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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 말을 걸다 ⑧ 작자미상 ‘기영회도’ - 취(醉)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연희

한 해가 저무는 이즈음, 사람들 모임에 빠지지 않는 것이 술이다. 묵은 해의 근심을 잊고자 망우(忘憂)의 한 잔, 새해의 축복을 기원하는 축원(祝願)의 한 잔이 오간다. 그러자니 음주문화의 지나침이 지적되기도 한다. 이에, 옛 시절 술 문화의 ‘예(禮)’에 대하여 그림을 보며 생각해 보려고 한다. 한 폭 그림은 예법에 깍듯한 연회장면을 그린 것이고, 또 한 폭 그림은 예법을 무시한 음주시인을 그린 것이다.

‘예(禮)’와 정치

‘예’라 하면 일상의 에티켓 정도로 들리겠지만, 애당초 ‘예’란 말은 어떠한 체제가 전아하게 운영되는 양상을 뜻하는 말이다. 중국의 고대국가가 정비될 때 질서가 필요한 모든 영역에 ‘예’가 마련되었다. 혼인에는 혼례, 장례에는 상례, 제사에는 제례, 성인식의 관례 등. 

중국의 고대로부터 조선말기까지 금과옥조로 여긴 ‘예기(禮記)’는 ‘예’를 기록한 책이다. 조선은 ‘국조오례의’를 편찬해 예법을 재정비했다. 국가의례로부터 가정의례에 이르기까지 옛 사람들은 ‘예’에 벗어나지 않고자 했다. ‘예’의 양상들은 그 집단의 권위와 품격을 보여주었고, ‘예’를 지키는 것은 권위와 정통성을 주장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사회 속에서 권력을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 ‘정치’라고 정의할 때, ‘예’는 정치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예’를 지킴으로써 권력에 봉사하였고 ‘예’를 통하여 권력의 획득을 표시하였기 때문이다. 



음주(飮酒)의 ‘예’

‘예기’에서의 음주란 ‘서로가 기뻐하는 것(합환·合歡)’이며, ‘취하지 않음’을 중시한다. 취하지 않게 하고자, 술 한 잔을 올리고 백 번 절하는 예를 요구했다. 

취하지 않는 음주의 예법은 조선의 왕실에서도 거듭 강조됐다. 건국초의 태조, 태종, 세종이 모두 술의 경계를 공식적으로 요구했고 특히 세종이 내린 ‘계주교서(誡酒敎書)’는 지속적 영향력을 행사한 글이다. ‘계주교서’의 요지가 이러하다. ‘술 때문에 곡식과 금전이 낭비되고, 술 때문에 내면의 의지를 잃게 되고 외면의 권위마저 잃게 된다. 술 때문에 부모를 잊고, 혹은 술로 인해 남녀간의 분별을 잃고, 끝내 가정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잃게 된다. 술 마시다 살해당한 이들이 허다하다. 술 마시다 장이 썩어 죽은 자, 술 마시다 가슴이 상해 죽은 자, 혹은 정신을 잃어 죽은 자의 경우가 있으니, 술의 폐해를 입지 않도록 부디 조심하라.’ 

이 글은 우리 역사를 예로 들었다. “옛날 신라는 포석정에서 패하였고 백제는 낙화암에서 망했으니, 모두 술 때문이다. 고려 말기에는 아래 위가 술에 빠져 방자하게 굴다가 멸망의 지경에 이르렀다.” 세종의 염려는 간곡했다.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지는 못할지언정 제 한 몸의 생명도 돌아보지 못한단 말인가? 배우고 벼슬하는 자들이 그럴진대 거리의 백성들이 무슨 짓을 안 하겠는가?” 

세종이 ‘계주교서’로 허락한 바, 술을 마셔도 좋은 때는 오직 세 가지 경우다. 제사를 지낼 때, 손님을 접대할 때, 그리고 어르신을 봉양할 때다. 하늘을 기쁘게, 손님을 기쁘게, 노인을 기쁘게 함으로써, 스스로 기쁠 수 있는 단계까지만 음주하라는 엄격한 지시다. 

음주의 ‘예’. 나라를 다스리는 국왕이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나 보다. 그 자신과 신료들이 술로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술을 경계한 세종의 의지는, 세조와 숙종이 모두 동의하여 이 글을 다시 알리면서 술의 폐해를 줄이고자 노력하였다. 



노인 봉양의 연회장면

조선에서 ‘경노존현’(敬老尊賢·어르신을 공경하고 현명한 이를 존대한다)의 유교강령은 국가적 정책의 하나였다. 국가의 원로를 예우하는 연회는 노인을 봉양하여 술을 올리라는 세종의 허락일 뿐 아니라, 나라의 권위와 평온을 증명하는 정치행위였다. 1∼2품의 관직을 지낸 원로공신에게 베푸는 연회를 ‘기영회(耆英會)’ 혹은 ‘기로회(耆老會)’라 한다. ‘기(耆)’란 60세이고 ‘노(老)’는 70세다. 눈썹과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는 때다. 

오늘날에도 중요 모임에 기념촬영이 있듯, 조선에도 그림기록의 전통이 있었다. 모인 이들의 수만큼 그림을 그려 각자 보관하는 풍습도 있었다. 여기 소개하는 ‘기영회도(耆英會圖)’는 국왕 선조가 원로들을 모시고 술을 대접한 기영회를 기록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기영회도 중 크기도 가장 크고 필묵의 솜씨도 뛰어난 걸작이다. 모임그림의 틀에 맞게, 그림제목-그림-모인 이들의 이름의 순으로 삼단구성을 갖추고 있다. 실력 있는 화원의 솜씨이며 여러 측면에서 시각자료로 가치가 높기에, 문화재청에서 보물로 지정한 그림이다.

그림 속 기영회는 1584년 이른 봄의 행사다. 초대받은 이는, 홍섬(1504∼1585), 노수신(1515∼1590), 정유길(1515∼1588), 원혼(1505∼1588), 정종영(1513∼1589), 박대립(1512∼1584), 임열(1510∼1591) 등 7명이다. 모두 옅은 홍색도포를 입었다. 최고품계의 관료복식이다. 임열만이 2품이었고 그 외는 정1품 혹은 종1품의 관직을 지냈다. 

노인들은 각 상을 받은 뒤, 술을 받고 있다. 실내의 중앙에 두 사람이 마주하고 읍을 하며 술잔을 들었다. 시중드는 여인이 그 앞에 앉아 술잔을 올린 것으로 보인다. 이 술은 임금이 내린 술이라 하여 ‘선온’(宣??·베풀 선, 술 빚을 온)이라 불린다. 순백자 항아리 한 쌍이 선온을 담아온 용기로 보인다. 화면의 왼편 하단에 놓여 있다. 



헌수(獻壽)의 예와 태평성세 

원로들이 받는 선온은 장수(長壽)를 기원하는 헌수례다. 장수는 오복(五福)의 첫째 항목이라, 오복의 축원전체를 뜻하게 된다. 오복은 ‘서경(書經)’에서 나온 말이다. “첫째는 장수(壽), 둘째는 부유(富), 셋째는 강녕(康寧·건강하고 평안함), 넷째는 유호덕(攸好德·덕을 닦음), 다섯째는 고종명(考終命·천명을 다함)이다.” 

‘서경’의 문맥에 따르면, 오복은 천자(황제)가 거두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 말하자면 복지의 혜택이다. 조선시대 문헌에서도, 국가가 사면을 베풀 때 오복을 베푼다고 하였다. 그러나 원로들에게 헌수의 술잔으로 예를 취하는 것은 백성들의 복지와 실제로 별 상관이 없다. 연회의 축복과 헌수의 예는 정권의 안정됨을 공표하고 태평성세를 보장하는 상징적 행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연회의 분위기는 평온하고 화락하다. 노인들은 표범의 가죽으로 보이는 호피 방석에 앉았으니 국가적 품위에 손색이 없다. 뒷벽에 장식된 그림은 길고 크게 표구된 장벽화다. 병풍이 아닌 것은 특이하다. 보기에 왼편에 그려진 것은 동백과 매화이고 오른편에 드리워진 것이 소나무다. 그 사이로 물새들이 물결을 가르며 헤엄친다. 한 쌍은 목이 푸르고, 한 쌍은 목이 붉은 황오리다. 겨울산수를 설경으로 그린다면, 겨울화조는 동백과 매화로 그리는 전통이 있었다. 붉은 동백과 흰 매화에 푸른 소나무 깃들인 정원풍경. 화려함과 기품을 최고로 자랑하는 겨울풍경이다. 

병풍 앞에는 두 개의 향로가 놓였는데 삼족(三族)의 청동기라 고풍스럽다. 그 앞에 커다란 촛대가 있다. 촛불은 연회가 밤으로 무르익음을 뜻하며, 동시에 연회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을 뜻한다. ‘예기’에 따르면, 연회장의 촛불은 다 타들지 않게 한다. 이는 촛대가 다 녹기 전에 연회를 마치라는 절제의 요구다. 

화면 하단의 커다란 백자병에 홍백의 조화(造花)가 꽂혀 있다. 연회에 참석한 이들의 머리에도 조화가 꽂혀 있다. 동백으로 보인다. 대청 끝에 자리한 악대들의 연주에 꽃병 뒤로 너울대는 기녀들의 춤이 끊이지 않는다. 연회의 화락한 분위기다. 

이 그림은 예의와 격식으로 축수의 선온이 오가는 가운데 국가의 태평성세를 기원하는 술잔치를 기록하고 있다. 



‘예’를 벗어난 시인 

황제의 부름을 받고도 만취하여 몸도 일으키지 못했다는 저 당나라 시인 이백은 ‘예’를 무시했던 사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백을 들어 ‘예’의 이름으로 처단하는 경우는, 옛 글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이백은 많은 문사들의 흠모와 사랑을 독차지했다. 성호선생 이익(1681∼1763)이 평했다. 그것은 “시(詩)로서이지, 술로서가 아니오”라 한다. 이백의 만취는 그 예술의 비범함을 표현해준 방법일 뿐이었다. 

19세기 화원화가 이한철(1808∼?)이 그린 ‘취태백도(醉太白圖)’를 보면, 이백이 보기 좋게 늘어져 안하무인이다. 그 뒤로 커다란 술동이가 보이고 이백의 배는 술동이처럼 둥글게 부풀어 있다. 그 옆에 적힌 시는 두보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술 취한 여덟 신선을 노래하다)’ 중 이백을 읊은 구절이다. 



‘이백은 한 말 술에 시 백편을 짓고,

장안의 저잣거리 주점에서 잠드시네. 

황제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못하고

신(臣)은 ‘술의 신선(酒中仙)’이라고 스스로를 칭하네.’ 

李白一斗詩百篇 

長安市上酒家眠 

天子呼來不上船 

自稱臣是酒中仙 



취(醉)를 예찬하는 사람들 

이백뿐인가. 취하지 말라는 예법의 엄격함을 깡그리 무시하고 취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던 일군의 철학자와 문인들이 있었다. 전설 속의 죽림칠현(竹林七賢·3세기 활동)이 으뜸이다. 아침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자마자 술부터 마시는 것이 그들의 생활규칙이라 기록되어 전한다. 전원으로 돌아가 실컷 마시겠노라 한 도연명(365∼427)이 버금이다. 깨어있는 놈들이 세상을 망친다고 마음껏 비방하고 자신은 깨지 않고 취하여 살겠노라 선언했던 지식인이다. 그런데 세상에 깨어있는 사람들이 도연명에게 술을 선물했고 도연명의 시 ‘음주’를 즐겨 읽었다. 

사실, 죽림칠현이 실제로 그랬는지 도연명이 실제로 그랬는지 따질 일이 아니다. 죽림칠현은 말할 것이 없고, 도연명의 주옥같은 명문(名文) ‘귀거래사’와 ‘도화원기’는 취한 정신으로 쓸 수 있는 글이 결코 아니다. 문제는 그들을 사랑하노라 선언하며 음주예찬을 표방했던 후대의 문사들이다. 그들 중에는 ‘취중(醉中)’ 심지어 ‘몽중(夢中)’을 핑계 삼아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고, 혹은 음주를 예찬함으로써 세상의 명리에 초월한 자신의 인격을 주장하고자 했다. 이것이 ‘취태백도’의 기능이었을 것이다. 밥이 귀한 시절이니 술이야 오죽하랴. 금주령의 실제원인은 식량부족이었다. 취할 만큼 실컷 마시고 세상을 풍자하며 살아가는 삶이란 일종의 낭만이었거나, 자기표현의 수단이었다. 

더욱 큰 문제는 철학도 없이 정치도 없이 예를 벗어나 술을 마시는 경우다. 그것은 현대 한국사회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조선시대의 음주문화에도 유사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술의 폐해, 술의 쓰임새

중종 때 책문(策問·과거의 마지막 합격자 33인의 등수를 매기는 논술시험)으로 술의 폐해를 논하라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조선시대 음주문화도 지속적 사회문제였음을 직감하게 하는 출제다. 장원으로 뽑힌 이의 글은, 술의 폐해와 술의 순기능을 함께 다루었고 술의 폐해를 다스리는 일은 각자의 마음으로 다스릴 일이라 하였다. 적절히 술의 기능을 활용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논술로 표현한 것이다. 중종은 그의 글을 좋게 여겼다. 실제로 중종은 마음이 울적하면 술병을 들고 신하들과 어울려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길 원했다. 

실행이 불가능한 법이 금주법이라고 한다. 금주령이 내려진 곳에서는 기상천외의 양조업과 유통업이 개발되었다. 이는 동서양이 모두 그랬다. 조선 초기부터 술을 경계하는 어명이 거듭 배포되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조선시대 관료들의 회음(會飮)문화는 지나쳤다고 한다. 영조는 끝내 금주령을 내렸고 왕실의 제사에도 술을 없애고 식혜를 올렸다. 그러나 정조는 금주령이 백성들의 소요만 일으킨다고 하였다. 영조 금주령의 결과가 어떠했는지 미루어 알 수 있다.

옛 그림 속 인물들이 보여준 음주의 예법와 정치, 음주에 기탁하거나 음주를 빙자한 자기표현의 수단 등을 다시 음미해볼 일이다. 음주문화의 미묘한 내면과 끊이지 않는 문제는 여전히 심사숙고할 일인 듯하다.


-문화일보 2012.12.27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2122801033130025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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