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411> 교과서의 변천사

편집부

국내 첫 교과서 ‘소학독본’ … 역사·지리·국제 등 10개 분야가 한 권에
“한국은 교과서 같은 야구를 펼쳤다.”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당시 미국 스포츠채널 해설자가 한국야구대표팀을 칭찬하며 한 말입니다. 우리는 분야를 막론하고 기본기와 실력이 출중하고 배울 점이 많은 사람에게 “교과서 같다”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교과서가 그만큼 권위 있고 정답에 가깝다는 뜻이겠지요. 우리나라의 교과서는 언제 처음 만들어졌고 어떻게 변해 왔을까요. 교과서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조선시대: 천자문·대학·논어가 교과서

개화기 당시 외국인 선교사가 한국 학생들에게 외국어를 가르치는 모습. 서양식 칠판과 탁자, 의자에 상투를 튼 학생들의 모습이 대비돼 이채롭다. [중앙 포토]
1894년 갑오개혁 이전, 교육은 서당과 향교·성균관을 통해 이뤄졌습니다. 주된 교육내용은 물론 유교이념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교재 역시 유교경전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조선 말기의 유학자 이상수는 당시 쓰이던 교재를 크게 세 단계로 분류했습니다. 첫째는 아이들이 ‘천자문’ 등을 통해 한자의 음과 뜻을 배우는 단계입니다. 글자를 배우고 나면 두 번째는 경전의 뜻을 해석하는 단계로 ‘사략’ 등을 통해 유교의 기초적인 정신세계를 배웁니다. 마지막으로 ‘대학’ ‘논어’ 등 본격적인 유교경전을 배우게 됩니다.
개화기(1894~1910): 여학생은 ‘재봉’ 고등학생은 ‘의학’ 배워

서당 대신 근대적인 학교가 도입되고 서양에서 신문물이 들어오면서 기존의 천자문 대신 새로운 교과서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 필요성을 절감했던 건 고종 황제였습니다. 고종은 갑오개혁 다음해인 1895년 ‘교육입국조서’를 통해 “교육은 국가를 보전하는 근본이며 지(智)·덕(德)·체(體)를 교육의 3대 강령으로 삼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학부관제·외국어 학교관제·소학교령 등 법령을 반포합니다. 교과서 편찬에 관한 사항은 학부관제에 규정돼 있습니다. 같은 해 11월 정부가 펴낸 최초의 교과서인 국민소학독본이 발행됩니다. 국제정세·역사·지리·기술 등 10여 개 분야를 이 한 권의 교과서로 모두 배웠습니다. 1896년 정부가 교과서 편찬에 쓴 돈은 5000원(전체 국가 예산의 0.08%)였다고 합니다.

당시 초·중등 학제는 소학교(현재 초등학교)와 중학교(현재 중·고등학교)로 구분됐습니다. 소학교는 저학년인 심상과(尋常科) 3년 동안 독서와 작문·역사·산술·한국지리 등 모두 10과목을 배웠습니다. 이후 2~3년간의 고등과(高等科)에선 외국지리와 외국역사를 배웠습니다. 여학생의 경우에는 재봉 과목도 있었다고 하네요. 중학교 역시 4년간의 심상과와 3년간의 고등과로 구분돼 있습니다. 심상과에선 초등학교와 비슷한 과목을 좀 더 심화해서 배웠습니다. 고등과 학생들은 특이하게 의학이나 측량 과목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대학들처럼 당시에도 중학교들은 입학생을 모으기 위해 교과목 소개와 함께 신문에 모집광고를 내기도 했습니다.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면서 교과서도 친일성향을 띠게 됩니다. 이에 반대해 조선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민간교과서가 발행되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민간교과서만 117종에 이릅니다. 그러나 1908년 일본은 ‘교과용 도서 검정규정’을 마련해 절반이 넘는 62종의 인가를 취소해 버립니다.
일제강점기(1910~1945): ‘소학독본’ 불온 서적으로 금기

일본은 1910년 한일합병과 동시에 조선인이 발행한 모든 출판물에 대한 단속을 시작합니다. 교과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당시 책이름에 ‘대한(大韓)’이 들어간 도서는 모두 출판을 금지했다고 합니다. 국민소학독본이 계몽사상을 반영했다는 이유로 불온 도서로 지목되기도 합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36년 동안 국어와 국사는 한국어와 한국사를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국어는 일본어를 뜻했고 국사는 곧 일본사였습니다. 지리도 일본지리를 배워야 했습니다. 당시 교과서는 식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의 힘과 우수성을 강조하고 한국인의 열등성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채워졌습니다. 교과서를 통해 ‘내선일체(內鮮一體·일본과 조선은 하나)’와 ‘황국신민(皇國臣民·천황의 신하 된 백성)’ 사상을 주입했음은 물론입니다. 1938년 이후 사범학교 등에선 아예 조선어를 정규과목에서 빼버리고 학교장이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해방직후(1945~1954): 광복 석 달 만에 ‘한글첫걸음’ 출간

해방 직후에는 학생뿐 아니라 전 국민에게 국어교육이 시급했습니다. 민족의식 고취도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급한 대로 일본어 교과서를 번역해서 쓰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내용이 제국주의에 대한 찬양이 대부분이어서 사실상 불가능했지요. 이에 미 군정청은 한국교육심의회를 발족시키고 해방 석 달 만인 1945년 11월 국어교과서 ‘한글첫걸음’을 출판합니다. 초·중·고생들이 모두 이 교재로 한글을 배웠습니다. 초판만 100만 부가 넘게 발행될 정도로 인기였다고 하네요. 이후 국어독본·음악·습자·지리 등의 교과서가 차례로 간행됩니다.

광복 후 2년 동안 교과서 편찬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미 군정청 발표에 따르면 1947년 당시 발간된 교과서는 150종(초등 41종, 중등 70종, 대학 및 전문학교 23종 등)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교과서를 찍어낼 한글 활자를 만드는 것부터 문제였습니다. 일제시대 한글 말살정책과 전시 물자 징발로 활자가 대부분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종이도 부족해 다른 책보다 교과서를 먼저 찍도록 했습니다.
해방 후 각종 제도를 새롭게 정비하던 시기라 교육 부문의 변화도 많았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홍익인간이 교육의 기본이념이 됐고, 6(초)-3(중)-3(고)-4(대학) 학제가 만들어진 것도 이때입니다.
차츰 자리를 잡아가던 교육제도는 1950년 6·25전쟁 발발로 위기를 맞습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교육열은 전시에도 계속됐습니다. 행정력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학교가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문교부는 ‘전시하 교육특별조치 요강’을 마련해 전시용 교과서를 발행했습니다. 전쟁 통이다 보니 통일의 당위성과 반공의식을 강조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교과서 이름도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거나 ‘침략자는 누구냐’ 등이었습니다. 심지어 교과서 제목이 ‘탱크’ ‘군함’ ‘비행기’인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1951~53년 전쟁 중에 발행된 교과서만 4100만 부에 이른다고 하니 배움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지요.
제1~7차 교육과정(1954~현재): 1979년부터 컬러 화보 실어

전쟁이 끝나자 정부는 5~10년 단위로 교육과정을 새로 편성해 교과서를 발행했습니다. 제1차 교육과정(1955~63년)에선 처음으로 국정교과서와 검인정 교과서를 구분합니다. 국정(1종)교과서는 정부가 저작권을 갖고 직접 발행하는 교과서를, 검인정(2종)교과서는 민간에서 만들어 정부나 시·도교육감의 승인을 받은 교과서를 뜻합니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는 모든 교과서를 국정으로 발행했고, 중·고등학교는 과목에 따라 두 가지를 함께 사용했습니다. 국어는 국정교과서를 사용했는데 박두진의 ‘해’, 조지훈의 ‘승무’, 이육사의 ‘청포도’ 등 유명한 문학작품이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 서문 기억하시나요. 1968년 제정된 이 헌장이 교과서 둘째 장에 의무적으로 실리게 된 건 제2차 교육과정(1963~73년)이 한창 시행되던 1970년부터입니다. 이 시기에는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교과서에서도 자주성·생산성·효용성이 강조됩니다. 일부 교과서는 박정희 정부가 강조했던 새마을 정신을 비중 있게 다루기도 했습니다.
제3차 교육과정(1973~1981년)은 유신 헌법의 이념을 가르치는 것이 주목적이었습니다. 국어·윤리·사회 등의 과목에서 한국적 민주주의와 유신 이념 등을 의무적으로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암울했던 시기이지만 변화도 있었습니다. 온통 흑백이던 교과서에 1979년부턴 6쪽 이내의 컬러 화보를 싣도록 했습니다. 일본어가 독일어·프랑스어·중국어·에스파냐어와 함께 제2외국어 과목에 포함된 것도 이때입니다.
이후 전두환 대통령 시절인 제4차 교육과정(1981~87년)에선 표지-화보-머리말-차례-본문-찾아보기로 이어지는 6단계 골격이 갖춰졌고 제5차 교육과정(1987~92년)부턴 1과목 다(多)교과서제가 도입됩니다. 예를 들어 국어의 경우 말하기·듣기·읽기·쓰기로, 산수는 산수·산수익힘책으로 나눠 배우는 식입니다.
문민정부 들어 시작된 제6차 교육과정(1992~97)에선 단순 교과서 외에도 비디오·오디오 자료 개발이 시작됩니다. 현재 시행 중인 제7차 교육과정(1997~ )에선 수준별 교과서가 편찬됐고, 교과서마다 출처 및 인용자료를 소개해 신뢰도를 높였습니다.
이한길기자
-한국일보 2012.2.29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2/02/29/7128777.html?cloc=olink|article|default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