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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만의 현대미술 뒤집어 보기 <27> 오카모토 타로의 '태양의 탑'

최태만

오사카의 엑스포기념공원에 가면 들판에 덩그러니 서있는 '태양의 탑'을 볼 수 있다. 이 탑은 오사카엑스포의 이념인 '인류의 진보와 조화'에 걸맞지 않은 조야한 형태와 기이하고 신화적인 형상을 하고 있다. 우유병의 형태에서 착안, 철골 철근콘크리트 등을 사용해 조립한 탑의 외관은 옆구리에 뿔처럼 달린 두 개의 팔과 발광판처럼 보이는 '황금의 얼굴'로 이루어져 있어서 날개가 퇴화한 새를 연상시키는가 하면 가슴 부위에 달린 '태양의 얼굴' 때문에 신화 속 괴수를 떠올리게도 만든다.


탄게 켄조가 설계한 '대지붕'의 가운데 부위를 뚫고 세워진 이 탑은 지하로부터 공중으로 사람들을 수송하는 에스컬레이터의 샤프트를 둘러싼 통로였다. 오카모토 타로는 이 탑을 과거-현재-미래의 시간흐름에 따라 지하-지상-공중으로 연결된 세 개 층의 공간으로 설계했다.

지하공간은 '생명의 신비'를 주제로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민속공예품과 인류학적인 물건들을 통해 원시적 삶을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현대의 에너지'를 주제로 한 지상부분을 거쳐 대지붕으로 올라가기 위해 강철로 만든 높이 41m의 '생명의 나무'가 설치된 통로를 통과해야만 했다. 이 나무의 줄기와 가지에는 원생동물로부터 공룡, 인류에 이르는 292개의 생물모형이 달려 있어서 관람객들은 생명의 진화과정을 계통적으로 보여주는 진화의 나무를 보면서 미래 주거공간인 대지붕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탑을 의뢰받은 타로는 엑스포의 주제야말로 진보만 내세운 근대의 프로젝트가 지닌 모순을 은폐하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인간은 전혀 진보하지 않았다는 자신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이처럼 비미래지향적이고 초현실적인 구조물을 설계했던 것이다.

1911년에 카와사키 시에서 태어난 타로는 유명한 만화가인 오카모토 이페이의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1929년 부모를 따라 유럽으로 갔다. 그는 파리에서 민족학자인 마르셀 모스의 지도를 받으며 오세아니아 원주민의 제의에 대해 연구하고, 조르주 바타이유가 설립한 종교사회학 학교에도 다녔다. 초현실주의 시인 앙드레 브르통과도 교류하던 그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인 1940년에 귀국했다.

총력전체제에 동원돼 종군했던 타로는 평생 파리에 남아 예술활동을 하려고 했던 자신의 뜻을 꺾어버린 일본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전위예술을 선택했다. 패전 후 회화작업과 함께 고고학적·인류학적 연구를 진행하면서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쳤다. 그는 오사카엑스포 주제관을 위한 상징조형물의 제작을 의뢰받자 즉시 자신의 생각을 '태양의 탑'을 통해 실천에 옮겼다. 미술평론가 사와라기 노이는 이 사실에 주목하여 한쪽에서는 진보를 주장하고 다른 쪽에서는 '진보란 없다'라고 말하는 모순된 상황을 같은 장소에서 교차시키는 것이 타로의 실천이자 세계박람회란 국가적인 축제의 중심에서 해소하지 못한 모순을 단숨에 폭발시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고 해석했다.

오사카엑스포가 끝나자마자 일본은 대부분의 건물과 조형물들을 철거했지만 1975년 '태양의 탑'만은 영구보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지하공간은 매립하고 탑 내부도 철거 후 폐쇄했기 때문에 현재 볼 수 있는 것은 외형뿐이다. 1980년대 이후 오카모토 타로의 존재는 일본 미술계에서도 급속하게 망각되었다. 그러나 1980년 한 광고에 출연한 그는 '예술은 폭발이다'라고 외쳤다. 타로는 1996년 사망했다. 사와라기 노이는 절규와도 같은 타로의 외침을 '태양의 탑'을 새롭게 해석하는 핵심어로 포착한 미술평론가였다.

-국제신문 2011.11.28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10&key=20111128.22021193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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