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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 말을 걸다 (4) 이흥효 ‘추경산수도’ - 나도 그대처럼 권력에서 떠나가리

고연희

▲  기러기 내리는 강남의 가을을 그린 이흥효의 ‘추경산수도’.(16세기. 산수화첩. 비단에 수묵, 29.3 x 24.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빈 배가 정박돼 있고, 어부는 주점에 들었다. 이흥효의 ‘산수도’.(산수화첩. 29.3 x 24.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옛 시에서 선비들이 바라는 직업의 제1순위는 ‘어부’다. 복사꽃 흩어지는 물길로 흘러가는 어부도 좋고, 비 오는 날 푸른 도롱이에 부들삿갓으로 폼을 잡은 어부도 좋다. 쓸쓸한 가을 강이나 눈 내린 겨울 강에 으슬으슬 손발이 저려 와도 무시하고 앉아 있는 어부라면 더욱 좋다. 그래서다. 그러한 ‘어부’의 그림이 실로 많이 그려졌고, 이를 감상한 시문도 풍성하게 지어졌다.

# ‘어부’가 되겠다는, 대제학 

조선전기 관료문인 서거정(1420∼1488)이 ‘추강독조도(秋江獨釣圖; 가을 강에 홀로 낚시하네)’ 한 폭을 펼쳐놓고 시를 읊는다. 자신은 언제나 ‘어부’를 꿈꾸며 살아왔거늘 아직도 어부가 아닌 것이 부끄럽다는 고백이다. 



거룻배와 낚싯대가 꿈속에 자주 드니,

나는 지난 세월 물고기랑 새랑 친한 정을 나누었지.

저 옛날 푸른 도롱이 입은 현진자여,

올해도 인간세상 못 떠난 게 부끄럽다오. 

- 서거정, 「추강독조도」 제 2수. 



서거정은 최상급 관료문인이었다. 국가문서와 귀빈접대로 일생이 바쁘고 호화로웠다. 그는 이미 20대 약관에 집현전 소장학자들과 어깨를 겨루며 ‘몽유도원도’에 찬시를 적었고, 승승장구 출세하며 대제학을 거듭 지냈다. 시문창작은 물론이요 역사서, 지리서, 음담패설집까지 갖은 집필에 분주했고 성격도 쾌활했다. 

서거정의 소망이 ‘어부’라니! 벼슬이란 오르기는 어렵지만 떠나기란 쉬운 것이고, 그의 벗 김시습은 떠난 지 오래였다. 서거정은 관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거정에게 도롱이와 삿갓을 선물한 이가 있었다. 서거정은 그의 어부 꿈을 거듭 고백했다. 서거정이 도롱이에 비 맞으며 나앉을 리 만무한 일이다. 옛 분들의 ‘어부’ 꿈, 그 정체가 흥미롭다. 



# ‘어부’는 마음이 한가롭다. 

나무 끝에 너른 들에 가을빛이 물들고,

아득아득 강과 호수 기러기 그림자가 어스름하네.

서쪽에서 부는 바람 소매에 가득 들고,

한 평생 고기 낚는 마음이 한가롭구나.

- 서거정, 위의 시, 제 1수



서거정이 ‘추강독조도’의 내용을 묘사한 시다. 누구의 그림인지 밝혀져 있지 않다. 

훗날의 화원화가 이흥효(1437∼1593)의 그림으로 그 화면을 유추할 수 있다. 가을 너른 들에 아득한 물, 기러기들의 실루엣이 어스름하다. 

그림 하단 조그만 배 위에 ‘어부’가 앉아 있다. 낚싯대는 배 뒤편에 꽂아 두었다. ‘어부’는 하는 일이 없으니, 마음이 한가롭다.



# ‘어부’에게 드레스코드가 있다. 

이 그림 속 어부를 들여다보라. 그가 입은 옷은 관료의 평상복 ‘도포’다. 그가 전직 벼슬아치였음을 뜻하는 코드다. 직업적 어부가 아니라 은일자란 뜻이다. 서거정이 위 시에서 언급한 현진자는 청색 삿갓에 녹색 도롱이를 입었다. ‘푸른 도롱이’란 말이 예서 비롯한다. 이 그림엔 달이 떴으니 맑은 날씨다. 도롱이(비옷)가 필요 없다. 

세상 밖 어부라 하여 옷을 함부로 입히면 안 된다. 어부의 도포에 붉은색을 칠했다가 화원의 자리에서 쫓겨 난 사람이 있다. 명나라 화가 대진이다. 붉은색은 황제의 색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대진의 그림제목도 ‘추강독조도’였다. 



# ‘어부’는 강남(江南)에서 노닌다. 

‘어부’가 머무는 곳을 ‘강호(江湖)’라 한다. 조선시대 시를 보면, 그저 ‘강호’에 가겠노라 읊는 경우가 많다. 국문학계에서는 옛 시와 시조에 등장하는 ‘현실’/‘강호’의 공간대립에 대하여 오랜 논의가 있었다. 

‘강호’란 자연에 실재하는 어느 강과 호수가 아니다. 현실의 명리다툼이 없는 곳, 마음이 편하리라 확신되는 곳이었다. 상상의 ‘강호’. 그곳의 물풍경에는 계절의 변화가 우주의 순리처럼 오고 간다. 

모든 상상에는 이미지(image)가 존재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강호’에는 중국 ‘강남(江南)’이 있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알고 있는 천하제일의 경치, 일러 ‘소상팔경’이 그곳이다. 오늘날 중국의 호남성 동정호 일대다. ‘소상팔경’을 상상하는 시와 그림은 고려왕실로부터 조선왕실로 인기를 누렸고, 양반가에 팔폭으로 펼쳐졌던 병풍그림이었다. 

소상팔경의 여덟 경치 중 조선선비들이 특히 애호했던 이미지는 ‘평사낙안’(平沙落雁; 너른 모래벌판에 내려앉는 기러기들)과 ‘동정추월’(洞庭秋月; 동정호에 뜬 가을달)이었다. 믿음의 새요, 질서의 새로 통하는 기러기들이 따뜻한 강남으로 내려앉으니, 보는 이는 안식을 느낀다. 둥근 달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흥효가 그린 ‘강호’에는 이 두 풍경이 조합되어 있다. 



# ‘어부’에도 유형이 있다. 

‘어부’는 물에 산다. 세상의 발길이 이르기 힘든 조건이다. 나에게 ‘어부’라 하면 떠오르는 것은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이다. 겸허한 인성과 집념의 마력. 그것은 헤밍웨이가 멀고 검은 바다를 상상하며 빚어준 환영의 인격이다. 나는 지금까지 세상의 진짜 어부를 만나본 일이 없다. 조선시대 관료들도 그렇지 않았을까. 그들에게도 ‘어부’란 세상 너머의 존재이며, 글 속의 상상어부, 즉 ‘가어옹(假漁翁)’이었다. 

동아시아 문학의 전통 속에서 ‘어부’는 종류가 다양하다. 문사들의 노래문화와 사상철학이 변화하면서 그들이 꿈꾸는 어부상도 따라 변했기 때문이다. 

‘어부’의 기본형은 고대 중국의 노래집 ‘이소경’의 어부다. 초나라 대부 굴원이 바른 말을 고하다가 세상에서 쫓겨났을 때, 어부는 굴원에게 말한다. 물이 깨끗하면 갓끈을 닦고 물이 더러우면 발을 씻을 일이지, 더러운 세상에 깨끗한 마음을 말한 것이 어리석다고. 

굴원은 타협을 원치 않고 끝내 멱라수에 투신했다. 굴원을 추모하는 시문이 조선시대 문헌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굴원처럼 살겠노라 다짐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세상에 달관한 어부의 통찰력이 오히려 매력으로 옛 분들 마음에 파고든 것 같다. 

역사의 실존 인물 강태공은 세상의 리더가 될 어부다. 강태공은 기원전 11세기 중국인이다. 주나라를 부흥시키고 세상의 정의로운 풍속을 일으켰다고 칭송되는 위인이다. 강태공이 무왕의 부름을 받아 재상으로 오르기 전 그는 위수의 어부였다. 강태공형 어부는, 세상을 꿰뚫어 통찰하며 때를 기다리는 잠재적 정치인이다. 조선의 시문과 그림에서 지속적으로 애호되는 유형의 ‘어부’다.

당나라 시인 장지화는 ‘어부사’를 매우 잘 지어 유명하다. 그는 실제로 은일어부의 생활을 했다. 당나라 황실과 귀족들은 그를 상당히 우대해 배와 노비 등을 제공해 주었다. 앞에서 서거정이 부끄럼을 고백할 때 ‘현진자’를 불렀는데 이가 곧 장지화다. 시문으로 명성을 얻고 행복하게 살았던 시인형 ‘어부’다. 

정결한 어부로 엄자릉이 있다. 엄자릉도 ‘후한서’에 기록된 역사적 인물이다. 퇴계 선생 이황이 어부 중 엄자릉을 좋아했다. 동강에서 염소가죽을 걸치고 낚시했던 엄자릉. 그는 한나라 황제 광무제와 어린 시절 동문수학한 벗이었다. 광무제가 그를 아껴 조정으로 불렀으나 엄자릉은 거절했다. 황제와의 하룻밤 일화가 유명하다. 그를 찾아온 황제와 한 방에서 잘 때, 엄자릉이 발을 황제의 배 위에 올려놓고 잤다. 황제와의 인연을 빌미로 출세를 도모하지 않았던 결연함이, 정치권력에 붙어 사는 현대의 소인배들까지 거침없이 조롱한다. 조선의 학자들에게 가장 존경받은 ‘어부’가 엄자릉이었다. 

그 유형이 무엇이든, ‘어부’는 세속적 성공을 바라지 않고 정치권력을 비루하게 여기는 인물이다. 따라서 ‘어부’는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로부터 자유롭다. ‘어부’는 세상 너머에 머물면서 세상을 통찰하는 존재다. 



# ‘어부’를 권하는 학자들

성리학적 정신수양의 추구가 조선의 문인사회에 자리 잡히는 조선중기, 몇몇 유학자들은 어부노래를 다듬어 ‘어부’의 마음으로 수양하라 권면하는 문화캠페인을 벌였다. 그 당시 술자리에서 연주되는 노래와 춤은 그 내용이 음탕해 성리학자들이 이를 사회문제로 판단했던 까닭이다. 대표학자가 농암 선생 이현보(1467∼1555)다. 그는 노랫말을 지어 시동에게 부르게 하고 다시 벗들에게 돌려 읽도록 해 거듭 다듬었다. 

조선사회에 유가문화가 깊숙하게 뿌리를 내리는 거대한 지각변동과 함께 나타났던 문화면 특기사항이었다. 그렇게 다듬어진 곡조 중 유명한 것이 이현보의 ‘어부사’다. 



이 중에 시름없으니, 어부의 생애로다. 

일엽편주를 만경파에 띄워두고. 

인간세상 다 잊었거니 날 가는 줄 알겠느냐.



퇴계 선생이 이현보의 어부노래를 좋아했다. 놀이의 방탕함을 절제하면서 마음을 즐겁게 해주기 때문이라 했다. 노래 속 ‘어부’는 날 밝으면 노닐다가 날 저물면 주막으로 든다. 물 보며 달 보며 술 한 잔을 들이켜면 근심이 사라지고 세상이 잊혀지리. 퇴계 선생도 걸맞게 시를 읊었다. 



강물 보며 술 마시니 높은 뜻 감흥이 일어나,

술 한 잔에 마음의 근심이 눈 녹듯 사라지네.



‘어부’를 상상하는 마음은 이흥효의 또 다른 산수화로 표현되어 있다. 어부의 배는 강가에 정박하고 있다. ‘청렴’(푸른 깃발)이 휘청 꽂힌 주점이 그 곁에 있다. 여기 소개한 이흥효의 그림 두 폭은, 현재 여섯 면으로 엮어져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흥효산수화첩 중 두 면이다. 



# ‘어부’ 그 상상의 기능 


세상을 살며 담당하는 책무는 벗어나기 어렵고, 쉬이 벗어나서도 안 될 일이다. 대제학 서거정이 ‘어부’를 노래할 뿐 어부가 되지 않았던 현실적 이유다. 대제학뿐인가. 새 왕조의 태종은 경복궁이 완성되자 기생에게 어부노래를 부르게 했다. 어부노래를 애써 다듬은 이현보는 76세까지 관직을 떠나지 않았다. 

그림 속에 쓸쓸하게 앉은 저 ‘어부’! 그는 세상을 통치하던 이들이 상상으로 공유하던 존재였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인격의 상징이었다. 옛 분들은 한결같이 그림 속 어부와 더불어 한가롭게 강호를 즐기겠노라 노래했다. 

‘어부’를 노래하는 그들의 심리가 단순하진 않았으리라. ‘어부’는 그 자체로 벼슬살이 고달픔의 반증일 수 있다. 혹은 드러낼 수 없는 권력자의 이면일 수 있다. 속마음은 청렴하다고 주장하고픈 관료들의 자기과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어라고 추적하든 분명한 것은, 마음의 수양을 추구하던 옛 시절 노력의 한 가지 방법이요, 정착된 이미지였다는 점이다.

(※ 이 글의 ‘어부’는 고기를 낚지 않는 이상한 어부다. 즉 어부의 일반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특별명칭이기에 어부에 홑따옴표를 붙여‘어부’라 표기했다.)

<미술사학자>


- 문화일보 2012.11.30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2113001033130025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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