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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만의 현대미술 뒤집어 보기 <6> 피카소와 한국전쟁

최태만

황해도 신천군 사건 다룬 문제작 '한국에서의 학살'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을 들 수 있다. 피카소는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인 '뤼마니테'가 전쟁화보와 함께 전쟁의 전개양상에 대해 상세하게 보도함으로써 프랑스는 물론 유럽의 많은 지식인이 한국전쟁을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인식하였으며 그에 부응해 반전평화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됐다.
당시 프랑스의 발로리스에 체류하고 있던 피카소는 프랑스 공산당의 요청으로 '뤼마니테'가 전하는 한국전쟁에 대한 기사를 참고하며 1950년 9월부터 제작에 착수, 1951년 1월 18일 '한국에서의 학살'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황해도 신천군에서 벌어진 학살사건을 내용으로 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미군이 신천군 인구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5383명을 살해했다는 소문이 전해지면서 전 세계의 좌익이나 진보운동진영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한국전쟁 전문가인 박명림의 연구에 의하면 이 사건은 미군에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라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반공우익 민간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일 가능성이 크다. 즉 북한군이 황해도에서 퇴각하면서 우익민간인 400여 명을 살해하자 한국군의 북진에 앞서 광복동지회를 결성한 신천지역 우익인사들이 10월 13일 봉기를 결행, 공산정권에 부역한 자들을 닥치는 대로 숙청한 결과 600여 명의 좌익인사들이 살해당했던 것이다. 결국 신천학살은 우익들의 반공 봉기과정에서 빚어진 좌우익의 상호 살육전이었다.
그러나 신천학살은 피카소가 그림을 구상한 이후에 일어났으며 더욱이 신천학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신천학살을 주제로 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피카소는 '뤼마니테'가 전하는 기사에 의존하여 한국전쟁을 상상했고,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이 가졌던 보편적인 반전평화사상에 따라 이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마치 기계처럼 무자비한 처형을 집행하는 군인과 그 앞에선 희생자를 대비시킨 작품의 구도와 형식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점령군에 맞선 스페인 마드리드 시민들의 저항을 잔혹하게 보복한 현장을 그린 고야의 '1808년 5월 3일'과 마네의 '맥시밀리언 황제의 처형'으로부터 빌려온 것으로써 피카소는 그것을 입체주의와 자신이 1920년대부터 추구했던 신고전주의 방식으로 번안했던 것이다.
미군 당국은 즉각 학살 연루를 부정했으며, 프랑스공산당조차도 이 그림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성취하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한국에서의 학살'에서 전쟁에 대해 반대한다는 메시지와 보편적인 휴머니즘 이외의 그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은 '게르니카'가 바스크인들이 사는 도시에 대한 융단폭격의 참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전쟁을 도덕의 차원으로 바라보고 있는 피카소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학살'이 1951년 '살롱드메'에 출품됐다는 소식을 접한 미국 미술계는 혼란과 당혹에 빠졌다. 특히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피카소가 미국을 한국전쟁의 원흉으로 몰고 가는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책동에 동원된 위험인물이자 공산주의자이며 심지어 소련의 첩자로 분류하여 25년간 그를 사찰했다.
이 작품이 임시수도 부산으로 피란한 미술가들에게 알려지면서 피카소는 한국에서도 논란의 중심으로 떠올랐으며, 김병기는 부산의 한 다방에서 피카소와의 결별을 선언하였다. 이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다루고자 한다.
국민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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