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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호의 보물읽기]22. 윤관 장군묘(尹瓘 將軍墓)

장덕호

윤관(?~1111)의 본관은 파평이며 자는 동현(同玄),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고려 문종때 문과에 급제해 숙종 9년(1104년) 동북면행영병마도통이 되어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 정벌에 나섰으나 여진에 패하자 임기응변으로 강화를 맺고 철수했다. 

그후 특수부대인 별무반을 창설, 대원수가 되어 예종 2년(1107년) 부원수 오연총과 함께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아 국방을 수비했다. 

윤관은 문무를 겸한 공신으로 사후인 1130년 예종의 묘정에 배향됐다. 장군의 묘는 묘역 전체 규모가 크고 웅장하며 봉분과 석물이 단을 이루며 자리하고 있다. 봉분 아래는 장대석 모양의 호석을 두르고 봉분 주위에는 곡장을 둘렀다. 정면에 상석이 놓여 있고 왼쪽에는 묘표가 있다. 단 아래에는 망주석과 장명등, 양편에 동자석, 문인석, 무인석, 석양, 석마 등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들 석물들은 최근에 새로 조성한 것이다. 묘역 아래에는 장군의 영정을 봉안한 여충사(麗忠祠)가 있으며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0일 제향을 지낸다.

장군 묘역은 조선시대부터 400여년 동안 계속된 산송(山訟·묘지에 관한 다툼)으로도 유명하다. 
윤관 장군은 고려는 물론이고 조선시대에도 국가로부터 추앙받던 인물이었으나 묘는 실전되어 찾지 못하다가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임을 주장하여 영조 40년(1764년)에 공인됐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조선 현종대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1593∼1662)의 묘가 바로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로인해 양 문중의 산송이 시작됐고 영조는 양 문중의 의견을 모두 수렴하는 해결책을 제시했으나 최근까지 400여년간 산송이 이어져 오다 2007년에야 파평윤씨문중에서는 인근에 대토를 내어주고 청송심씨 문중에서는 묘역을 이장키로 합의해 한국역사상 최장기 산송은 양 문중이 화해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장시 경기도박물관의 발굴 결과 조선중기 복식, 묘지석 등 많은 문화재가 출토되어 경기도박물관에서 전시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 경기일보 2012.8.2

http://www.kyeonggi.com/news/articleView.html?idxno=597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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