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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 말을 걸다 ⑥ 조속 ‘금궤도’ - 훌륭한 지도자와 평화로운 나라를 염원합니다

고연희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으로 국토는 황폐했고 북녘 오랑캐의 기세로 혼란스러운 상황. 

이때, 조선의 왕실에서는 옛 신라의 전설적인 한순간을 커다란 화폭에 담았다. 

평화로운 미래를 약속하는 하늘의 축복, 새 지도자의 생명이 붉은 끈에 매어져 하강하는 순간이다. 

그림의 제목은 ‘금궤도’다.

# 금궤!

‘금궤(金櫃)’는 황금도색의 나무궤짝이다. 그림의 한가운데 위치한다. 크고 번듯한 상자에 정교한 자물쇠 장식이 얼핏 봐도 그 존재가 예사롭지 않다. 

흰색 수탉이 소리쳐 운다. 금궤의 등장을 세상에 알림이다. 새벽이 들고 어둠이 물러난다. 금궤를 매달고 선 나무를 보라. 무성한 잎들이 아침 햇살에 흰 꽃으로 빛난다. 안개가 밀려나며 드러나는 청록의 산수. 금궤의 황금빛과 영험함을 부각시켜 준다. 

영험한 궤짝이라니, 혹자는 미국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화두였던 성궤를 연상할지도 모르겠다. 절대신의 권력으로 축복이 보장되는 궤짝. 민족의 미래를 보장하는 측량할 수 없는 은총. 그것의 소유를 소망한 이유이다. 이 그림 속 금궤의 의미와 기능도 사실상 그러하다. 하늘이 내린 축복의 약속이며 만백성의 바람이다. 

그림 속 금궤의 이야기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모두 전한다. 금궤에는 사내아이가 들어 있다. 이 아이의 후손에서 신라의 왕들이 날 것이며, 다른 왕조가 누리지 못했던 영광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 김알지, 신라 김 씨 왕의 시조가 되다 

그림을 보면, 금궤로 도달한 인물이 있다. 신라의 4대왕 석탈해(昔脫解·기원전 19년∼기원후 80년)다. 보위하는 황색 의장부채가 그의 고귀한 신분을 표시한다. 석탈해는 금궤를 열어보고 기뻐했다. 이 아이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로다! 

금궤에서 나온 아이는 남달리 총명하고 사려가 깊었다. 석탈해는 아이의 이름을 김알지라 했다. 지략이 많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기에 ‘김(金)’이라 한 것이다. 김알지. 우리나라 김 씨의 시조로도 알려지는 이름이다. 

김알지의 7대손이 석 씨 왕조를 계승해 신라왕이 되었다. 미추왕이다. 미추왕은 살아서 성군이었고 죽어서 혼령이 되어 신라의 삼국통일을 도왔다. 미추왕의 혼령이 김유신 장군과 교유했다는 신비로운 일화가 기록으로 전한다.

요컨대, 금궤에서 김알지가 나왔고, 김알지에서 미추왕이 나왔고, 미추왕으로부터 김 씨 왕조가 세워졌고, 김 씨 왕조는 신라를 다스리고 삼국을 통일했다.



# 하늘(天)이 내려주시다 

사람의 몸이 어머니의 몸에서 나오지 않고 하늘의 궤짝에서 나왔다는 이런 식의 이야기는, 사실상 믿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누군가가 만든 이야기로, 지배권력의 탄생에 대한 정치적 신비화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믿음 속에서 신화가 되고 역사가 된다. 

하늘이 내렸다는 태생의 신비는 김알지만의 것이 물론 아니다. 삼국시대 왕의 시조들은 대략 그 태생이 유별나다. 고구려 고주몽이 알에서 나왔고, 신라의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왔고, 가야국 수로왕이 금합 속 황금알에서 나왔다. 이 그림 속 금궤를 발견한 신라왕 석탈해도 궤짝에서 나온 인물이라, 그 이름이 탈해(脫解)다. 

수로왕의 신화를 다시 보면, 금합이 붉은 줄에 매어져 있었다고 한다. 자승(紫繩)이라 부른다. 김알지의 금궤를 설명하는 ‘삼국사기’에는 자색구름 자운(紫雲)이 흩어졌다고 한다. 자색구름은 하늘이 상서로운 일을 보일 때 나타나는 고대적 발상이다. 그림 속 금궤가 붉은 끈으로 매어져 있다. 하늘의 적극적 개입을 표시하는 이미지다. 

조선시대 왕의 도장 어보(御寶)를 보았다면 기억할 것이다. 어보는 금색 거북 모양이 주를 이루는데 거북등에 예외 없이 붉고 굵은 끈이 달려 있다. 이 붉은 끈은 하늘이 내려준 신성한 권력을 뜻한다. ‘자승’의 유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하늘이 내려야 정당한 권력이라는 생각은, 이미 중국의 한나라 즉 고조선시대로부터 정착된 오래된 사고방식이다. 이 때문에 권력층은 그들의 권력이 하늘이 내려준 것이란 표징을 제시하고자 가련한 노력을 멈출 수 없었다. 



# 인조(仁祖·재위 1623∼1649)의 어명으로 그려졌다

‘금궤도’의 윗부분에 글이 적혀 있다.



어제(御製·왕이 짓다) 

이것은 신라 경순왕 김부의 시조로,

금궤 속에서 얻었기에 김 씨 성이 됐다는 내용이다. 

금궤가 나무에 걸려 있고 그 아래 흰 닭이 우니,

그것을 보고 가져오게 했다. 

금궤 속에 사내아이가 있었으며, 

석 씨를 계승해 신라왕이 되었다. 

그 후손 경순왕이 고려로 들자, 

그가 순순히 온 것을 가상하게 여겨 

경순이란 시호를 내렸다.



때는 을해년(1635) 다음 해의 봄, 

명하기를 그림을 그려 삼국의 역사를 보이라 하셨다. 

이조판서 신 김익희(金益熙)가 명을 받들어 쓰고, 

장령 신 조속(趙涑)이 명을 받들어 그렸다.



御製

此新羅敬順王金傅始祖, 金櫃中得之, 仍姓金氏者. 

金櫃掛于樹上, 其下白鷄鳴, 故見而取來. 

金櫃中有男子, 繼昔氏爲新羅君也. 

其孫敬順王入高麗, 嘉其順來, 諡敬順.



歲乙亥翌年春, 命圖見三國史,

吏曹判書 臣 金益熙 奉敎書,

掌令 臣 趙涑 奉敎繕繪.



이 글의 내용을 보면, 어제와 제작 상황이 나뉘어 있다. 

‘어제’를 먼저 보면, 통일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과 그의 시조 김알지가 한 가닥으로 엮여 있다. 김알지가 나온 뒤 오랜 계승을 거쳐 경순왕에 이르렀고, 신라의 국운이 기울었다. 경순왕은 고려에 투항해 백성의 안전을 도모했다. ‘금궤도’의 화면은 김알지 하강의 순간만을 포착했지만, 왕이 요구한 주제는 김알지의 혈통이 역사적 소임을 다하는 오랜 서사였다. 

그 아래 제작 상황이 난해하다. ‘을해년 다음 해’에 왕이 그리라고 했다는 표현방식부터 그러하다. 을해년 다음 해는 병자년 즉 1636년이다. 병자호란의 치욕이 사무쳐 병자년이란 말을 피한 것이다. 그런데 ‘봄’이라 했으니 병자년 ‘겨울’에 맞은 치욕에서 한참 이전이다. 그림이 제작된 당시에 적었다면 이렇게 적었을 리 만무하다. 굳이 병자년을 피해 쓴 것을 볼 때, 그림 위의 글이 병자호란 이후에 적혀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김익희(1610∼1656)가 이조판서가 된 것은 그의 말년(1656년)이다. 그렇다면 그림 위의 글은 ‘적어도 1656년 이후’로 밀려난다. 

지금 보는 이 그림의 글이 이렇듯 후대에 적혀진 것이라면, 그림은 어떠할까. 인조 때의 제작품이 후대의 왕실에서 모사되고, 글은 모사된 시점에서 새로 적은 것이 아닐까. 아직 학계의 진지한 검토가 진행되지 않은 상황이라, 이에 대한 추정은 여기서 접어 두고자 한다.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다. 김알지 탄생의 신비로운 순간이 병자년 봄 인조의 명으로 제작되었다는 것. 그 후 수십 년 뒤 조선왕실에서 이 그림에 대해 다시 글을 쓰고 기렸다는 것. 



# 왕실의 영광과 평화를 기원하다 

이 그림이 원래 제작된 시기 1636년 봄은 역사상 절묘한 시점이다. 그해 겨울 병자호란으로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어지는 1637년 정초의 한파 속에서 인조가 겪은 삼전도 치욕을 생각하면, 그 분통에 숨진 이들을 생각하면, 1636년의 봄은 그들에게 마지막 봄이었다. 

그러나 따사로운 봄은 결코 아니었다. 왜란과 정묘호란으로 나라는 쑥대밭이었다. 강해지는 후금(後金·이후 청나라가 됨)의 등쌀에 몹시 혼란스러웠다. 나라의 국력이 약화되었고 학자들은 명분을 찾지 못했다. 무엇보다 조선왕실은 중국대륙의 실제상황을 파악하는 정보력이 부족했다. 국왕 인조는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터라 국내외적으로 자신의 위상을 세우는 과정이 어려웠다.

인조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1636년 봄 당시, 왕실에서는 왕후의 죽음으로 국상의 절차가 시끄러웠고 곧 태어날 원손이 기다려지는 시점이었다. 인조가 고대 신라의 영광과 평화를 기원했던 사정을 여기서 이해할 수 있다. 

‘금궤도’를 그리게 한 뒤, 인조는 조선 역사상 가장 힘든 고비를 넘어가야 했다. 오랑캐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린 뒤 황폐한 국정을 꾸려 나가야 하는 역경이었다. 청 황실은 점점 강성해졌다. 수십 년 뒤, 조선왕실은 청나라를 무찌르겠노라는 북벌론의 환상을 붙들어 세우면서, 이 그림에 다시 관심을 가졌다. 

하늘이 내려주신 황금빛 궤짝에 새벽 햇빛이 비친다. 이 나라를 이끌어줄 생명과 힘에 대한 기원, 평화로운 역사의 보장을 기도하는 간절함 아니었을까. 적어도 이러한 염원으로 이 나라를 이끌겠노라는 왕실의 자기표현이었다. 

김알지의 왕조는 석 씨 왕조로부터 인정받아 왕권을 인계받았고, 그 후손은 고려로 왕위를 인도했다. 김 씨 왕조는 통일 왕조의 영광을 차지한 왕조이자 평화로운 왕위계승을 누린 왕조였기에, 그 시조 김알지의 탄생을 빌려 왕실의 영광과 나라의 평화를 기원했음 직하다. 



# 좋은 지도자가 나셨다. 짝짝! 

훌륭한 지도자와 평화로운 번영에 대한 바람이 표현된 조선왕실의 그림으로 ‘진단타려도(陳?H墮驢圖·진단이 나귀에서 떨어지다)’가 있어 함께 감상할 만하다. 진단(陳?H·872∼989)은 중국 북송대의 은일자이다. 그의 은일 방법은 오랜 수면이다. 몇 달 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않으니, 왕이 찾아가도 그를 만날 도리가 없다. 어떻게 그렇게 오래 잘 수 있느냐. 명대 서적 ‘준생팔전’에는, 믿거나 말거나, 진단의 수면방법 및 수면포즈가 소개돼 있다. ‘진단타려도’에는 수면의 달인 진단이 웬일로 나귀에서 떨어지고 있다. 무슨 일인가. 

그 위에 적혀 있는 숙종의 어제가 이러하다. ‘회이 선생(진단)이 무슨 일로 갑작스레 안장에서 떨어지나. 취하거나 졸아서가 아니라오, 특별하게 기뻐서라오. 혐마영에 상서로움 드러나고 참된 임금 나셨다니, 이제부터 온 천하에 근심 걱정 없으리라.’ 송나라 태조(조광윤)가 왕위에 오르자 진단은 기쁨에 못 이겨 짝짝! 손뼉을 치다가 나귀에서 꽈당! 미끄러진다. 그래도 진단의 마음은 여전히 기쁘다.

여기 소개한 두 폭 그림은 화사한 안료에 필치가 매우 공묘하다. 전형적인 화원(畵員)의 화풍이다. 그런데 그린 이는 각각 조속(1595∼1668)과 윤두서(尹斗緖·1668∼1715)로 전하고 있다. 조선의 대표적 문인화가 이름들이다. 실상은 왕실이 후원해 실력파 화원의 공력으로 제작된 그림들이었으리라.

우리는 지금 새로운 지도자의 출현을 앞두고 있다. 그것이 하늘의 축복처럼 믿을 만하고, 넘어져도 좋을 만큼 기쁜 소식이기를! 옛 그림 속 인물의 마음으로 기원할 때이다.

- 문화일보 2012.12.14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2121401033130025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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