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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만의 현대미술 뒤집어 보기 <7> 김병기, 남포동 다방서 피카소와 결별 선언

최태만

1954년 발행된 잡지 '문학예술'의 창간호에 김병기는 1952년 어느 날 부산 남포동의 한 다방에서 낭독했다는 '굿바이 피카소'란 글을 발표했다. 그가 피카소와 결별을 선언한 것은 '타임'에 소개된 '한국에서의 학살' 때문이었다. 당시 다방에 모였던 미술가들에게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타임'과 같은 시사지는 현대미술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매체였다.
김병기는 '한국에서의 학살'에 대해 '미군 기계화 부대가 벌거숭이 우리 민중을 향해 총을 쏘는 극심한 선전미술'이라고 소개했다. 북한에 있던 최승희의 남편이자 열성적인 좌익문학가인 안막이 그것을 북한에 유리하도록 대서특필한 사실도 그를 자극했다.
그는 결별선언문에서 피카소의 '전쟁'과 '평화'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피카소는 발로리스의 한 지역 유지로부터 로마네스크 풍의 낡은 성당('평화의 사원')을 장식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두 점의 대형그림을 1952년 10월에 완성했다.
두 그림 중 '전쟁'은 창과 방패, 정의의 상징인 저울을 든 남자 전사와 전쟁을 상징하는 괴물을 병치시킨 것이다. 전사의 손에 쥔 방패에는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가 그려져 있다. 반면에 전쟁을 상징하는 칼, 창, 도끼를 휘두르는 병사들의 실루엣을 경계로 맞은편에는 머리에 뿔이 달린 괴물이 한 손으로 피묻은 칼을 휘두르고 있으며 다른 손으로는 해충을 퍼뜨리고 있다.
'전쟁'에 등장하는 도상 중에서 서로 대척지점에 있는 비둘기와 해충은 한국전쟁과 반전운동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특히 해충은 북한과 중국이 선전했던 세균전에 대해 암시한 개연성도 있다. 당시 북한정권 외무상 박헌영은 1951년 5월 유엔에 미군이 1950년 12월과 이듬해 1월에 걸쳐 천연두를 퍼뜨렸다고 공식항의했다. 중국과 소련의 언론은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으며 '뤼마니테'(프랑스 공산당 기관지)역시 이 선전전에 동조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세균전에 대한 의혹은 북한이 이녹, 퀸, 오닐 등의 미군 포로들의 자백을 공개하면서 증폭되었다.
때마침 피카소의 친구이자 문필가인 르와가 프랑스 공산당원의 자격으로 1952년 6월 북한을 방문하여 이녹을 만났을 때 세균전에 대한 폭로가 북한의 강요에 의한 거짓자백이자 석방을 전제로 꾸며낸 이야기라는 고백을 듣고 그 사실을 서방언론에 발표했다. 따라서 '전쟁'에 나오는 해충이 한국에서의 세균전을 상징한다는 것은 추정에 불과하다. 게다가 당시 세균전의 진위여부에 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음을 감안할 때 피카소가 미군의 부도덕성을 공격하기 위해 이런 이미지를 채택했을 것이란 해석은 설득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병기는 피카소가 '레지스탕스의 시기에 코뮤니스트들이 가장 용감했다'는 소박한 동기에서 '한국에서의 학살'을 제작했을 것으로 추론하며 '코뮤니스트가 된 이후에 당신의 작품이 의도하는 에스프리가 점점 피상적인 리얼리티의 파악으로 흐르고 있다'고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과 '평화'에 대해서도 '치졸한 극락도와 지옥도로 변하였다'고 단정했다.
김병기의 시각에 피카소의 작품들은 리얼리티 정신을 배반한 것이었고, 더욱이 그가 공산당에 가입한 사실을 강조해 이 그림들이 코뮤니스트의 공식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단정했던 것이다. 김병기의 시각은 냉전체제 아래 미국사회를 휩쓸었던 매카시즘의 정책과 정서에 의해 강화된 반공주의적 정보만을 취득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즉 김병기의 결별선언은 이런 반공정서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 국제신문 2011.6.26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key=20110627.2202020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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