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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만의 현대미술 뒤집어 보기 <5> 밀다원과 부산시청 벽에 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최태만

1·4 후퇴 후 피란처 부산은 김동리의 소설 '밀다원시대'가 묘사한 분위기 그대로였다. 그때의 예술가들에게는 낮에 다방 구석에서 하루종일 소일하다 저녁에는 대포 먹을 일이 생기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었다. 소설에서 박운삼이란 인물로 묘사된 젊은 낭만파 시인 전봉래는 빈곤과 고독, 실연의 슬픔까지 겹쳐 '십 분이 지났다. 눈시울이 무거워진다. 찬란한 이 세기에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진 않았소. …바야흐로 음악이 흐른다'는 메모를 남기고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그는 해방 후 평양에서 월남했기 때문에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동생 전봉건과 함께 북한 정치보위부를 피해 숨어 지냈다. 서울수복 후 동생은 입대하고 자신은 부산으로 내려왔으나 가혹한 현실에 좌절하여 1951년 밀다원에서 음독자살하고 말았다. 전봉래의 자살로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피란 온 예술가들의 사랑방으로, 미술 전시관으로 애용되던 밀다원은 문을 닫았다.
1952년 5월 문신, 김훈, 권옥연, 이준은 광복동 미화당에서 후반기 동인전을 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살아봐야 '20세기 후반까지'라는 다소 염세적인 생각으로 '후반기'란 명칭을 붙였다. 이처럼 미술가들은 종군기록화전 외에도 밀다원, 르네상스와 같은 예술가들이 주로 모이는 찻집에서 전시를 열었다.
그러나 전쟁은 이들의 삶을 고단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일거리를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장우성, 이상범, 김은호, 서세옥, 장운상, 박세원 등 부산으로 내려온 화가들은 호구지책으로 영도에 있는 대한도자기 회사에서 도자기 그림을 그리러 다녔다. 그런가 하면 박수근과 같은 화가들은 미군부대 초상화 반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으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부산 피란시절 몇 명의 화가들이 당시 문교부 등의 정부청사가 입주해 있던 부산시청 외벽에 한국전쟁 발발 2주년을 기념하여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모방한 그림을 그려 붙였다는 사실이다.
이준에 따르면 이 그림은 당시 공보부 처장이던 이헌구가 전쟁으로 생활고에 허덕이던 작가들을 도우려는 생각으로 이뤄졌는데, 그린 사람은 김환기, 김병기, 남관 등이었다고 한다. 이준이 지적했던 것처럼 '비록 이 그림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국민적 계몽에 목적이 있었다고 하지만 화단의 대표적인 화가들의 작품이라면 소재나 내용이 좀 더 창작적'이어야 했으나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모사했기 때문에 맹렬한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문교부 현판이 붙은 부산시청 건물 외벽에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변용한 그림은 걸려 있으나, 이준이 거론한 세 작가 중 누구도 이 작품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다. 김병기는 이 작품과 자신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밝혔고, 남관 역시 그 시점에 일본에 있었다고 했다. 시청 벽에 내걸린 그림을 촬영한 사진으로만 알려진 이 작품의 제작과정에 참여한 작가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이화여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조은정 씨의 논문을 통해 공개된 바 있다.
이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규명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피란살이를 하던 화가들이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처지였으므로 이런 그림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음을 무시할 수도 없다. 게다가 당시 공보부에 근무하던 이헌구의 개인적 발상이었는지는 더 추적, 조사해야 할 문제지만 시청 벽면에 이런 그림을 걸었다는 것에서 임시수도를 지키던 관료들의 요구와 당장 돈이 필요한 미술가들의 이해관계가 빚어낸 결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국제신문 2011.06.12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key=20110613.2202120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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