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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만의 현대미술 뒤집어 보기 <31> 백남준의 자서전 다시 쓰기

최태만

생전에 백남준은 너무 많은 일을 저질렀다. 그는 예술가이자 무당이었고, 문화테러리스트였으며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을 지닌 선구자였다. 플럭서스의 동료 볼프 포스텔의 요청에 따라 자신이 직접 작성한 자서전에서 그는 '1931년 9월 31일 나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쾌락을 음미하는 동안 잉태되었다'고 적었다. 음력으로는 6월 17일이지만 백남준의 학교서류와 여권에는 7월 20일을 공식적인 생일로 기록하고 있다.


백남준은 자신이 태어난 지 일 년 후인 1932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그래서 '1932년 7월 20일 나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손자로 태어났다'고 썼다. 그렇다면 그는 1931년에 태어났지만 공식적인 생년월일은 1932년 7월 20일이 되는 셈이다.

1933년에 그는 한 살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백윤수는 1916년 대창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큰돈을 번 사업가이자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인 거부였다. 백남준의 부친 백낙승은 메이지대학 법률과와 니혼대학 상과를 졸업한 엘리트였고, 1930년대 말 회사의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백낙승은 태평양전쟁 중 일본 관동군사령부 헌병대와 결탁하여 직물을 중국에 밀수출하여 떼돈을 벌었다. 일제 식민 치하에서 백낙승은 비행기 제조회사를 설립하고 일본 군부에 창씨개명한 집안이름을 따서 '히라카와(白川)'라고 이름붙인 비행기를 헌납했다.

1945년에 그는 열세 살이었다.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맞아 MBC에서 제작한 '세계 속의 한국인, 백남준의 팔월'이란 특집 다큐멘터리에서 백남준은 아버지의 친일행각에 대해 솔직하게 고백했다. 해방을 앞둔 5월과 6월 사이 아버지와 큰형은 살아남을 궁리를 하느라 전전긍긍했지만 해방 후 혼란기에 그의 집은 박헌영, 여운형, 한민당 대표, 한독당 대표가 모여 '5당 회의'란 것을 개최하기도 했다고 한다. 경기중학에 다니던 백남준은 독서회니 공산당 세포니 하며 분주했다. 조선 최고 재벌의 막내아들이 공산주의자가 된 것이다.

1950년에 그는 열여덟 살이었다. 자서전에서 그는 '1950년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해로 외국의 '원조'는 복잡했다. 우리가 거절할 권리도 없는데 과연 원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까?'라고 적었다. 1954년 그는 스물두 살이었고 처음으로 여자와 별로 대단치 않은 섹스를 했다.

1965년에 '만일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서른세 살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이 자서전은 1964년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1982년 '만일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쉰 살이 될 것이다'라고 썼다. 그해 그는 휘트니미국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었다.

1986년에 펴낸 자전적 에세이 '보이스 복스'에서 그는 '나도 이제 쉰에서 다섯이 넘었으니 차차 죽는 연습을 해야겠다. 예전 어른이면 지관을 데리고 이상적인 묘처를 찾을 나이가 되었으나, 나는 돈도 없고 요새는 땅값도 비싸졌으니 그런 국토낭비계획은 없애고 오붓하게 죽는 재미를 만드는 것이 상책이다'라고 적었다. 2032년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백 살이 될 것이다'라고 적었으나 그는 2006년 1월 29일 지구를 떠났다. 그는 죽었으나 '2932년 천 살, 11932년 만 살이 될 것이다'라고 자서전에서 썼던 것처럼 만일 지구가 종말을 맞이하지 않는다면 11932년까지 살아남은 지구인들의 인구에 회자되며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 국제신문 2011.12.26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key=20111226.22021193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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