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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조형미학_북한미술 연구 위한 자료관이 필요하다

박계리

글 ㅣ 박계리


북한의 핵문제가 불거진 지 오늘로 꼭 3년을 맞지만 아직 완전한 해결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나마 지난 9월 2단계 4차 6자회담에서 공동성명을 통해 큰 가닥을 잡았다는 사실은 다행스런 대목이다. 그러나 공동성명은 회담 참가국들의 목표점과 지향을 담은 대원칙 선언문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해결해야할 숙제들이 적지 않다. 북-미 간에 현격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는 대북 경수로 제공 문제 등을 비롯하여, 공은 이미 우리에게 있다기보다 북한과 미국의 손에 달려 있는 듯 보이고, 북한과 현대의 갈등을 보면서도 마음이 찹찹하다.
이러한 복잡한 세계정세 속에서 남북한 문화교류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지금 시점에서 우리의 문화교류정책이 적절히 현실 감각에 맞게 수정되지 않는다면 조만간 한국의 대북교류정책은 한반도주변 열강들의 피 튀기는 헤게모니 쟁탈전 속에서 그 현실 적응력을 상실한 순진한 이상론으로 취급되어 버리고 말 수도 있을 것이라는 위기위식을 느끼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문제일까?
현실주의적 교류 관점과 입장을 세우기 위해서는 상대방과 나의 의도를 간파하고 이를 관철할 양자의 위치와 힘, 그리고 주변 환경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여타 문화예술 분야보다도 조형예술 분야의 교류성과가 저조했던 것이 북한 조형예술의 성격과 현재적 양상에 대한 몰이해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은아닐까, 반성해보지 않을 수 없다.
북한 미술은 하나같이 똑같다는 선입견, 미술에서의 문인화, 음악에서의 아악 같은 봉건시대 지배계급의 양식은 철저히 금지되고 있을 것이라는 단정, 논쟁과 이론 없이 김일성 지시에 의해 북한 미술계가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왔다는 추측 등에 의해 우리는 북한의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실패해 왔다.
북한 미술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조선화’이며 이를 통해 김일성주의 미술론이 성립하였다. 그동안 연구자들은 조선화 성립과정을 수묵화 대 채색화의 논쟁에서 채색화가 승리한 것으로 단순하게 해석하였지만, 필자는 김일성주의 미술론 성립과정을, 1단계 반사대주의 이론투쟁 단계와 2단계 반복고주의 이론투쟁 단계로 명명하여 분류해 보고, 반사대주의 이론투쟁 단계는 전통개조론과 전통계승론 간의 논쟁이었다고 새롭게 정리한 바 있다. 이러한 논쟁이 정리된 후 김일성은 조선화의 전형을 발표한다. 김일성의 주체미술론에서 확립된 조선화의 전형은 인물 중심의 구상화를 위주로 하여, 이를 서구적인 명암법을 사용하여 입체감이 강조되도록 그리는 채색화 양식이었다. 이러한 양식의 성립과정은 서구의눈으로 우리의 전통을 타자화하여 보고, 그 시선 속에서 열등한 부분을 선별하여 이를 극복하려고 시도하였던 일련의 과정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형식은 1960년대를 거치면서 북한 미술계에 확고하게자리 잡게 되어 1970년대는 ‘주체미술의 대전성기’로 자리매김된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김정일은 몰골법의 적극적인 사용을 통한 조선화의 발전이라는 새로운 테제를 들고 나왔다. 이러한 몰골법을 통한 김정일의 시각은 서구와 비교하여 서구와 다른 부분을 보다 강조하려는 시도로의 적극적인 전환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김정일에 의한 ‘몰골법’ 강조가, ‘몰골법’이라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덜 민감한 용어를 방패 삼아 이를 통해 그 동안 이데올로기적으로 거부하였던 문인화의 여러 기법들을 복권하고자 하는 야심찬 전략이라는 점은 향후 북한미술의 폭넓은 변화 가능성을 전망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1980년대 후반부터 보다 본격적으로 대두되고 있는 ‘조선민족제일주의’를 통해 더 활성화되고 있으며, 현재는 ‘우리민족끼리’라는 구호와 더불어 더욱 본격화되고 있다.
최근까지 미술계에서는 북한과의 민간 차원의 교류가 간헐적으로 진행되었다. 지난 1992년 예술의전당에서 개최된 <북한미술전-그리운 산하>를 필두로 남한 내에서 개최되는 북한미술전은 매회 늘어나고 있고, 현재 국내에 들어와 있는 북한미술품의 수량에 대해 한 연구자는 수만 점, 수십만 점이 넘을 것 같다고 추정한 바도 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민족전통에 대한 동질성을 확인하고 민족사에 대한 반국적半國的 관점을 극복하며, 북한 조형예술의 상업적 유통 및 육성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었던 것은 주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 미술에 대한 1차적이고도 실증적인 연구와 소개가 일천한 현재 조건에서 북한 미술품의 갑작스러운 유통은 미술사적인 가치판단은 차치하고 그 진위조차 의심스러운 것도 상당량 포함되면서,오히려 북한 미술에 대한 혼란을 가중시키고 민간 차원의 미술교류의 확대에 중대한 장애마저 조성하고 있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이벤트 위주의 일과성 전시에 그치는 한계나 민간교류의 속성상 과당경쟁이나 성사의 불투명성 같은 문제에 쉽게 노출되는 등의 문제도 지적되고 있다.
개인보다 집단이 중요한 것이 북한사회이다. 개인보다 조직이,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시 되는 사회. 우리의 시선으로 북한사회를 들여다볼 때 굴절이 생기는 부분이기도 하다. 예술가에 대한 태도, 예술에 대한 인식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가 가장 극단적으로 도출되는 부분은 아마도 작품에 대한 모사 문제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미술작품은 그 작품이 그 예술가의 유일무이한 작품인가 아닌가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그러나 북한사회에서는 작품의 유일성에 대해 자본주의 사회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이는 흔히 ‘종자론’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론과 긴밀히 관련된다. 예를 들어 평양미술관에 정영만의 <강선의 저녁노을>이라는 작품이 걸려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 작품이 평양미술관에 걸려 있으면, 아무리 그 작품이 훌륭해도 평양의 그 미술관까지 쉽게 올 수 없는 사람들은 그 작품을 감상할 수 없다. 작품의 종자가 좋으면, 작품이 훌륭하면 그 작품을 여러 개 만들어서 여러 지방으로 보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감상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는 것이 북한사회이다. 마찬가지로 <꽃파는 처녀>라는 문학작품의 종자가 훌륭하면 그것을 영화, 무대극 등 여러 장르로 개발해내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북한의 판단이다. 이러한 논리는 예술이 인민을 교양하기 위한 선전선동매체로 존재하는 북한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도달할 수 있는 논리이다.
이에 따라 최고의 기술을 지닌 작가들이 훌륭한 작품을 합법적으로 모사해낸다. 그러나 그것이 국내로흘러들어왔을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그 혼란이 어떠할지는 이미 현실에서 경험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는 미술 남북교류에서 항상 보이는, 전시에 대한 이벤트적 관념을 버려야 한다. 일과성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적 후원 및 전략적 육성, 즉 점진적 장악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전시는 물론 등가주의와 상호주의에 충실한 방식이지만, 이러한 정태적인 방식은 일회적, 단발적이며 그만큼 주변 영향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 평등과 상호주의는 물론 교류의 이상이지만 현실은 어디까지나 힘에 의해 좌우되는 것임을 인식하고, 이제 정태적 만남의 형식을 넘어 보다 주동적인 육성과 수용의 방식을 개발해야 할 때이다. 이러한 관점에 설 때 일과성 전시의 정례화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미술자료관’과 같은 물적 토대 구축과 전문인력 양성, 그리고 이를 통한 공적 후원의 조직화 및 제도적장치보완이라고 할 것이다.
둘째로 탈정치·탈이념적 교류론의 이상론을 현실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문화예술교류가 정치경제적 거래 성사를 위한 선물 내지는 그 종속변수로 간주되어 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래서 더더욱 탈정치적·탈이념적 민간 문화예술교류의 원칙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당위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민간 문화예술교류도 정권 안정화의 정략적 도구에 이용될 가능성은 여전히 현존한다는 점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가능성은 특히 이벤트적 성격이 강한 공연 및 전시 부분에 농후한 데, 그에 대한 대책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역으로 이러한 효용가치를 극대화하는 현실감각도 필요하다고 본다.
셋째로 남북 문화예술교류를 민족 내부의 문제로만 사고하는 협애한 시야를 극복하고 미국 등 주변 열강의 동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보다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해외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통일 문제의본질은 민족 내부의 이념 대립에 있지만, 그 외연은 미국과의 민족 외적인 문제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 최근 북핵 문제를 둘러싼 북미대립과 함께 남북교류의 속도가 일정 정체되고 있는 현실은, 통일이단지 민족 내부의 문제만이 아님을 보여준다. 따라서 통일에 기여하기 위한 문화예술교류는 민족 구성원뿐만 아니라 미국 등 주변 관련국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한 외교적 도구일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1998년 하반기부터 북한은 혁명의 주력군 문제에 있어서 노동계급보다 인민군대를 더욱 중시하는 ‘선군정치’를 적극적으로 표방하기 시작하였다. ‘선군정치’는 미국과의 핵대결과 체제 내부의 균열에서 비롯된 내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군을 전면에 내세우는 ‘군 중시’ 정치를 말한다.
이와 더불어 미술계에서도 선군미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북한사회에서 미술의 존재 의의가 선전선동의 대표적 수단임을 감안한다면, 선군미술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2000년대 북한미술계의 상황에 대한 판단 또한 남북 미술교류를 위한 전제조건이 됨은 당연하다 하겠다. 이는 북한미술계를 향하여, 왜 미술이 선전선동의 수단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가,라고 비판하기 이전에 우리가 선군미술에 대하여 파악하고 있는 척박한 수준에 대해 우려하게 되는 이유이다.
북한사회에서 자유로운 예술가들의 창작을 염원할 때, 이 염원은 그래야 한다는 당위의 외침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정치와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 북한사회 속에서의 미술의 위치와 역할을 정확히 이해한 후, 보다 치밀한 남북교류의 전략들 속에서 그 가능한 단초들이 모색될 수 있기 때문이다.
탈냉전시대의 이라크전은 이제 적과 아를 구분하는 기준이 선험적·윤리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정치적·경제적 효용가치에 있으며, 그 어떤 외교력도 자주적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무자비하게 짓밟힐수 있다는 냉엄한 신국제 질서의 성격을 가르쳐주었다. 문제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며, 당위가 아니라 방법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남북교류를 통해서 분열주의와 대결의식을 불식시킨 것은 중요한 성과이지만, 이제는 현실을 도외시한 맹목적 감상주의나 당위적 이상론도 경계하여야 한다는 점 또한 잊지 말았으면 한다.
박계리│1968년 서울 출생.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일제시대 ‘조선향토색’」으로 석사를,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타자로서의 이왕가박물관과 전통관-서화관을 중심으로」와 같은 논문을 발표했으며,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미술평론 「김정일주의 미술론과 북한미술의 변화-조선화 몰골법을 중심으로」가 당선되었다. 현재, 미술평론가, 미술사가로 활동하며 한국미술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재직중이다.
출처-기전문화예술 2005.11ㆍ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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