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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의 국보순례] [11~20] 2009.6.11~8.13

유홍준

[11] 피맛골 백자항아리
지난 6일 재개발 사업이 한창인 서울 종로구 청진동 '피맛골'에서 당장 나라의 보물로 지정해도 한 치 모자람이 없는 조선 초기 순백자 항아리 석 점이 발굴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 기사를 본 나의 지인 중에 백자의 빛깔이 눈부시고 형태도 듬직해서 이제까지 보아온 백자와는 다른 멋이 있다고 말한 사람이 있어, 나는 일반인의 눈에도 그런 미감이 읽히나 자못 놀랐다.
사실상 조선백자의 세계는 그 시대정신과 취미를 반영하며 변하였다. 백자의 생명력이라 할 흰빛의 변화를 보면 15세기 성종 때 백자는 이른바 정백색(正白色)이라는 맑은 흰빛을 띠고 있다. 이것이 16세기 중종 때가 되면 따뜻한 아이보리 빛으로 세련되고, 임진·병자의 양란(兩亂)을 거치면서 17세기 인조 때는 시멘트 빛에 가까운 회백색(灰白色)으로 거칠어진다. 그러나 18세기 영조 연간이 되면 다시 세련되어 뽀얀 설백색(雪白色)의 저 유명한 금사리(金沙里·경기도 광주시 남종면)가마의 달항아리가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18세기 후반 정조 때는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유백색(乳白色)의 우윳빛 분원(分院)백자가 나오게 되고, 19세기로 들어서면 청백색(靑白色)으로 변하면서 조선백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조선백자의 이런 변화는 문화사적 흐름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15세기 백자의 정백색은 국초(國初)의 기상을, 16세기 상앗빛 백자는 성리학의 세련을, 17세기 회백색은 전후(戰後) 국가재건의 안간힘을, 18세기 설백색과 유백색은 문예부흥기의 난숙함을, 19세기의 청백색은 왕조 말기의 황혼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것이 '양식사(樣式史)로서의 미술사'의 시각에서 본 조선백자의 흐름이다.
'피맛골'에서 나온 백자항아리가 이제까지 보아온 백자와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은, 15세기 순백자 항아리는 아주 드문 편이어서 일반인들은 볼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에 '피맛골' 백자항아리 발굴기사를 보면서 속으로라도 그런 인상을 받으신 분이 있다면 그분은 예술을 보는 안목이 있다고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12] 궁궐의 박석(薄石)
우리 궁궐 건축이 남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데는 박석(薄石 또는 博石)이 큰 몫을 하고 있다. 박석은 고급 포장 재료이다. 넓적한 화강암 돌판으로 두께는 보통 12cm이고 넓이는 구들장의 두 배 정도다. 박석은 주로 궁궐 건축에 사용되어 근정전의 앞마당인 전정(殿庭), 종묘의 월대(月臺), 왕릉의 진입로인 참도(參道) 등에 깔려 있다. 서울의 옛 지명에 박석고개가 여럿 나오는데 이는 대개 왕릉으로 가는 고갯길에 박석을 깔아 생긴 이름이다.
포장재로서 박석은 그 기능이 아주 탁월하다. 화강암판이어서 잘 깨지지 않고, 빛깔이 잿빛이어서 눈에 거슬리지 않으며 표면이 적당히 우툴두툴하여 미끄럼을 방지해주고 햇빛을 난반사시켜 땡볕에도 눈부심이 없다.
박 석은 이처럼 포장재료로서 탁월한 기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인공적인 직선이 구사된 궁궐 건축에 자연적인 맛을 살려 자연과 인공의 어울림을 꾀한 우리의 건축 미학에 잘 맞아떨어진다. 내가 외국의 박물관장이나 미술평론가를 데리고 경복궁에 갈 때면 그들은 근정전의 박석을 보면서 한결같이 포스트 모던아트에서나 볼 수 있는 탁월한 감각이라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언젠가 경복궁관리소장에게 근정전은 어느 때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느냐고 물었더니 장마철 큰 비가 내릴 때 빗물이 박석의 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이 정말로 아름답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박석의 자연스러움을 오히려 마감에 충실하지 못한 우리 건축의 폐단이라고 불만을 말하기도 한다. 이런 분들은 화강석을 반듯하게 다듬어 깐 창덕궁 인정전을 보면 그 기능은 고사하고 얼마나 멋이 없는지 바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창덕궁 인정전의 전정은 일제가 잔디를 입혔던 것을 1970년대에 복원하면서 지금의 화강석으로 깔아 놓은 것이다. 그때만 해도 박석을 구할 수 없었다.
문화재청에서는 몇 년간 '조선왕조실록'과 의궤(儀軌)를 조사하여 박석 광산이 강화도 매음리(일명 그을섬)인 것을 확인하고 바야흐로 채석을 시작하여 광화문 월대 복원부터 다시 박석을 깔기로 했다. 박석의 미학은 이리하여 다시 이어지게 됐다.
[13] 취병(翠屛)
궁궐 담장의 기본은 사괴석(四塊石·벽이나 담을 쌓는 데 쓰는 육면체의 돌) 기와돌담이다. 네모난 화강석을 가지런히 쌓고 석회로 줄눈을 넣어 반듯하게 마감하고는 그 위에 기와를 얹은 것이다. 이 사괴석 기와돌담은 보기에도 위엄과 품위가 있어 궁궐 바깥 담장으로는 제격이지만, 생활공간의 안 담장으로는 너무 무거운 느낌을 준다. 그래서 궁궐 곳곳에는 벽돌담장, 꽃담장 또는 허튼 돌을 조각보 맞추듯 이어 쌓은 '콩떡 담장'이 배치되어 있다.
궁궐의 이런 여러 담장 중에는 취병(翠屛)이라는 일종의 생울타리(살아있는 나무를 심어 만든 울타리)도 있었다. 취병은 시누대를 시렁으로 엮어 나지막이 두르고 그 안에 키 작은 나무나 덩굴식물을 올려 여름에는 푸름으로 가득하고 겨울에는 얼기설기 엮은 대나무가 그대로 담장 구실을 한다. 이러한 취병은 서양에도 있어 장미넝쿨 생울 같은 꽃담(floral screen)을 '트렐리스(trellis)'라고 부르고 있다. 취병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중요한 미적 덕목으로 삼은 우리 옛 건축에 더없이 잘 들어맞는 형식이었다.
200년 전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습을 그린 〈동궐도(東闕圖)〉에는 지금은 모두 사라졌지만 취병이 18곳이나 그려져 있다. 대개는 건물의 뒷담과 정자 주변에 둘러져 있는데 너른 마당을 낀 대문 앞에 가로지른 헛담으로 친 것도 있다.
조선후기 백과사전이라 할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취병 설치하는 법이 자세히 나와 있다. '버들고리를 격자(格子)모양으로 엮어서 그 속을 기름진 흙으로 메운 다음 패랭이꽃이나 범부채와 같이 줄기가 짧고 아름다운 야생화를 심으면 꽃피는 계절엔 오색이 현란한 비단병풍처럼 된다.'
그러나 취병은 잘 돌보지 않으면 금세 풀덩이가 되거나 시누대가 쓰러져 버리고 만다.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고 궁궐의 전각들이 텅 비게 되면서 그 많던 취병은 모두 사라졌고 끝내는 취병이라는 아름다운 건축 조경 양식의 맥마저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창덕궁관리소는 작년에 이 취병의 전통을 되살리고자 부용정과 규장각 사이의 꽃계단[花階]에 〈동궐도〉 그림대로 취병을 설치했다고 한다. 이로써 우리는 비로소 취병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모두들 틈 내어 한번 구경가 볼 만한 일이다.

[14] 조선 왕릉(朝鮮 王陵)
조선 왕릉(王陵) 40기가 마침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또 하나의 세계문화유산을 갖게 되었으니 가슴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세계가 알아주는 이 조선 왕릉의 문화적, 건축적 가치에 대해 우리들이 과연 얼마만큼 인식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도 일어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삶의 공간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못지않게 죽음의 공간에 대해서도 고민해 왔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내린 결론은 자연 속에 묻히는 것이었고, 그것이 국가적 의전(儀典)으로 발전한 것이 왕릉이다. 따라서 모든 왕릉이 갖고 있는 홍살문[紅箭門], 정자각(丁字閣), 능침(陵寢)에 이르는 공간 구성과 문신석과 무신석,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의 조각들에는 조선시대 전체를 꿰뚫는 정신, 즉 자연에의 순응, 도덕적 가치로서 경(敬), 윤리로서 충(忠)과 효(孝), 그리고 미적(美的) 덕목으로서 검소(儉素) 등이 들어 있다.
그리고 똑같은 공간구성이지만 각 능에는 그 시대의 문화적 분위기와 역량이 드러나 있다. 이는 백자항아리가 국초부터 구한말까지 그 빛깔과 형태를 달리한 것과 같다. 15세기 새로운 이상국가를 건설하려는 국초의 기상은 무엇보다도 동구릉(東九陵) 안에 있는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에 잘 나타나 있다. 고향 함흥 땅의 억새를 입혀 달라는 그의 유언이 지금껏 지켜지고 있는 이 건원릉의 늦가을 모습은 자못 처연하다.
조선적인 세련미가 구현되어 가는 16세기는 중종의 왕비인 문정(文定)왕후 태릉(泰陵)의 엄정한 능침 조각에서 볼 수 있다. 병자호란을 겪은 뒤 상처 받은 자존심을 되찾으려고 일어난 다소 허풍스러운 17세기 분위기는 효종 영릉(寧陵)의 무신석 어깨가 과장되게 표현된 모습에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조각이 아름다운 것은 18세기 사도세자(思悼世子)인 장조(莊祖)의 융릉(隆陵)을 따를 곳이 없다.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한 순종의 유릉(裕陵)은 대한제국 황제의 예에 맞춰 황제릉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지만 그 누구도 위엄이나 힘을 말하지 않는다. 조선왕릉은 이처럼 저마다의 표정을 갖고 있는 당당한 세계문화유산이다.

[15] 창덕궁 호랑이
요즘 궁궐에 가보면 한여름의 푸름이 가득하다. 특히 창덕궁(昌德宮) 후원에서는 나무 사이로 짐승이 뛰쳐나올 것만 같다. 실제로 옛날에는 창덕궁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다. 〈세조실록〉 11년(1465) 8월 14일 조에는 '창덕궁 후원에 호랑이가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북악에 가서 얼룩무늬 호랑이를 잡아 돌아오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속설에 의하면 1592년 임진왜란 난리 중에 인왕산 호랑이가 사라졌다느니,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호피(虎皮)를 좋아해서 다 잡아갔다느니 하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선조실록〉 36년(1603) 2월 13일자에는 '창덕궁 소나무 숲에서 호랑이가 사람을 물었다. 좌우 포도대장에게 수색해 잡도록 명했다'는 기사가 나오고, 이어 선조 40년(1607) 7월 18일자에 '창덕궁 안에서 어미 호랑이가 새끼를 쳤는데 한두 마리가 아니니 이를 꼭 잡으라는 명(命)을 내리다'라는 기사가 있다. 인왕산 호랑이의 활동은 여전했던 것이다.
호랑이가 사람을 물어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호환(虎患)이라는 일종의 사건사고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호환에 관한 마지막 기록은 고종 20년(1883) 1월 2일자에 나온다.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에서 아뢰기를 삼청동 북창(北倉) 근처에서 호환이 있다고 하여 포수를 풀어서 잡아내게 하였습니다. 오늘 유시(酉時·오후 5~7시경)에 인왕산 밑에서 작은 표범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봉하여 바칩니다. 범을 잡은 장수와 군사들에게 상을 주고 계속 사냥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런 얘기를 듣고 있으면 사람을 물어갈지언정 그리운 것이 인왕산 호랑이이다. '인왕산 호랑이 으르르르, 남산의 꾀꼬리 꾀꼴꾀꼴'이라는 서울의 전래민요가 더없이 정겹게 다가온다. 그러나 이미 한반도에서 멸종된 호랑이가 되돌아올 리 없는 일이다. 다만 근래에 그나마 녹지가 확보되어 가면서 다시 산짐승들이 하나둘 궁궐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니 2005년 10월 25일자 조선일보를 보면 '창덕궁에 멧돼지가 자주 출몰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 기사를 보면서 서울의 자연이 살아나고 있는 것 아니냐고 좋아한다면 옛날 분들이 이를 보고 무어라고 할까.

[16] 봉정사(鳳停寺) 대웅전(大雄殿)
보름 전, 보물 제55호였던 안동 봉정사(鳳停寺) 대웅전(大雄殿)이 국보 제311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건축양식상 우리나라 다포(多包)집 중 고식(古式)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찍이 보물로 지정되었지만 건립 연대가 밝혀지지 않아 국보로는 되지 못했었다(국보의 조건에는 절대연대, 유일성, 희소성 등이 있다). 그러나 최근에 해체 수리하면서 지붕 밑에 있는 건축부재에서 세종 17년(1435)에 중창(重創)했다는 기록을 발견했고, 아울러 이 건축부재의 연령을 측정한 결과 600년 이전에 벌채된 나무라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게다가 근래에 대웅전 후불벽화인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를 수리하면서 그 뒷면에서 세종 10년(1428)에 제작된 고려불화풍의 〈미륵하생경도(彌勒下生經圖)〉를 발견하여 별도의 보물(제1614호)로 지정되었으니 봉정사 대웅전은 여러 면에서 국보로 승격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 것이었다.
사실 그동안 봉정사 대웅전은 바로 곁에 있는 극락전이 국보 제15호인 데 반하여 보물에 머물렀다는 이유 때문에 상대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해 왔다. 물론 봉정사 극락전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축으로 추정될 뿐만 아니라 주심포(柱心包) 맞배지붕집의 진수인 단아한 절제미(節制美)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에 반하여 봉정사 대웅전에서는 팔작지붕 다포집의 웅장한 힘과 멋이 넘쳐난다. 전각 내부도 화려한 가운데 경건하다. 불상 머리 위를 화려하게 치장한 보개(寶蓋)와 그 주위에 설치된 용과 봉황의 조각도 일품이다. 한마디로 봉정사 극락전과 대웅전은 추구하는 미학 자체가 다른 것인데 그동안 상대적인 피해를 보아왔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유산을 보는 우리의 눈은 지정 등급으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봉정사 요사채 뒤편에 있는 영산암(靈山庵)은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찍은 곳으로 전통건축에서 마당이 지닌 미학을 환상적으로 구현한 곳이지만 겨우(?) 경상북도 민속자료(제126호)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대 건축가들의 봉정사 답사 하이라이트는 국보, 보물보다도 오히려 여기로 삼고 있다.
[17] 최고령 목조건축
지난 회 국보순례에서 안동 봉정사(鳳停寺)를 이야기하면서 머물 정(停)자를 정자 정(亭)자로 잘못 표기한 것을 눈 밝은 독자의 가르침으로 알게 되었다. 봉정사는 절집이 들어앉은 지세가 마치 봉황새가 머물고 있는 듯하다고 하여 이런 이름을 얻었다.
또 지난번에 이 절의 극락전이 우리나라 최고령(最古齡) 목조건축(木造建築)으로 추정된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도 한 독자의 질문이 있었다. 충남 예산에 사신다는 이분은 자신의 고향에 있는 수덕사(修德寺) 대웅전의 문화재 안내판에 가장 오래됐다고 쓰여 있다며 항의성 반론을 폈다. 이참에 최고령 목조건축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국보에 대한 상식으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현재 삼국 및 통일신라 시대 목조건축으로 남아 있는 것은 없다. 고려시대 목조건축으로는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 이외에 영주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조사당(祖師堂), 강릉 객사문(客舍門) 등 남한에 5채가 있고, 북한에는 황해도에 성불사(成佛寺) 응진전(應眞殿)과 심원사(心源寺) 보광전(寶光殿) 2채가 남아 있다.
이 중 수덕사 대웅전은 1937년 해체 수리 때 '1308년 4월 17일 기둥을 세우다(立柱)'라는 묵서명(墨書銘)이 발견되어 창건 연대가 명확히 밝혀진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으로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집을 최고령이라고는 할 수 없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1916년 해체 중수 때 1376년에 중건되었다는 묵서명이 발견되었는데 옛날에는 보통 100년 내지 150년 만에 건물을 보수하였다. 그래서 부석사 무량수전은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으로 불리었던 것이다.
그런데 1971년, 봉정사 극락전 해체 수리 때 대들보 위에 얹혀 있는 건축부재(중도리)에서 '능인(能仁) 대덕(大德)이 신라 때 창건한 후 여섯 차례 중수(重修)했고 1363년에 축담(竺曇) 선사가 다시 중수했다'라는 기문(記文)이 발견되었다. 비록 창건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 중건 연대가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13년 앞선 데다 건축양식이 고식(古式)이어서 이후 건축사가들은 이 건물을 우리나라 최고령 목조건축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18] 안동 묵계서원
안동(安東)은 조선시대 목조건축의 보고(寶庫)다. 한옥(韓屋)의 참 멋을 안동만큼 풍부하게 보여주는 곳은 없다. 경상북도의 새 도청 유치를 위해 경주시와 안동시가 치열하게 경쟁할 때 경주시가 내세운 것 중 하나가 문화재가 많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안동시는 우리도 적지 않다며 누가 많은지 국가 및 지방 지정문화재를 세어 보자고 했다. 그 결과 안동이 석 점 더 많았다. 현재도 경주는 320점, 안동은 323점이다.
안동에 이처럼 문화재가 많은 것은 전통 있는 가문마다 한 마을에 종택(宗宅)·정자(亭子)·재실(齋室)·서원(書院) 등을 경쟁적으로 갖추었고, 그 후손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이 목조건축들을 보존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벼슬하던 선비가 낙향하여 한 마을의 입향조(入鄕祖)가 되면 그 후손들이 재실과 서원을 세우면서 가문을 일으키는 과정은 길안면(吉安面)의 묵계서원( 溪書院)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
안동시내에서 길안천을 따라 영천으로 내려가는 35번 국도는 요즘 세상에선 보기 드문 호젓한 옛길이다. 더 먼 옛날에는 내륙 속의 오지여서 묵계리에 있던 역(驛)이름이 거무역(居無驛), 즉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다. 이런 궁벽한 산골의 입향조는 안동 김씨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1431~1521)이다.
보백당은 나이 50세에 등제(登第)하여 삼사(三司)의 청직(淸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김종직(金宗直)과 교분이 깊었던 탓에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심한 고초를 겪었고, 나이 70세 때 또 구금됐다가 5개월 만에 풀려나자 이곳 묵계리로 내려와 우거(寓居)해 버렸다. 이 집이 묵계종택이다. 보백당은 앞산 깊은 계곡에 아슬아슬한 외나무다리를 걸쳐놓고 만휴정(晩休亭)이라는 환상적인 정자를 짓고는 이름 그대로 만년의 휴식처로 삼아 나이 87세까지 여기서 지냈다. '우리 집엔 보물이 없다. 있다면 청렴[淸白]이 있을 뿐이다(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라는 유훈(遺訓)을 남긴 보백당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훗날 묵계서원이 세워졌다. 이 모두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사람도 살지 않던 묵계리가 오늘날에는 비경(秘境)의 문화유적지로 남은 것인데 안동에는 이런 마을이 수십 곳이나 된다.
[19] 인각사(麟角寺)
경상북도 군위에 있는 인각사(麟角寺)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인 일연(一然·1206~1289) 국사가 말년에 주지로 계셨던 일세의 명찰이었다. 일연 스님이 열반에 들자 나라에서는 보각(普覺)이라는 시호와 함께 스님의 사리탑에 정조(靜照)라는 이름을 내려주면서 당대의 문장가인 민지(閔漬)에게 비문을 짓게 하고 글씨는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지는 왕희지(王羲之)의 유려한 행서를 집자(集字)해 새기도록 했다. 이것이 저 유명한 〈보각국사비명(普覺國師碑銘)〉이다. 이 비는 중국에서도 드문 왕희지 집자비인지라 금석학(金石學)과 서예사에서 보물로 삼는 바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오면서 인각사는 퇴락을 면치 못했다. 아름다운 화산(華山·828m)의 기품 있는 자태가 상상의 동물인 기린(麒麟)의 뿔[角]을 닮았다 해서 인각사라는 신비로운 이름을 얻었지만 이제는 궁벽한 산골의 초라한 절집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었다. 게다가 〈보각국사비명〉은 임진왜란 때 박살이 나 간신히 밑동만 남고 말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각사는 폐사나 다름없었다. 번듯한 법당 하나 없이 절 마당에는 기단부를 잃은 엉성한 삼층석탑, 전각 없이 쓸쓸히 나앉은 석불좌상, 다 부서진 비의 잔편, 제자리를 잃은 사리탑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 그 황량함이 민망할 정도였다. 게다가 한때는 수몰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다행히 연전부터 인각사를 이대로 둘 수 없다는 불교계·학계·문화재계의 각성으로 하나씩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얼마 전에는 절터 발굴 중에 고려시대를 대표할 청동정병(靑銅淨甁)을 비롯한 불구(佛具)들이 출토되어 이 절집의 위상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태 전에는 일연 스님의 비를 다시 세워 놓았다. 옛 탁본을 토대로 한 금석문연구가 박영돈 선생의 30년 집념으로 완벽하게 왕희지 집자비로 복원하게 된 것이다. 사라진 비석받침[귀부·龜趺]과 지붕돌[이수·�u首]은 미술사가들의 고증으로 동시대 유물인 강진 백련사비(白蓮寺碑)의 예에 따랐다. 우리 시대에도 이렇게 자랑스러운 문화재 복원이 있다는 감회에서 비문을 찬찬히 읽어보니 그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되어 있다. '무서운 불[劫火]이 활활 타서 산하(山河)가 모두 재(災)로 될지라도 이 비만은 홀로 남고 이 글만은 마멸되지 않게 하소서.'
[20]무무당(無無堂)
군위 인각사(麟角寺)가 제 모습을 찾아가는 길은 절터의 발굴 결과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문헌상의 기록일 것이다. 마침 이색(李穡;1328~96)의 '목은집(牧隱集)'에는 '인각사 무무당기(無無堂記)'라는 글이 실려 있다. 목은 선생이 낙서(洛西·낙동강 서쪽)지역의 절집을 두루 들러 보던 중, 상주 남장사(南長寺)에 이르렀을 때 인각사 스님 창공(窓公)이 새로 지은 무무당에 기문(記文)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이에 목은은 자신은 유학자이지만 스님의 세계에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호방함이 있어 좋아한다고 한 차례 불가(佛家)를 칭송한 다음, 인각사의 가람 배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 소견을 피력했다.
'대체로 이 절의 불전(佛殿)은 높은 곳에 있고 마당 가운데 탑이 있으며 왼쪽에 무(��·강당)가 있고 오른쪽에 선당(膳堂·살림채)이 있다. 그러나 왼쪽 건물은 가깝고 오른쪽은 멀어 건물배치가 대칭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제 무무당을 선당 옆에 세워 좌우균형이 맞게 되었다. 그러나 새 건물이 들어섰어도 기존의 선당이 치우쳐 있다는 점을 면키 어려우니 역시 조금 옆으로 옮겨야 절의 모양과 제도가 완벽해지겠다. 지금 못하더라도 뒷사람들이 바로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목은은 이처럼 건축에 대해 상당한 안목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목은은 이 기문에서 무무당의 뜻풀이는 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목은은 이렇게 말했다. '무무당의 뜻은 이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기에 굳이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처럼 모르는 사람만 답답할 뿐이다. '무무'란 '없고 없다'는 뜻도 되지만 반대로 '없는 게 없다'는 뜻도 된다. 어느 쪽일까? 이 오묘한 뜻을 알고 싶어 여러 전거를 찾아보았다. '회남자(淮南子)'에 무무라는 말이 잠시 나올 뿐이었는데 그것도 이와는 상관없는 얘기였다.
그러던 중 몇 해 전, 금강산 신계사(神溪寺) 낙성식에 갈 때 마침 조계종 본사(本寺) 주지들과 같은 버스를 타게 되어 이 당대의 고승들에게 공개적으로 그 뜻을 물어본즉 돌아온 대답은 더더욱 오묘했다. '없고 없는 게, 없는 게 없는 것 입니다.' 목은 선생의 말대로 불가에는 참으로 호방한 기풍이 있다.
유홍준 (명지대 교수·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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