보 인프라는 일련의 물리적 구조를 바탕으로 한다. 어느 시대보다도 상호적인 교류가 가능하게 된 진보된 물질적 도구들 사이를 빛의 속도로 횡단하는 것은 개별적 자아의 잡다한 욕망과 필요들이다. 작가가 주목하듯이, 그러한 정보망들이 진실로 나와 타자의 소통의 창구가 되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현대인을 에워싼 각종 정보망들에는 획일적인 자기들이 획일적인 패턴을 이룬다. 작품 속 선인장 가시처럼 자신을 갑옷처럼 보호하면서도 바깥을 향해 곤두세운 촉수들로 가득한 단독자들은 타자를 배제한 근본적으로는 불가능한 소통에 몰두한다. 자기애란 믿을 것이라곤 자기밖에 없었던 근대 낭만주의 시대의 산물이지만, 정보혁명을 통해 여러가지 전자거울로 둘러싸인 현대 역시 나르시시즘을 고무한다. 정보자체가 바깥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지시적이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에서 원본 없는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는 시뮬라시옹의 세계를 묘사하면서, 한 과학의 논리적 진화는 그 자신을 대상으로부터 더욱 떨어져서 결국은 그 대상이 없어도 되기에 이른다고 지적한 바 있다. 미디어는 ‘미디어에 대해서만 말하는 현기증 나는 거울’(레지스 드브레)인 것이다. 자기지시성은 현대문화에서 일반화되기 이전에 형식주의 예술에서 먼저 발생했다. 편재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거듭되는 반사는 주체/객체라는 경계를 해체시키고 하나의 흐름만을 낳는다. 동일성의 원리는 기계적으로 확장된다. 이러한 메커니즘 속에서 소통이란 거울을 보고 이야기하는 듯한 폐쇄 감을 줄 뿐이다. 미디어 이론가 마크 포스터는 [뉴 미디어의 철학]에서 정보적 시뮬레이션이라는 전자적 단계에서 자아는 끊임없는 불안정 속에서 탈 중심화 되고 분산되면서 여럿으로 불어난다고 말한다. (해체적)주체는 발화의 중심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주체의 분산은 정보적 시뮬레이션이 사물과 말을 분리시키는 경향과 관련 있다. 마크 포스터에 의하면, 정보양식 이전의 시대에는 합리적인 개인이나 중심화 된 주체의 자율성이 있다고 믿어졌다. 그러한 자율적 주체는 언어기호와 지시대상, 말과 사물을 연결시킬 수 있는 능력, 요컨대 언어의 재현적 기능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적인 것의 영역은 갈수록 언어의 자기 지시적 측면을 넓히고 증대시키는 전자통신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언어는 자유의 확장을 추구하는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주체가 객체의 세계를 통제하는 도구를 넘어선다. 현대인의 나르시시즘은 미디어의 자기지시성의 결과물이다. 미디어화 된 환경에서 주체는 자신만을 보지만, 보고 싶은 자신은 이미 해체되어 있다. 나를 보여주지 않는 거울에서 나를 또는 나만을 보려는 이 엇갈린 열망 속에서 끝없는 소통에의 목마름이 야기된다. 그래서 세상은 더욱 사막같이 느껴진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16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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