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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정신] 미술평단 원로에게 듣는다

박용숙

'100년이 지났건만 잠에서 깰 줄 모르는가'
미술비평이라는 말은 유럽에서는 18세기에 이르러 등장했는데 대체로 문학과 어울리면서 기생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다가 미술비평이 독립적인 영역으로 분립되면서 본격적으로 개업을 하게 됐던 것은 20세기 모더니즘시대를 맞이하면서다. 인문주의 사상의 전성기가 되어서 비로소 미술비평도 제구실을 하게 됐다는 뜻이다.
미국의 저명한 미술비평가 그린버그에 의하면 모더니즘비평의 원 텍스트는 문학이나 다른 예술분야와 마찬가지로 칸트에다 둥지를 튼 現象學에 기초한다고 말하고 있다. 모더니즘 시대의 비평이 그 원 텍스트를 근거로 새 시대의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기 위해 화가(작가)와 협력했음을 알게 한다. 그러니까 비평이란 원 텍스트를 거울삼아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기 위해 비평가가 일방적으로 작가에게 간섭하는 행위가 아니고 공동으로 새로운 그 시대의 텍스트를 만드는 일종의 변증법적인 게임을 뜻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변증법적인 게임의 과정에서 비평의 다양성, 독재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를테면 동일한 텍스트를 근거하지만 시대나 지역성(전통)에 따라, 혹은 작가의 개성이나 표현방식에 따라 비평은 다소 우유부단함이나 교만함 혹은 일방적인 간섭이 생겨나며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 과정을 모두 비평의 다양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양해가 된다면 분명 비평은 그 사회와 문화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일익을 담당하게 말 할 수가 있게 된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비평의 어려움은 언제나 시대정신에 앞서가는데서 발생하는 충돌사고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미술비평사가 리오넬로 벤투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예술작품을 평가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자면 한 예술작품을 두고 몇몇의 비평가들의 쓴 글을 읽어봐야 한다. 그렇게 되면 분명 하나의 작품에 서로 다른 여러 평가기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그래도 사람들은 그 중의 어느 한 사람의 글이 기준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사람들의 이런 구미에 맞춰서 글을 쓴다면 비평은 아주 강력한 펀치 한방으로 상대를 넘어뜨리는 링 시합에서처럼 통쾌한 일일 수가 있다. 하지만 비평이 마치 골동품을 감정하듯이 양단간의 결판을 내리는 작업이 아니고 작가와 함께 새로운 시대의 텍스트를 생산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못하는 것이 또한 비평의 특성이다. 우리는 이 비평의 특성을 별도로 ‘담론’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벤투리가 간략히 지적한 대로다. 담론이란 미리 정해놓은 종착역을 향해 달리는 열차에서 나누는 대화가 종착역 없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그 자체가 하나의 교감이 되도록 나누는 대화방식이다. 비평정신을 이렇게 간단히 정의를 내려봤지만 역시 중요한 관심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 미술의 비평이다. 나는 늘 우리에게는 미술비평이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고 믿는다.

우리의 미술비평은 모더니즘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던 80년대에 들어와서야 한국문화의 층위에 떠오르게 된다. 그러니까 모더니즘의 그림도 수입이고 비평도 수입품이다. 문제는 수입했다는 사실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수입해온 모더니즘의 게임법칙이 제대로 행해지지 못하고 겉으로만 그 모방이 진행됐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비평의 원 텍스트가 제대로 소화되지 못하면서 수많은 세월을 소화불량이자 설사증세로 고통을 치르는 세월을 보냈다는 뜻이다. 적절한 예를 들어보자. 80년대였을 것이다. 한동안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이 비평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큰 주목을 끌었다. 작품의 메시지는 ‘구원이란 없다’이다. 한마디로 이 메시지는 기독교문화권에서는 엄청난 충격을 주는 메시지다. 그들은 오랜 동안 하나님이 메시아라는 두레박을 내려주면서 반듯이 구원하러 온다고 약속했던 그런 문화 속에 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처럼 팔자를 믿는 문화권에서 그런 주제를 다룬 연극에서 그 어떤 충격을 받는다는 것은 도리어 이상한 일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연극이 아니므로 그런 메시지를 모방한다는 것은 제정신이 나간 자의 일이다. 그런데도 비평은 이를 대단한 작품인 것처럼 소란을 피웠다. 원 텍스트를 완벽하게 이해 못했다는 사실을 폭로한 예다. 이런 이야기는 미술에서도 마찬가지다.
백남준은 ‘예술은 사기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 하지만 미술계는 아직도 이 사기라는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의 비디오 작품들은 물론 그를 우상처럼 떠받들고 있다. 우리는 그가 보여주는 모든 비디오 작품에 아무런 메시지가 없다는 사실을 정직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더니즘의 원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예술은 사기다’라고 주장하고 아무런 메시지도 담지 않는 비디오를 만드는 것은 한마디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다를 바 없다.
그가 비디오 아티스트의 대부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것은 다름 아닌 모더니즘의 텍스트가 제대로 유통되는 서구문화라는 우리와는 시공간적으로 달랐던 지역에서의 일이다. 종교가 고전적인 기능을 상실한 후 예술이 그 대역을 맡으며 예술이 현대의 총아가 되었던 정황에서 ‘예술은 사기다’라고 하게 되면 이는 곧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던 니체의 선언처럼 서구인에게는 대단한 충격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처럼 예술은 구원의 메시지가 아니라 광대놀이나 신기한 재주를 보여주거나 꿈같은 이야기로 여겼던 상황에서는 그의 ‘사기발언’은 또 다른 의미의 충격이다. 그것은 백남준이 기대했던 그런 충격이 아니고 전혀 의외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비극은 일직이 30년대의 고유섭 시대에서부터 시작돼 아직도 우리의 비평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고유섭은 그랬다.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고려청자보다는 조선조 시대에 밥그릇이었던 막사발이 더 정신적인 아름다움(禪味)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당시 일본의 미학자 야나기의 주장을 그대로 복창한 것이다. 그는 막사발은 조선시대에 백성들이나 사찰의 승려들이 밥그릇으로 사용하던 그릇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런 비평을 하게 됐던 것은 우리의 비평적인 텍스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의 비평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백년이나 지나지만 여전히 이 땅의 비평정신(미술)은 긴 미망의 잠에서 깨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 박용숙(미술평론가)
- 출처 : 교수신문 5.1
※ 필자는 동덕여대 교수를 지내다 퇴임했으며, 현재는 미술평론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 현대 미술사 이야기’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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