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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 말을 걸다 (7) 이인문 ‘강산무진도’ - 왕의 비전, 무궁무진 발전하는 행복한 나라

고연희



▲  ① 도르래 -‘강산무진도’ 부분도. 도르래로 물자를 수송하는 장면.

▲  ② 장터의 양륜거 -‘강산무진도’ 부분도. 바퀴가 두 개 달린 ‘수레(양륜거)’가 오가는 장터.

▲  ③ 선박 -‘강산무진도’ 부분도. 조선시대 물류 운송의 핵심 수단이었던 선박.

▲  ④ 땅끝마을 물레방아 -‘강산무진도’ 부분도. 에너지에 대한 꿈이 담긴 ‘땅끝마을 물레방아’.
8.6미터에 이르는 긴 그림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제목의 뜻은 무궁무진 산수강산이다. 그런데 사실상 이 그림에는 옛 산수화의 ‘산수’(山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그림에는 번영하는 인간 사회가 들어서 있으며 은자가 머물 산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림 속 너른 산하 구석구석까지 주거, 교통, 선박, 교역 등 문명이 가득하다.

‘강산무진도’는 정조(正祖) 시절 화원화가 이인문(李寅文·1745~1821)이 국왕의 비전을 담아 그린 특별한 산수화였다.

# 전통 산수와 다른 ‘산수’

산수화 속 ‘산수’란 원래 ‘현실 너머’의 공간이다. 그 ‘산수’에는 달빛 낚는 어부와 그의 벗 나무꾼 혹은 뜻이 높은 스님과 시인이 유유자적 노닌다. 그래서 산수화를 펼치면 우리 마음은 퍼뜩 현실을 훌쩍 떠나 정신이 자유로운 세상을 상상하게 된다. 도가사상이든 유학사상이든 자연의 산수를 흠모하는 마음이 비슷했다.

산수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던 중국 송나라의 대표적인 산수화가 곽희(郭熙·1060∼1080년경 활동)가 산수화의 필요성을 이렇게 말했다. “속세의 온갖 일에 구속받는 것은 누구든지 싫어하고, 안개 피고 구름 도는 절경 속 신선과 성인의 경지는 누구든지 동경하나, 제 한 몸만 깨끗하게 하자고 세상을 버리고 산수에 들 수 없으니, 훌륭한 화가에게 산수를 그리게 하여 방 안에서 그 풍광을 즐길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강산무진도’는 이러한 산수화의 기본속성에서 벗어나 있다. 이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산수감상으로 그칠 수 없다는 것을. 이 그림 속 산수는 속세를 초월한 자연이 아니라 문명이 앞선 곳이다. ‘강산무진도’의 산수에는 의미의 룰이 바뀌어 있고, 이 그림 속 인물들은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자 산수의 공간을 활기차게 누비고 있다. 

# 새로운 패러다임의 유토피아 

‘강산무진도’를 펼치면, 두루마리 오른 끝에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 소나무 청정한 언덕이다. 그 배경에 도시의 건물이 아련하다. 첫 장면의 배경이 자연스러운 먼 산이 아니라 인공의 건물이라니 심상치 않다. 이어지는 골짝에는 고급 주택이 즐비하고 가옥마다 휘장이다. 그 속의 인물들은 담소를 나누거나 산책을 나서고 가마로 길을 떠난다. 

두 개의 골짝을 지나면 거대한 항구가 등장한다. 정박한 배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너른 물길로 배들이 다니는데 거대한 선박과 조그만 고깃배가 어울려 있고 인물들이 분주하다. 

물은 다시 산으로 이어지고 산기슭은 곧 번잡스러운 장터이다. 짐 실은 나귀와 수레 끄는 소리가 요란하다. 장터의 거리는 그 다음 계곡으로 이어지고 이곳에 선 높은 언덕은 도르래로 교통한다. 이어지는 산세가 몹시 험하고 긴 폭포가 쏟아진다. 심산유곡이다. 그런데 높은 산등성이에서 나귀가 내려오다 앞다리를 번쩍 들고, 폭포수 물길 뒤로 가옥과 울타리가 즐비하다. 폭포 뒤로 건설된 문명이 신기하고 놀랍다. 

이어지는 산수는 더욱 기이하다가 뚝 그치고 평지가 등장한다. 그곳은 성곽이 둘러지고 수문(水門)이 크게 뚫린 도시다. 모두가 기와집이며, 거대한 수문에는 큰 배가 드나든다. 

화면의 끝은 물을 접한 땅끝인데, 땅끝마을 집집마다 수레바퀴가 돌아간다. 물레방아일까. 문명의 혜택이 산수 깊숙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동아시아 고전의 보편적 유토피아는 무릉도원식 농경사회였다. 그곳은 숨어 있으니 현실과 단절된 폐쇄적 공간이며, 자급형 경제구조에 남녀노소 평등하다. 소박하지만 평화로운 세계라 동경되었다. 대개의 산수화가 한가로운 분위기를 그리는 것은 이와 상통한다. ‘강산무진도’는 도원식 유토피아에서 벗어나 있다. 이 그림 속 공간은 현실세상으로 열린 개방형이며 확장형이다. 산수와 현실은 분리되지 않는다. 발전하고 화합하는 인간사회가 산수 속에 펼쳐진다. 새로운 타입의 유토피아라 할 수 있지 않을까. 



# 도르래로 올리는 활기 

인간 문명의 발전에서 ‘바퀴’의 등장은 매우 중요하다. 동그란 형체가 구르면서 발휘하는 효과의 발견이 획기적으로 인력을 절감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강산무진도’에서 가장 널리 소개되는 부분이 도르래 장면이다. 높은 언덕 위에 나무 버팀목을 쌍으로 세우고 그 위에 장대를 얹고 장대에 줄을 감아 돌리면서 물건을 올리는 방식이다. 그림을 보면 언덕 아래 사람들이 끈을 당기면서 들것이 위로 오르고 있다. 

이 도르래는 ‘녹로’(?N??)라는 고식도르래에 속한다. 조선의 학자들이 즐겨 보았던 명대서적 ‘천공개물’(天工開物)에 따르면, 녹로는 중국 서한(西漢)의 벽화에서 그 기원을 추적할 수 있고, 명나라에 이르도록 널리 사용되었다. 사실상 ‘강산무진도’에 그려진 도르래란 것은 녹로라 부르기에 원시적이다. 그림 속 인물들이 물자수송의 필요에 응하여서 급조해 사용하는 제작물이 분명하다. 그림 속 인물들은 도르래로 물건을 올리느라 산 위와 산 아래 적잖이 모였다. 그들의 환호성과 분주함 속에 협동하는 활기가 전달된다. 

조선시대 산수화에 도르래가 그려진 것이 또 있을까? 심사정(沈師正·1707∼1769)의 ‘촉잔도’(간송미술관 소장)가 있다. ‘촉잔도’ 역시 8미터가 넘는 긴 두루마리의 산수화인데, 이 그림은 산길의 험난함을 묘사한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701∼762)의 ‘촉도난’을 옮긴 것이다. ‘촉잔도’의 도르래는 크고 완전한 녹로이다. 큰 들것에는 행려자를 태웠으니, 오늘날의 케이블카를 연상케 한다. ‘촉잔도’의 도르래는 산악의 험난함을 표현하는 매체이다. 이에 비해 ‘강산무진도’의 도르래는 작고 활기차다. 언덕 아래 물건을 언덕 위로 신속히 옮길 수 있는 편리한 도구로 그려져 있다. 



# 수레 사용의 추구 

바퀴 활용의 문명은 중국이 앞서고 있었다. 18세기 조선학자들의 연행기록에서 빠뜨리지 않는 것이 중국의 다양한 수레였다. 1780년 중국을 다녀온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통탄한다.

“우리나라에 수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바퀴가 온전하게 둥글지 않고 바퀴 자국에는 틀이 없으니, 이는 수레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오. 그런데 사람들 하는 말이, ‘우리나라는 길이 험하여 수레를 쓸 수 없어’라 하니, 이게 무슨 말이오? 나라에서 수레를 쓰지 않으니 길이 닦이지 않을 것인데.”

‘전철(前轍)을 밟는다’는 말이 있다. 앞 수레가 다져놓은 길로 뒤 수레가 따라갈 때 이르는 말이다. 전철을 밟으려면 바퀴 간격이 일정해야 한다는 조건이 따른다. 박지원은 전철로 다져진 길, 즉 바퀴 규격의 합리적 제도화를 바랐다. 그는 주장한다. “충청도 보은의 대추, 내포의 소금, 전라도 고흥과 남해의 귤·유자, 관동의 벌꿀 등 모두 백성들에게 필요한 물자인데 원활하게 유통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수레가 발달하지 못하여서이다.” ‘강산무진도’의 장터장면을 보면 수레가 다닌다. 바퀴가 두 개 달린 ‘양륜거(兩輪車)’이다. 



# ‘이고 지기’보다 합리적 운송 

“이고 진 저 늙은이 짐을 벗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으니 돌인들 무거우랴. 늙기도 설어라 커늘 짐조차 지실까.” 16세기 정철 시조에 담긴 경로사상은 실로 귀감이다. 그런데 18세기 학자 유수원(柳壽垣·1694∼1755)이 쓴 ‘우서((迂書)’를 보면, 중국의 북경에는 이고 진 사람이 없다고 감탄한다. 그들은 외발의 손수레로 밀거나 어깨에 거는 들것으로 짐을 옮긴다는 것이다. 그렇다. 짐을 대신 들어드리는 인정(仁情)보다 한수 앞선 방식은 혼자서도 끌고 다닐 손수레를 만들어 드리는 합리적 태도이다. 조선후기 문헌에는 수레의 사용에 대한 학자들의 진지한 사고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일찍이 18세기 초 숙종 치세 때 병조판서 민진후(閔鎭厚·1659∼1720)가 아뢴다. 

“신이 북경에 갔을 때 독륜거(獨輪車·외발 손수레)를 보았습니다… 고쳐서 양륜거(兩輪車·두발 손수레)를 만들도록 하였더니, 독륜거보다 조금 나았습니다.” 

이어지는 18세기 연행기록들은 북경거리의 독륜거와 다양한 수레를 거듭 소개하고 있다. 그럼에도 결국 19세기의 학자 이규경(李圭景·1788∼?)의 글을 보면, “중국의 수레사용은 매우 다양한데, 우리나라에서는 오로지 양륜거뿐이다”라고 돼 있다. 독륜거가 외발 수레에 물건을 균형잡히게 싣고 밀고 다니는 손수레라면, 양륜거는 바퀴가 두 개 달린 수레이다. 바퀴가 두 개라 안정감이 있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양륜거가 발달되었던 것 같다. 

‘강산무진도’의 장터를 보라. 이고 진 사람이 없다. 수레를 끌거나 어깨에 메거나 나귀에 싣고 다닌다. 인물들이 밀고 다니는 작은 수레는 모두 양륜거다. 박지원의 글을 상고하면, 실제로 그 당시에 양륜거가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근대기 사진을 검토하면 여전히 이고 진 사람들이 많다. 그림 속 장터는 18세기 실제상황은 아니다. 바람직한 운송기구가 널리 사용되는 이상적 장면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 선박의 중요성 

‘강산무진도’에 주장된 문명의 이기는 ‘배와 수레’이다. 이들은 수륙의 주요한 교통수단이자 물류유통 수단이었다. 바다에 접한 한반도에서 배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배 침몰의 사고기사가 자주 등장한다. 배 수십 척이 침몰했을 때, 태종이 죽은 이들을 애통해하자 신숙주가 왕을 위로했다. “그래도 수로운송이 육로운송보다 용이하니 어쩔 수 없습니다.” 조선의 왕실에서 안전한 배의 제조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당연지사이다.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은 물론이요, 국왕 정조도 선박제도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정조가 조선시대 선박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선박제조의 제도개선이 급선무라 지시한 어명이 ‘홍재전서’에 실려 있다. 

‘강산무진도’에 그려진 배는 대략 헤아려도 100척이 훌쩍 넘는다. 그 가운데 강과 바다로 자유롭게 다니며 물품을 운반하는 대형선박, ‘조선’(漕船)이라 불리던 배가 눈에 띈다. 그림 속의 배는 중국에서 ‘조방’(漕舫)이라 불린 중국식 조선이다. 좋은 배를 많이 제조하여 안전하고 신속한 유통구조를 마련하고픈 꿈이 담긴 화면이다. 



# 이상적 개발과 행복한 백성을 구상

조선후기 정조와 그가 아낀 학자들은 청나라의 시스템을 배우고자 했다. 청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중국을 무너뜨리고 인조의 머리를 조아리게 한 오랑캐나라이다. 그러나 척화공신 김상헌의 후손 김창협(金昌協·1651∼1708)이 깃발을 꽂았다. “청나라에 어찌 배울 것이 없겠는가. 사신으로 가는 분은 청나라의 서적을 구해오시게!” 

정조는 젊은 학자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젊은 학자들은 중국의 문명을 보고하며 배울 것을 정리했다. 정조는 꿈꾸었다. 발달된 문명의 혜택으로 성덕을 베풀고 그 속에서 활기차고 행복한 백성들을. 

‘강산무진도’에는 수륙의 운송시스템이 완비되어 있고, 땅끝에도 분산형 에너지발전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며 정비된 도시와 지역마을의 발전이 구상되어 있다. 오늘날에 그려졌다면 항공과 정보의 시스템 및 대체에너지 개발의 구상도 첨가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오늘날에도 우리 국토의 농산물 유통과 에너지수급 상황에 문제가 있다. 새 시대의 새 정부가 국민의 행복을 약속하며 출범하는 이 시간. 한반도의 산천은 여전히 수려하다. ‘강산무진도’ 속 행복한 인물들의 새 버전, 이 시절의 강산무진을 구상해봄 직하지 않을까?

- 문화일보 2012.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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