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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미술평론 당선작] 문자도(文字圖)의 서민풍류(庶民風流)와 현대회화의 갱신원리

편집부

- 유종인
1. 문자의 독성(毒性)과 그 해독(解毒/解讀)
문자는 쓰는[書] 것이다. 그러나 문자를 그리는[畵]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때가 있었다. 그것이 비록 문자의 본령인 지시적 기능에 회화적인 기능을 덧붙인 것이라 해도 그 파장은 단순한 화인(畵人)의 개인적인 실험을 훌쩍 벗어났다. 그것은 곧 회화적 장르의 형태로 화실을 벗어나 저잣거리로 여염집으로 번져나갔다. 종내 이러한 번짐은 화인의 요구가 아니라 당대 백성들의 미학적 요구의 보편타당한 심성을 반영하는 장르로 번성하게 되었다. 문자의 획득 여부에 따라 사회적 신분이 판가름되는 시대에 당대 서민들 입장에서 문자도(文字圖)는 신분상승과는 무관하게 문자의 회화적 미감(美感)과 세속적 기복(祈福)심리가 갈마들어 있는 장르다.
언문(諺文)인 한글을 제외한다면, 한자에 대한 소통적인 언어의 획득이 아니라 감상적 참여와 현세적 기원이 문자에 대한 관심으로 정착한 그림인 것이다. 그것은 곧 문자(文字) 그 자체로 말하고 발복(發福)하고 보여주는, 어쩌면 세간의 장삼이사(張三李四)인 서민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문자였던 것이다.
문자로써 쓰는 것과 문자를 그리는 것은 문자화된 상관물에 대한 관점(觀點)의 차이를 요구한다. 쓰는, 혹은 쓰여진 문자는 소통하고자 하는 두 대상을 특정하는 소통의 매개이다. 그러나 그린, 그려진 문자(文字)는 최초의 통상적 관념의 발화(發話)가 있으나, 그가 소통의 최초 상대 중의 한편이라고 특정할 수가 없다. 그는 문자도(文字圖 )의 시대 규범적 양식에 따라 문자를 쓰지 않고 그린 이름 없는 화가일 따름이다. 그러기에 그린[畵] 혹은 그려진 문자(文字)는 상대적인 소통의 매개가 아니라 문자의 열린 회화적 지향과 현세 기복적(祈福的) 바람을 품고 있다. 그것은 소통이 아니라 소망하는 의식의 상징들로 보편화되어 있다. 그러기에 그것은 상대에 대한 최초의 발화자의 성격은 사라지고, 공통의 복수(複數) 단독자인 서민들의 삶의 간원(懇願)과 문자에 대한 문맹 백성들의 선망이 화려한 이미지들로 장식되어 있다.
조선시대 후기, 언문 즉 한글을 제외하고 한문(漢文)에서는 철저하게 소외되었던 일반 백상들에게 문자도(文字圖)는 보여지는 문자의 초상(肖像)의 이미지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삶을 진전시키는 뜻글자인 한자(漢字), 즉 표의문자(表意文字)의 기복적인 의미전언들을 자신들의 생활 전반에 이미지로 현현(顯現)하는 장식(裝飾)과 발복(發福)의 기꺼움과 소슬함으로 구체화됐을 것이다. 단 하나의 뜻글자인 한자 속에다 다양한 이미지 상징들을 그려 넣을 수 있었던 것은 한자가 갖는 표의(表意)적인 속성에 기댄 바가 없지 않다.
그것은 어쩌면 문자로부터 소외된 백성 일반의 하층문화가 문자의 맹목적인 독성을 끌어들여 나름의 회화적인 개안(開眼)을 모색한 한 양상으로 볼 수도 있다. 문자에서 소외된 서민백성들이 그걸 백안시하지 않고 나름의 미적 요소로 받아들여 그 이미지를 확장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통시적(通時的)으로 보면 문자도의 문자에 대한 회화적인 변복(變服)이지만 그와 동시에 의미의 해체와 확산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시각일 수도 있다. 서민백성들이 보기에 문자가 거느린 단정적인 이미지는 유교적 집권층이 가진 교조적인 색깔과는 상관없이 얼마든지 변용을 기할 수 있는 흥미로운 소재로 비쳤을 수 있다.
문맹인 서민백성들에게 문자의 폐해나 어려움은 그것이 지시적인 기호(記號)로 한 사회 속에서 통용됐을 때 가능한 것이다. 문자가 그것의 의미적인 지시성과 교조적인 계몽을 포기했을 때 그 문자는 하나의 아름다운 추상, 의미 변용과 번짐이 가능한 구체적 이미지로 옮아가게 된다. 초기 문자도 속 문자의 난독(難讀)이 서민백성들에게 하나의 걸림돌이 되지 않고 다양하고 화려한 변이(變移)를 보인 것은, 문자의 독성(毒性)을 그림이라는 중화제(中和劑)와 그걸 나름의 기복적(祈福的)이고 장식적인 수사(修辭)의 이미지로 번성시킨 눈썰미와 자유의식에서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 17세기 이후, 왕족이나 양반 사대부가에서 소장하게 된 세화(歲畵), 그 중에 문자도(文字圖)는 문자에 대한 서예적인 기호를 벗어나 있다. 그것은 글자라고 하는 지시적 기호 너머의 또 다른 미학적 관심과 세속적인 욕망의 발원으로 기층민중의 생활 속에 편재(遍在)하게 된다.
백성들의 저잣거리로 번지면서, 문자도는 유교(儒敎) 윤리의 교화적인 기능을 짐짓 화려한 수사적 회화성(繪?性)으로 가리고 바꿔버렸다. 심지어 기복(祈福)과 길상(吉祥) 같은 인간 보편의 감정과 희원을 문자그림에 더 자주 등장시켰다. 유교(儒敎)의 기본적인 윤리덕목인 충효신의제(忠/孝/信/義/悌) 각각의 문자도에서 그 문자 획(劃)이나 여백을 채운 것은 각각의 윤리덕목을 상징하거나 비유하는 고사인물도와 상징물들이 점차 사라지거나 와해되고 굳이 문자(文字)와 직접적인 연관이 희박한 세속적인 영달이나 기복(祈福)의 사물들로 자연스럽게 바꿔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문자도의 문자가 함의(含意)하고 있는 지시적이고 교화적 기능과 아주 절연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문자와 그림의 부분적인 불일치는 결국 양반사대부(士大夫)문화에서가 아니라 서민계층에서 자생적으로 능란해진 것이다. 이런 부분적인 문자와 그림의 불일치는 그러나 그것이 전체적으로 문자도 자체의 내용적인 부조화(不調和)나 문자도의 미숙성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데 중요한 전환이 있다. 결국 이런 문자와 거기에 배인 그림의 행복한 불일치(不一致)는 결국, 문자도는 문자가 아니라 그림이라는 숙명적인 아우라 속에서 그 본령이 돌올해진다. 이것을 늡늡하게 확장시키고 다양한 문자도의 양식으로 조리차한 것이 서민들의 기층의식과 재야화인(在野畵人)의 풍류의식인 것이다. 문자의 고유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 문자의 교화적 교조주의의 맹목으로부터 자신의 삶의 천연성(天然性)을 원색적으로 꿈꾸고 채색하여 해방시킨 것이다.
조선후기 문자도의 변형과 발전의 밑바닥에는, 문자의 소통적이고 권력지배적인 소유계층과 문자의 회화적이고 세속적 향유계층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 대별되는 신분계층 간의 문화적 안목의 차이는 갈등과 분열의 양상보다는 자연스러운 갈마듦을 통한 창의적인 문자도의 분방함을 도모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문자도의 주류적인 생산과 향유계층은 서민백성이라는 점이다. 이 단순한 사실 속에는 문자도의 운명이 결코 조선 지배계층의 유교적 성향에만 머물지 않고 더 폭넓은 서민들의 기층문화로 번져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곧 관념이 아닌 삶, 그 자체로의 전환이자 이행을 확실히 보여주는 단초가 된 것이기도 하다.
조선후기로 치달을수록 문자도의 문자는 문자(文字) 고유의 지시적이고 교화적(敎化的) 기능을 벗어나 자연스레 서민들의 다양한 심성을 분방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초기의 문자도의 문자가 획 속에 거느렸던 유교적인 고사도(故事圖)나 관련 상징물(象徵物)에서 늑줄을 주듯이 이완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문자와 그림이 대등하게 배분되는 양상을 보이다가 나중에는 문자도의 화면점유율이 상대적으로 축소되기까지 한다. 갖가지 길상문양(吉祥紋樣)이나 다양한 기복적 상징물에 문자는 고립적으로 둘러싸이기까지 한다. 문자의 획(劃) 속에 품었던 그림들이 획 밖으로 일탈돼 나오기까지 한다. 문자가 애초에 거느렸던 유교적인 교화기능은 서민적인 소박한 발복(發福)의 기원에 둘러싸이고 화려한 수사적 채색욕구와 장식욕구에 파묻혀버린다. 그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문자도(文字圖)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이 서민백성들이 품고 사용하던 문자가 아니라 양반사대부가 전유했던 교조적이고 배타적인 문자였다는데 기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문자도의 변화는 그 전반적인 향유대상 계층이 전반적으로 바뀌었다는데 있다.
문맹(文盲)의 백성들에게 스며든 문자도(文字圖)는 그 문자의 함의(含意)를 치명적으로 와해시켜버리기 보다는, 문자의 의미 향배(向背)에서 자유로운 채 새로운 그림의 형태로 문자그림의 분위기를 갱신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조선 후기 문자도가 서민백성들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정혁(鼎革)의 눈높이가 아닌가 싶다. 문자도가 어쨌든 문자라는 그림이라는 인식을 애초부터 거느렸다고는 하지만, 그 문자에 그림으로써 의취(意趣)를 더한 것이 기존 양반사대부들이 거느렸던 문자도의 주류적인 관점이라면, 서민백성들로 스며든 문자도는 오히려 그 반대의 의취를 보인다. 문자의 서예적인 미학이나 유교적인 관념의 의취(意趣)을 탈각시킨 상태에서 서민백성들의 길상(吉祥)과 세속적인 기복(祈福)을 대변하는 다양한 상징그림들이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 상징물들은 문자도 내에 배치된 문자(文字)의 지시적이고 교화적인 본령에서 자유로워졌음은 물론이다.
그런 가운데 화면의 배경에는 장식적인 화려한 수사(修辭)의 그림들이 화폭을 그득 채움으로써 문자취향의 관념도(觀念圖)는 이미지 위주의 사물도(事物圖)로 그 바탕을 바꾸어나갔던 것이다. 결국 문자(文字)에 대한 수식(修飾)의 측면은 사라지고, 어느 순간 화려한 속화(俗畵) 속에 간간이 문자(文字)이미지의 수식적 방점(傍點)을 찍은 듯한 느낌마저 없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 외형적인 문자와 그림 간의 비율만 가지고 문자도의 변화양상을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그런 계량적인 수치나 통계만으로는 다룰 수 없는 부분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그림이 문자의 위상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문자가 그림을 품었을 때는 그 문자의 의미적인 차원만이 지시되고 확보되었다.
그러나 문자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상징물들과 수사적인 그림이 배치되었을 때, 보게 되는 것이 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 사실화(事實畵)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화조(花鳥)나 어해(魚蟹), 노안(蘆雁), 산수(山水), 책가(冊架), 십장생(十長生) 같은 사물화를 통해 문자도에서의 문자(文字)의 홀대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의미적인 민화(民畵)의 기원(起源/祈願)을 아우르게 됐다는 점이다. 그것이 서민백성들 속에서 문맹의 문자로 일궈낸 풍류(風流)정신의 소산이다.
앞서 문자로부터 소외된 서민백성들이 문자도의 문자를 나름의 조형미 속으로 더 확장시킨 여지를 조선후기 서민백성들의 그지없는 심성(心性)에서 찾은 바 있다.
2. 문자그림의 확산과 그림문자의 풍류(風流)
귀가 어두우면 사소한 소리마저 큰 의미나 기척으로 다가온다. 여느 보통 사람들 보기에 별무 대수롭지 않은 소리도 여러 의미요소를 지닌 소리의 가능성으로 들려올 수 있다. 서민백성들에게 문자도(文字圖)의 도래는 문자에 대한 다양한 의미요소의 해석과 확장의 빌미를 주지 않았을까. 모르는 문자는 모르는 문자 이상의 문자적(文字的) 이미지를 여러 겹으로 거느리게 한다. 그것은 현대인에게는 특정되지 않은 의미에 대한 불안의 요소로 작용했겠지만, 우리 조상들의 심성 속에서는 그것이 다양한 소재를 섭외하고 그것을 상상적 의미로 확산하는 풍류(風流)로 자리잡아가기 시작했다. 오류나 오답이 아닌 개연성있는 발복적(發福的) 소재와 의미의 확장과 오지랖 넓은 심성의 번짐으로 문자도의 품이 웅숭깊어진 것이다.
그 배경에는 ‘문자그림’을 ‘그림문자’로 탈바꿈시키려는 도저한 해학적 눈길이 자리하고 있다. 예를 들어, <孝(효)>라는 문자도 속에 꼭 효의 유교적 덕목과 관련된 사물이나 고사(故事圖)만 배치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물론 양반사대부들이 문자도를 우월적으로 향유하던 시기에는 문자도의 문자가 획(劃)이나 문자 여백에 거느리던 그림은 다분히 교화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거느린 지시적 이미지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세화(歲畵)의 형태를 띤 문자도가 서민백성들의 품으로 전해져 광범위한 속화(俗畵)의 한 부류로 편입되면서, 문자도의 문자는 서서히 그 유교적인 교화의 기능과 지시적인 의미성을 회의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 문자가 품고 있는 상징물이나 그 여백에 담긴 정체불명의 고사(故事)장면이 엉뚱해 보이기까지 했을 것이다. 설사 그 문자의 획이나 그 여백에 담긴 그림의 정체를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은 경우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부분이었다. 여기서 문자도에 배치되는 주류 문자인 <忠/孝/信/義/悌>에 곁들여지는 그림들의 속성이 드러난다. <孝>라는 문자도의 문자에 꼭 죽순(竹筍)이나 잉어[鯉] 같은 유교적 덕목을 드러내는 상징물을 삽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물론 지극한 효의 극치를 보여주는 고사(故事)장면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문자도의 문자가 간직한 의미적인 전언, 즉 메시지가 아니라 그것의 보다 분방한 해체적인 수용에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문자도의 문자적 의미를 파기하는 수순이 아니라 그것을 버리지 않으면서 서민백성들의 보다 현실적이고 근원적인 심성의 환타지를 보여주는 쪽으로 문자도의 문자는 이미지의 확장을 꾀했다. 개별 문자들이 표방하는 한정된 의미범위를 확산시킨다는 것은, 문자의 지시적 기능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忠>이라는 문자의 의미가 <悌>라는 문자의 의미를 포섭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기호적인 관점에서 문자라는 것은 그 상징의미의 변별력이 그 생명이기 때문이다. 분별되는 않는 의미체계는 문자언어라고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유교적 덕목을 지닌 개별 문자(文字)가 그 의미의 상징물 외에 다양한 사례(事例)를 부속(附屬)그림으로 거느릴 수는 있어도 그 의미 자체의 일탈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런 의미 자체의 일탈을 포함한 의미의 다양한 번짐을 미학적(美學的)으로 수용하는 양식 내부의 변이(變移)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궁극적인 원인은 앞서 언급한 아이러니하게도 문자에 대한 기호적 접근이나 이해가 아니라 이미지로써 받아들인 조선후기 서민층의 해학적인 눈썰미와 마음자리에서 찾을 수 있다. 문자도의 문자가 내세우던 교조적인 이미지의 빗장을 열어젖힌 것이다. 유교적 덕목(德目)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서민백성들 내부의 본원적인 갈망과 해원(解寃)의 목소리를 속화(俗畵) 중에서도 문자도(文字圖)라는 민화 양식 속에 다양한 회화적 이미저리(imagery)로 불러낸 것이다. 그것은 문자도를 문자가 아닌 그림의 환타지로 받아들인 기층문화의 늡늡한 심성과 그 붙임성에서 찾을 수 있다.
아무리 고상한 담론이나 고매한 시대의 윤리의식의 문자언어라 해도 그것이 시대의 기층문화와 진정으로 넘나들이 하려면 생득적(生得的)인 삶의 호감이 확보해야 한다. 그것은 민초들의 삶, 그 살아있음을 북돋우는 언어문자로 작용해야 한다. 만일 그것이 서민백성의 삶과 겉도는 측면이 승한 지배권력의 윤리나 담론이라면, 설사 문맹이 아닌 백성이라도 그것을 내면화(內面化)하고 삶의 주류적 생활문화로 삼는데 주저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버성김이 있는 양반사대부 지배계층의 문자도(文字圖)를 우리의 서민백성들은 오히려 늡늡하게 품어 안았다. 문자도의 문자가 함의(含意)하는 시대적 교의(敎義)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그 계몽적 교조주의에 얽매이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당대 기층문화는 문자도 속 문자(文字)가 거느린 다양한 기복(祈福)족 상징물과 고사도(故事圖)의 차입을 더 확장시켜 풍성한 삶의 층위를 드러내는 이상적 풍물도(風物圖)의 지경으로까지 몰고 갔다. 이렇듯 문자도가 문자(文字)형태의 고사(枯死)로 이어지지 않고 풍성한 이미지의 향연으로 연계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문자(文字)를 구상적(具象的) 이해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추상적(抽象的) 감상의 상관물로 삼은 조상들의 눈썰미에서 발원한다. 즉 문자의 본원(本源)을 협량한 의미의 분별체계로 보지만 않고, 문자라는 이미지의 가변성과 그것의 장식적 요소 그리고 삶의 발복(發福)을 구하는 주술적(呪術的) 요소로 본 측면이 완연하다.
문자이해(文字理解)의 오활한 그물에 걸리지 않고 문자감상(文字鑑賞)의 펀더기로 나아간 백성들의 눈썰미는 곧, ‘문자가 그림 속에 몸을 푼다’ 라는 지경을 심미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것은 곧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을 하나로 묶어준 부속그림의 역할이 크다. 모르는 것을 더 큰 앎과 체감의 영역으로 확장시킨 상상력은 바로 풍류(風流)인 것이다.
문자도에서의 풍류는, 글자그림의 지시적인 좁은 마당을 그림글자라는 단순히 기호체계로 규정지을 수 없는 더 넓은 즐김과 발원의 펀더기로 안내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자도에서의 풍류의식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한데 어울려 갈마들게 하여 지식의 체계를 초월해버렸다는 데 있다. 앎과 모름이라는 지식적 분별을 뛰어넘은 곳에 풍류는 도저한 생기(生氣)의 수맥을 거느렸던 셈이다. 그 풍류의 수맥에 입술을 적신 문자도의 문자와 그림은 어느 한쪽의 생사(生死)나 어느 한편의 고립과 번창을 넘어선 기운을 드리우게 된다. 그 풍류의 기운으로 문자도는 몰상식이나 몰이해의 분별심을 넘어서는 원융무애(圓融無?)한 삶의 발원을 풍물지(風物誌)처럼 펼쳐보이게 된다. 이해하거나 읽지 않아도 민화로서의 문자도는 하나의 장식적인 발원, 발원(發願)의 장식성에 풍류적인 상상력을 뒷배로 둔 결과였다.
3. 문자도(文字圖)의 풍류와 현대회화의 존재론
문자도의 이런 풍류적인 결기는 여러 관념적인 변화와 화인(畵人) 개인의 성향에 따라 보다 존재론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문자도의 풍류적 층위가 보다 개인적인 층위(層位)로 옮겨갔다는 것뿐이다. 한국에 있어서의 풍류가 단순히 서양적인 개념의 낭만성(浪漫性)에 한정지을 수 없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고단한 삶의 현실과 그런 현실이 엄혹하면 엄혹(嚴酷)할수록 오히려 그걸 해학적으로 쓰다듬고 위로와 발복(發福)의 숨통을 열어주는 것이 한국적인 낭만, 즉 풍류의 한 측면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회화에 저류(底流)하는 풍류의식은 문자의 지시적 엄격성을 현대적 자의식으로 해체하고 그것을 존재론적인 층위에서 재구성하는 추상적 회화성을 보인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고암(顧菴) 이응로(李應魯)의 문자추상 시리즈와 군상 시리즈는 문자와 사물, 문자와 존재가 서로 상보(相補)적인 양상으로 서로 넘나들이하고 있다. 집단, 즉 군상을 이루는 개별적인 존재들은 문자의 해체적인 면모와 근친의 이미지로 교호한다. 그것은 앞서의 조선후기 문자도(文字圖)가 개개 문자의 의미적인 지향에 그림을 접목시킨 것과는 대별(大別)되는 대목이다. 즉 의미지향적인 문자도의 문자와 그림의 융합이, 이응로라는 현대 화인(畵人)에게서는, 문자의 형태적인 측면의 시각적 이미지로 관심의 층위가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문자라는 감각적 실체의 외형성(外形性)과 군중이라는 존재의 집단 무의식을 형상적(形相的)으로 접근시키고 상보(相補)시켰다는 것이다. 문자에서 소외되지 않은 계층이 문자의 의미를 탈각시켰다는 것은 어쩌면 화인다운 발상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곧 문자(文字)의 불모성(不毛性)을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리 많은 언어를 수용해도 존재의 깊이와 측면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는 허무의식이 선험적으로 깔려있다고 보여진다. 그런 문자에 대한 허무의식이 문자의 내용성이 아닌 문자의 형태성, 즉 불가해한 문자 이미지로의 탐색을 부추겼다. 결국 문자와 사람이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 문자 이미지가 바로 역동적인 추상이었다. 즉 춤의 양상으로 전개한다. 그것은 곧 대위법(對位法)적인 진경(眞景)으로 나아가는 살아있는 문자들의 존재론적인 춤으로 드러난다. 춤은, 가시적인 측면에서 정체된 부분을 흔들어 깨우는 모색의 몸짓을 몸바탕으로 삼고 있다. 정체된 그 ‘무엇’ 은 카오스의 상태인데, 그러기에 그것은 존재 그 자체라기보다는 혼돈, 즉 카오스의 기화(氣化)상태인 것이다. 그런 정적(靜的)인 상태를 흔들어버리고 깨우는 그의 집단적인 개별 존재들의 이미지는 점차 그 춤의 동력(動力)을 통해 어떤 일정한 기호적인 동선(動線)을 부여받게 된다. 그런 기호적인 동선(動線)은 하나의 의미체계로 억압받지 않으면서 나름의 생기 있는 기호의 이미지로 축약되고 또 확산된다. 왜냐면 이런 집단 속 존재들의 도약적 이미지는, ‘춤’ 이라는 혼돈을 일깨우는 존재의 매개를 통해 새로운 의미의 혼돈을 잉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미의 혼돈’ 은 앞서의 ‘혼돈된 의미’ 와는 정반대의 생산적이고 비약적인 무한한 가능성과 생명으로 충일된 다양한 의미의 불확정성(不確定性)을 함의한다. 하여 의미의 빈약, 의미의 착종(錯綜)이나 혼란으로서의 혼돈과는 전혀 그 혼돈의 성격이 다르다. 이응로에게 사람이라는 존재의 심연은 이런 새로운 혼돈의 기호체계로 보이지 않았을까. 비록 그 빈약한 존재의 허울을 여러 경로로 경험했다 하더라도 그에게 사람은 특정되지 않은 불가해한 기호, 즉 문자(文字)형성의 기원이자 모태(母胎)로 이미지화됐을 것이다.
고암은 이것을, ‘형태의 아름다움이 무형의 공간에서 만들어진다는 <무형(無形)의 유형(有形)>’을 주장했다. 이런 고암의 동양철학적인 관점에서, 문자추상(文字抽象)은 ‘점과 획이 무형의 공간에 자유자재로 구성해 나가는 <무형의 발언>’ 이라는 사유를 견지했다. 이것은 문자라는 의미체계를 풀어헤쳐 회화적인 이미지를 구성해낸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와해된 문자의 의미는 그 지시적 기호체계의 의미만을 탈색(奪色)시킬 뿐이지 그 문자의 형상성(形象性)은 더 구체적으로 향상된다. 그런데, 고암(顧菴)은 이걸 문자 자체의 원론적인 기능과 기호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범박하게 문자는, 그 사회적인 측면에서 어쨌든 공통의 약속을 전제로 한 기호인식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한층 고양된 문자들의 해체적 이미지를 “추상(抽象)” 이라는 명명(命名) 속에 거느리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하나 유의해야 될 대목은, 고암이 말한 <문자추상> 연작들의 “추상(抽象)”은 회화적인 조형력에서 보면 구체적인 추상, 더 나아가서는 문자의 본원적인 태생을 떠올리게 하는 문자의 기원론적(起源論的) 추상성에 대한 구상(具象)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문자는 원래 특정된 의미체계 이전에 하나의 추상적인 구상(具象)이었다, 라는 주장과 맞닿는 부분이다. 어폐(語弊)되는 두 개념 간의 동숙(同宿)은 문자의 활물화(活物化)에 대한 화가의 욕망과 그 기원에 대한 존재론적 투사(投射)가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문자(文字)의 활물화(活物化)는 지시기호(指示記號) 자체에 대한 재해석이라는 관점보다는 화인(畵人)의 인간 존재에 대한 기호적인 관심의 확장이라는 관점이 우세하다. 즉 인간이라는 보편의 숙명과 더불어 화가 자신의 불가해한 인간이해의 심연(深淵)을 ‘명료화하기 힘들고 간명하게 지시할 없는 문자의 형태’ 로 본다는 측면이다. 그런 측면에서, 언어, 특히 문자는 약속의 이해(理解), 곧 이해를 위한 약속(約束)의 협의(協議/狹義) 속에 한정되는 운명을 지닐 수밖에 없다.
무언가를 특정하여 지시하지 않는 말[言語]이전의 문명과 자연 속에 드리워진 사물들의 독특한 포즈나 나름의 형상, 그 이미지는 문자의 잠재태(潛在態)로도 볼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고암의 <군중(群衆)> 연작은, 앞서의 <문자추상> 연작(連作)이 지니는 추상적인 구상성을 반대로 몰고 나아가는 형국을 보여주고 있다. 군중(群衆)이라는 개별적인 존재들의 집단 무의식을 다양한 춤의 형상으로 간략화하면서, 애초의 선험적인 구상성은 특정되지 않는 기호체계의 이미지로 탈바꿈된다. 구상적인 추상성이 역으로 촉발되는 시점이다. 이는 활물(活物) 그 자체인 존재의 이미지를 특정된 의미체계 이전의 기호, 즉 문자(文字)의 원형 이미지로 되돌려보려는 도저한 노력으로 간주된다.
문자의 존재론적인 형상(形象)에 대한 재해석은, 추상과 구상 양쪽에서 본래의 기호이미지를 이탈해서 새로운 이미지의 형태로 탈각되어 나온다. 문자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화인(畵人) 남관(南寬)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그의 구상(具象)계열의 그림이 추상계열로 접어드는 1960년 이후서부터 그는 특히 문자(文字)적 유추가 가능한 기호적인 이미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고암 이응로가 추구했던 군중의 무의식적 심층과는 다른 보다 개인적인 차원의 소통과 존재(存在)의 심연(深淵)에 대한 응시로 차별화된다. 거기에다가 ‘심연의 색채’ 라고 부를 수 있는 그만의 색감은 ‘의미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문자’ 의 이미지를 포란(抱卵)하듯이 바림처리가 돼 있다.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1965년작)이나 <읽을 수 없는 글자>(1966년작)에서 보여지듯이 그의 존재의 심층에 대한 문자적 접근은 앞서의 현대회화의 문자적 인식의 허무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 허무성은 그의 대부분의 문자추상 계열 작품에서 보편적으로 드러나는 양상인데, 그만큼 남관은 문자의 한계성을 통해 문자적 이미지의 가능성을 역으로 드러내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닌가 싶다. 허무와 소통부재의 존재의 분위기를 <읽을 수 없는 글자>의 이미지로 환유해서 보여주는 맥락, 남관(南寬)은 그것을 불가능한 문자의 세계를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문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존재의 현실을 그는 회피하지 않고 ‘존재의 문자’로 드러내고자 한다. 거기에 남관(南寬)이라는 화인(畵人)의 풍류정신이 있다. 결국 그는 문자로 환원되지 않는 그의 그림 속의 문자의 운명을 그는 처음부터 선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문자의 외형(外形)이 오히려 존재의 아픈 현실을 오롯이 드러내는 ‘그림문자’의 가능성을 탐색하였다. 사회적 약속으로서의 문자언어의 회화적 갱신은, 약속된 적 없는 그의 문자적 이미지들은 그렇기 때문에 그 다의성(多義性)을 품는다.
그의 1974년 작품인 <나의 친구들을 위한 기념비>는 문자와 그림의 혼종(混種, hybrid)으로까지 그림의 정황을 몰아간다. 사회적으로 약속된 기호양식은 아니지만, 짐짓 남관에게 있어 추상화된 기호는 그림과 문자의 제 3지대를 향해 열려있기까지 하다. 그것은 애초 17세기 이후 우리 조상들이 문자도를 기껍게 받아들인 후 가졌던 진솔한 존재의 색채언어에 대한 징후를 개인적 차원에서 수용하는 한 독특함이라 여겨진다. ‘기념비’라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문자로 단정할 수 없고 그림으로 풍경화(風景化)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남관은 문자 외형(外形)의 이미지적 속성을 기하학적 형태와 웅숭깊은 모호한 심연의 색채로 드러냈다.
조선후기 조상들이나 현대 화인(畵人)들이나 문자에 대한 인식은 기본적으로 회의적이다. 문자가 현실을 정혁(鼎革)할 수 없을 때 조상들은 그림의 화려한 장식성으로 주술적 간원(懇願)을 스며두었고, 문자가 존재의 트라우마를 직시하거나 표현하지 못할 때 현대 화인들은 문자의 한계성을 오히려 역이용해 존재의 아픔을 통렬히 드러냈다.
근현대를 통틀어, 문자와 그림의 이러한 근친성(近親性)은 문자에 대한 그림의 모성적 지위에서도 드러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자를 품은 그림이 그것을 새로운 형질의 회화적 이미지로 표현의 밀도와 형상성을 높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버리지 않고 품고 넘나들이 서로 양생(養生)하는 풍류정신, 그 상상력의 모태를 가졌기 때문이다.


[당선 소감]
얼마 전에 산기슭에서 작은 괴석을 만났다. 그를 자전거에 태워 집에 데려왔다. 늦가을의 선선한 기운이 나를 고매(故買)한 장물아비처럼 둘러쌌다. 처음이었다. 아내는 이게 마지막이라며 좁은 베란다를 허락했다. 초겨울이 시르죽은 들꽃들 위에 무서리를 내릴 때에도, 나는 이 돌 버력과의 만남을 왠지 아끼었다. 가끔씩 물을 주어 씻기고 풍란이라도 한 촉 안칠까 저 눌옹(訥翁)의 적적함을 엿봤다. 어떻게 해볼 요량도 없이 나는 그저 바라보고 담담했다. '무엇일까' 했다. 희미하게나마 침묵만이 아닌 이 땅의 여러 형상(形象)들 앞에서 가리어진 말을 배우는 기분이었다. 나는 시를 쓰는 우매한 처인(處人)이다. 그러함에 나는 변방을 사랑한다. 이 땅의 변방에 처한 형상들에 배인 선망이 내 시(詩)의 오장육부요 피톨이다. 나는 그 선혈로 운(韻)을 짓거나 줄글을 터서 밥과 술을 벌어왔다. 새끼들은 커서 아비를 일깨우는 천성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니 오래된 신문지 위에 앉은 저 괴석 눌옹에게 말을 건네듯 나는, 떠도는 형상들의 마음을 그 침묵 밖으로 눌변을 부려도 되는지 모르겠다. 나에게 가장 깊은 형상의 숨결을 안겨준 가족에게 고맙다. 거리에서 익힌 용렬한 생각의 말부림을 넉넉히 봐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모든 숨 탄 것들과 한 숨결 나누고 싶다.
▲1968년 인천 출생
▲인천전문대 도서관학과
▲1996년 문예중앙 시 부문 신인상
▲2002년 농민신문 및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오광수 [심사평] 깊은 사유 동반한 유려한 문장에 점수
미술평론을 미학이나 미술사로 혼동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응모작 가운데서도 이 점이 발견된다. 미학지나 미술사 논총에나 어울릴 글들이 적지 않다. 내용은 뛰어나지만 미술평론 응모작으로는 걸맞지 않다. 마지막까지 남은 세 편을 두고 오랫동안 숙고했다. 관점이나 내용이 다들 뛰어났기 때문이다.
'김창영의 모래그림'은 극사실주의(재현), 단색화(모노크롬), 오브제(모래)를 관통하는 70년대 말 한국미술계를 대변하는 혼성적문화 자화상을 흥미 있게 추구해 보였다. 이에 따른 복잡한 기호체계를 추적해 나간 점은 독특하다. 단 이 복잡한 기호체계가 대단히 논리적인 전개를 보여주어야 함에도 해석의 유연성이 따라주지 못한 아쉬움이 지적된다.
'앨리스 앤더슨, 불안과 혼란의 기억이 만든 판타지아 세계로의 초대'는 앤더슨의 작품이 지닌 심리적인 측면을 추구해가면서 그 독자한 판타지아 세계를 풀어 보이고 있다. 부분적으로 단조로운 분석이 눈에 띄지만 전반적으로 무난한 편이다. 그러나 외국 작가를 대상으로 했을 때 그에 대한 일반적 이해의 바탕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망설여질 수밖에 없다.
'문자도의 서민 풍류와 현대회화의 갱신원리'는 그 제목이 지닌 구태의연한 언술에도 불구하고 유려한 문장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깊은 사유를 동반하게 한다. 조선후기 민화의 문자도가 갖는 회화성과 현대의 이응로, 남관으로 이어지는 문자 추상의 발생에 대한 근친성의 추구는 혜안이다. 단 논증에 바탕을 두어야 할 부분들이 적지 않은데 자의적 해석으로 일관한 점이 아쉽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이 글이 우리의 현대미술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본다. 당선작으로 올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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