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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 말을 걸다 (12) 바둑두기, 선비들의 手談인가 한량들의 雜技인가

고연희

고려시대 공민왕(1330~1374)의 그림이라는 거작 한 폭이 일본에 있다.

낡은 비단 위 청록안료에 금가루가 가미된 화려한 고화다.

잘 지어진 건물과 높이 자란 소나무 아래 문사들이 바둑에 몰두하고 있다.

그림제목은 ‘위기도(圍碁圖·바둑 두다)’.

바둑 두는 인물은 누구이며, 옛 선비들은 이들을 보며 무엇을 감상했을까.



‘상산사호’의 시간, ‘십팔학사’의 공간

바둑은 중국의 요순시절에 만들어졌다고 기록되며,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로부터 바둑 기록이 나타난다. ‘碁(棋·기)’ 또는 ‘奕(혁)’으로 불린 바둑놀이는 장구한 역사 속에 에피소드도 다양하다. 옛 그림에 등장하는 고전적 바둑 스타는 ‘상산사호(商山四皓)’ 와 ‘십팔학사(十八學士)’가 대표적이다.

‘상산사호’는 한나라 고조 유방의 부름도 무시하고 세속을 떠나 상산에 은거한 백발의 현인 네 사람이다. 그러나 유방이 척부인 아들로 황제계승자를 바꾸려 하자, 상산사호는 원래의 태자인 여후의 아들을 찾아간다. 유방이 놀라고 두려워 황제계승자를 바꾸지 않았다. 팔순 넘은 노인이 수염을 휘날리며 나타나 황실의 질서를 세운 위엄과 덕망은 높이 기릴 만하다. 그들은 상산에 다시 들어 영지버섯으로 요기하고 바둑으로 소요했다. 상산사호의 바둑 두기는 은자의 시간이며 세속을 잊는 시간이었다. 옛 그림의 바둑주제로 가장 흔한 것이 상산사호의 바둑 두기, 곧 ‘사호위기(四皓圍碁)’다.

‘십팔학사’는 당나라 현종이 선발한 우수학자 열여덟 명이다. 이들은 황실의 연회에 초청돼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거문고를 뜯고 바둑을 두고 시를 짓고 그림 그리기를 보란 듯이 즐겼다. ‘금(琴), 기(棋), 서(書), 화(畵)’의 예능활동이다. 이들의 ‘금기서화’는 그림으로 그려졌고 당나라 귀족의 필수덕목으로 간주됐다. 송나라의 이공린과 원나라의 조맹부 등 문인화가들이 금기서화 네 장면을 세트로 그릴 정도로 유행했다. ‘십팔학사도’란 그림에도 대개 금기서화의 멋이 그려졌고 이가 고려로 전달됐다. 목은선생 이색은 금기서화를 ‘사예(四藝)’라 칭하며 좋아했다. 조선전반까지 그 인기가 대단했다.

영지를 먹으며 상산에서 누린 초탈의 바둑은 불노불사 신선의 시간을 연상하게 했다면, 십팔학사의 바둑은 황실 파티에 초청된 엘리트가 누린 아취(雅趣)와 화려한 공간의 이미지였다.



‘위기도’ 인물의 정체

고려말기에서 조선초기의 문헌을 살피면 ‘상산사호도’와 ‘금기서화도’가 모두 그려졌다. 두 장면 모두 너덧 명의 문사가 바둑판에 둘러앉은 이미지이다. 그러면 공민왕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위기도’는 무엇을 그린 것일까? 나의 판단으로 말하자면, 이 그림은 십팔학사의 공간과 상산사호의 시간이 오묘하게 조합된 이미지다.

화려한 건축물에 수려한 소나무, 매미날개 깃이 늘어진 관을 쓴 학사의 모습은 십팔학사 금기서화의 화면을 흡사하게 따르고 있다. 그러나 청록 짙은 산이 바로 뒤에 높이 솟고 흰 구름이 건물의 지붕까지 휘감았다. 계단 앞엔 동자마저 하염없이 쭈그렸으니, 한가로운 산중의 고요한 시간이 화면에 흐른다.

‘위기도’를 그린 이는 조선초기의 화원화가가 분명하다. 자를 대어 그린 건물의 선과 정교한 채색법이 전문가의 손길이다. 고려에서 감상되던 십팔학사의 화려한 이미지가, 조선왕실에서 조선시대에 더욱 애호된 상산사호도의 주제에 적용된 것이다. 공민왕의 것으로 전해지는 작품이 국내에도 여러 점 있을 만큼 그림솜씨가 인정됐고, 그의 왕비는 그림수장으로 유명한 노국공주였으니 공민왕의 화격이 남달랐을 것이다. 게다가 공민왕이 바둑을 좋아해 그의 조정에서 신료들이 바둑을 즐겼다고 ‘고려사’에 전한다. 그렇다고 해도 이토록 정교한 대작이 공민왕의 필적이겠는가. 이러한 사연이 얽혀 훗날에 공민왕의 그림으로 포장됐으리라.



‘위기도’의 붉은 돌과 검은 돌

이 그림 속 바둑알은 그 색이 검은색(黑色)과 붉은색(朱色)이다. 바둑알의 색이라면 검은색과 흰색이 기본이라, 바둑을 ‘흑백(黑白)’이라 혹은 ‘오로(烏鷺·까마귀와 백로)’라 별칭하고, 바둑 두기를 ‘오로삼매’라 했다.

붉고 검은 바둑알은 당나라 유종원의 ‘서기(序碁)’에 나온다. 내용이 이러하다. 유종원의 동생들이 학문에 집착하자 방직온이란 이가 바둑판돌을 만들어 휴식을 제공했다. 그의 룰에 따르면, 검은 돌은 천하고 붉은 돌은 귀하다. 이를 보고 유종원이 탄식한다. 돌에 색이 칠해져서 귀천이 나뉘었으니, 방직온의 뜻이 아니요 돌의 본질도 아니다. 사람도 귀천이 나뉘면 공경과 천시가 나뉜다. 귀한 자의 뜻은 광대해지고 천한 자의 마음은 비루해진다. 그렇다면, 공경과 경시의 차이와 광대하고 비루한 마음의 차이란 무엇인가. 유종원은 스스로를 검은 돌과 닮았다 했다. 이 세상 누군들 검은 돌이 존재하는 모순과 시름을 모르겠는가.

이 그림 속 바둑의 색은 학문하다 쉬어가는 시간으로 바둑놀이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함이리라.



바둑의 현실적 문제, 잡기(雜技)!

그런데 그림처럼 하염없이 바둑판에 앉은 것은 현실에서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옛 선비들이 바둑그림을 보며 정작 무엇을 생각했는지 이해하려면 바둑의 현실적 문제를 짚고 가야 할 것이다. 바둑이란 승부를 가르고자 장시간이 소요되는 게임이다. 치세와 학문에 성실한 이라면 이 시간을 허락하기 어렵다. 현실에서 어느 누가 상산사호이며 십팔학사겠는가.

공자의 말씀이다. “하루 종일 잘 먹고도 마음 쓰는 곳이 없다면 곤란하다. 장기나 바둑이라도 둘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장기와 바둑은 무위도식보다 조금 나은 것이다. 맹자 또한 바둑이나 장기를 일삼느라 부모공양을 안하는 경우를 몹시 걱정했다.

고려의 김경직이 대궐에 들어 관료들이 장기와 바둑을 즐기는 것을 보고 ‘이 국가가 장차 망하리라’ 탄식했다. 조선전기 정극인은 ‘외우지 못하면 60대, 바둑 장기 잡기를 하면 70대, 여색을 탐하면 100대’를 회초리로 치라 했다. 갈암선생 이현일은 한 인물의 생애를 기리며 그는 ‘천박하고 허풍스러운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바둑이나 장기 따위의 잡기를 손에 대지 않았다’고 칭송했다.

다산선생 정약용은 관료의 덕목으로 ‘임(任)’을 내세워 정의했다. “너에게 벗이 있고 이웃이 있으니, 벗으로서 덕을 돕고 이웃으로 도우라. 장기나 바둑으로 사귀지 말고, 질병이 있을 때 보살피라. 참소하여 얽어 넣지 말고, 재물을 얻고자 이간질하지 말고, 그들을 속이거나 배반하지 말라.” 장기와 바둑을 콕 집어 거론한 우려는 정약용이 아들에게 보는 편지에도 여실하다. “눕기 좋아하기, 농담 좋아하기, 성 내기, 장기와 바둑 두기, 남 속이기 등은 버리기 힘든 나쁜 습관이니 절대 물들지 말라”고 당부했다. 점잖은 학자 이덕무도 살려라 죽여라 훈수로 시끄러운 바둑놀이의 경박함이 질색이었다. 자식에게 장기와 바둑을 가르치는 놈은 때려서라도 쫓겠노라 했다.



바둑의 환상적 미덕, 아(雅)와 피세(避世)

그럼에도 바둑에 멋이 있다면, 당나라 십팔학사들이 파티에서 바둑을 즐기는 모습이 멋있어 보이는 이유다. 갖춘 자의 아취이다. 고려시대 왕과 승려와 문사들은 이 아취를 즐기고자 ‘밤새워’ 바둑으로 승부를 가리는 것을 꽤나 멋으로 여겼다. 그러느라 아내로 내기를 걸어 빼앗겼다 찾아오고, 골동품과 거문고로 내기를 걸어 몽땅 잃었다가 찾아온 이야기가 ‘고려사’에 실렸다. 대개 바둑을 잘 두는 이들이 교활한 내기를 요구하고, 바둑에 진 자들은 도덕심과 기지로 빼앗긴 것을 찾아온다. 바둑의 승자가 가진 불편한 진실일까. 성리학이 우세한 조선에서 바둑을 경계하는 이론이 득세했다. 임진왜란 이후로는 취미생활이 추구되면서 바둑의 멋이 다시 인정받는다. 그러나 고려의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다.

혹은 바둑놀이에 세속을 벗어나는 피세의 자유로움이 있다고 봤다. 혼란한 현실을 극복하는 좋은 방법은 명상과 성찰이다. 그러나 옛 시문과 그림 속에서는 극단적 도피행위로 술에 취하거나 잠에 들거나 바둑에 빠지는 시간이 미화된다. 상산사호의 바둑도 엄밀하게 따지면 그러하다. 도피의 시간은 신선계의 시간으로 확장된다. 신선의 바둑이야기가 무수하다. 왕질은 산속에서 바둑을 구경하다 백 년이 흘렀다고 하고, 동그란 굴 속에서 바둑을 둔 신선이 살았다고 하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속세에서 벗어나고픈 자유로의 환상이다.



바둑의 현실적 미덕, 수담(手談)과 측인(測人)

마음을 한가롭게 해주는 대화를 ‘한담’이라 하고, 명리에 얽히지 않으면 ‘청담’ 혹은 ‘고담’이라 한다. 말이 다른 선비들이 나눈 ‘필담(筆談)’은, 글로 나눈 대화다. 나는 예전에 조선선비들이 북경에서 중국인과 필담을 나눈 기록을 보며 답답할 것이라고 공연한 염려를 했다. 오늘날 카카오톡을 해보니 필담에서 누린 지적 재치의 묘미가 괜찮았으리라 깨닫게 된다.

바둑은 ‘세설신어’에서 ‘수담(手談)’이라 했다. 손으로 바둑알을 나누면서 상대의 감정과 인격을 만나는 대화이다. 벗을 애도하는 글 중에 바둑의 시간을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어려운 시절 바둑 둔 추억은 참으로 애절하다. 수담의 사귐과 묘미가 각별했기 때문이다.

바둑으로 초연한 의지를 보여준 일화도 있다. 죽림칠현 중 한 사람인 완적은 모친의 서거 소식을 듣고 바둑을 그대로 두었다. 동진의 사안은 전쟁의 계략을 세워 놓고 바둑을 두기 시작해 승전보를 듣고도 바둑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감정의 소용돌이를 바둑으로 지켜낸 놀라운 의지이며 홀로 나눈 수담이다.

배움을 즐기는 사람들은 바둑으로 세상을 배우려 했다. 최한기는 ‘추기측인(推己測人)’이라 하여, 나를 미루어 다른 사람을 헤아림을 바둑에서 취했다. 상대 바둑알의 행보를 미리 예측하는데 그 예측이 모두 틀리면 다시 한다. 세상살이에서 다른 사람을 헤아리고 일의 기미를 파악하는 것이 그러하고, 계획과 달라진 변화에 대응하는 법이 그러하다. 한 수를 잘못 두면 온 판이 망가지고, 포국을 좁게 하면 큰 판을 못 짠다는 식의 비유가 허다하다. 기실 모든 비유가 그러하듯, 이현령비현령이다. 바둑판과 성리학의 태극이 비유되는가 하면, 흔적 없이 뒤집어질 바둑판의 덧없음이 다양한 현실상황에 비유됐다.



그림으로 바둑을 보는 뜻

어떠한 바둑이야기가 바둑그림만 하겠는가. 바둑그림은 다양하게 그려졌다. 상산사호와 십팔학사의 이미지가 조합된 그림, 신선같이 앉아 대국하는 모습, 조선후기 풍속화 속에 갓을 쓰고 앉아 바둑을 즐기는 모습 등. 특히 산속의 영지 곁에 바둑을 즐기는 상산사호의 화면은 무수하게 많다.

조선중기 이경윤(1545∼1611)의 작품으로 전하는 ‘송하대기도(松下對碁圖·소나무 아래서 바둑을 두다)’에는 두 인물이 신선처럼 앉아 대국 중이다. 현실에서 누리기 힘든 그림 속 바둑. 두 인물에게도 지혜로운 시간과 아취의 공간이 가득하다. 유몽인(1559∼1623)이 그림첩에 쓴 제발이 마침 이러한 그림을 감상한 시이다.



소나무 아래 노인들 주인도 없고 객도 없이 바둑 한판에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네.

내가 본 것은 두 사람이니, 두 사람은 영지버섯 캐러 가서 돌아오지 않을 줄 어찌 알까.

구름 속 산수 속에 잔잔히 물 흐르는 소리.

- 이 그림은, 소나무 아래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데 나무는 있고 산은 없다.

(松下丈人, 非主非賓, 一局棋幾千春 송하장인 비주비빈 이국기기천춘

吾所見者兩人, 安知不復有兩人採芝猶未還 오소견자양인 안지불부유양인채지유미환

雲藏山水潺潺 - 右松下二人對棋, 有木無山 운장산수잔잔 - 우송하이인대기 유목무산)

- 유몽인,「화첩」 6수 중 제 4수



그림 속 바둑의 시공간은 그림 너머 상상으로 펼쳐진다. 그림도 못 보고 바둑도 못 두는 소경 심봉사가 소경잔치로 끌려가며 흥얼거린다. “상산사호 몇 명인가, 날 더하면 다섯이지!”<미술사학자>
-문화일보2013.01.25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301250103313024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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