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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만의 현대미술 뒤집어 보기 <37> 별들의 전시 '싱싱미전'

최태만

창작의 자유 요구 중국판 독립미술전
지난주에 소개했던 벽동인회처럼 중국에서도 기성의 권위에 대한 도전과 창작의 자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 형식의 전시가 1979년 9월 27일 처음으로 노천에서 열렸다. '별들의 전시'를 의미하는 '싱싱미전(星星美展)'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공식 미술로 채택했다. 특히 문화혁명 시기는 마오쩌둥의 우상화가 절정에 이르는 한편 문화예술은 암흑기를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1976년 4월 마오 주석이 사망하고, 문화혁명 동안 권력을 휘두르던 4인방이 숙청되면서 덩샤오핑의 개방개혁 정책으로 문화예술에서도 제한적으로나마 자유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기에 제1차 천안문 사태의 원인을 제공했던 저우언라이의 사망도 중국 문화예술의 흐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노련한 외교관이자 행정가인 저우 총리가 마오에 앞서 1976년 1월 사망하자 4월 5일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천안문광장에 모인 추모 인파는 4인방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마오 이후 권력을 장악하려던 4인방은 무장병력을 동원해 시위 군중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저우의 지원을 받던 덩샤오핑에게 사태의 책임을 물어 권력으로부터 축출했다. 이때 황루이(黃銳)라는 청년이 천안문광장에서 '반혁명적인 시'를 낭송한 혐의로 체포, 구금되었는데 그가 국립미술관인 중국미술관의 철제 담에서 열린 싱싱미전의 기획자였다.

1952년 베이징에서 태어난 황루이는 문화혁명의 광풍 속에서 중등교육을 마친 1968년 내몽골로 하방(下放)돼 1975년 베이징으로 돌아왔으나 1979년까지 베이징의 피혁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천안문광장에서의 시낭송으로 사흘 동안 구금됐다 풀려난 후 중앙미술학원 입학시험에 에 떨어진 그는 젊은 문학가들과 함께 1978년 12월 '오늘(今天)'이란 잡지를 창간했다.

예술계의 해빙 분위기 속에서 황루이는 주제나 형식, 장르나 재료에 상관하지 않고 모든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운 아마추어 청년작가들의 자발적인 전시를 위해 동지들을 규합했다. 한마디로 중국판 앵데팡당 즉, 독립미술전이라 할 수 있는 싱싱미전은 이렇게 탄생했다. 황루이는 '오늘'을 인쇄하면서 알게된 마더셩(馬德升)과 함께 베이징시 미술가협회를 찾아가 '건국30주년 기념 미술전'이 열릴 예정이던 중국미술관의 철책에서 전시할 것을 신청해 허락을 받았다. 자유주의, 개인주의, 형식주의를 주창하는 선언문을 발표하며 행사가 막을 올리자마자 미술계의 주요 인사는 물론 호기심에 찬 많은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튿날 '전시취소명령서'가 붙었고 경찰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을 감시하자 분위기는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참여 작가는 물론 많은 저항적인 예술가들은 이 사태를 예술의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규정하며 국경일인 10월 1일 이를 행동으로 표현하기로 결의했다. 시위는 마침내 민주정치를 원한다는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발전했다.

중국미술관 동쪽 공원의 철책에서 철거된 작품들은 11월 23일 베이하이공원에 있던 한 화랑에서 다시 열렸다. 1983년 중국정부가 예술에 대한 탄압을 제기하자 황루이는 사귀던 일본 여성과 함께 일본으로 떠나 2002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싱싱미전은 중국 현대미술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국민대 교수·미술평론가

-국제신문 2012.2.13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20213.2202019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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