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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현대미술 이야기](12) 신표현주의

진중권

ㆍ독일 예술가들의 독일 이야기 ‘전후 사회사’와 정면으로 맞서다

개념예술과 미니멀리즘, 플럭서스를 거치면서 전통적 의미의 ‘작품’이 사라져갔다. ‘회화’라는 것이 아직도 가능한지 의문이 제기되던 시대에 갑자기 새로운 구상이 나타나,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 미술계를 주도하게 된다. 거대한 포맷, 요란한 주제, 격정적 표현, 두꺼운 임파스토로 이루어진 새로운 구상회화. 이른바 ‘신표현주의’는 뻔뻔할 정도로 복고풍이나,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 개념예술과 미니멀리즘에 익숙한 눈에는 차라리 전복적이며 충격적으로 보였다. 묘한 역설이다. 

■ 새로운 야만인들 

이 신구상의 원조로 종종 추상의 시대에 꿋꿋이 구상을 고집했던 프랜시스 베이컨과 루시안 프로이트를 꼽는다. 하지만 1970~1980년대에 구상회화가 ‘신표현주의’의 이름으로 전면화하는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일군의 독일화가들(게오르크 바젤리츠, 안젤름 키퍼, 외르크 임멘도르프, A R 펭크 등)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동독 출신으로, 그곳에서 공식 교리였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예술훈련을 받은 바 있다. 그들이 가진 구상회화의 취향은 이 경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독일 화가들은 주제와 표현의 그 강렬한 효과 때문에 ‘새로운 야만인’(neue Wilden)이라 불린다. 야만인들 사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게오르크 바젤리츠. 동독 출신이었던 그가 서독으로 이주했을 당시, 서독사회는 두 전체주의 체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예술의 영역에서 이는 나치 예술과 동독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동시에 거리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구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물론 전체주의 예술에 대한 향수를 가진 것으로 오해 받을 수도 있었다.

1960년대에 독일의 미술계는 유럽의 앵포르멜과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 거의 점령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바젤리츠는 이 국제적 추상운동들과도 거리를 두려 했다. 왜냐하면 국제화의 흐름들에 맞서 독일 미술의 지역적 정체성을 다시 확립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그가 의지할 유일한 전통은 전쟁 전의 표현주의밖에 없었다. 표현주의는 독일이 배출한 최초의 국제적 예술운동이자, 구상회화임에도 불구하고 나치 정권에 ‘퇴폐예술’로 낙인찍혀 탄압을 받은 바 있기 때문이다. 



안젤름 키퍼 ‘마가레테’ 1981


■ 민족의 정체성과 주체성 

바젤리츠는 전후 독일사회가 겪은 정체성 위기의 예술적 화신이라 할 수 있다.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말이 곧 나치를 연상시키는 상황에서, 혐의를 벗는 길은 국제적 흐름에 동참하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는 곧 미국이 주도하는 전후의 민주주의와 소비주의에 그대로 투항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젤리츠는 위험하지 않은 표현주의 전통을 다시 끄집어내어 민족적 양식을 세우려 한다. 이 점에서 바젤리츠의 미학은 본질적으로 보수주의적이다. 

바젤리츠와 쇠네베크가 발표한 작품 ‘지옥 선언’(1962)은 이 보수주의 미학의 급진적 출발이었다. 고트프리드 벤, 아르토와 로트레아몽의 어조로 작성된 이 선언문에서 그들은 화가를 니체주의적 영웅으로 묘사한다. 할 포스터에 따르면, 그들이 예술가를 위대한 범죄자로 보는 니체의 시각을 내세운 것은 “전후 독일 민주주의 체제의 구축에 반대”하는 “우익의 반동적 엘리트주의”의 표현으로, “민주주의 일상의 기만과 허위를 혐오했던 바이마르 시대의 초기 파시스트적 태도”에 맞닿아 있다고 한다. 

바젤리츠의 영웅들은 누더기를 걸치고 머리가 너무 작아 영웅이라 하기에는 거북스럽고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이는 민족적 주체성과 정체성을 다시 세운다는 기획 자체가 즉 시대착오(“역사적 오류”)임을 말해주는 듯하다. 그가 구상의 방식을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얼룩이나 흔적으로 사실적 묘사의 관례를 파괴하는 것은 이 정체성 혼란의 또 다른 표현이리라. 바젤리츠는 그림을 거꾸로 그리곤 했다. 내용보다는 형식에 주목하라는 얘기인데, 이 역시 구상의 본질과 배치되는 측면이 있다. 

■ 스스로 부과한 억압장치 

신표현주의 경향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인물은 안젤름 키퍼다. 바젤리츠처럼 키퍼도 표현주의 전통의 연장선 위에서 예술의 민족적 정체성과 지역적 특수성을 수립하려 했다. 양식이나 기법의 면에서 키퍼는 바젤리츠와 매우 유사하다. 다만 유리, 짚, 나무, 식물 등 이물질을 회화에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반(反)회화적 충동을 엿볼 수 있다. 키퍼는 원래 사진에서 출발하여 회화로 넘어 왔다. 하지만 사진을 가지고 작업을 할 때조차도 그는 장인적 생산물로서 회화의 아우라를 의심하지 않았다. 

신표현주의는 형식 위주의 추상회화가 포기해 버린 예술의 발언능력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다. 키퍼는 회화라는 매체로 독일의 참혹한 역사적 기억과 정면으로 대결하려 했다. 이때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아우슈비츠를 다룬 파울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였다. 인물화 작업에서는 횔덜린, 하이데거, 몰트케, 비스마르크 등 유명한 인물들을 다루었다. 이런 식으로 단절된 독일의 문화적 전통을 다시 이으려는 시도에는 위험이 따랐다. 이 인물들이 직간접적으로 나치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키퍼의 주제는 역사를 넘어 독일의 신화와 전설로 확대된다. 여기에도 어떤 불편함이 존재한다. ‘독일적’이라 할 수 있는 신화와 전설의 이미지는 이미 나치의 이데올로기 구축에 오용된 바 있기 때문이다. 전후 독일에서 이 이미지들은 물론 금기의 대상이었다. 키퍼의 업적은 흔히 ‘파시스트 이미저리’(imagery)로만 여겨지던 도상적 전통을 과감하게 복원한 데에 있다. 에릭 센트너에 따르면 키퍼의 작업은 “전후 독일 사회가 스스로 부과한 억압 장치를 해체하는 데에 필요한 시도였다”고 한다. 



외르크 임멘도르프 ‘독일 카페’ 1982~83

■ 독일 카페 

펭크는 바젤리츠보다 20년 늦게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주했다. 그는 정치적 제재보다는 인간이나 토템을 닮은 신(新)원시주의 이미지를 즐겨 그렸다. 펭크의 이미지들은 곧 특유의 그림문자(pictogram)로 발전하는데, 그는 이를 일종의 보편문자와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훗날 그는 이 기획이 실패했다고 선언한다. 픽토그램은 그 표현적 격렬함을 잃고 문양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그의 픽토그램은 머잖아 뉴욕의 지하철에 등장할 바스키아나 키스 해링의 그래피티 예술을 예감한 것처럼 보인다. 

펭크와 함께 작업을 했던 임멘도르프는 독일의 현대사를 주제로 한 작업을 해왔다. 그는 표현주의보다는 초현실주의에 가까운 이미지에 반어와 상징의 뉘앙스를 섞어 정치적 관념을 전달하곤 한다. 가령 그의 대표작인 ‘독일 카페’ 연작(1977~1984)은 레나토 구투소의 ‘그리스 카페’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모두 16점으로 이루어진 대형포맷 작업이다. 여기서 그는 디스코텍에 온 사람들을 통해 동독과 서독의 분단, 나아가 미·소 냉전 체제라는 부조리한 현실을 냉정하게 비웃는다. 

독일의 신표현주의가 누린 국제적 명성에는 세 가지 맥락이 존재했다고 한다. 하나는 파스빈더와 빔 벤더스로 대표되는 ‘뉴 저먼 시네마’로, 이 영화들은 신표현주의 회화와 비슷하게 독일의 역사를 주제로 다루었다. 1980년대 중반 독일사회가 보수화하는 분위기 속에서 “독일의 역사를 정상화”하자며 우익 수정주의자들이 촉발한 ‘역사학자 논쟁’(Historikerstreit)도 독일의 역사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전 세계적인 신구상의 부활 역시 독일의 신표현주의에 주목하게 한 요인 중의 하나였다. 

■ 국제적 신표현주의 

1960년대에 독일에서 시작된 새로운 구상회화는 1970년대 말에 이르면 전 세계적 현상이 된다. 독일에 ‘새로운 야만인들’(neue Wilden)이 있다면, 이탈리아에는 ‘트랜스아방가르드’(trans-avantgurd)가, 프랑스에는 이른바 ‘자유구상’(figuration libre)이 존재했다. 미국에서는 이 흐름이 ‘나쁜 회화’(bad painting), 혹은 ‘신구상회화’(new image painting)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이 모두는 신표현주의가 그저 독일만의 지역적 타당성만을 넘어 국제적 정당성을 갖는 흐름임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1970년대 말에는 구상회화가 부활할 만한 이유가 존재했다. 전후의 2차 모더니즘은 형식주의로 흐르는 바람에 상상력을 자극하고, 정서적 울림을 주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을 거치면서 모더니즘 자체가 이미 종언을 맞고 있었다. 여기서 예술의 새로운 동력을 찾아 과거로 회귀하는 경향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떤 특정한 맥락에서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외려 새로워 보인다. 이것이 이른바 포스트모던의 역설이다. 

미국에서 바젤리츠의 역할을 한 것은 필립 거스턴이었다.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자 중의 하나였던 그는 1960년대 후반 돌연 재현으로 돌아선다. “우리가 추상예술에서 계승한 신화에는 뭔가 우습고 인색한 구석이 있다. 회화는 자율적이며, 순수하며, 자족적이라고 한다. … 하지만 회화는 순수하지 않다. 회화의 연속성을 강요하는 것은 불순물의 조정이다. 우리는 이미지-제작자이며, 이미지를 뒤집어쓴 존재다.” 예술계의 무관심 속에 그는 홀로 인체를 마치 만화의 형상과 같이 왜곡한 이미지를 선보인다. 

■ 신표현주의 논쟁 

정치적·예술적으로 모호했던 전쟁 전의 표현주의처럼 신표현주의 역시 뜨거운 정치적·미학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바젤리츠나 키퍼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저리를 문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술 국가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독일의 ‘이야기’(역사, 신화, 전설 등)를 다루는 것 자체가 이미 정치적으로 위험한 일이다. 독일의 맥락에서 보수주의와 극우성향은 말끔하게 분리되지 않기에, 민족서사의 묘사는 자칫하면 파시스트 이미저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의 시대에 예술의 지역성을 주장하고, 사진의 시대에 장인적 수공이 회화를 고집하고, 대중문화의 시대에 타블로의 고급예술에 집착하는 것도 신표현주의의 보수성이라 할 수 있다. 신표현주의의 이 보수성에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 바로 게르하르트 리히터와 지그마 폴케의 작업이다. 이 두 화가의 국제화 전략은 신표현주의와 대립하는 독일 회화의 또 다른 기둥이다. 평론가 할 포스터는 1970~1980년대의 신표현주의란 “레이건 시대의 보수적 분위기가 예술에 관철된 것”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신표현주의가 비판을 받는 또 다른 지점은 과도하게 시장 친화적(?)이라는 점이다. 사실 개념미술이나 미니멀리즘의 경우 구입할 만한 ‘작품’이랄 게 없다. 바닥에 깔아놓을 벽돌 몇 개나 철판 몇 개가 고작이다. 게다가 해프닝이나 퍼포먼스의 경우에는 아예 물리적 대상으로서 작품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표현주의는 이렇게 ‘작품’ 자체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작품을, 그것도 전통적인 ‘회화’를 부활시켰다. 한마디로 구입할 만한 타블로를 제공함으로써 수집가들에게 큰 인기를 끌며 국제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결국 예술의 ‘수용’이라는 측면에서도 신표현주의는 보수적이었던 셈이다. 할 포스터의 말대로 신표현주의가 레이건 시절의 보수주의를 반영하는 문화 현상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포스트모던의 한 갈래, 말하자면 포스트모던의 급진적 날개와 구별되는 그것의 보수적 날개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 경향신문 2012.11.2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1232139425&code=96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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