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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진의 미술관 속 로스쿨 <1> 히틀러가 전시에도 돈 주고 미술품 사들인 까닭

김형진

사람들은 누구나 유명해지고 돈을 벌면 어린 시절 꿈꾸었던 일을 하고 싶어 한다. 18세에 대도시에 온 가난한 시골 소년은 유명한 미술학교에 들어가 미술가로 성공해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뜻밖에 입학시험에서 떨어지자 소년은 길거리에서 관광객들에게 엽서를 그려주는 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낙담한 소년은 재수를 해서 다시 한번 미술학교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불합격. 그때 마침 전쟁이 일어나자 더 이상 생계를 이어가기조차 어려워진 소년은 미술가가 되는 것을 단념하고 군대에 입대하게 된다. 그 소년이 나중에 이웃나라 독일에 가서 총통이 되어 이름을 세상에 떨치게 된 아돌프 히틀러다.
히틀러는 어린 시절 이루지 못한 미술가의 꿈을 늘 아쉬워했다. 자기가 쓴 책 『나의 투쟁』이 잘 팔려서 인세가 들어오자 그는 무엇보다도 미술품을 사서 모으기 시작했다. 총통이 된 이후에는 고향인 오스트리아의 린츠에 엄청난 규모로 총통미술관을 짓고 싶어 했다.
히틀러는 총통미술관을 빛낼 미술품을 유럽 각지에서 수집하도록 지시했다. 이를 위해 심복 히믈러의 비밀 경찰과 괴링의 부대들이 총동원됐다. 나중에 나치 독일은 미술품 수집을 위해 이른바 ‘로젠버그 특임대’란 특수조직까지 만들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해외 미술품 수집을 위한 범정부적 조직으로는 세계 최초의 조직이었을 것이다.
로젠버그 특임대는 나치에 점령된 유럽 곳곳에서 미술품을 빼앗기도 했지만 대부분 대가를 주고 구매했다. 당시에는 유럽이 나치에 점령되어 있었고 경제 사정이 아주 나빴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나치에 그림을 헐값에 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나치는 서유럽에서 수십 만 점의 소중한 미술품을 확보했다.
그런데 나치는 왜 미술품을 주인들에게서 빼앗지 않고 굳이 구매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국제법 때문이었을 것이다. 빈번하게 전쟁을 해온 유럽 국가들은 전쟁 중에 약탈당하거나 파괴되는 미술품 문제에 대해 오래전부터 국제법을 가지고 있었다. 중세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약탈에서 보듯이 옛날에는 침략군이 전쟁에서 이기면 점령지의 보물이나 미술품을 약탈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난 후 맺어진 파리 조약에서 유럽 국가들은 처음으로 약탈 미술품의 반환과 같은 문제를 국제법의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어 1874년의 브뤼셀 선언, 그리고 1899년과 1907년에 각각 체결된 헤이그 협약을 통해 유럽에서는 전시에도 승전국이 점령지의 미술품을 약탈해서는 안 되며 필요한 미술품은 대가를 주고 구매해야 한다는 원칙이 국제법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도 프랑스를 점령했지만 루브르 박물관의 명작들을 마구 약탈하지는 않았고 네덜란드나 벨기에의 미술관들도 전쟁 말기까지는 나치의 약탈을 피할 수 있었다.
한편 전쟁이 계속되면서 연합군의 공습이 심해지자 나치는 그동안 모아놓은 유럽의 미술품들을 알프스산맥 속 소금광산 같은 곳으로 옮겨 보관했다. 전황이 더욱 불리해져서 동쪽에서는 소련군이, 서쪽에서는 미군이 몰려오자 절망적 상황에 빠진 나치는 산 속에 숨겨놓은 미술품을 모두 파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으나 막상 실제로 파괴하지는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연합군은 미술품의 일부를 주인들에게 돌려주었지만 나치가 가져간 미술품 중 상당수는 전쟁 말기의 혼란 속에 영원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히틀러는 미술을 좋아했으며 괴링이나 슈피어와 같은 나치 고위층 인사들도 당시에는 미술애호가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나치 고위층 인사들은 그리스와 로마 양식의 고전 미술은 찬양했지만 당시에 유행하던 큐비즘·다다이즘·초현실주의 같은 현대 미술은 경멸했다. 문화에 나름대로 감각이 있던 히틀러는 미술이 대중에 미치는 영향력을 잘 알고 있었는데, 이런 ‘퇴폐적인’ 현대 미술이 독일 국민의 정서를 오염시킨다는 걱정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1933년 드디어 나치가 정권을 잡게 되자 독일 정부는 모든 종류의 현대 미술 작품을 ‘퇴폐적’이라고 비난하며 탄압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샤갈, 마티스, 피카소, 고흐와 같은 거장들의 작품까지도 심한 탄압을 받게 됐다. 마침내 1937년 이른바 ‘퇴폐미술전’을 계기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활짝 꽃피웠던 독일 현대 미술에 조종이 울렸다. 나치 치하에서 많은 명작이 불태워졌다. 이른바 ‘퇴폐’ 미술 작가들은 파울 클레처럼 해외로 망명하거나 오토 딕스처럼 조용히 시골에 숨어 살아야 했다. 히틀러는 스스로가 화가였으며 독일 미술을 몹시 사랑했고 미술 수집에 욕심이 많았다. 그랬던 그가 결국 독일의 현대 미술을 한동안 매장시키고 인류가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거장들의 작품을 대거 역사에서 사라지게 한 것은 역사의 슬픈 아이러니일 것이다. 그때 순진했던 18세 시골 소년이 대도시 미술학교에 합격해서 그저 화가로서의 길을 걸었더라면 그를 위해서나 미술계를 위해서나 더욱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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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진씨는 미국 변호사로 법무법인 정세에서 문화산업 분야를 맡고 있다.『미술법』『화엄경영전략』 등을 썼다.
중앙선데이, 2011. 3. 20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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